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의 욕망을 좆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무심코 연극의 향수가 뒷덜미를 잡아 끌었다. 대학 1학년때 우연히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에서 세미가가 있었는데, 그때 로비에서 쉽게 독파할 수 있는 잡지가 있었다. 그 잡지 뒤에 <단원 모집> 공고는 내 호기심을 자극하였고, 나는 오디션을 치르는 대열에 뻘줌하게 서 있었다. 오디션을 본 뒤에야 알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영과 학생이라는것을 알았다. 나는 "모 아니면 도" 라는 심정으로 내 순서를 기다렸고, 연출선생님이 미쳐 오더하지도 않았던 그 찰나에, 시키지도 않는 트롯 하나를 구성지게 부르고는, 전쟁터에서 아이를 잃은 젊은 아기 엄마역을 해 내서 주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1차에 합격했다는 연락이 왔고, 분장 선생님을 2차로 면접을 치르러 갔다. 그 때의 배짱이 어디서 나왔을까... 분장 선생님은 지긋이 나이 드신 분이었다. 그의 패인 주름 하나 하나가 연극인으로써 삶을 보여주는것처럼........
2명의 신입단원 중, 내가 있었다. 매일같이 선배 심부름을 하고, 벽에 포스터를 붙이고, 무대를 청소하고, 라면을 끓였다. 틈틈히 선배들이 리딩을 하는 모습을 뒤에서나마 지켜보고, 흉내도 내 보고........정작 리딩 한줄 하지 못한 채, 난 이모의 성화에 못이겨, 내 꿈을 접어야 했다. 지금 같으면야, 내 인생을 걸만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논리있게 설득했는지는 모르나, 내 근본적인 우유부단함이 내 뻔뻔한 용기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나 보다.
그때 이후로, 무대를 향한 나의 미련은 그 수위를 철벅 거렸다. 가슴찡한 뮤지컬을 보거나, 연극 한편을 보면, 칼로 가슴을 후비고 지나가듯, 마음이 너무도 쓰라렸다. 이루지 못한 그 때의 꿈은 오래된 사진만큼이나 꺼내 볼 수록 울컥이는 활화산이었다. 고달프거나, 어떤것을 이루어 환희를 느낄 때, 나는 항상 부족함과 갈증을 같이 느꼈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꿈꿨던 어떤 세상에 대한 갈증이자, 배고픔이자, 질긴 미련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끈을 놓지 못한 채, 삭아져 가는 썩은 동앗줄 만큼이나 그것을 부여잡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자기 삶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자기 삶에서 멀치감치 발을 옮기고 <견자>가 되면, 자신의 삶 그 자체도 한편의 연극이 된다. 나는 곧잘 내 삶의 관중이 되 보려고 노력한다. 내 안에서가 아니라, 내 밖에서 내가 더 쉽게 이해되는 일이 경험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나라는 틀 안에 갖혀 제대로 나를 볼 수 없는것이야 말로 슬픔이기 때문일게다.
주부들로 이루어진 순수 아마추어극단 <모자이크>는 청춘의 시절에 못다 이룬꿈을 이룰 수 있는 고마운 극단이었다. 나는 막내로 신고를 마치고, 첫 작품부터 비중있는 역을 맡게 되어,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4개월여 매일 다섯시간을 연습에 매달렸다. 에어콘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 연습실에서, 열두명이나 되는 단원들이 구슬진 땀을 흘렸다. 나의 첫 데뷔작품은 고전 해학극으로, 결혼의 풍습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맹진사댁 경사> 이다. 나는 여기서 맹진사를 강하게 질타하는 <맹효원>의 역을 맡았다. 남자역 그것도 60대의 남자 역이고, 더군다나 내가 꾸짖는 맹진사는 실제로 65살의 언니였다. 그러니 30대인 그것도 막내 단원인 내가, 맡언니를 야단치는 역을 맡았으니, 너무도 아이러니 하였다.
나는 사개월 동안 진정한 <맹효원>으로 살았다. 상담이나 강의 도중에도 맹효원의 말투가 서슴지 않고 나왔었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도 경우없이 구는 젊은 애들을 보면, 왠지 내가 꾸짖어야 할 의무가 불끈 불끈 솟아남을 몇번이나 느꼈다. 몰입이라는것이 이런것인가........
그렇게 혹독한 연습을 통과하니, 무대가 차려졌다. 연습이나 리허설때는 떨지 않으리라 몇번이고 다짐을 했으나, 막상 공연시간이 다가오자, 가슴이 방망이질 쳐서 한참을 고생했다. <여긴 연습실> <지금은 연습중> 이라는 주문을 연신 외며, 무사히 첫 공연에 별다른 실수 없이, 끝내고 커튼콜때 나름대로 춤을 추며 인사하고, 암전이 되고 관객들에게 고마운 인사를 하러 무대뒤로 빠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에.......내가 그렇게 바라던, 아주 통쾌하고, 짜릿하고, 시원하고, 뭉클하고 뜨거운 것이 덩어리가 되어 목 뒤에서 솟아오름을 느꼈다. 그것은 너무도 뜨거워서 내가 혹시 이것에 데이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까지 생길 정도로 그 느낌은 아주 강렬했다. 마치, 마약을 처음 맛본 것처럼......................전율을 느꼈다.
이러한 마약을 겁없이 나는 마셔 버렸다. 암전되고 무대를 빠져나오는 그 순간에 느끼는 그 감정의 마약을 나는 즐겁게 마시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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