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남인의 수뇌부는 허적, 허목, 윤휴, 유혁연, 권대운, 민암, 오시수 등이 있었는데 서인 정권 밑에서 벼슬을 하며 비교적 잘 지낸 탁남과 서인에 맞서 예송을 주도한 청남으로 갈렸다. 윤휴, 허목 등은 청남이었고 허적, 유혁연, 권대운 등이 탁남의 영수였다. 탁남은 정치적 변동을 크게 추구하지 않았지만 윤휴 등 청남은 북벌을 추구하는 등 여러모로 정권 교체에 따른 변화를 추구했다. 특히 대동법, 호포제 등의 세역 개혁안에 대해서는 윤휴와 허목 등의 인물 사이에 의견차가 있었는데, 윤휴는 대동법에 소극적인 대신 호포제를 추진하였고, 허목은 대동법에는 호의적이었으나 호포제에는 비판적이었다. 노비제를 비롯한 사회 질서를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오가작통제와 호패법 등을 강화하여 호구 파악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송시열의 고묘를 주장하면서 협력하기도 했지만 권대운, 유혁연 등이 당시 맹렬하게 북벌을 주장하던 윤휴를 탄핵하거나 비난하고 허목 등이 허적을 탄핵하는 등 서로간의 공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1680년, 집권 5년만에 김석주가 허견의 역모를 밝혀내면서부터 시작된 경신환국으로 남인 정권은 축출되었다. 역모 죄로 단박에 허적, 윤휴, 유혁연, 오시수 등 남인 정권의 수뇌부가 사사되면서 남인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야사에는 영상(영의정) 허적이 멋대로 유악을 가져다 써 숙종의 분노를 일으켰다는 유악 일화가 전해오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유악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고 허적을 처형할 때도 그의 죄목에는 유악 얘기가 없다. 권대운, 민암, 오정복 등 살아남은 수뇌부들도 야인이 되었고 정권은 송시열, 김수항을 위시로 한 서인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9년 후 인현왕후 폐출과 장희빈 문제로 다시 남인에게 기회가 왔다. 숙종은 장희빈이 경종(조선)을 낳은지 돌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원자의 명호를 내리려 했는데 송시열이 반대를 하다가 삭직 문외출송 되었고, 송시열의 삭직을 동의하지 않은 도승지 이하 네명의 승지들과 대간들을 모조리 파직 및 체직한 후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 살아남은 남인의 영수들을 삼정승에 기용하면서 다시 남인정권을 세우니 이가 바로 기사환국이다. 남인들이 점령한 대간은 송시열을 안치할 것을 청하자 숙종은 이를 수용함은 물론 심지어 가극할 것을 명했다. 남인 정권을 굳힌 왕은 이번에는 인현왕후를 내칠 것을 명하고 이에 반대하고 연명상소를 주창한 소론 오두인, 박태보를 고문한 후 유배했으며(유배 중 사망) 장희빈을 중전으로 세우고 인현왕후는 폐출했다. 그리고 서인의 거두이자 남인의 철천지 원수인 송시열을 사사할 것을 명하니, 제주도로 유배갔던 송시열은 서울로 압송되다 정읍에서 금부도사를 만나 83세로 사사되었다. 남인은 다시 모든 것을 되찾은것 처럼 보였다. 허목을 시작으로 윤선도, 오시수, 홍우원 등 관작이 추탈된 남인들이 복권되었으며 민회, 윤휴, 유혁연, 허적등 사형당한 남인들도 신원되어 왕에 의해 치제했다. 이이와 성혼은 문묘에서 출향(!)되고 파괴된 정개청의 사당이 복구되었다. 또한 허적의 아들인 허견의 옥사에 대한 재조사가 명해져 전 훈련대장인 [[김익훈]이 70세의 나이로 형장을 받다 죽었으며, 김환, 이회 등 고변자들도 모조리 참수되었다. 김석주 역시 관작이 추탈되는 등 죽어서 벌을 받았으며 전 영의정 김수항이 61세를 일기로 사사되었다. 어마어마한 변화였다. 하지만 기사환국으로 들어선 남인 정권은 그 이상의 변화를 주도하진 못했다. 과거 허견의 옥사로 핵심세력이 사사되고 삭직된 청남 대부분도 세상을 뜬 상태에서 집권한 건 탁남 뿐이었다. 대표적인 이 시대의 인물인 권대운, 목내선, 이덕원 등은 소극적인 인물이었으며, 그 중에서 민암이 장희재를 비롯한 외척들과 동맹을 맺고 왕의 철저한 예스맨들로 정권을 유지해갔다.
그리고 고작 4년만에 남인의 세도는 기울기 시작했으니, 숙빈 최씨가 왕의 총애를 얻기 시작하면서 장희빈의 총애는 비례하여 약해진 것이다. 긴장한 남인 정권은 서인의 젊은 세력인 소론 함이완, 한중혁, 노론 김춘택, 유복기 등이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것을 포착하여 쟁점화시킨 후 서인을 재기불능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역으로 유학 김인의 상소에 돌변한 숙종이 민암, 장희재를 문외출송 시키면서 사태는 환국으로 치달았다. 영상 권대운까지 죄다 쫓겨난 빈자리에 남구만을 영상으로 임명하고 훈련대장에 신여철을 병판에 서문중을 임명하여 핵심수뇌부를 서인으로 채웠으니 이것이 바로 갑술환국이다. 결국 장희빈은 강등되었고 인현왕후가 복귀했으며, 인현왕후가 죽자 남인은 숙빈 최씨와 노론에 의해 거의 박멸당하게 된다(신사옥사). 결국 이런 과정에서 남인들은 거의 개발살이 나버렸고 경종이 즉위할 즈음 되면 제대로 된 야당 자리도 갖추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허목의 제자 유형원의 종제인 성호 이익은 "실학"을 완성시키며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진력하였고, 남인 최후의 거두가 된다. 실사구시와 붕당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균전론을 통한 중농주의의 완성 등이 그의 학문의 특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