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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 한이치에 제2편 평삼심(平常心) 5. 일원상에 대하여 [3.일원상 신앙하는 법]
일원상 신앙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몇 가지 조목으로써 신앙 방법을 해석할 수 있으니 첫째는, 재래의 개체신앙을 전체신앙으로 둘째는, 미신신앙을 사실신앙으로 셋째는, 형식신앙을 진리신앙으로 혁신한 것입니다.
이제 그 내용을 말하자면
개체신앙이라 함은 모든 사람들이 혹은 등상불을 신앙하고 혹은 하나님을 신앙하고 혹은 어느 사람을 신앙하고 혹은 어느 물상을 신앙하고 혹은 어느 귀신을 신앙하여 각자의 신앙표본을 따라 자기의 일생 화복이 오로지 그 한곳에서만 결정되는 줄로 믿는 것인 바 전체신앙은 먼저 세계 일원을 통찰하여 우리의 죄복 인과가 오직 한 곳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 허공법계가 전체 한 불성으로서 처처 물물이 모두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또는, 죄벌을 주시는 근본임을 잘 알아서 항상 이 우주 대성(大性)으로써 마음의 귀의처를 삼는 것이요,
미신 신앙이라 함은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죄복인과가 경우를 따라 직접 실현되는 당처를 알지 못하고 그 사체에는 당하든 지 안 당하든지 천만사를 한갓 자기의 신앙 표본에만 의지하여 공상적 발원을 하는 것이니 예를 들면, 사람에게 관계된 일을 저 감각 없는 무정지물에게 소원 앙축한다든지 또는, 사리간에 직접 실행할 일을 저 무형한 귀신이나 또는 알 수 없는 운수에게 우연한 성공을 희망하는 것이 모두 그 유(類)인 바 사실신앙은 모든 사물을 응접할 때에 먼저 그 죄복의 직접 관계 있는 당처를 발견하여 천지에 당한 일이면 천지를 신앙하고, 부모에 당한 일이면 부모를 신앙하고, 동포에 당한 일이면 동포를 신앙하고, 법률에 당한 일이면 법률을 신앙하여 각각 그 소당처(所當處)를 따라 실지적 원을 발하고 일을 진행하는 것이요
형식신앙이라 함은 모든 사람들이 이치의 신명(神明)함을 알지 못하고 그 신앙이 항상 명상에 구속되어 어떠한 명호나 어떠한 물상을 의지하기 전에는 스스로 그 신앙력을 세우지 못한 것을 이름인 바 진리신앙은 그 신앙이 한갓 명상에만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일원 가운데에 갊아있는 자연의 이치가 원래 지공지명하고 통달무애하여 세간 인과에 추호라도 가히 속이지 못할 것을 자신하는 것이니
이 여러가지 말씀은 곧 일원상의 진리를 분해적으로 비판하여 써 참되고 떳떳한 옳은 신앙을 세우게 한 것인 바 이것을 깨친 자는 가히 정당한 신앙력을 얻었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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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개체신앙이 아니라 전체신앙이다.
두 번째는, 미신신앙이 아니라 사실신앙이다.
그 다음에, 형식신앙이 아니라 진리신앙이다.
이렇게 혁신한 것이 대종사님의 신앙이다~ 그러셨습니다. 그러죠?
자~ 그 전에 제가 여러분들한테 오늘은 특별히 신앙에 대한 기본적인 걸 다 설명하려고 해요. 선물이에요, 오늘 오신 분들. 제가 이렇게 설명한 건 처음입니다.
첫째,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다. 그러면 ‘신(信)’ 이라고 하지 왜 ‘앙(仰)’을 넣어? 그냥 신! 그러면 되지. 신앙은 물론 믿음이 신앙이죠. 그러나 ‘앙’자를 넣었다는 것은 우러른다~ 우러를 앙자 거든요. 그러니까 한 인간이, 어떤 성자가 내 놓으신 어떤 종교적 이상, 성자가 내 놓으신 그것에다가 내가 완전히 바치는 거예요. <완전히 비치는 실천적 태도!> 그렇게 이야기해요, 학계에서는. 그래서 여기에서는 우리가 흔히하는 지정의(知情意) 삼방면(三方面)을 넘어서 그것을 경험한 걸 넘어선 초월적인 영역까지가 포함이 되는 겁니다.
종교라는 것은 신앙을 통해서 주로 구원을 얻게 되죠, 우리가. 그래서 이제 신앙위주인 종교가 있고 또 수행위주인 종교가 있습니다마는, 우리는 이제 신앙과 수행을 함께 하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신념과 구분을 못해. 신념이라는 것은 뭐냐면 자기의 경험이야. 자기의 직접경험을 통해서 얻은 것을 신념이라고 해. 확신이라고도 하죠. 그러나 아까 제가 말한, 지정의 삼방면, 또는 자기의 경험을 초월한 그 자리까지는 신념의 세계가 아직 가지 못한 거예요. 신념은 어떻게 보면 중요한 것이지만 자기의 경험일 뿐이다. 직접 경험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는 것을 넘어선 정과 의, 그리고 그걸 초월한 세계까지를 우리가 이상으로 놓고 거기를 향해서 간다.
그러면 신앙의 목적은 뭐냐?
여러분 여기 왜 오셨어요? 왜 왔어? 신앙의 목적이 뭐예요? 예? 여기 돈 주는데 아니자나, 돈 내는데~. 여기 온 신앙의 목적이 뭐예요? (잘 살자는 거) 잘 살자는 거! 어~그려 그려.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한마디로 말하면 행복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인간이 누구나 가장 원하는 것은 뭐죠? 행복인 겁니다. 수양의 목적은 내가 보다 더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런 것이죠. 반대로 이야기하면, 신앙이 없는 사람도 행복을 위해서 살아요. 그러나 성자가 내 놓으신 어떤 진리, 요걸 통해서 그 행복을 얻는 것이 빠르다는 거지. 보다 효과적이라는 거거든요. 내가 혼자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얼마든지. 그러나 그 행복보다는 훨씬 더 빠른길, 지름길이 있다. 성자가 내놓은 그 법을 통해서 그 길을 갈 수 있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 신앙의 대상은 뭐냐?
오늘 지금 종교학 시간이야. 신앙의 대상은 뭐예요? 여러분들이 한번 여러분들이 이런 걸 내 안에서 연마를 해보셔야 합니다. 그래야 내 신앙이 명료하게 떨어져요. 자신감이 붙어. 신앙이란 뭐야? 탁 물어봤을 때 내가 대답할 수 있는가. 그러면 신념과 대비해 봐라. 내가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고 신앙의 목적을 누가 묻는다면. 내가 여기 다니는 목적이 나는 뭐라고 확실히 알고 있느냐. 이걸 아느냐 모르냐가 참 중요하다.
그 다음에 이제, 우리도 그러면 신하고 앙을 하는데 그러면 믿을 대상, 우러를 대상이 뭐냐? 신앙의 대상이 뭐예요? 뭣이여? 사투리 안 써야지. 뭐예요? (하하하) (일원상) 일원상이 뭣인데!
신앙의 대상은 어떻게 말하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진리”라는 말 입니다. 어떤 종교라도 필요 없어. 그런데 거기에 이제 대상의 명칭이, 우리는 일원상이라고 하고 또 절에 갔더니 부처님이라 그러고 교회 갔더니 하나님이라 그러더라. 저 이슬람 갔더니 알라라고 하더라. 그런데 그걸 모아서 말했더니 뭐여? 그 대상이 진리더라. 신앙의 대상의 핵심은 진리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적 종교의 신앙> 이라고 표현하신 거여, 대종사님이. 진리적 종교의 신앙이라고 표현하셨어.
그러면 조금만 더 들어가 보면, 그러면 그 신앙의 내용이 뭐냐? 그 대상의 내용이 뭐냐? 했더니 여기서 이제 종교적 차이가 조금씩 있는 거여.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내용이 같아. 진리라는 것은 같아. 그러나 인식하는 게 다른 거여. 인식하는 게 다른 거여.
우리 원불교는 일원상이라고 했는데 더 들어가면 <우주만유의 본원>이라고 하면 되요. 우주만유의 본원. 이 본원을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해석하냐? 하나님이라고 생각해. 다른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해, 이 본원을. 원불교는 이 우주만유의 본원을 어떻게 생각해? 아 <본원즉실재(本源卽實在)>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여. <본원즉실재>다! 라는 소리는 뭐예요? 우주존재가 따로 있는 이면적인 부분이 있지만, 사실은 더 들어갔더니 그게 실지로는 뭐더라? 실재(實在), 이 전체더라. 우주만유 전체더라 이 말이여. 이게 우리는 원불교 신앙의 대상이다. 그래서 개체신앙이 아니라 뭔 신앙이에요? 전체신앙이다. 그러니까 어떤 절대적 존재만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체대상을-천지만물 허공법계인 이것을- 일원상의 진리에서는 또는 일원상의 신앙에서는 우주만유의 본원이라고 표현을 하셨다.
[[ 질문: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경우는요?]]
네~~ 우주만유가 4개로 쪼개버리면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옛날에는 <사은의 본원>이라고도 했지. 사은의 본원이라는 소리나, 우주만유라는 소리나 같다 그 말이여. 얼마든지 질문해요~ 괜찮아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신앙만 있냐? 수행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또 뭐여? 일원상은? 수행의 표본이다. 이게 기가 막힌 거예요. 왜 신앙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수행의 표본일까? 요거 생각해 보셨어요?? 응? 즉 우주만유의 본원과. 이렇게 하면 어려워지지.
우주 만유의 본원 - 他 - 신앙일체 중생의 본성 - 自 - 수행 제불제성의 심인 - 自他 |
우주만유의 본원 그러면 나뿐만 아니라 전체를 이야기 해. 전제. 그러니까 대타적인 거예요. 이것이 이제 타력신앙인 거예요. 타력신앙이 우주만유의 본원 때문에 나온 거여. 그러면 자력신앙은 뭐냐? 바로 제불제성의 심인도 들어가지만 그 안에 일체중생의 본성이 들어가. 이해가 되실란가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신앙이 대상이면서 수행의 표본이 되는 거여. 이게-우주 만유의 본원[他]와 일체 중생의 본성[自]- 하나다 이 말이지, 하나다 그 말이여. 기독교 다니는 분들은 요것-일체 중생의 본성-이 별로 없지. 요건[일체중생] 뭐여? 그냥 중생이여, 죄인이라고. 그런데 우주만유의 본원을 신앙해, 타력신앙으로써.
그런데 우리는 그것만이 아니라 수행의 표본으로써 또 일원상이더라 이 말이에요. 그 일원상 안에. 그러니까 그것은 일체중생의 본성으로써 내 자력신앙이 들어가 있어. 내가 신앙을 통해서.
그러면 제불제성의 심인은 어떤 양반이냐? 자력과 타력을 겸비한 양반이여. 그래서 우리는 자타력 병진 신앙이여. 이해가 될랑가 모르겠네~ 또 너무 또 어려워지는가.
[[ 질문 : 그러면 제불제성님들은 누구나 이 본원에 도달하신 분들이라는 거예요?]]
사실은 우주만유의 본원과 심인과 본성이 원래 무촌이예요 무촌. 근데 이제 이런 거죠. 이제 일원상을 요런 관점으로 보니 요런거고, 요렇게 봤더니 심인이고, 요렇게 봤더니 본성이더라 이 말이여. 어? 요거 있고 요거 있고 요거 있는게 아니라 (하나를) 요렇게 저렇게 보고 있는 거예요. 이해가 되세요? 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아서.
예전에는 따로인지 알았어. 그러니까 기독교는 유상의 세계가 있고 무상의 세계가 따로있어. 그렇게 바라봐. 그런데 우리는 요렇게 봤더니 무상인데, 이렇게 봤더니 유상이네. 한 몸이네. 이렇게 된 거예요. 이해가 되시죠! 우리 진경님 짝궁 이렇게 이야기하면 모르겠네. 알겠어요? 모르시겠죠? 집에 가면서 물어봐. 집에 가면서 물어보세요.
그래서 우리가 수행이라는 것은 뭐냐면 내 인격관리예요. 마음 관리여. 왜냐하면 신앙을 하는 것이 내 마음이 들어서 신앙을 하거든. 그러잖아요. 또 내 인격이 그 신앙을 하다가 어떻게 만드느냐도 달려있어. 그러니까 분리를 할 수가 없는 거지 사실은. 그러나 신앙 자체를 놓고 보면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 성자가 내놓으신 교법이나 진리에, 내가 거기에 바치고 온통 거기에 내가 믿음을 통해서 합력하고 거기에 실천이 들어 갈 때, 그 성자가 말씀하신 그것은 내가 성취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대종사님이 내놓으신 교법과 대종사님이 말씀하신 그 진리를 온통 믿고 바친다.
그래서 거기서 다시 4개로 다시 쪼개지. 믿음에 4개를 쪼개. 믿음은 정(定)이라고 했죠. 따라서 하세요~ 신(信)은 정(定)이다. 정이라는 소리는 뭐냐면 정해버렸다.
그러니까 나는 대종사님 법에 믿음을 냈다 그것은 대종사님 법으로 정했다 그 말이여. 그러잖아요. 그래서 그중에 첫째는 진리다, 둘째는 교법이다. 셋째는 스승. 넷째는 회상이다, 즉 교단이다. 여기에 일단 신을 내는 거예요.
여기서 더 들어가면 진짜 신은 원불교에서 말하면 자력신이예요. 이 자력신의 신은 뭐냐? 자력신의 신은 뭐예요? 내가 일체중생의 본성, 나의 본래 성품은 뭣이다고? 못난 놈이라고? 바보라고? 멍청하다고? 골치 아픈 놈이라고? 죄인이라고? 그게 아니라~ 나의 본 모습은 원만구족 지공무사한 일원상이다~ 이 말이여. 내가. 이걸 믿냐 안 믿냐 얼마나 큰데, 사람이. 어떤 문제가 생겼어, 죽고 싶은 마음이야. 이걸 믿는 사람은 안 죽어요. 안 죽어.
근데 더구나 여기서 현실적으로 인과의 진리를 봅시다. 인과의 진리만 내가 믿어도 억울해야겠어? 안 억울해야 되겠어? 아 인과의 진리를 믿는다면. 제가 만약 인과의 진리를 안 믿는다면 저는요 이럴 것 같애. 보일 때만 잘하고, 좋을 때만 믿고, 안 보이는 데에서는 안 믿어. 안 좋은 일 생길 때는 안 믿어. 그럼 원망이지. 그리고 나는 세상에 불만이 많을 것 같애, 내가 인과를 안 믿는다면. 아니 어떤 사람은 부자 집에 태어나서 펑펑쓰고 대접받고 살고 말이야, 왜 나는 그냥 그렇게.. 비교하면 그렇죠? 누구같이 크고 싶고 누구같이 이뿌고 싶고 누구같이 똑똑하고 싶고 누구같이 정말 잘 살고 싶고 누구같이 건강하고 싶은데, 왜 나는 그렇게. 그 중에서 몇 가지는 다 안 채워지지. 그것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냐 말이지.
그러나 인과를 신앙함으로써 사실은 이것이 수용이 된다는 거지. 수용이 되잖아요. 자 예를 들어서 내가 정말 안 좋은 일이 생겼어. 내가 갑자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병이 생겼거나, 내 가까운 인연이 갑자기 생명을 잃었다가나,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사업이 갑자기 부도가 났거나. 아니면 거꾸로 사업이 너무 잘되, 생각보다 좋은 며느리가 들어왔어. 이게 뭐냐? 이게 인연과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게 그냥 시소타는 인생이야. 좋았다 싫었다, 고마운 척 했다가 또 원망했다가. 그러나 인과를 신앙하면 먼저 수용이거든. 인과를 믿으면 수용하게 되어있어. 아까 믿음은 정이라고 했잖아. 인과를 믿으면 마음이 딱 정해져. 필시 이건 곡절이 있을 것이다. 내가 왜 키가 작은가, 곡절이 있을 것이다. 내가 왜 못 생겼나, 곡절이 있을 것이다. 나는 왜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냐 우리집은, 곡절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마음이 어떻게 되요? 그것을 받아들여요. 그러니까 신앙하지 않고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게 이해가 되? 여러분 이해가 되요? 신앙하지 않는다면? 이해가 안 되지. 좋을 때는 이해가 된 것 같애. 좋은 것은 이해가 돼. 오~ 그런갑다. 근데 욕심의 눈으로 볼 때는 어떻게 내가 100프로 나를 만족해? 여러분 100% 만족한 사람 없어. 미안하지만 여러분 옆 사람도. 우리 우진이가 자기 마누라 이뻐 죽겠다고 하는데 마누라 100% 맘에 들겠어? 천만에 말씀이에요. 거짓말이에요. 자기 자신도 자기를 100% 만족할 수 없어. 왜? 욕심의 시각으로 볼 때는 그렇다. 그러나 인과의 시각으로 딱 들어가면 어때요? 아하~ 이건 내가 지은 건데 이것 안 받을 수 없잖아! 받아야 하잖아.
그리고 미래의 개척에 대해서도, 어떤 우연한 것이나 혹한 것을 받을 것인지. 인과를 신앙하는 사람은 ‘그러면 내가 미래를 향해서 내가 어떤 것을 할 것인지’가 달라진다 이 말이죠. 막연한 기대, 이게 아니라 ‘그래 내가 짓자!’ 말이지!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지만 지을 건 내가 지어서 내가 개척해 만들어 버리자! 적극적 창조적 인과가 이 안에 들어가 버린다 이 말이죠. 내가 나를 얼마든지 희망적으로 만들어 갈수 있는 게 인과다.
저는 인과같이 은혜가 없다고 봐요. 공부 안한 놈이 떨어지는 게 맞지, 공부 한 놈이 떨어져 봐요. 공부 안 한 놈이 붙으면 이놈의 인과가 뒤죽박죽이 되어 버려가지고~ 얼마나 이게 은혜가 아니냐고. 붙을 놈은 붙고 떨어질 놈은 떨어진다. 얼마나 은혜냐 이 말이죠. 나는 그게 은혜라고 생각해.
지금 제가 신앙의 세계를 하다가 신앙의 원리에 들어가고 있어요.
신앙의 원리는 첫째 뭐냐? 인과보응의 원리더라, 인과보응의 원리더라.
여러분들은 무엇을 신앙하냐? 일원상이라는 대상을 신앙하지만, 신앙을 해서 무엇을 얻겠다는 거냐? 복락 행복을 얻겠다는 건데, 그 원리는 뭐냐? 인과의 진리, 인과의 진리는 믿고 들어가는 것이여. 인과의 진리여 우리는.
그리고 그 신앙의 원리는 그러면, 왜 이렇게 인과가 있냐 하고 더 들어가 보면 뭐죠? 왜 그러면 인과가 있으냐하면 그 안에는 기가막힌 <음양의 원리 & 하나의 이치>가 있더라. 예를 들어서 우리가 기도를 왜 해? 신앙의 행위로써? 신앙의 행위에 기도가 있네. 기도 죽어라 안 하는 사람이 있어요, 원불교 다니면서도. 왜 안 하는지 아세요? 누가 말해봐. 옛날에 그랬던 사람 말해봐~ 내가 기도 잘 안 했다, 왜 안 했나~ 말해봐~ 예?
내가 열심히 하면 되지, 타력보다. 자력을 강조하는 사람이 기도를 안 해. 두 번째는 기도 그거 하면 진짜 위력이 있간디? 진짜 있나 그거? 그거 막연하고 없는 것 같은데. 즉 인과의 이치, 한 기운이라는 이치를 부정하는 거죠. 이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기운이라 이치를 신뢰하는 사람, 그리고 아까 타력과 자력이 어울러져야 한다는 걸 아는 사람은 기도를 하게 되어있다. 더 나아가서 어떻게 하다가 그런 기도가 체험이 있어지면 그 사람은 신앙행위인 기도를 계속하게 되어있죠.
근데 제가 가만히 보면 기도를 누가 하나 봤더니, 처음에 안 하던 사람이 기도할 때가 있어. 언제 하냐? 시험 볼 때, 지도 기도도 안한 놈이 나보고 교무님 저 꼭 좀 해주세요~ 저 꼭 기도해주세요~ 뭔 소리여? 급해. 뭔가 하나 잡고 싶어. 뭔가 잡고 싶어. 내 자력만이 아니라 뭔가 타력을 잡고 싶고. 자기도 모르게 타력이 필요하다는 걸 아는 거죠. 그죠? 그 다음에 이제 임신했을 때, 임신이 안 될 때, 강력한 타력을 요구하죠. 별로 신심이 없는 엄마인데 갑자기 기도를 열심히 해. 자기를 위해서는 잘 안하는데 자기 배 속에 있는 애기를 위해서는 기도를 하더라고. 내가 가만히 보니까 엄마가 진급하는 이유가 있더라고. 왜? 자식을 잘 해주려다가 자기 공부가 되어버려. 자식을 위해서 백일기도를 했더니 자기 기도가 되어버렸어. 이해가 되십니까? 야~ 이렇더만 이게.
근데 우리가 정말 기도는 수행을 위한 기도, 내 서원을 정말 이루겠다는 기도, 그리고 내가 지은 업에 의해서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짓는 그 참회의 기도를 우리가 얼마나 하느냔 말이죠. 건방진 사람들은 안 해요. “내가 뭐 잘못했냐~~” 지가 일생동안 지 입에 넣은 것만 해도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이고 해놓고 내가 뭐 잘못했냐 소리해, 버르장머리 없이.
그래서 신앙의 원리는 인과의 이치로써 인과의 원리로써 그 위력이 있다. 분명한 타력의 위력이 있죠? 있어 없어? 있지요? 옛날에 어떤 사람이 깅가밍가 했더니, 하늘에 대고 하느님 똥구녕이라고 생각하고거기다가 손가락질하면서 나한테 천벌을 내려주라고 열 번만 해봐라 했더니, 몇 번하다가 말더래야. (하늘에 대고 손가락질 하면서) 나한테 천벌을 내려주십시오~나한테 천벌을 내려주십시오~열 번을 하라고 했어, 인과를 안 믿는 놈한테. 그랬더니 몇 번하다 안 하더래. 무슨 말이지 알겠어요?
그런데 이게 신기해. 우리 마음이 교만에 갇혀있거나 욕심이 딱 들어있거나 업력에 쌓여있으면 말이죠~ 그 아까 타력에 빌 마음이 안 들어요. 묘하더만. 마음이 맑은 사람이 기도를 더 하고 싶어 합니다, 오히려.
그리고 어중간한 자력자가 타력을 무시해요. 진짜 큰 자력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타력의 위대함을 더 알아요. 제가 왜 아냐면, 어중떵이들은 저한테 안 물어요. 자기가 다 결정해가지고 해. 근데 진짜 똑똑한 놈들은 나한테 와서 묻더라고. 저는 처음 교무할 때 약간 이상했어요 그게. 나보다 똑똑한 애 같은데 왜 이렇게 와서 묻지? 진짜 똑똑한 사람은 타력을 쓸 줄 알더라니까. 아는 길도 물어가고 돌다리도 두드려본다고 하듯이, 그 타력을 활용해 쓸 줄 알더라고. 어중띤 자력, 어중띤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 자력만 강조하고 그러더라. 내가 보니까. 경험을 통해 알았네~ 그래서.
그 다음에 이제 우리 신앙의 교리는 인과보응의 신앙문에 바탕한 뭐죠? 바로 사은사요예요. 그죠? 사은을 통해서, 즉 우주만유를 통해서 우리는 감사생활. 그렇게 되면 평화낙원 평화세상이 되는 거죠. 그리고 사요를 통해서 우리 인간에게 공을 들인다면 평등세상이 된다. 그게 낙원세상이죠. 사은을 통한 낙원은 평화세상이요 사요를 통한 낙원은 평등세상이더라. 평등사회더라.
그 다음. 신앙의 종류. 신앙의 종류는 뭐가 있죠?
절에 가면 뒤에 칠성각이라고 봤어요? 칠성신앙이죠. 칠성신앙은 도교가 들어온 거예요. 북두칠성의 칠성있잖아요. 예전에 도가에서는 북두칠성을 하나의 신앙와 수행으로 활용해서 썼어요. 그것을 가져다가 흡수한 거야, 불교에서. 아 우리나라만 칠성각이 있지 다른 나라에는 없어. 칠성신앙 예를 들어서 그런 것은.
크게 놓고 보면 이렇게 구분할 수 있다. 자력과 타력. 자력신앙와 타력신앙.
그래서 자력신앙 위주의 종교는 불교계통이다. 그리고 타력신앙의 계통은 기독교라던가 카톨릭이라던가. 이런 데는 타력신앙 위주다. 그러나 원불교는 뭐라고 했어? 자타력 병진 신앙이다.
대종사님이 금강산에 가셔가지고 산장 여자주인이 낙원생활 감사생활하는 거 보면서, 저렇게 타력신앙만 하고도 인생을 기쁘게 생활하는데, 낙생활하는데, 우리는 자타력 병진하지 않느냐! 그러셨잖아요.
그러면 자력신앙은 뭐냐? 타력신앙부터 할까? 타력신앙은 뭐냐? 우주의 절대 타력을 믿는 거여. 내가 이해가 안 되고, 나보다 훨씬 큰 힘, 여기를 믿는 거여. 예를 들면 봄은 누가 오게 해? 전화했어? 봄 오라고? 전화한 사람? 근데 오잖아요. 지금 벌써 여름이여, 누가 오라고 했어? 그 위력, 절대적인 게 있다 이 말이여. 이거 옛날에 막연하게 신이라고 했는데, 동양에서는 이것을 이치라고 봤어요, 이치.
그리고 자력신앙은 뭐냐면 내 안에 내재되어있는 어떤 자성불이라고 할까. 내 안에. 그 어떤 사람이 도둑놈한테 쫓겼어요. 그런데 그 도둑놈이 칼을 가지고 있어요, 너 죽여버리겠다고. 그래서 도망가는데 딱 담을 만나 버렸네. 담을 만났어. 그래가지고 이거 바로 찔려 죽게 생겼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담인데, 에라이~ 이래죽나 저래죽나 모르겠다~~ 에라이 하고 막 탔더니 타고 넘어가버렸네. 나중에 맨정신을 차려가지고 거기를 가봤어. 아무리 넘으려해도 못 넘겠어.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 하고 있어요?
여러분들 안에 엄청난 그 능력이 있거든. 대종사님이 이걸 무궁한 보물과 무궁한 묘리와 무궁한 조화라고 했거든. 이걸. 그런데 우리 안에 그게 있는데 우리는 그걸 믿지도 않고 단련도 않고 쓰지도 않고 쓸줄도 몰라. 근데 급할 때는 그걸 씁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이 기도를 오롯하게 하다보면, 예전에 이런 일이 있어요. 우리 옛날에 심장병 어린이 돕기 싸이클 했어, 옛날에 다니셨던 분들은 알 거예요. 그러면 그거 엄청 위험합니다. 원불교학과생들 중에서 건강한 사람들로 먼저 뽑아요. 자기들이 자원해. 그러면 백일동안 특별히 더 잘 먹고 기도를 하면서 계속 운동을 시켜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싸이클 탄 우리 동기가 나한테 이야기를 해주더라고. 강원도 어디를 가다가 탁 넘어졌는데 딱 죽을 상황이였데야. 아 근데 안 다쳤어, 하나도 안 다쳤데. 보니까 전부 원불교학과생들은 기도하잖아, 또 자기 엄마는 죽어라 기도하고 있어. 그러니까 한번도 사고가 없었어요, 몇 년 동안 했는데. 여러분 진짜 그 드문 일이예요. 아주 위험한 일이거든요. 특히 경상도 가면. 경상도는 왜 이렇게 차를 급하게 몰아. 막 밀어버린데~ 자전거를. 대구나 부산가면 막 밀어버린데. 한번도 그 건이 없었어요. 그게 뭐냐 그게.
본인이 성심으로 하고 이 주변이 또 기도를 하다보니까 보호를 받는 거야 이게. 그러니까 우리 안에 무한한 능력이 있는 반면에 또 엄청난 타력이 있다 그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플러스 시키면 어떨 것 같아요? 타력을 잘 쓰면 그 타력 안에 자력이 있어. 그리고 자력을 잘 하면 그 안에 타력을 당기는 힘이 있어요. 왜냐하면 자타가 둘이 아니거든, 사실은. 그러니 우리는 자타불이(自他不二)를 본래 하나로 놓고 그걸 응용해서 쓰는 거예요. 얼마나 효율적이여.
타력만 쓰면 50, 자력만 쓰면 50. 그러면 자타력 병진하면 100일까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자타력 병진이 100이라면, 타력만 쓰면 20~30밖에 안 되요. 자력만 쓰면 20~30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자타력을 병진하면 100이 되어버려. 이해가 되려나 모르겠네. 20+20이여~ 그러면 40이여야 맞잖아. 그런데 100이 되어버린 다니까. 자타가 서로 상보적 관계로 시너지를 내 버린다고. 그러니까 100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타력 병진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하다.
신앙의 방법 들어가겠습니다. 신앙의 방법의 핵심은 뭐냐?
사실입니다 사실. 사실이야. 그래서 우리는 <사실적 도덕을 훈련한다>고 했잖아요. 사실이야 사실. 무엇을 어떻게 신앙할거냐. 사실신앙이다 사실신앙. 그러면 사실적으로 뭐뭐가 있냐? 그 신앙의 방법은 불공이잖아요. 그 불공에 있어서는 2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어요, 대종사님은. 하나는 뭐죠? 실지불공. 실지불공, 당처불공이라고 해요 이걸. 실지불공 당처불공이 있고. 또 하나는 뭐가 있어요? (진리불공) 그렇지! 진리불공이 있다고. 진리불공. 그러니까 진리불공은 무형한 전체에게 무형의 힘을 빌리면서 전체의 힘을 빌리는 거여. 당처불공은 그 대상에게 직접적으로 핵심적인 불공을 해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종사님의 불공하는 법에는 뭐라고 나와 있어요? 아 천지에게 당한 죄복은 천지에게 해라. 부모에게 당한 죄복은 부모에게, 동포에게 당한건 동포에게. 아 볼 이쪽이 염증이 생겨 부어올랐어. 그러면 어디를 째야 돼? 아 여기를 째야지. 그러죠? 그러면서 또 뭐여? 밥도 잘 먹어줘야 해. 잘 씻어주고 공기도 잘 통해주고. 그와 같은 이치여. 여기 아픈 데를 그대로 소독해주는 것이 사실불공 실지불공 당처불공이고, 그리고 전체적으로 또 관리해주는 것이 진리불공인 것이여. 내가 오늘 겁나게 쉽게 설명하는 건데.
그래서 그 생활은 어떤 생활이냐. 바로 인과에 대한 것을 하고, 실지 당처 진리불공을 같이 겸하기 때문에. 그것이 보은이죠. 진리불공도 보은이고 당처불공도 보인이거든. 그러면 실지로 결과가 어떻게 되냐. 그러면 그 사람은 감사생활인거여.
그러면 신앙의 순서를 제가 말씀을 드릴께.
첫째, 먼저 마음을 내야겠지. 입교를 하던가. 마음을 내. 그 다음에 법신불을 봉안해야지. 신앙의 대상을 봉안해야할 거 아녀. 그다음에 이제 봉안해놓고 조석으로 심고를 올린다든가 내가 신앙의 행위를 하는 거여. 공을 들이기 시작하는 거여.
그리고 더 들어가면 이제 뭐냐 있느냐. 바로 그 신앙의 핵심자리를 발견하는 내용이 들어가야 해. 그게 뭐냐? 신앙을 하면서 우리는 수행을 겸하라 했기 때문에 만법귀일의 소식을 먼저 발견할 줄 알아야 해요. 그게 이제 견성이예요 견성. 그리고 진공자리를 발견을 해야 해. 그리고 묘유 인과 자리를 발견해야 해. 이게 견성이에요.
그 다음에 뭐냐? 그 신앙의 대상인 일원상 자리를 지킬 줄 알아야해. 그 인과의 이치에 위배되지 않게 생활 속에서 내가 내 마음을 지키고 쓸거냐. 아까 그 봤으면 그 본 것을 놓치지 않는 거여. 양성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야. 그 본 것을 놓치지 않는 보림이라고 해. 이것이 양성이여.
그리고 실지로 경계 속에서 어떻게 힘에 맞게 하나씩 하나씩 써 나갈거냐, 이게 취사고 솔성이죠. 실행이예요 실행. 그래서 이것이 이제 진리와 생활이 하나로 맞춰서 써야해. 이것을 대조라고 해요. 맞춰 써야해. 그래서 내 생활이.
그래서 대종사님이 이걸 어떻게 표현했냐. 야 그거 간단하다. 니 생활을,, 니 불공하는데 있어서는 훈련으로 해라, 정기 상시로. 그리고 밖으로는 보은 불공을 해라. 힘에 맞게 정신 육신 물질 간 불공해라. 그리고 그 불공 중에 제일 좋은 것이 있다. 그게 전법교화다. 왜 대불공이다. 교화 대불공이라했어. 그것이 정말 큰 불공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이게 마음도 안정이 되고 복과 혜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냐? 낙원세상이 된다. 아까 평등 평화 낙원세상이 된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 복혜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이 세상은 보다 낙원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래서 그 결과는 어떻게 되냐? 업력이 소멸되요. 이렇게 하면.
기도만 해도요 업력이 녹아납니다, 업력이 녹아나. 인연복이 좋아지죠. 복 중에 최고라는 인연복이 얼마나 좋아지겠어. 그래서 아까 개인은 행복을 언제? 그때 그때 자기 힘에 맞게 행복을 만끽하면서 살 수 있어. 나중의 행복이 아니라, 그때 그때 그때. 그리고 이 세상은 평화의 세상이 되고 그리고 더 들어가서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포부와 경륜 비전 또는 목적 또는 서원 이것을 이룰 수 있다는 거여.
여러분 한생을 살면서 자기의 포부와 경륜, 일종의 서원을 이루고 산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이 신앙을 통해서 이룰 수 있다는 거예요. 이룰 수 있다. 아니면 좀 길게 잡아서 다음생까지 이루시던가. 다음생에 사람 몸 받아서 이 회상 만나서 어쩔랑가 또 모르니까, 가능하면 이생에 최대한 하시라. 장담하면 좋은데 장담 못하니까. 아시겠어요?
하나만 더하고 끝마칠게요.
우주만유의 본원을 제가 아까 실재라고 했어요. 이게 뭐냐? 우주만유는 뭐죠? 우주만유의 실재는 뭐죠? 만법(萬法)이예요. 우주만유의 본원은 뭐죠? 귀일(歸一)이여. 감사합니다.
첫댓글 타이핑 공장장님...♡ 감사합니다^^
ㅋㅋㅋ 이렇게 즉각 답변을.ㅎ
니랑 나랑이 가장 한가한 여인같옹. 푸힛.ㅋㅋㅋㅋ
@이제선 맞아용~~제 한손엔 스맛폰이 붙어있어용ㅋㅋㅋ
@나인명 둘이라 외롭지 않아요.ㅋ 땡큐 인명.ㅎㅎㅎㅎ
@이제선
@나인명
둘이 잘노시네요 ㅋㅋㅋ
법문 타이핑 공양 참 쉽지 않지만 큰 공덕이 됩니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