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 도형은 1885년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부친 안발(安撥)과 모친 창녕성씨(成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강진(康津). 호는 백산(白山)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 백야 김좌진 장군과 삼백으로 불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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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하여 문리를 쉽게 터득하고 문장에도 뛰어났습니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에 위기가 닥치자, 신학문을 익혀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1905년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양정의숙(養正義塾)으로 전학하여 선진 학문을 접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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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교남학우회(橋南學友會)를 조직하고, 1908년 영남지방 유지들과 교남교육회를 조직하여 잡지 발행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립학교 설립에 필요한 재원확보에 힘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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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구포에 구명학교와 의령에 의신학교를 설립하고, 이듬해인 1908년 자신의 향리인 입산리에 창남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과 민중계몽운동을 실시하였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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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과 식민지 지배가 가시화 되는 상황에서 1909년 서상일. 김동삼 둥 영남지역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17세부터 30세미만 청년들로 조직된 대동청년당을 결성하였습니다. 안희제 선생은 2대 단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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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가 시작되던 해 안희제는 양정의숙을 졸업하였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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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귀국하여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부산 중앙동에 백산상회를 설립하였고, 1916년 경에는 서울. 대구. 안동. 원산. 봉천 등지에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여 활동지역을 확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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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에서 1982년 6월 21일부터 1982년 9월 14일까지 방영된 월화드라마로 제작되어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거부들의 일대기를 엮어 한국 근대자본이 어떻게 형성되었나를 살펴보는 거부실록 시리즈 중 세 번째 작품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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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영남의 각지에 배포하였고, 11월에는 기미육영회를 결성하였습니다. 이 회는 우수한 청소년을 선정하여 국내.외에 유학시켜 조국광복과 민족국가 건설의 인재양성에 그 목적을 두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수시로 전달함으로 임정의 재정과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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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동아일보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동아일보 부산 지국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습니다. 1926년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를 동지들과 함께 인수하여 중외일보로 변경하여 발행하여 1931년 6월 종간될때까지 사장.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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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10월에는 대종교에 입교하였고 발해의 고도인 동경성 일대에 토지를 구입하여 1933년 발해농장을 설립. 경영하였습니다. 만주로 이주한 한국 농민들을 대상으로 토지를 분배하여 경작케 함으로써 3백여호를 유치하였고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발해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맡아 항일독립정신을 고취시켜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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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대종교 3세 교주 단애 윤세복 종사를 비롯한 간부들과 대종교 총본사가 동경성으로 옮겨오자 교무행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포교활동도 활발하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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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은 대종교 서적간행을 맡았습니다. 교적 간행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성금을 냈고 여러 교우에게서도 성금을 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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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홍범규제> 5백 부, <삼일신고> 2천 부, <신단실기> 1천부 등 6종 1만 5백 부를 만주 연길현에서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발해고궁지에 단군전인 천진전 건립을 추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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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0월 천진전건축주비회(籌備會) 총무부장으로 임명됐습니다. 그해 10월 3일 동경성에서 개천절 경축식을 거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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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천진전을 이곳에 세움으로 대종교와 단군민족주의의 구심점을 확립하려 했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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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교세가 확장되고 교도들의 항일정신이 고조되어 독립운동세력으로 발전하여 가자 일제는 위협을 느껴 1942년 11월 19일 교주 윤세복을 비롯한 21명의 국내.외 대종교 지도자들을 일제히 검거하여 대종교 민족운동을 탄압하였습니다.
이것이 임오교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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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선생은 신병 치료차 귀향해 있던 중 일경에게 피포되어 만주 목단강성 경무청으로 이송 수감되었습니다.
혹독한 고문과 회유를 받았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고, 선생은 1943년 8월 3일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출감한지 3시간만에 목단강성 영제의원에서 59세를 일기로 순국하셨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그리고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백산 안희제 선생의 항일 독립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1995년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3가 10-2 옛 백산상회 자리에 백산기념관을 설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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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 자리한 백산기념관에는 백산 안희제 선생의 유품과 독립운동 자료 80여 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대종교 총본사에서는 임오교변으로 순국한 홍암 나철 대종사님의 두 아들(정련, 정문)과 백산 안희제 선생등을 임오십현(순국십현)으로 하여 극진한 예우를 갖추어 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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