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염색
남녀공학의 학교에 있다가 여학교로 발령이 났다. 14년 전에도 이 학교에서 근무한 적이 있긴 하지만, 여고생들만 있는 학교라서 약간의 긴장이 되었다. 전에는 그래도 40대 초반의 젊다면 젊은 나이였는데 지금은 50대 후반의 늙은 나이가 되었다. 거울을 보고 있노라면 ‘세월여류(歲月如流)’라는 말이 절로 실감이 간다. 요 근래 몇 년 사이에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 구레나룻과 앞이마를 덮는 머리가 특히 심하여 거의 흰 것과 검은 것이 반반은 될 듯싶었다.
집사람이 머리 염색을 제안해 왔다. 한창 커가는 여고생들 앞에 희게 센 머리털로 서는 건 예의가 아니다. 요즘 젊은 애들은 늙은 사람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젊게 보이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흰머리를 검게 염색하자는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말도 일리가 있을 듯 했다. 내가 한창 젊었을 때는 인상만 조금 찌푸려도 아이들이 겁을 먹고 말을 들었는데, 최근에는 인상을 쓰고 호통까지 쳐도 반응이 영 예전만 못하다. 겁은커녕 웃으며 애교까지 떠는 애들도 있다. 이건 마치 자기 할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다. 요즘 교사에게는 젊음이 실력이고 또 젊음이 무기인 듯했다.
나는 고민 끝에 염색을 하기로 했다. 평생 처음으로 하는 염색이었다. 비닐을 목 주위로 둘러 집게로 고정시켜 늘어뜨린 채 의자에 앉자, 집사람은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검은 염료를 찍어 머리에 바르기 시작했다. 역한 염료의 냄새가 코끝을 자극해 왔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이렇게까지 하며 염색을 해야 하나하는 회의감도 잠깐 있었지만, 끝내고 거울 앞에 서서는 기분이 싹 달라졌다. 반백(斑白)은 어느새 흑발로 되어 있었다. 나는 중년의 말기쯤에 있다가 청년기로 연령층의 이동을 한 것이다. 비록 머리털에 한해서이긴 하지만……. 이 맛에 사람들이 비싼 돈을 지불하면서 염색을 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나는 염색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하는 첫날은 담임과 학생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진다. 규정상 염색이 안 되는데도 한 반에 서너 명은 머리가 노랗거나 붉었다. 그 원색의 머리를 다시 흑발로 돌리는 데는 많은 회유와 꾸중과 시간이 필요했다. 이때 내가 염색을 한 학생에게 들려주는 말은 대충 이러하다.
금발의 유럽 여성이 흑발의 동양인을 닮고자 검은 색으로 염색하는 경우가 있겠는가? 또 코가 큰 유럽 사람이 동양인을 닮고자 코를 두루뭉술하게 깎아내릴까? 그런 일은 없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건 과거 세계 문화의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 금발과 높은 코를 가진 유럽의 국가가 흑발과 낮은 코를 가진 동양의 나라보다 진보된 문명을 가졌고, 그 유럽인들이 동양인을 식민지로 지배하는 구조 속에 있었다. 이러한 장기간의 역사적 경험은, 백인은 우월하고 황인과 흑인은 열등하다는 의식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는 것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결국 인종적 열등감에서 기인한 것이다. 만약, 과거 한때 전 세계를 제압했던 징기즈칸과 같은 영웅이 계속 등장해 동양인이 천 년 이상 전 세계를 지배하며 우수한 문명을 향수하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도 우리가 지배하고 있는, 유럽인들의 금발을 부러워하며 노랗게 염색하려 안달이 났을까? 이런 논리로 나는 염색한 학생들의 마음을 돌리려 했었다.
나는 지금 반백을 흑발로 염색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흑발을 금발로 염색하는 것과 백발을 흑발로 염색하는 것은 본질적인 면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흑발을 금발로 바꾸는 것이 인종적 열등감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백발을 흑발로 바꾸는 것은 연령적 열등감이 아닐까? 인종적 열등감은 주체성이 없는 좋지 않은 것이지만 연령적 열등감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닌 것인가? 이건 결국 오십보 소백보(五十步笑百步)로 자기합리화에 다름 아니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칠순을 넘긴 국회의원도 흰머리라고는 한 올도 보이지 않는 완연한 흑발이다. 팔순이 된 대통령도 흑발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가정을 해 보자. 칠순이 된 사람이 국회의원 선거에 나오면서 염색하지 않고 백발의 모습 그대로 선거벽보용 사진을 찍었다면 그 벽보를 본 유권자는 어떤 생각을 할까? 흰머리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 솔직한 후보로 평가할까? 아니면, 반대로 '저리 늙은 사람이 무슨 기력이 있어 정치를 할까? 임기는 제대로 채울까? 정치를 그만둘 때가 됐는데 욕심이 과하시네.'라고 생각할까? 모르긴 하지만 대개는 부정적으로 볼 것이다. 여기에 백발을 흑발로 염색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흑발은 젊음이며 힘과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흑발을 금발로 염색하는 이유도 이와 유사한 것이 아닐까? 인종적 열등감이라는 극단적 용어보다는 미적 추구과정 정도로 표현하는 것은 어떨까? ‘아름다워 지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라는 말처럼 사람들은 미의 추구를 위해 금발로도 바꾸어 보고 콧대도 높이려는 것일 게다. 백발을 흑발로 바꾸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리라. 나는 지금 흑발염색을 해 놓고는 끝없는 자기합리화를 주절대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 동안 염색에 대해 편협한 나의 고정관념이 허물어지고 있는 순간이기도 하리라. (2017. 1. 6)
첫댓글 선생님은 염색을 해야겠네요. 난 아직 생각이 없습니다. 집사람은 자꾸 하라고 하지만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