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봉투를 뒤지면서 이웃의 취향을 파악하는 20대 남자? 어찌보면 단순한 정신병자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가 하성란(36)은 이 남자를 통해 철저히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현대인들의 소통 단절을 그리고자 했다.
도시인들의 고독을 밀도 있게 묘사한 하성란의 문제작 '곰팡이꽃'은 99 년 동인문학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차원 높은 영상미학과 작가주의를 표현하는 KBS 1TV 'TV문학관'에서 소 설 '곰팡이꽃'의 강렬한 소통 욕구를 담는다.
한 해를 정리하는 발걸음이 분주해질 무렵인 28일 밤 11시 전파를 탄다 . 드라마는 원작과는 달리 남편이 음란 사이트에 중독돼 육체적 사랑을 꺼리는 섹스리스 커플 이야기가 첨가된다.
가족과의 단절, 이웃과의 단절, 경제ㆍ사회적 단절로 이어지는 일관성 있는 주제의 상승 효과를 통해 모래알 같은 현대인의 파편화된 삶을 세 밀하게 들여다본다.
치밀한 묘사를 위해 고화질(HD) 화면에 디지털 5.1채널 사운드, 실험성 짙은 촬영기법을 동원했다.
또 고독에 갇혀 있는 주인공들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 수중카메라, 애 니메이션 등 독특한 영상을 곁들인다.
대하드라마 '무인시대'를 공동 제작하고 있는 김형일 PD가 연출을 맡았 다.
도시의 일상을 냉정하고 정밀하게 묘사하는 소설가 하성란은 새로운 소 설 경향을 주도하는 작가. 대표작으로 소설집 '루빈의 술잔'과 장편 ' 식사의 즐거움' 등이 있다.
소설 속에서 TV 드라마로 걸어나온 주인공 기훈은 KBS 주말 연속극 '진 주목걸이'에서 부잣집 말썽쟁이 아들로 출연중인 남궁민이 연기한다.
카드회사에서 근무하는 평범한 샐러리맨 기훈은 옆집 쓰레기를 뒤지며 그들과의 소통 욕구를 채우려 한다.
기훈의 옆집 여자 애인으로 사채 빚에 시달려 끝내 자살을 선택하는 용 재 역은 이두일이 맡는다.
30대 맞벌이 주부 은숙은 탤런트 박현숙이 연기한다.
통신회사 상담원 으로 남편의 음란 사이트 중독에 괴로워하지만 끝내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다.
음란 사이트 중독자 남편 역은 이얼이다.
보안 경비업체에서 일하는 그 는 부인을 사랑하지만 육체적 사랑을 꺼린다.
얼핏 봐도 사연이 기구한 이들은 소외감을 견디기에는 너무 나약하다.
기훈은 매일 이웃 쓰레기 항목을 적어나간다.
'4월 23일 오비라거 맥주 뚜껑, 풀무원 콩나물, 신라면, 코카콜라, 참나무통 맑은 소주…' 식으 로 수첩에 꼼꼼하게 적어나가다 보면 버린 사람의 취향과 생활패턴, 성 격까지 손에 잡히는 듯하다.
쓰레기 속에는 그 사람의 진실과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고 믿 는다.
기훈은 얼마 전 깨진 부엌 살림이 잔뜩 들어 있는 쓰레기 속에서 가위 로 두 동강이 난 신용카드를 발견했다.
쇼핑광이었을 여자와 그로 인해 시작됐을 부부싸움, 가위로 카드를 잘라버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 다.
<전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