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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존경하면서도 무척 무서워하는 문재文才가 있습니다. {양무리 마을}에서 ‘철수’라는 별명으로 ‘논리를 따르는 글쓰기’를 하셨던 ‘어울림’ 님이십니다. ㅡ{바른 믿음} {독자 마당}에 ‘옳은 믿음’ 님이 쓰신 글들을 읽으면서 ‘아, 카멜레온 어울림 님이시구나.’ 생각했습니다.ㅡ 그런데 또 제가 무척 무서워하는 문재가 생겼습니다. ‘닉네임’ 님이십니다. 회원수 몇 안 되는 {개혁신앙 푸르내}에서 별명 ‘TR-RE’를 쓰신 닉네임 님을 만나게 됐는데, ‘논리를 따르는 글쓰기’로 제 글들을 반론하시는 TR-RE 님을 보며 기뻤습니다. ‘혹시 어울림 님 아니신가?’ 하는 생각이 들어 무섭기도 했지만 기뻐한 것입니다.
ㅡ정치 성향에서 결코 극우파를 지지하실 수 없는 어울림 님이 {개혁주의 마을}에서 극우파와 같은 자신의 정치 성향을 드러내신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페북} 활동을 한 얼마 뒤였습니다. 저에게 페친 신청은 하지 않고 저를 ‘팔로우’ 하신 분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분 이름을 보고 ‘어울림 님이시구나.’ 생각한 저는 그분 담벼락에 가 봤습니다. 정치와 관련된 글이 많았는데, 저와 같은 이른바 “좌파” 정치 성향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뒤 {개혁주의 마을}에서 극우파와 같은 정치 성향을 드러낸 어울림 님 글을 보게 됐습니다. 저는 이를 ‘{페북}에서 나를 팔로우한 그분이 어울림 님이시면, 나한테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마음에서 나온 전법, 어울림 님의 카멜레온 전법이구나.’ 생각했습니다. ㅡ
https://cafe.daum.net/reformedvillage/D3MR/114
다음은 위 링크 글에서 저와 닉네임 님과 나눈 대화(토론)입니다. 들여쓰기 없이 ‘-’를 써서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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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 朴埰同 (2022.06.06.22:43)
https://cafe.daum.net/reformedvillage/D3MR/98
위 링크 글에서 “결정 성화(물론, 중생과 중복하는)는 우리에게 마음과 의지와 애정에 대한 기본적인 새로운 전환을 제공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욕구를 가진다.”는 존 프레임 목사님 말씀에서 “우리에게 마음과 의지와 애정에 대한 기본적인 새로운 전환을 제공”은 무엇을 뜻합니까? 칭의 전 회심이나 칭의 후 점진성화를 뜻합니까?
이 문장을 ‘중생은 우리에게 마음과 의지와 애정에 대한 기본적인 새로운 전환을 제공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욕구를 가진다.’로 바꾸면, 안 됩니까?
닉네임 (2022.06.07.09:13)
저도 이 부분을 여러 번 봤는데,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프레임 목사님은 여기서 ‘reorientation’이라는 말을 쓰셨는데, 이 책 전체에서 ‘reorientation’이라는 말은 결정 성화를 설명할 때 두 번 말고는 쓰신 적이 없습니다. 중생 부분을 읽어봐도 이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중생과 겹친다(overlap)는 말도 정확히 무슨 의미로 쓰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프레임 목사님의 생각을 추적할 또 다른 근거는 “41. 중생과 회심”의 첫 대목인데, 여기서 ‘객관적, 주관적’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확정 성화’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시지 않아, 프레임 목사님의 정확한 생각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책을 읽는 원칙은 ‘좀 더 분명한 구절을 가지고 해석을 하자’입니다. 구원 서정을 가장 분명히 밝히신 분이 레이몬드 목사님이시고, 저는 그래서 여태껏 레이몬드 목사님의 틀이 맞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현재 제 생각은, 레이몬드 목사님이 제시한 구원 서정이 옳다고 생각할 근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계 님과 같은 반론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사계 님의 주장에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닉네임 (2022.06.07.09:34)
그리고 제안을 하나 드리자면, 중생을 “초기 성화”라고 표현하시면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실제로 토마스 보스턴 목사님이 중생을 설명할 때 쓰신 표현입니다.
1. Initial sanctification, which is the implanting of the seeds of grace in the soul at first, and is the same with regeneration, 1 John 3:9 wherein the Spirit of Christ comes into the man's heart with his graces, and takes possession of him for God. The whole soul is cast into a new mould and frame, and the image of God is drawn anew upon it. <An Illustarion of the Doctrines of Christian Religion>
번역본이 없어 영어로 쓴 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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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머레이 목사님 중생론을 이단시한 피터 마스터스 목사 친구로서 로버트 레이몬드 목사님을 무척 낮게 평가하며 신뢰하지 않는 저는 ‘로버트 레이몬드 {최신 조직신학}’을 읽어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로버트 레이몬드 {최신 조직신학}’은 저에게 없는 책입니다. 바꿔 말하면, 닉네임 님은 “구원 서정을 가장 분명히 밝히신 분이 레이몬드 목사님이시고,” 하셨지만, ‘두 번 순간 중생’을 주장하며 존 머레이 목사님 ‘단회 순간 중생 시 회심론’을 이단시한 피터 마스터스 목사 연중론을 분별하지 못한 채 오히려 존 머레이 목사님 중생론을 공격하셨다는 점에서 ‘로버트 레이몬드 {최신 조직신학}’을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ㅡ참고로, ‘로버트 레이몬드 {최신 조직신학}’을 {페북}에서 반값으로 내놓으신 목사님께 주문해 둬, 얼마 뒤 소장하게 됩니다.ㅡ
“중생을 ‘초기 성화’라고 표현하시면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하셨습니다. ‘초기 성화’도 무척 좋은 용어입니다. ㅡ‘초기 성화’는 연중론 용어 ‘초기 중생’을 떠오르게 하는 용어입니다.ㅡ 중생을 ‘초기 성화’로 표현해도 무방합니다만, ‘초기 성화’는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 ‘존 머레이 {조직신학 제2권} 박문재 역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8, 증쇄 판)’ 298쪽에서 말씀하신 “확정 성화에서 매우 특징적인 것”, ‘확정 성화의 독특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용어입니다. 즉,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 “중생은 확정 성화에서 극히 중요한 요소이지만, 확정 성화를 ‘중생’이라는 주제에1) 포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 까닭은 확정 성화에서 매우 특징적인 것, 즉 그리스도 죽음과 우리 연합에 따른 죄에 대한 죽음, 또한 그분 부활과 우리 연합에 따른 새 생명은 성령에 의한 중생으로 적절히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신 ‘확정 성화의 독특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용어입니다.
게할더스 보스 목사님께서 “종말은 구원을 앞선다.”는 명언을 남기셨습니다. 이 명언을 저는 ‘종말은 천지창조를 앞선다.’는 말로도 이해합니다. 그런데 ‘확정 성화’를 “근본根本 성화”로 말씀하는 개혁신학자도 계십니다. 안토니 후크마 목사님 제자이신 예장 고신 박영돈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확정(결정) 성화(Definitive Sanctification)’에서 ‘definitive’ 뜻 하나는 ‘최종’입니다. 그러므로 ‘근본 성화’라는 용어가 ‘중생’에만 적용하는 용어라면, 이 역시 ‘확정 성화의 독특성’을 적절하게 설명하는 용어가 될 수 없습니다. ㅡ물론,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택함)’을 받은 우리가 최종으로 완전 성화(영화榮化)의 은혜를 누리는 때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몸과 같은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는 종말입니다.ㅡ 즉, 20세기 개혁신학 보물로서 ‘Definitive Sanctification 진리’는, 예장 합신 송인규 교수님께서 “천재”로 높이신 20세기 개혁 신학의 거목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 “Definitive Sanctification” 말을 써서 확립하신 ‘확정(결정, 최종) 성화’ 진리는 천지창조를 앞서는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에 따른 ‘종말까지 결코 상실할 수 없는 생명의 연합’을 찬란하게 빛나게 하는 용어입니다.
비록 완독은 아니었습니다만, ‘존 머레이 {구속론} 하문호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83)’가 출간되자마자 읽었던 제가 ‘확정(결정) 성화’라는 용어를 처음 알게 된 때는 ‘피터 마스터스 {영혼의 의사} 손성은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 3쇄 판)’을 텍스트 비평을 하려고 ‘존 머레이 {구속: 구속 성취와 그 적용} 장호준 역 (서울: 복있는사람, 2011)’을 구입한 2011년 12월이었습니다. 이 책에 실린 ‘김광열 <해설의 글>’에서였습니다. 다음은 ‘존 머레이 {성경과 기독교 윤리} 김남식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0)’ 248쪽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개혁신앙 푸르내}에서 닉네임 님에게 소개했던 글입니다. 배경색은 제가 칠합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죽고 소생하셨을 때 정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즉, 신자들은 참으로 갈보리와 삼 일만의 부활이라는 단회 사건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신자는 신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은 아니다. 또 이 죽음과 부활이 그들을 사실상 신자로 만든 것이 아니란 것도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가 신자를 효과 있는 은혜의 작동 전에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로 인식할 수 있고 또 인식해야만 하는 다른 측면들이 있다.
고넬료가 주목해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돼 기억하신 바가 됐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행 10:4~6)
또 두 번째 소리가 있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행 10:15)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봤다.” 하거늘, (행 11:13~14)
로마교는 사도행전 10장 4절~6절을 내세워 ‘행함구원론’을 주장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의義(선행)를 행한 고넬료’를 보시고 그 행함이 기특해 ‘그 행함(공로)의 대가代價’로 고넬료에게 구원을 주셨을까요? 아니면,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받은 고넬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시’에 깨끗함을 받은 자였기에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를 흠향하시며 구원을 주셨을까요?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는 ‘확정 성화’를 설명하시면서 ‘객관적인 역사의 사실, 실제 역사에서 일어났던 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시에 창세 전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아났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겸비謙卑)한 마음으로 이웃 사랑이라는 의義(선행, 구제)를 행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에 힘썼던 백부장 고넬료(행 10:1~2), ‘오실 그리스도’를 믿으며 ‘의義의 완전한 법으로서 십계명’을 실천하는 경건한 생활을 함으로써 영생(구원) 얻기를 바란 고넬료를 하나님께서는 언제 깨끗하게 하셨을까요?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받은 자로서 고넬료를 ‘객관적인 역사의 사실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시에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공생애 시대 사람인 고넬료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시에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였을까요? 아니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시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자로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엡 2:1~3)이었을까요? 다음은 존 머레이 {조직신학 제2권} 302쪽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몇 가지 점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것이 두드러지는 구절들 가운데 하나에서, 바울은 그 동일한 사람들이 허물과 죄로 죽었으며, 그때 이 세상의 풍속을 좇아 행했으며, 전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해, 다른 이들과 같이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한다(엡 2:1~4). 그뿐만이 아니다. 바울은 그들이 허물로 죽었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나아가, 갈보리와 무덤으로부터 부활이라는 역사의 사건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둠의 권세로부터 생명, 자유, 화평의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질 때마다 계속적으로 수행되는 변화들을 표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타내 보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백하다.
사도행전 11장 14절2)은 고넬료가 중생한 시점, 구원을 받은 시점, “구원받을 말씀”을 들은 시점을 베드로 사도에게 복음을 들었을 때로 증거합니다. 즉, ‘객관적인 역사의 사실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시에 실제로 깨끗함을 받은 고넬료는 ‘그리스도 구속 사역의 성취로서 그 객관적인 역사의 사실’의 적용, 성령께서 그리스도 부활의 생명(의義의 생명)을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받은 사람으로서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자’에게 겨자씨 형태로 심으셔서(주입하시셔) 살리시는 중생을 베드로 사도에게 복음을 들으면서 체험합니다. 이와 같이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 확립하신 ‘20세기 개혁신학의 보물로서 확정 성화 진리’는 연중론만이 아닌, 로마 천주교 ‘행함 구원론’이나 알미니안 신학 ‘행함 구원론’이나 새관점 신학 ‘행함 구원론’을 성령의 검으로 베어 버릴 수 있는 참 은혜로운 진리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얻게 하려 함이라.
(요 10:10 하)
“생명을 얻게 하고”에서 저는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순종으로 얻으신 의義의 씨인 확정 성화의 씨로서 “하나님의 씨”(요일 3:9)’를 성령께서 죄와 허물로 죽은 죄인,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에게 심어(주입해) 살리시는 ‘중생’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풍성하게 얻게 하려 함”에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엡 4:13)를 향해 가는 점진성화, 실패를 통한 점진성화 시 누리는 생명’과 종말의 ‘영화로운 생명’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존 오웬 {칭의론} 박홍규 역 (서울: 처음과 나중, 2020)’에 적혀 있듯이 우리가 중생 시에 받는 생명은 ‘영화로운 생명’3)입니다. ‘종말(최종)을 담보하고 있는 생명’입니다. 비록 ‘새들이 깃드는 울창한 나무로 자라야 할 겨자씨’와 같은 생명이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씨(요일 3:9)로서 그 생명은 성자 하나님이시지만 마지막 아담으로 성육하셔서 부활로 우리 맏형님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순종으로 얻으신 ‘의義의 생명’이기 때문에 ‘영화로운 생명’입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성경 지식에서나 신학 지식에서나 논리력에서나 예장 합동 꼴뚜기파 목사들을 뛰어넘지 못하는 염지웅 목사님은 여전히 {페북} 자신의 담벼락에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과 존 머레이 목사님을 저격하는 글을 쓰셨는데, 언제쯤 ‘확정 성화 진리’를 이해해 진정한 ‘카이스트(KIST)’ 영재로 거듭나실까요?
이 글이 닉네임 님 의문(반론)을 해소하는 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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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문본에는 이 문장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중생은 확정 성화에서 극히 중요한 요소”라는 존 머레이 목사님 말씀에 비춰 “주제에” ‘만’을 넣어 ‘주제에만’으로 읽으면, 글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2) 이 구절은 임진년 2012년 7월 초에 연중론이 무엇인지 모르시던 한아름 님이 {양무리 마을}에 중생에 관한 글, 존 머레이 목사님 제자이신 존 프레임 목사님 글을 올리심으로써 촉발된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 때 ‘홀리조이 손성은 목사님과 로빈슨 크루소 윤영상 목사님 대(VS) 저와 라마드 목사님이 벌인 토론’에서 별명 ‘새 삶’을 썼던 제가 ‘연중론’을 베어 버리는 성령의 검으로 썼던 구절입니다.
3) https://cafe.daum.net/reformedvillage/D1OV/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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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 朴埰同 제가 머레이 목사님 로마서 주석 번역본이 있었는데, 깜빡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 남겨드립니다.
"죄의 권세에서부터 구출을 표현하는 이 법정적인 국면은 우리가 꼭 이해해 둘 필요가 있다. 그 법정적 국면은 칭의 속에 들어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성화의 기초에 놓여 있는 사건 속에도 들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죄의 세력 위에 하나의 심판이 집행된 것이다(요 12:31 참조). 신자 편에서 볼 때 이 세력에서의 구출은 이 심판의 효험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 바울이 나중에 롬 8:1, 3절을 사용한 법정적 용어인 "정죄", "정죄하다"는 말의 해석을 가능케 해주며, 또 이 법정적 용어는 그리스도께서 죄의 권세에 관하여 영구히 결정적으로 이룩하셨던 일을 지적하며(8:3),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죄에게 집행된 심판으로 인해 이 권세에서 우리가 구출된 사실을 지적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8:1)."
<로마서 주석>, 롬 6:7.
@닉네임 댓글이 백 개가 넘었군요.
‘구원의 서정’이 시간순을 배제한 논리(인과관계) 순서라는 것은, 안토니 후크마 목사님께서 {개혁주의 구원론}에 하신 비유, “중생: 수도꼭지를 튼다. 회심: 수도꼭지를 틀자마자 수돗물이 나온다.”는 비유에서 보는 대로 ‘동시성’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동시성’을 앞세워 ‘구원의 서정’을 알미니안 행함구원론 ‘구원의 서정’인 ‘회심 –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자에게 확정 성화의 씨인 하나님의 씨를 심어 살리시는 중생’으로 잡을 수 없습니다.
제가 “‘중생 – 회심 – 칭의’의 ‘동시성’을 잘 안다면, ‘확정 성화’를 ‘칭의’ 뒤에 둬도 무방합니다.” 했습니다. 그런데 ‘확정 성화’를 ‘칭의’ 뒤에 둠으로써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중생 시 내재하는 의義(확정 성화)’를 이야기하신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과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을 연구하신 수많은 신학 교수님을 “사탄의 전령”으로 이단시한 염지웅 목사님이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닉네임 아무튼 ‘중생(확정 성화) – 회심 – 칭의’의 ‘동시성’은 무척 중요합니다. ‘살아나자마자 칭의를 받음으로써 칭의 시 선을 행한 것이 전혀 없음’을 드러내는 ‘동시성’, 강조하고 강조해야 할 이 ‘동시성’ 때문에, 존재할 수도 없는 ‘구원의 서정’이지만, 이른바 “임신: 초기 중생”과 “출산: 완전 중생” 사이에 “임신 기간: ‘믿을까, 말까? 회개할까, 말까?’ 하는 태아의 분투에 따른 회심”을 둔 연중론은 ‘사이비 사설’임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죄의 권세에서부터 구출을 표현하는 이 법정적인 국면”에서 독해할 수 있는 것은 ‘존재의 변화로서 중생(확정 성화)’이 아닌 ‘신분(지위)의 변화로서 칭의’입니다. 다음은 닉네임이 옮기신 글 바로 앞에 있는 글입니다.
@닉네임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는 문구는 칭의 법적인 관섬에서 볼 때 법적 의미를 지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문맥이 죄의 세력에서 구출을 다루므로 그것은 분명 죄를 ‘단념’하는 일이다. 죄의 지배력과 결정적인 결별은 재판관이 피고인에게 무죄판결을 내리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렇게 무죄 판결을 받은 자는 죄가 더 이상 주관하지 못한다.》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에서 “죄에서 벗어나”는 ‘중생’을 뜻합니까? 아니면, ‘칭의’를 뜻합니까?
“무죄 판결을 받은 자는 죄가 더 이상 주관하지 못한다.”는 어떻게 독해해야 할까요? 저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아 죄의 권세에서 해방돼 죄로부터 자유로운 성도를 죄의 권세자(검사檢事)인 사탄이 “너는 죄인이다.”고 더 이상 정죄하지 못한다.’로 독해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카나리아 朴埰同 예. 어느새 백 개가 넘었네요.
'중생 시 내재하는 의'는 '초기 성화'이지 '확정 성화'가 아닙니다. 염 목사님 의견은 '초기 성화'라고 말함으로써도 충분히 반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계 님의 오독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습니다. 칭의는 죄의 '죄책'에서 건져 주시는 것이지, 죄의 '권세'에서 건져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머레이 목사님은 로마서 6장이 '성화'를 다루고 있다고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죄의 권세에서부터 구출을 표현하는 이 법정적인 국면”은, 바로 그 다음 문장에서 보여주듯이, "성화의 기초에 놓여 있는 사건", 즉 '확정성화'의 "법정적인 국면"을 말합니다. 사계 님의 해석이 맞다면, 머레이 목사님의 다음 문장, "그 법정적 국면은 칭의 속에 들어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성화의 기초에 놓여 있는 사건 속에도 들어 있음"은 쓸데없는 문장이 되겠지요. 사계 님이 최초의 선입관을 걷어 내시기 전까지 오독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사계 님이 오독을 멈추실 때까지 제 비판도 멈추지 않겠지만요.
"이 성화는 무엇인가? 신약 성경에서 로마서 6:1-7:6보다 이것을 잘 가르쳐 주는 구절도 없을 것이다"(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0쪽)
@카나리아 朴埰同 "죄의 지배력과 결정적인 결별"은 영어로 "decisive breach with the reigning power of sin"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말할 것도 없이 머레이 목사님이 '확정성화'를 나타낼 때 늘상 쓰시는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그 문장도 '확정성화'의 '법정적 국면'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The decisive breach with the reigning power of sin is viewed after the analogy of the kind of dismissal which a judge gives when an arraigned person is justified." 그리고 원문과 번역문의 의미도 약간은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원문에서는 확정성화의 법정적 국면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 좀더 뚜렷이 드러납니다.
또 다음 글에서도 역시 칭의에 대한 어떤 암시도 없습니다.
"(3) 죄에 대한 죽음은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 죄의 몸이 멸한 것, 죄의 지배력으로부터의 옮김과 관련되어 있다(롬 6:6-7).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새사람이다"(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303쪽).
@카나리아 朴埰同 끝으로 이 한 문단이 사계 님의 의견을 단칼에 베어 버립니다.
"첫 번째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바울의 가장 놀라운 진술들 중 하나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그것은 로마서 6:7이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의롭다 하다'라는 용어와 관련된 바울의 일관된 용례는 이 경우에도 통용되어야 하므로 이 구절은 성화가 아니라 칭의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의롭다 하다'의 사법적 의미와는 이질적인 의미를 주장하는 것은 근거 없는 것이라는 점은 인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동일한 용어를 동일한 문맥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바울의 특징이며, 여기서 바울이 특히 <칭의와 무관하게> 이 용어를 사법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용어의 정확한 의미는 개개의 문맥 속에서 결정되어야 하는데, 이 경우에 바울이 <칭의가 아니라 성화의 영역에 속한 것> 즉 죄의 종 삼는 권능으로부터의 옮김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9-300쪽).
다시는 그릇된 반론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줄입니다.
@닉네임 바로 이 문단이 저를 지지하는 문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