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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8:1-21
찬송가 415장, “십자가 그늘 아래”
욥기 16장에서 17장에 나오는 욥의 말을 들었던 빌닷은 오늘 본문에서 울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는 욥의 언사들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빌닷은 욥기 8장에 처음 등장하는데, 첫 등장부터 욥의 친구들과는 남다른 기량을 보였습니다. 그에겐 좀처럼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욥의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만약 자신이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가르쳐서 알게 해달라는 욥의 말이 빌닷에게 까칠한 촉진제가 되어, 하나님의 정의롭고 오류가 없는 심판을 욥이 원하는 바대로 매섭게 가르쳐줍니다.
빌닷은 이성적이며 날카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욥이 주장하는 비탄섞인 억울함과 그것과는 정반대로 펼쳐진 하나님의 심판같은 상황이 전혀 이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빌닷은 본문에서 이전과는 훨씬 수위 높은 어조로 욥의 호소를 극단적으로 막아섭니다.
(1-4)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어찌하여 우리를 짐슴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
울분을 터뜨리는 자는 누구인가?(4)
여기서 빌닷은 욥에게 냉혹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너희’라는 2인칭 복수 대명사에 욥을 포함시킨 것입니다. 욥을 향해 ‘너희’라는 표현은 문맥상 다소 부자연스럽기에 학자들의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만, 가장 매끄러운 해석은 빌닷이 욥을 악인의 무리에 포함시켰다는 것입니다. 욥과 빌닷의 설전은 이만큼 치열했습니다. 같은 생각, 같은 마음, 같은 관점을 함께 공유하여 ‘우리’라는 친구가 되었던 그들인데, 이제 그들은 하나님을 사이에 두고서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관점으로 갈라섬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빌닷에게 우리였던 욥은, 악인의 무리에 적합한 너희로 변했습니다.
이렇게까지 빌닷이 욥에게 빈정 상했던 이유는, 욥이 울분에 갇혀 친구들의 조언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을뿐더러,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훨씬 월등하다는 언사로 친구들의 말들을 무시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욥은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하나님과 가까운 자로 높이고, 친구들은 그런 자신과 대화가 일체 통하지 않는 무지한 짐승쯤으로 여기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빌닷은 욥의 말을 콕 집어 그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습니다. 욥기 16장 9절에서 욥은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자신을 찢는다’고, 자신의 의로움과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하지만, 빌닷은 오늘 본문 4절에서 그 말을 그대로 인용해, 하나님이 욥을 찢으신 게 아니라, 자신을 찢고 아프게 하는 장본인은 바로 욥 자신이라고 지적합니다. 빌닷이 보기에 욥이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보며 회개해도 모자란 형국임에도 불구하고, 교만하고 우월한 마음을 붙들어 사리분별을 하지 못해 울분을 터뜨려 자신 스스로를 찢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빌닷의 지적은 옳습니다. 울분을 터뜨리는 사람은 스스로를 찢어 이치를 분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역설적 교훈이 바로 이것이기도 합니다. 빌닷 역시 욥으로 인하여 울분을 터뜨립니다. 그는 울분의 말들을 욥에게 거칠게 쏟으며, 울분으로 인해 욥의 비탄어린 호소가 그의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빌닷도 욥과 다를 바 없이 울분을 터뜨려 스스로를 찢음으로 그의 옆에 있는 친구의 억울함을 듣지 못했고, 그가 주장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을 열지 못했으며, 그로 인해 마음의 눈을 열어 자신의 관념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잠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묵상해보길 원합니다. 갈보리 언덕 위엔 그리스도 십자가 좌우편에 함께 달린 강도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이들 모두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비난했습니다(막15:32). 그들은 어째서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힘없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냐고 울분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메시야로 기대했는데, 그 소망이 끊어지니 너무나도 분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에게 ‘십자가 우편 강도’로 친숙히 알려진 자에게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울분을 뒤로하고 십자가 위에 계시던 그리스도의 말과 태도를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욕을 퍼부었지만, 그는 도리어 사랑으로 용서하셨습니다. 자신의 옷을 제비뽑으며 괴롭히던 로마병사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자비가 우편강도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그의 마음의 눈을 밝게 해주었고,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우편강도에게 보이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십자가 좌편강도는 여전히 울분을 터뜨리며 자신을 찢고 있었습니다. 억울한 울분이 그를 집어 삼켜,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계신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지 못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 땅에 군사적인 힘을 지닌 그리스도를 보내시지 않으시고, 연약하고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모양으로 처참하게 십자가 위에 달려 인류의 죄를 속량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운행과 섭리를 십자가 좌편강도는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눈이 밝아져 우리가 처한 불이익과 어려움을 보아야합니다. 그것들로 인해 울분을 터뜨려 우리의 삶을 성급하게 찢기 보다는, 그 너머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계시는 운행함을 보아야 합니다. 비록 욥의 비탄을 지적하는 빌닷의 말은 옳았을지는 몰라도, 그의 말 역시 울분을 터뜨리는 언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5절부터 21절까지 빌닷의 말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운행을 보여주기 보다는, 악인을 향한 저주를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나의 '옳은' 신학이 남에겐 저주가 될 때(5-13)
긴 설명을 통해 악인의 멸망을 선언하는 빌닷의 중심에는 한 가지 신학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악인이 그 행위대로 보응받아 멸망하지 않고, 의인보다 더욱더 강성하여 살아가는 상황이 찾아오면 안된다는 도식입니다. 그래서 빌닷은 악인의 빛이 꺼지길 바랬습니다.
(5-6)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그의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
성경에서 사람을 향하여 빛과 불꽃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부귀영화라는 상징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으로 빌닷은 직접적으로 욥을 공격합니다. 이전에 욥에게는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소가 오백 겨리, 암나귀 오백 마리를 가지고 있고, 뿐만 아니라, 욥은 종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로서 그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지금 자신의 꼴을 즉시하라는 말입니다. 그에게 많고 많던 소유물은 단번에 사라지고, 남은 자라곤 자식을 포함해 아무것도 없지 않냐는 뼈아픈 말입니다. 그러니까 빌닷의 의미는, 욥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으면, ‘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며 그의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빌닷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악인의 멸망을 발걸음에 빗대어 비유합니다. 본문 7절에서 11절입니다.
(7-11) 그의 활기찬 걸음이 피곤하여지고 그가 마련한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니 이는 그의 발이 그물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려들며 그의 발 뒤꿈치는 덫에 치이고 그의 몸은 올무에 얽힐 것이며 그를 잡을 덫이 땅에 숨겨져 있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목에 있으며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라게 하고 그 뒤를 쫓아갈 것이며
빌닷이 바라본 악인의 걸음은 회의적입니다. 그 발걸음이 활기차 보여도, 결국에는 피곤하여질 뿐만 아니라, 스스로 꾀에 빠지는 모양에 지나지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때로 악인은 자신의 번영과 성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고 넘어뜨리려 교묘한 수를 사용합니다. 성실한 사람들의 머리를 밟고 올라가기 위해 길마다 함정을 준비하고, 활기찬 걸음으로 삶을 살아가지만, 결국 그가 마련한 꾀에 스스로가 빠지게 될 것이라고 빌닷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을 욥에게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빌닷이 보기에 욥이 당한 상황은 아무리 욥이 의롭고 고상한 신앙적 삶을 산 척 해봤자, 욥의 발이 마침내 그가 마련한 그물에 빠지고 가미에 걸려 들어, 그의 몸은 결국 올무에 얽힌 상황이란 점을 드러낸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돌이켜 회개하라는 의미에 빌닷은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상치 못하는 온갖 두려움과 불안이 악인을 엄습할 것이고, 예견하지 못한 재앙이 그를 집어 삼키며 각종 질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저주를 본문 11절에서 13절 속에서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서, 악인은 자신이 마련한 꾀에 빠지지 않을지라도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며,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를 향해 하나님의 심판이 들이닥칠지는 모를 일이라는 사실을, 욥이 어느 한날 갑자기 당한 끔직한 재앙을 상기시키며 그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향해 소금을 뿌려 더 큰 고통을 안겨주는 언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의로움과 옳음의 차이점
무시무시한 빌닷의 저주는 본문 14절부터 21절까지 지속됩니다. 저와 교우님들은 빌닷의 언어로 인해 가빠진 숨을 천천히 내쉬며 곰곰이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본문속에서 과연 누가 울분을 터뜨리며 자신을 찢는 사람인지 말입니다. 욥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여다볼 생각 없이, 자신의 신학적 가치관을 내세워 그를 탓하여 엄하고 매서운 저주를 숨 가쁘게 쏟아내는 빌닷인지, 아니면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하나님께로 끌고 나아가, 결국 모든 원인은 하나님을 탓하여 그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는 욥인지 말입니다.
저와 교우님들은 어떠합니까? 일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평탄함만을 누리는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생은 그리 간단치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제도 예견치 못한 큰 풍랑을 겪었으며, 오늘도 사방에서 어떤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불안감 속에 갇혀 있고, 내일은 기근으로 말미암아 쇠하여질 것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울분을 느끼게 됩니다. 그때에, 우리는 누구를 탓할 것이며, 무엇을 탓할 것입니까? 누구를 향하여 우리 자신을 찢겠으며, 무엇을 향하여 우리 스스로를 찢어 우리가 마주한 울분을 터뜨리실 것입니까?
우리는 창문을 열고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분의 보좌 앞이야말로, 우리가 울분을 터뜨릴 수 있는 안전한 장소이고, 우리 자신을 찢고, 우리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밝아진 우리 마음의 눈을 통하여 이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욥기는 욥과 그의 친구들 사이에 의견대립이나,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따져보는 책이 아닙니다. 그들 모두는 각자의 지방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고, 학식이 뛰어났으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명료한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을 사이에 두고서 논쟁이 뜨겁게 오가는 가운데 오직 욥만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부당하고 억울한 고난에 처한 욥은 그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끌고 나가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지 않았습니다(욥13:20).
교우님들께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삶을 사는 동안에 울분이 차오르는 순간이 많으실 줄 압니다. 그리고 울분은 내 개인의 인생에서 그치지 않고, 내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마주할 때, 우리는 울분을 집어삼킬 수 없습니다. 우리에겐 그것을 삼켜 소화시킬만한 선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문을 열어 우리가 삼켜온 울분을 하나님을 향해서만 터뜨려야 합니다. 그분 앞에서 자신을 찢고 애통하는 것처럼 참되고 의로운 믿음도 없습니다. 이 교훈이야 말로 욥기가 저와 교우님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귀중한 메시지입니다. 혹여 주변 사람들을 볼 때 울분이 차오르십니까? 창문을 열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이해되지 않고 막막한 나의 환경 때문에 울분이 차오르십니까? 창문을 열고, 마음의 눈을 밝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만 우리의 솔직한 심정을 찢어 울분을 터뜨리십시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들으십니다.
만약 이 사실을 쉽게 받아드리기 어려우시다면, 욥기의 증언을 의지해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탄식, 친구들과의 날카로운 설전, 욥이 홀로 기도하는 모든 장면속에 마치 계시지 않는 분처럼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자취를 감추십니다. 하지만, 욥기 후반부에 이르러 하나님은 마침내 등장하시고, 이 모든 상황과 욥과 친구들의 말을 들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욥38:1; 42:7-8).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장에 내 곁에 계신 것 같지 않고, 나의 탄식을 듣지 않는 것 같이 멀게만 느껴질 때가 있어, 내가 처한 억울함과 이해못할 상황이 막막하게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욥기는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모두 다 지켜보고 계신 전능자‘라는 위로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 위로에 힘을 얻어 믿음으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낱낱이 쏟아내는 저와 교우님들이 되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믿음을 따라 사는 동안에, 우리의 눈을 흐리게 만드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해못할 상황 때문에 우리 마음 가운데 가득 차오르는 울분이 그러합니다. 그것은 내 주변 이웃의 말도 듣지 못하게 만들고,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 마저도 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주님,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늘에 열린 창문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곳을 향하여 우리 마음 가운데 은밀하게 쌓여있는 아픔들과 억울함을 하나님께로만 향하여 터뜨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수아 사람 빌닷의 말은 비록 옳았던 말이였어도 거칠고 사납고 매서웠습니다(1-4).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옳은 말을 어떻게 표현해야하겠습니까?
2. 빌닷이 보기에 욥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오만한 악인이었습니다(5-6).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어떻게 바라보셨습니까? 그로 미루어 보건대, 상대방을 향해 우리의 견해를 강하게 견지해야될 근거를 성경에서 발견하실 수 있으십니까?
3. 악인의 발걸음은 결국 스스로 마련한 꾀에 빠지지만(7), 시편 1편 1절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길 안에서 우리의 꾀가 아닌 하나님의 계획으로 채울 수 있겠습니까?
4. 빌닷이 악인의 멸망에 대하여(14-21) 맹렬히 쏘아붙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작성: 김대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