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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강해(4)
아버지 되신 하나님
본문 : 롬8:15-17
우리는 사도신경을 살펴보면서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무엇이든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 전능성은 창조를 통해 온전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의 근원이시고,
모든 질서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토기장이에 비유하셨습니다.
토기장이가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무엇이든 자신의 뜻대로 만들고 부술 수 있습니다(사 64:8, 렘 18:1-4).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토기장이’처럼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만들거나
부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아무렇게나 행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4:8).
하나님에게 있어서
사랑은 소유물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입니다.
소유물은 내버리거나 잃어버릴 수 있지만.....
본질은 그럴 수가 없듯이......,
사랑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공개적이고도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십자가 사건입니다.
<요일4:9-10>
9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죄로 인해 영원히 죽어야할 인류를 살리기 위해 ....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죗값을 대신 치르게 하실 만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큰 대가를 지불하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너무도 귀한 존재입니다.
(너무나도귀한존재:이태원압사)
<아버지 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단어가 ‘아버지’입니다.
사도신경은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합니다.
그냥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강조하여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 하나님에 대해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가부장적 권위나,
남성 우월주의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과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라고 다 똑같은 아버지는 아닙니다.
아버지라는 단어에 이를 갈고 학을 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아버지이신지를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사랑이 충만하신 아버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아들 형제가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서
자기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청을 마지못해 들어줍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가지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 먼 곳을 갑니다.
거기서 그는 방탕한 생활로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다 낭비하여 마침내는 한 푼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남의 집에 종으로 들어가
돼지가 먹는 사료 찌꺼기를 먹으며
목숨을 연명하다가 하루는 떠나온 집에 계실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 집에 있었던
그 행복함을 생각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한편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이후 늘 동구 밖을 보며
집나간 아들이 이제나 돌아올까? ..
저제나 돌아올까?
눈이 빠지게 기다립니다.
아버지는 언젠가는 내 아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발견합니다.
아들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외모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누더기를 입은 상거지였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금방 알아보고 돌아오는
아들에게 달려갔습니다.
냄새나는 아들의 목을 껴안고 키스했습니다.
종들을 불러서는 “어서 좋은 옷을 꺼내어
아들에게 입히고 반지를 손에 끼우고
신발을 신기라”고 명령합니다.
또 다른 종을 불러서는 “아들이 돌아왔으니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탕자와 같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이미 구약의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신 32:6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오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사 64:8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신약에 와서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하나님을
‘아빠’ 라고 부르신 것은,
주님이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의미 있는 것은 주님이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주기도문에는 ‘하나님’이란 말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6:9) 뿐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분명히 확증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입니다.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을 양자로 삼으시고,
그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 ‘아버지’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히브리어 ‘아바’(Αββα, Abba, ab-bah)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바’라는 말은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애칭(‘아빠’)입니다.
이와 같이 신구약 성경은 한결같이
하나님이 믿는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정리한 본문은 요한복음 1:12-13입니다.
<요1:12-13>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는
‘하나님의 자녀’됨이 ‘권세’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권세’라는 단어는 ‘합법적 권리’라는 뜻입니다.
이런 권리가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나요?
오직 개인적으로 예수의 이름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인간의 유전으로 되질 않습니다.
혈통적으로 세습되지도 않습니다.
인간적인 노력(종교적인 고행,
금욕, 수도 등 의지적인 노력)으로도 되질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약속입니다.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미국 국적법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 나라는 부모의 국적에 관계없이 미국 땅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심지어 불법 체류자의 자식이나 원정 출산으로
태어난 자식이라도 미국 시민이 됩니다
(‘속지주의’, 우리나라는 ‘속인주의’ – 부모의 혈통을 따라).
황당해 보이지만 자기들이 정해 놓고 그렇게 하겠다는데 누가 뭐랍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고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합니까?
그대로 믿고 따르면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겁니다.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를 구제주로 믿고 영접하셨습니까?
그러면 저와 성도님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 시간 다같이
“하나님 아버지”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쑥스러운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불러야 합니다.
언제까지 홍길동처럼 살겠습니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세요.
믿음으로 부르세요. “하나님 아버지!”
<자녀의 권세를 사용하라>
자 그럼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권세입니까?
이제는 누려야 합니다.
권력자(군왕)의 자녀도 자기의 권세를 누립니다.
재벌의 자녀도 자기의 권세를 누립니다(지나쳐서 탈).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우리의 삶 속에서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어떤 권세가 있습니까?
첫째, 기도하는 권세입니다.
기도는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권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세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구할 수 있는 권세입니다.
아무리 대통령, 또는 황제라도
자기를 "아빠"라고 부르며 매달리는
자녀들을 물리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하고,
그들의 필요를 알고 채워 주시는 분입니다.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아버지가 자식에게 아까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이해와 논리와
경제적 개념을 넘어서는 무한한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헌신적인 사랑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요구할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요구하면
그것을 들어주고자 하는 것이 아버지입니다.
마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요14:13-14>
13절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어떤 권세가 있습니까?
첫째, 기도하는 권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권세입니다.
기도한 후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여야 합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권세가 함께하시기 때문에
악한 영의 세력을 이기는 능력이 임합니다.
명령하고 선포하고 사탄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눅10: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황소의 힘보다 고삐를 잡은 아이에게 권세가 있듯이,....
아무리 힘센 마귀라 할지라도
예수 이름이라는 고삐를 잡은 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마귀를 제어하고 물리치는 권세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있습니다.
마귀가 강한척해도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어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그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면 우리의 싸움은 백전백승 할 것입니다.
약4:7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어떤 권세가 있습니까?
첫째, 기도하는 권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권세입니다.
셋째, 상속의 권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과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로 ...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눅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 16-17절입니다.<16-17>
16절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하늘의 생명록에 우리 이름이 기록되고
성령님이 인(도장)치시면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권세(권리)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제일 얄미운 사람이 권리만 누리고
책임(의무)는 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도 강조하지만 ...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도 강조합니다.
구약 신명기 14장 1절을 봅시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가졌으니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지....
이방인들의 풍습을 따라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고 털을
미는 것은 죽은 자를 위한 슬픔을 나타내는 표입니다.
이런 행동은 고대 이방 사람들이 행하던 풍습입니다.
장례식장에서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고 털을 밀고, 하였습니다.
이런 풍습은 진정한 소망이 없이 사는
이방 사람들의 삶의 풍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하나님께서 귀중한
선물로 주신 몸을 함부로 대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귀한 선물로 주신 것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다루어야지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됨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소중히 다루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신약으로 오면 고전 6:19-20에
우리의 몸을 “성령님의 전”이라고 하셨습니다.
<고전6:19-20> 19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수님을 모시고 성령님의 거하는 사람을 성령님의 전이라고 하십니다.
이 의미는 무엇입니까?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값으로 산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산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것, 하나님의 것입니다.
로마서 1장 6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시지요.
우리는 그런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런 존재가 되었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20절에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귀한 선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몸을 대해야 하고,....
몸으로 하는 모든 활동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은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는 고백이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백입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알아주지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보배롭고 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우리의 삶 속에서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이 부름에는 책임이 요구됨을 깨닫고 ......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