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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자원봉사활동 교육자료
주최:다운동청소년지도위원회 후원: 다운동주민자치센터. 다운동여성자원봉사회, 다운시장상우회. 2009년 8월 22일 강사: 박순열
경주 최부자 부자(富子)
가훈
1,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은 하지 마라
2, 재산은 만석이상 지니지 마라.
3,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4,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5, 며느리는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6,사방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 최부자의 가계도
최진립( 신라시대 진성여왕 때의 충신 최치원의 17대손)
동량(5남1녀중 셋째)
국선(4남2녀중 장남)
의기(3남3녀중 차남)
승렬(2남중장남)
종률(승렬의 무자식으로 동생 승절의 외아들입양)
언경(4종 종만의 아들 입양)
기영(1남4녀중 장남)
세린(2남4녀중 장남)
만희(2남중 장남)
현식(2남의 장남)
준(4남의 장남)
300년 부를 이어온 경주 최부자집의 비밀
1. 부를 유지하되 최소한의 지위만 갖는다.
2.인간관계에 바탕을 둔 노사관계를 실천한다.
3. 함께 일하고 일한만큼 가져간다.
4. 군림하지 않고 경영하는 중간관리자를 세운다.
5. 들어올 것을 헤아려 나올 것을 정한다.
6. 사회적 책임을 져버리지 않고 받은 만큼 사회에 환원한다.
7. 때를 가려 적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늘린다.
8. 지나치게 제산을 불리지 않는다.
9. 청백리 정신에 바탕을 둔 근검절약 정신을 실천하다.
10.이루기 힘든 일일수록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행한다.
11.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게 하고 항상 후하게 대접한다.
12. 자신을 낮춰 상대가 경계하지 않도록 한다.
13. 덕을 베풀고 몸으로 실천한다.
14. 2등을 위해 1등만큼 노력한다.
15. 가치 있는 일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
반갑습니다
다운동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여기에 사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유익한 시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오늘은 다운동소개를 잠시하고
경주최부자가 그부를 300년동안 이어온 비밀을 현대경영학적 차원에서 그 비밀을 여러분들게 알려드릴까합니다
오늘 강의가 여러분에게 훗날 많은 돈을 벌수 있는 계기가 되어
전부 부자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10년후 여기에 계시는 분들중에서 몇 명이라도
오늘 이시간을 기억 해 줄수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다운동을 소개하겠습니다
면적:
인구:
유래:
특징:
경주(慶州) 최부자 부자(富子)의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다소 딱딱한 강의 내용일수도 있으니 내가 부족하지만 잘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중간에 학습태도가 불량한 몇 명은 바로 퇴교시키겠습니다
신청할 때 홈페이지에 공지를 해놓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다알고 신청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경주 최부자 부자(富子)
예로부터 富不三代라 했습니다
부자는 3대를 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속담이 무색하게 만석꾼으로 무려 12대 약300년 동안 최고의 부를 이어온
경주 최부자의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최부자 보다 더 많은 재산의 부자도 많았습니다만
당대에 부를 일구고 당대나 다음 대에 망하거나 그 부가 이어지질 못했습니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부의 대물림은 흔치 않습니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이탈리아에 엄청난 부자인 메디치라는 사람의 가문을 보면
약 200년 동안 부를 유지했는데 금융업으로 큰돈을 벌어 당시 유럽의 절대 권력자인 교황까지도 마음껏 주물렀다합니다.
그렇게 부를 유지 했던 그 가문도 200년밖에 유지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최부자는 그보다 100년이나 더 오랬동안 부를 유지 시켰습니다.
이런 사실은 세계적으로 알릴만한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경주 최부자가 300년 부를 이어온 비밀을
현대 경영학적 의미에서 같이 공부합시다.
최부자집 가훈
1,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은 하지 마라
2, 재산은 만석이상 지니지 마라.
3,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4,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5, 며느리는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6,사방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만석꾼
만석이라는 재산이 어느 정도일까?
옛날에는 논을 소작하고 가을에 추수를 수확하면 수확한량의
반을 지주에게 주고 반은 경작자가 가졌습니다.
그러니 20,000석의 벼를 수확해서 소작료 수입이 10,000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의 수 개념은 다소 정밀하지 못했습니다.
두서너, 네뎃, 예닐곱 등과 같이 애매한 표현들이 많았습니다.
만석꾼이라 해도 만석이 않되는 사람도 있고 만석이 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지요
대체로 5,000석이 넘으면 만석꾼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대략 천석꾼은 각 군에서 최고의 부자가
만석꾼은 각도에서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었지요.
석은 섬과 같은 의미로 10말을 한섬 혹은 한석이라 했습니다.
만석은 대충 약 300만평의 논을 소유하고 있는 부자입니다
300만평이 어느 정도인가?
울산의 인구가 약 108만입니다.
한집 당 10명이 산다고 가정하면
(물론 집한채에 3가구 4가구 많이 살고 있는 경우도 있지요
그리고 아파트 같은 경우는 더 많이 사람이 살고 있지요)
1,000,000/ 10 = 100,000체의 집이 있습니다.
집 한채 당 쉽게 50평 잡겠습니다.
100,000채*50평= 5,000,000평입니다
울산 전체의 집이 있는 총면적은 대충 약 500만평입니다
300만평은 울산시 전체의 집이있는 면적의 3/5에 해당하는 반이상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면적입니다.
땅 한평을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는 지금의 현실을 감안하면
경주 최부자의 부의 정도는 가히 천문학적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지 않습니까요.
경주 최부자의 가계도
최진립( 신라시대 진성여왕 때의 충신 최치원의 17대손)
동량(5남1녀중 셋째)
국선(4남2녀중 장남)
의기(3남3녀중 차남)
승렬(2남중장남)
종률(승렬의 무자식으로 동생 승절의 외아들입양)
언경(4종 종만의 아들 입양)
기영(1남4녀중 장남)
세린(2남4녀중 장남)
만희(2남중 장남)
현식(2남의 장남)
준(4남의 장남)
300년 부를 이어온 경주 최부자의 비밀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비밀
부를 유지하되 최소한의 지위만 갖는다.
300년 만석군 기초를 다진 최진립
오랬동안 부를 일으킨 경주 최부자의 가문을 일으킨 사람은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11대 조부인 정무공 최진립 장군입니다.
장군은 신라 말 진성여왕때의 고운 최치원의 17대손인 그는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서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그가 25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이제까지는 왜군들이 부산포나 해안지방에서 노략질을 해가곤 하였으나
이번에는 부산에서 경주 쪽으로 깊숙이 침범해 오는 것을 알고
충노인 기별을 시켜 소상히 알아 오게하고 대처 방법을 고심했습니다.
이조리는 언양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이고 또 이조리에서 제일 큰집이
최진립의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최진립은 여러권의 병서를 읽고 싸움에 임하는 요령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군들은 수백명씩 무리를 지어 강탈하고 또 불을 지르고 하며 마을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내륙으로 올라오면서 일부의 왜군은 경주로 올라가고
약 100여명의 왜군이 이조리에서 밤을 지세고 다음날 경주로 갈 작정으로
이조리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최진립은 재빨리 가족들을 길 동편 산위로 피하게하고 집 뒷쪽에 있던 땔나무를
마당가운데 옮기게하고 하인 수십명을 주변에 활과 죽창으로 배치를 시켜 놓고
기다렸습니다.
자정이 넘어서자 보초병까지 골아 떨어 졌을때 가운데 땔나무에 불을 지피고 우왕좌왕하며밖으로 뛰쳐나오는 왜군을 모조리 섬멸 하여 채취한 무기며 조총등을 경주 관아에 반납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이후로 최진립장군의 소문이 전국으로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고위관직을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후에 반대파들의 모의에 관직 등 모든 게 박탈당하고
울산으로 귀향살이를 하였습니다.
인조반정 때 다신 복권이 되어 함경도 경흥부사의 직을 수행하는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냈습니다.
병자호란때 69세의 나이로 적군과 싸우다 전장에서 장열히 전사하였습니다.
최진립은 평소 자식들에게 당부한 유훈이 있습니다.
“바라건데 너희들은 내가 전하는 바를 어기지 말고 시행할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평생을 사는데는 하늘이 내린 각자의 할 바가있다.
먼저 나라가 위급하면 몸을 아끼지 말고 충성을 하여 나라를 구해야 할 것이다.
나라가없는데 어찌 개인이 있겠는가?
다음으로 가문을 지켜야 한다.
가문이야말로 모든 생명의 뿌리가 박힌 곳이므로 가꾸지 않음은
뿌리를 박을 터를 잃어버림과 다름이 아니다.
가문과 나라를 지키면서 부단히 학문하기를 힘써라
학문이 없이는 밝음이 없고 밝음이 없는 어둠의 생활은 뭇짐승의 삶과 무엇이 다느겠느냐
그러나 벼슬을 목적으로 학문을 하지 말라
뭇사람들과 복잡한 이해 속에서 원만하게 벼슬자리를 수행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사람이 왕후장상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권세와 부귀를 모두가질 수는 없다
권세의 자리에 있음은 칼날위에 서있는 것과 같아 언제 자신의 칼에 베일지 모르니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의 벼슬은 하지마라“
라고 당부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경주 최부자집의 첫 번째 가훈입니다.
두 번째 비밀
인간관계에 바탕을 둔 노사관계를 실천한다..
최진립장군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다 마지막에는 전장에서 함께 죽은
충노 옥동과 기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자 어느 가문에서도 행하지 않던 노비를 위한 불망비를 세워
후세에 경주 최부자의 부를 유지시킬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최진립의 셋째 아들인 동량은 전장에서 아버지의 죽음소식을 전해 듣고
전장으로 달려가 피 비린네 나는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아버지와 같이 죽은 옥동과 기별을
시신을 간단히 형제들과 함께 운구하여 울산 언양에 장사를 지네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한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합니다.
시묘살이를 마치고 이조리로 돌아오니 가업은 억망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 많은 난리로 노비들이 도망가고 물난리로 논경지가 많이 유실되어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최동량은 재방을 쌓고 농경지를 정리하며 만석꾼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세 번째 비밀
함께 일하고 일한만큼 가져간다
충신의 집안이라서 관의 협조를 얻기가 수월해서
최동량은 농사지식을 습득하여 많은 경작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제방을 만들고 수리시설등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당시 못살고 먹고 살기가 막막한 그 시절에
관청에서도 지원나오는 일하는 사람들이나 날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최씨 집에서 일을 하면 배불리 점심을 먹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당시농촌에는 일반적으로 하루에 두끼 만 먹는 것이 보통이었어나
이때부터 하루에 세끼씩 먹는 식습관이 만들어 졌습니다.
네 번째 비밀
군림하지 않고 경영하는 중간관리자를 세운다
인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의 전란속에서 최진립과 그의 아들 최동량은
최씨가문이 부자로 나아가는 기틀을 마련했고
당시에도 부자이긴 하였으나 만석꾼 까지는 되지 않고 대략 5,000석꾼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입니다
이를 토대로 본격적으로 만석의 재산을 모은 사람은 최동량의 아들인 최국선이었습니다.
국선은 노동력이 되는 노비와 소작인을 모으는데는 탁월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당시 권문세가의 대지주들은 한양이나 읍내에 살면서
마름이라는 중간관리자를 내세워 그에게 엄청난 권한과 전권을 맏겨 두었습니다.
중간관리자인 마름의 횡포는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형편의 소작인들은 마름의 눈에 벋어나면 소작을 못하게 하고
소작료 책정을 터무니없이 많이 하는가하면
부녀자를 희롱하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소작인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 행세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국선은 그런 횡포가 심한 마름을 두지 않고
직접 관리하거나 소작인들의 어려움을 들어주는 그런 지주가 되다보니
최부자집으로 소작인이 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동량은 당시에 농구를 마련하여 써래와 쟁기로 논밭을 갈았습니다.
그리고 분뇨로 거름을 만들어 생산증대에 힘썼습니다.
지금으로보면 유치한 농사 방법이지만 당시는 획기적인 농사 기술이었습니다.
다섯 번째 비밀
들어올 것을 헤아려 나올 것을 정한다.
최국선은 농사기법을 연구하면서 벼의 이앙법 도입을 시작했습니다.
삼한시대부터 시작한 우리나라의 농사는 전까지만 해도 직파법으로 농사를 지었으나
이때부터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으로 서서히 전환 되기도 했습니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농사 기법을 접목시켜 선진 농법으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이양법은 직파법에 비해 수리시설이 잘되어야 했고
김을 메는 데는 쉬웠으며 무엇보다 수확량이 탁월했습니다.
양입위출 (量入爲出) 무릇 재물은 한도가 있고 쓰기엔 끝이 없으니 들어올 것을 알아서 거기에 맞춰 쓰지 않으면 나중에 견디지 못하고 자녀의 교육도 혼인도 시키지 못하여 가난한 사람이 되는 이가 많으니 두려운 일이다.
여섯 번째 비밀
사회적 책임을 져버리지 않고 받은 만큼 사회에 환원한다
최국선이 나이 마흔에 심하게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사람이 허다했습니다.
그때 최국선은 곳간을 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굶어 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무었하겠느냐?
곳간을 열어 굶는 사람에게는 죽을 끓여 먹이도록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 옷을 지어 입혀 주도록 하라
이렇게 말하고 집앞의 큰 마당에 큰 솥을 걸고 굶주신 사람에게 연일 죽을 끓이도록하였습니다.
지금도 죽을 끓이던 그 자리가 활인당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는 가훈이 이때 생긴 것입니다.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백리라 함은 동으로 감포 북으로 포항 서북으로는 영천, 청도
남으로는 울산 밀양에 이르는 넓은 지역입니다.
여기서 하필이면 백리라 하는 것은 2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도보로 걸을 수 있는 최대 거리가 200리라보고
새벽에 나가서 왔다가 저녁에 돌아가자면 100리 정도 떨어진 곳이라고 볼 수 있고
또 하나는 최부자의 논밭이 백리 가까이 떨어져 있는 곳도 있었기l 때문이라고 할수 있다.
일곱 번째 비밀
때를 가려 적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늘린다.
한때 최국선은 병으로 오래 누워지넨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맏아들을 불러
“지금 방에 들어가 세궤 서랍에 있는 그동안의 담보서약을 모두 가져 오너라”
했습니다.
그 속에는 흉년이나 집안의 큰일이 있을 때 돈을 빌려간 사람이 써준 문서며
보증서들이 가득하였습니다.
국선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문서가 없어도 돈을 갑을 사람은 갚고 못 갚을 사람은 못 갚는다며
그중에서 토지나 가옥은 문서는 주인에게 돌려주고 빌려준 장부는 모두 불에 태우거라 했습니다.
그리고 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에나 뜻밖의 재앙을 당했을 때는 싼값으로 땅을 내놓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재산을 증식하기는 용의했다.
그러나 최부자는 남의 약점을 이용하여 재산을 늘리지 않았다는데서 이웃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사지 않았습니다.
이때 생긴 가훈이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입니다.
최국선은 남과의 거래에 있어서 기본적인 자세를 가르켰습니다.
첫째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물건을 팔때는 비싸게 팔고 싶고 남의 물건을 살때에는 싸게 싸고 싶어한다.
이것이 바로 경제적 사고 방식이지요
그러나 경제학의 기본 원리와 같이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곳에서 가격이 결정되고 거래가 성립된다.
물론 수요나 공급 면에서 독점 형태가 되면 일방적인 가격 결정이 된다.
이것이 사회적 지탄이 될 수도 있다.
둘째는 “남이 위급한 상황에서 물건을 헐값으로 내어 놓더라도 물건값은 제값을 주고 사라”
물론 절박한 상황에서는 싸게 사주는 것도 고마워 할 수는 있겠지만 물건을 판사람은
절박한 위기가 넘어가면 산사람에 대한 원망스럽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거 결국 원한을 사게 한다.
여덞번째 비밀
지나치게 제산을 불리지 않는다.
최국선은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었습니다.
아들 중에서 둘째인 의기가 부의 대를 이어 갈수 있었습니다.
국선은 자식들이 장성하여 재산을 분재할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시에는 노비를 먼저 나누고 다음은 땅을 그다음은 옷감 등의 재물을 나누었습니다.
재산을 나눌 때 이상한일이 벌어졌습니다.
의기는 도정하지 않은 벼는 20가마니였는데 아버지와 큰형님에게 절을 하고
벼20가마니를 자신의 광에 옮겼는데 그 가마니 안에서 구렁이가 발견 되었습니다
깜짝 놀란 의기는 처와 의논하여 아버지인 국선에게 고 하였습니다.
국선은 의기의 광에서 그 광경을 보고 난후 노비들이 몽둥이로 그 구렁이를 잡으려고 하니
“아서라! 그러는게 아니다 저것은 업이라는 영물이다.
구렁이가 우리를 해치지 않았는데 함부로 상생을 해서는 않된다.
자고로 볏섬 속에 있는 구렁이는 재물의 상징이니 장차 의기의 집에 큰 재물이 일꺼야
의기는 아버지 말을 듣고 크게 당황하여
“아버님 그러시다면 우리 가문의 재물은 큰집에 모이는 것이 당연하니 저 구렁이를 가마니에 다시 넣어 큰집 광으로 옮기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국선은
아니다 내가 재물을 나눌 때 특별히 구분 지어 나누지 않았으니 이미 구렁이는 이집에 들어 왔으니 복이 되어도 이집의 복이요 화가 되어도 이집의 와이니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며 만류를 했습니다.
그러나 의기는 그 구렁이를 가마니에 다시 넣어 큰집 광으로 옮겨 놓았으나
다음날 다시 의기 집의 광으로 그 구렁이가 다시 왔다고 합니다.
그 일이 있었던 후로 의기의 집에는 재산이 날로 불어났고 다른 형제들의 집은 재산이 많이 늘리지는 않았다 합니다.
최의기는 진사시험에도 여러번 낙방하고 부를 축척하다 70살 까지 살아가며 제산을 일구며 죽기 전에 “제산은 만석이상하지마라” 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최의기가 당부한 제산은 만석이상하지마라 도 하나의 가문이 되었지요
아홉번째 비밀
청백리 정신에 바탕을 둔 근검절약 정신을 실천하다.
의기의 집에는 재산은 날로 늘었지만 그의 아들인 승렬은 과거에는 번번히 낙방하였습니다.
자식이 귀했던 최종률은 세간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피하여 더욱 근검절약을 생활화했다
몸에 배인 가풍이지만 최종률은 또 하나의 가훈을 만들었습니다.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만석꾼의 며느리가 3년 동안 비단옷을 입지 않고 무명옷을 입어라는 것은
지나치게 인색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근검정신은 하인들에게는 물론 이웃사람들에게도 교훈이 되었다
최종률은 늦게 진사시험에 합격한 후 사흘만에 객사에서 죽었습니다.
최종률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4종형의 아들인 언경을 입양해 후사로 삼았다
최의기로부터 4대동안 아들이 없거나 외동아들만 두었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자손이 번창 하지 못해 아쉬운 점은 있겠지만
오히려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들이 많으면 분재를 계속하면 아무리 큰 부자 라도 부를 지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당시에는 권세가의 집에는 집에서 직접 술을 담가서 먹었으며
최부자 집에는 국선이 벼슬을 하며 배운 법주를 며느리에게 전수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주법주”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열 번째 비밀
이루기 힘든 일일수록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행한다.
이조리 땅을 버리다
경주 최부자 집이 경주 교리에 자리 잡은 것은 지금부터 약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최언경의 아들인 최기영이 터를 잡고 입향하여 정착하였다 합니다.
최부자집은 차츰 재산이 늘고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져서 이조리의 집이 너무 좁아 감당하기 힘들어 여기저기 좋은 집터를 물색하던 중 경주 교리로 집터를 잡게 되었습니다.
기영이 교리로 이사를 한다고 소문이 나면 인근의 땅을 팔지 않거나 비사게 부르기 때문에 조용히 매입작전을 시작하였으며 땅값의 2배를 쳐준다면 어렵지 않게 땅을 싸들였고
필요한 땅 3만평은 경주 향교를 제외하면 인근의 땅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향교의 유생들이 경주 최부자의 이사를 반대하고 달갑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최부자의 이사는 이무렵 경주를 순시하던 암행의사 귀에 들어가
어사가 최부자와 향교의 유생들의 말을 듣고
“먼저 최기영 진사는 감히 향교 옆으로 이사를 하려하면서 유림들의 여러 어른들과 상의를 하지 않은 점은 문재가 있소
그러나 최기영은 최진립 장군의 후손으로 대대로 진사에 급제하여 불학무도의 졸부는 아니기에 향교 옆으로 이사를 할수 없음 또한 문제가 있소
자고로 맹모삼천지교라 했소 향교 가까이로 이사를 하여 자식의 교육을 더 높이고자 함이 그자체로 흠일수는 없지요.”
어사의 말에 둘은 어아니벙벙하며 쳐다보다
어사가 다시 말을이어 갑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이해가 되는 방법이 있으니 둘다 따르겠소
도대체 그 방법이 무엇이요 어서 말해 보세요
세상을 움직이는 법도가 유가에서 우러나오고 유가를 교육하고
공자와 맹자를 모시는 향교가 가장 존중되어야함은 지극히 마땅하오
향교와 최씨의 집이 어찌 나란히 설수있겠소
그러나 개인의 땅에 사인이 집을 지을 수 없다고 하는 말씀 또한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이니
최씨는 집을 짖되 주춧돌과 용마루를 향교의 용마루 보다 다섯자 아래로 낮추어 짓도록하시오
이러한 판결에 유림들 모두는 고개를 꺼떡였다
그 자리에 모인 유림들은 설마 다섯자나 낮추어 집을 지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기영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나리의 현명한 판단에 어김없이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소인 또한 유생인데 분수에 넘치게 외람되게 하겠습니까?
인근의 땅을 모두 깍아 향교의 용마루보다 5자 낮게하여
향교를 결코 넘보지 않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향교에 바로 이웃하는 영광을 허락하신다면 미곡 1,000석을
유림의 기금으로 희사 하겠나이다
당시 경주향교의 재정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1년의 연비를 제대로 내는 사람이 없어 궁핍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유림의 경작지는 다소 있었지만 향교의 최소한의 행사비용도 모자라는 형편이었습니다.
최기영과 이사할 터를 둘러보던 지관이 북쪽의 내룡(기)이 약하다고 해서
그렇지 않아도 터를 낮추려고 한 처지에 마침 잘되었다 생각하며
집을 지을 때 인근의 터를 많이 낮추고 집을 지었다합니다.
열한번째 비밀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게 하고 항상 후하게 대접한다.
경주 최부자 중에서 기영이 가장 낭만적이며 풍류를 알고 학식이 풍부해서 많은 시문과 여행기 등을 남겼다 합니다.
그의 집에는 항상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그때 또 하나의 가훈이 정착 되었습니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과객은 오늘날의 여행객입니다.
조선기대에는 요즘같이 여관이나 호텔이 없고 주막이나 객사 객관 등이 있었으나
그나마 부잣집에서나 이용할 수 있었다 합니다.
최부잣집에 들어오는 객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는 선비와 무인들도 많았으며
이들은 세상 물정과 지방의 인심을 전해주는 역할도 했습니다.
당시는 교통이나 통신이 발달하지 못해 이들이 정보 교환을 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열두번째 비밀
자신을 낮춰 상대가 경계하지 않도록 한다.
최기영에게는 아를 둘과 딸이 있었는데 장남 세린이 그대를 이으면서 성균 생원에 급제했으나 조상의 뜻에 따라 벼슬에는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정진 했다
그러나 진시에는 세 번 낙방하였다
최세린은 용모가 의젓하고 재능이 뛰어났으나 그의 아호를 대우(大愚) 크게 어리석다란
뜻으로 스스로 어리석음을 자처하며 상대방의 경계심을 없애게 하였다
나의 호는 청송이라 지웠습니다.
20년 전 막 결혼하고 저의 처가가 밀양 청도면입니다 청도면의 청자를 붙이고
의미 없이 송자를 붙여 가첩 족보에 저의 제종숙께서 명명해 주셨습니다.
청송이란 푸른 기상, 곧은 성품 등을 의미하더라구요
전 만석꾼이 되긴 물 건너갔습니다. 벌써 기본인 호에서 탈락이지요.
여러분은 지금은 호가 없겠지만 행여 지을 기회가 되면 다소 덜떨어지는 호로 숙고를 좀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부자가 되고 그 부를 오래 지속시킬 것 아닙니까?
바보대통령 지급은 이 세상에 없지만 또 지금은 나쁘게 평가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훗날 역사는 바르게 평가를 내릴 수도 있을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도 아마 경주 최부자의
교훈을 다소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농담이지만 나의 생각입니다.
열세번째 비밀
덕을 배풀고 몸으로 실천한다
최만희의 아들인 최현식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젊은 나이에 집안일을 맞아하며
홀어머니를 지극히 섬겼다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경능(덕종내외의능) 참봉이 되어 직무를 수행하던 중
어버이를 섬길 날이 멀지 않았다며 사직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듬해 동학혁명이 일어나 온 나라가 난리에 휩사였습니다.
경주지방에도 활빈당이라 자처하는 무리들이 불평이 있는 농민들을 규합에서 떼지어 다니며 불을 지르고 약탈과 살인을 서슴치 않았으며 재물을 빼앗아 일부는 사취하고
일부는 백성에 나누어 주며 의적을 자처했다.
경주 관헌을 점령하고 무리 중 교리 최부자집으로 가자 선동하니
사마고 라는 진사 들이 모여 회의 하는 곳을 불태우고 최부잣집에 다다르니
모두 최부자집을 애워 싸고 불을 지를 태세였으나
그때 소작인과 하인들이 나서 말했다
도대체 이 댁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런 일을 벌립니까?
최부자 집 덕분에 우리는 목숨을 부지하고 있소
그러니 제발 진정하세요.
썩 비키지 않으면 모두 죽여 버리겠소.
부자치고 도둑놈 아닌 자가 어디있소
여기서 사방 백리 안에 흉년에 최부자집에서 얻어먹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지
물어 보세요
그 말에 폭도들은 진정을 찿았으며
최 현식은 이방인인 그들을 소를 잡아 그들을 대접하니
굶주린 농민들이 감탄하였다 합니다.
동학난이나 활빈당 등의 난리 와중에도 최부잣집은 불을 타지 않고 온전히 재물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선대부터 내려온 아랫사람이나 가난한 이웃에 배 풀어 온 덕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네번째 비밀
2등을 위해 1등만큼 노력하자
1등은 그야 말로 하나뿐입니다.
1등이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 불만 속에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
또한 일등을 했다 하더라도 만족은 잠시 뿐이고 바로 순간부터 끝없는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
견재와 시기 질투와 모함 음해 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1등을 하기 위해서는 이모든 것을 참고 이겨야 합니다.
그에 비해 2등은 편안합니다.
남의 눈에 두드러지지 않고 경쟁에서 약간 비켜 설수 있으며 시기와 모함과 질투를 적게 받는다. 그러면서 유복하며
그러나 결코 2등도 쉽지 않다
1등에 다름없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않된다.
그러므로 2등을 하라는 것은 노력을 적당히 하라는 것이 아니고
1등이 못되고 2등이 되더라도 만족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씨 가문에서 추구하는 적정 만족의 원리와 상통한다.
스스로 분수를 알고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을 할줄 아는 자세 그것은
“재산을 만석이상은 하지 말라” 라는 가훈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렇게 스스로 만족하며 겸손하고 양보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도 생긴다.
최현식의 호는 둔차(鈍次)로 1등보다는 2등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 이란 뜻으로
불리워졌습니다.
열다섯번째 비밀
가치있는 일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라
가치있는 일을 위해 300년 부를 버리다...
경주 최부자는 정무공 최진립과 그의 아들 동량이 기틀을 잡고
최국선에서부터 의기 승렬 종률 언경 기영 세린 만희 현식에 이어 최준에 의해 부자의 막이 내립니다.
최준의 아버지 최현식은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들은 후 시금을 전폐하고 두문불출하며
눈물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해 최현식은 아들들을 불러 모든 집안일은 아들 최준에게 맏긴다고 선언 했다
스물두살에 집안일을 맡은 최준은 해가 갈수록 아버지의 의중을 알수있었다.
당시 생각이 있는 젊은이들은 일제에 항거해 의병이나 상소로 일본에 항거 했으며 최준에게도 많은 재의 가있었으나 집안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어릴적부터 꿈꾸어온 신식 학문에 대한 열망이 조금씩 꺽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아버지 최현식의 의도 중 하나였다.
아들이 전장터에 나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역할이 있었다.
한일 합방으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최준은 향교를 빌려 간이 학교를 설립하고
백성들과 아이들을 불러 무료로 글을 가르켰다.
그러나 간이학교는 정식 학교가 아니므로 나라가 어수선 한 때라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으로 제대로 된 정식 학교를 만들어 보리라 생각했습니다.
최준에게 구국운동의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백산 안희제와 의병장 신돌석 장군.
여러분도 잘 아시는 광복군 사령관 박상진 의사였습니다.
안희재는 일제시대 자신의 재산을 팔아 부산 광복동에 백산 상회라는
곡물 수입및 수출할 수 있는 설립했습니다.
당시는 공업이 발전하지 못해서 대부분 농산물을 직거래 하거나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당시의 백산상회는 우리나라에서 제법 몇번째 가는 큰 상회였으며 안희제의 제산 대부분을 정리하여 설립했습니다.
안희제는 백산상회의 전권을 최준에게 넘기고 여기서 발생되는 수입의 대부분을 상해 임시정부 정치 자금으로 쓰여 지게 하였습니다.
백산상회는 일제의 감시를 철저히 따돌리며 겉으로는 항상 적자에 시달리는 부실기업으로
전전하며 수입의 많은 부분을 정치자금으로 빼돌렸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14년간 백산상회를 운영하며 당시 돈 200만원이라는 큰 부체를 최준이 안으면서 가사가 많은 어려움이 있게 되었습니다.
일재시대 지금의 한국은행격인 식상은행 총재인 아리가 라는 사람으로 인해
다소의 부체를 탕감 받을 수 있었으며 이 일로 인해 관직요청을 두루 제의 받았으나
어렵게 최준은 거절하였습니다.
해방이 되자 최준은 대구 경북지방의 유지들과 합세하여 대구대학을 설립하게 됩니다.
여러 어려운 상황 속에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은 합병하여 지금의 영남대학교로 명맥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6.25사변이 일어나자 경주에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 있을 때 계림대학 지금의 영남이공대학
을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며 휴전과 더불어 피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며 학생 수가 적어서 어려움을 격었습니다.
이렇게 최준은 300년 부를 이어온 가문의 부를 의미있는 현대식 교육사업에 대학설립에
전 재산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또 너자신을 알라 라고 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유한 사람이 그 부를 자랑한다 하더라도
그가 그 부를 어떻게 쓰는가를 알기 전에는 그를 칭찬해서는 않된다. 라고 했습니다.
부자는 부를 축척하는데 있어 많은 불법과 많은 이기적인 욕심으로
부를 이룬게 대부분이다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과욕으로 결국 부를 잃고 마는게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강의가 공부하고 사회생활하며 좀 알찬 내용으로 열심히 살아가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