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정토사 주지 덕진 스님
부처님의 숭고한 ‘전도선언’ 올곧이 실천한 이 시대 부루나존자
초등생 때부터 집안 살림, 누님 죽음에 엄청난 충격
허약·위장병 수년간 고통, 자살하려다 암자서 기도
‘모든 건 마음이 짓는다.’ 통도사 산문 열고 출가
사미 때 정진하며 병 떨쳐내 “평생 불법 전하겠다” 발원
어린이·청소년포교 40년, 울산불교 새 지평 열어
사부대중 30년 사찰불사, 지역 대표 도량으로 우뚝
정토사 주지 덕진 스님은 “옳고 해야 할 일이라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여건이 좋아질 때를 기다릴 것이
아니다”라며 “명예나 재정이 줄어드는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과감히 실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5명의 비구와 야사를 포함한 61명의 아라한 교단이 형성되었을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많은 사람의 행복과 이익을 위하여,
세상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갖고서,
천신과 사람들의 행복과 이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
나도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의 세나니로 가겠다.”
2500여년 동안 내려온 부처님의 ‘전도선언’이다.
여기서의 전도는 ‘성인의 가르침을 편다(聖人之布敎)’는 포교(布敎),
‘설법으로 지도하여 중생을 이롭게 한다(敎導化益)’는 교화(敎化)와 직결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대에게 알리는 차원을 넘어 이해·설득시키고 수용케 했을 때
저 숭고한 선언은 온전히 실현됐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를 정법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이 불사는 정성과 심혈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다.
태산 같은 신념과 온갖 역경을 이겨낼 인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 대작불사를 울산 정토사 주지 산하(山河) 덕진(德眞) 스님은 40년이나 이끌어 왔다.
경남 하동의 동촌마을에서 유년을 보냈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었지만 살림은 넉넉지 않았고, 어머니는 몸져눕는 일이 많았다.
집안일을 도맡았던 8살 위의 누나가 시집간 직후인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세 동생을 돌보며 밥 짓고 빨래했다. 5km의 등굣길을 걸으며 생각하곤 했다.
‘사람은 왜 자주 아파서 고통을 당할까?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는 없을까?
엄마는 늘 그렇게 아파야만 할까?’
동생들도 가지 못한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건
‘반장’을 할 만큼 학업 성적이 뛰어나서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내가 장남이다. 빨리 돈을 모아 부모님 편히 모시고 동생들도 공부시키자.’
중학교 졸업 후 부산으로 나가 냉동·시계 기술을 배웠으나 벌이는 신통치 않았다.
3년 타향살이 후 고향으로 돌아와 가축도 길렀지만, 자본과 지식이 부족해 쓴맛만 보았다.
좌절이 거듭될수록 몸은 축났다.
21살 되던 해 섣달그믐 전날 누나가 쓰러졌다.
하동에서 진주로 급히 나가 병원을 돌았지만 ‘회생 불능’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택시에서 누님은 숨을 거뒀다.
마을 뒤편의 얼어붙은 도로변에 차가운 시신을 내려놓았을 때는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너무 슬프면 목소리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약한 몸에 소화력도 떨어졌다. 음식을 먹어도 다시 넘어와 되새김질하곤 했다.
위에서 파급된 통증은 온몸을 흔들어댔다.
‘이 음식을 소화시킬 수 있나?’ 하는 트라우마는 곧 공포로 다가왔다.
회갑이 다된 어머니가 백방으로 수소문해 위장에 좋다는 약은 다 구해주었지만,
허사였고 살풀이도 통하지 않았다.
목숨을 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다.
어머니는 절에 가서 몸을 추슬러보라 권했다.
어렸을 때부터 참배했던, ‘첫아들 점지해 달라’고 기도 올렸던
어머니의 정성이 배인 사천의 다솔사 북암으로 걸음했다.
지극정성으로 예불을 올렸고, 틈나는 대로 불경을 열었다.
그때 보석보다 맑게 빛나는 한 구절이 가슴에 꽂혔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다.’
“내 몸, 내 인생, 부처님께 맡기자!”
양산으로 걸음해 통도사 산문을 열었다.
은사는 현재 통도사 방장인 성파 스님과 맺어졌다. 세납 26살 때다.
범어사 승가대학을 졸업한 직후 은사 성파 스님의 언명으로 부산 금화사를 맡았다.(1980)
그 절에서 청룡초등학교 교장이었던 박정자(보리성) 불자와의 인연이 닿았다.
“초등학교 6학년 불자 어린이들을 절로 보내겠으니 법회를 열어보라”는
박정자 교장의 권유는 가슴을 뛰게 했다. 곧바로 금화사 어린이법회를 개설했다.
당시 부산은 310만 인구에 사찰이 700여개에 이르렀지만
어린이법회를 여는 절은 금화사를 포함해도 5곳이 전부였다.
이어서 고등학교 불자모임인 보현불교학생회를 조직했고,
여성 청년으로만 구성된 연화불교청년회를 금화청년회로 변경하고는
남녀 청년 모두가 활동할 수 있는 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
부산불교어린이지도자회 창립(1982)에 주축 역할을 한
덕진 스님은 부회장을 맡아 전문교재인 ‘어린이 불교’를 발간하며 어린이 포교에 박차를 가했다.
부산불교어린이지도자회는 대한불교어린이지도자연합회로 확대됐다.(1986)
지금 ‘동련’의 전신이다. 1999년 대한불교어린이지도자연합회장을 맡았던
덕진 스님은 현재 동련의 이사이자 부총재이다.
수효사에 머물며 기도정진하던 때다.
울산 공원묘원에서의 신도 장례식 때 염불독경한 기억이 떠올라 사무실을 찾았다.
“공원묘지에 안장되는 영가에게 부처님 법음인 왕생극락 염불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런 조건이나 대가 없이 해드리겠습니다.”
얼마 후 그 공원묘원의 최한형 사장과 만났다.
“공원묘지 가는 길목인 우리 산에 절터를 보아 두었는데 인연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덕진 스님께서 절을 지어 보시겠습니까?”
정토사 대웅전과 감실팔불상.
최한형 거사로부터 울산공원묘원 초입의 땅 3305m²(1000평)를
시주받은 덕진 스님은 정토사를 세웠다.(1988) 대웅전에 이어
지장전, 설법전, 삼천불전, 삼성각, 극락원, 범종각 등을 짓고
석조 관음대불상, 대불삼보원, 감실팔불상 등을 봉안하며 울산 대표 도량으로 우뚝섰다.
또한 1997년 봄에 문을 연 정토불교대학은 지금까지 1만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신도전문교육기관으로 지정(2002)된 이 대학은
조계종 포교사만도 150여명을 키워냈다.
울산불교의 새 지평을 연 덕진 스님은 조계종 포교대상 공로상을 받았다.(2000)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알았다 해도
출가를 단행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솔사 스님들을 보며 직감했습니다.
‘부처님 법 따라 살면 내가 고뇌했던 것들이 풀릴 수 있겠구나.
부지런히 정진하며 포교하다가 이번 생을 마친다면 후회는 없겠구나.
명예와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가족에 대한 애착을 끊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겠구나.’
그리 생각하고 나니 걸릴 게 없었습니다.”
젊은 날 짓눌렀던 위장병은 통도사에서 치료됐다. 특별한 처방이 있었던 것일까.
“대중 속에 깊이 파묻혀 보자는 심산으로 사미 때 큰 방(감로당) 소임을 자청해 맡았습니다.
코피 터지는 건 예삿일이고, 지친 몸을 지대방에 뉘였는데
저도 모르게 한나절 동안 못 일어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중 일에 몰두하며 몇 달을 지내다 보니 아프다는 생각, 약에 의지했던 허약함,
치료에 집착하던 관념이 사라지며 위장병도 떨어져 나갔습니다.”
신경성 위장병이었던 거다. 병을 잊어버리는 게 최고의 처방이었던 셈이다.
“나도 건강해질 수 있겠구나. 사람답게 살 수 있구나. 자신감이 생기며 용심이 솟았습니다.
‘부처님 법으로 살아났으니 응당 보답해야 한다.
평생 부처님 법을 전하겠다’는 원을 세운 건 그때였습니다.”
시집과 수필, 그림동화 등의 많은 저서를 선보였다. 부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함이다.
금화사, 보명사, 수효사를 거쳐 정토사에 이르는 40년 동안 어린이법회를 거른 적이 없다.
‘어린이 법요집’ ‘불교 천자문’ 그림동화 ‘자비롭고 위대한 스승 부처님과 만나요’ 등을
선보인 것도 동심에 불심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어린이법회를 여는 울산지역 8개 사찰이 힘을 모아 개최한 ‘어린이 연꽃잔치’에는
6000여명의 어린이들이 참여했다.(1986) 이 법회를 구상한 장본인이 덕진 스님이다.
“어린이는 불교와 국가의 미래를 이끌 인재입니다.
어렸을 때 익힌 사고방식과 행동이
미래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변화시킬지를 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수차례에 걸친 교육개혁이 시도됐지만, 아직도 신뢰할만한 체계는 구축되지 않았습니다.
본질을 외면한 채 입시·경쟁·성공 등의 현실성에만 주안점을 두니 한계가 있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참삶을 살도록 세심하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완전한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는
지식도, 재물도, 건강도 잘 다스려야 하는데 불교는 그에 대한 적확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익힌 삶의 지혜와 자비행을 실천해 가면
우리 사회는 그만큼 살기 좋은 공동체, 정토로 변모합니다.”
정토사 전경.
3305m²(1000평)이었던 정토사 대지는 5950m²(1800평)으로 늘었다.
대웅전, 극락원 등의 전각과 요사채를 포함하면 연면적 1만4876m²(4500평) 규모에 이른다.
“정토사 신도님들의 불심으로 이룬 쾌거”라며 미소를 짓고는 불사임을 강조했다.
“불교대학과 불전을 겸하는 삼천불전을 착공했는데 ‘IMF 경제한파’가 덮쳤습니다.
강당과 식당이 들어갈 1층 정토회관만 조성된 상태였습니다.
무기한 중단을 결정할 상황이었는데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정토불교대학을 개설하고 싶었습니다.
부처님 법을 전하는 일만은 미뤄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가피가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밀어붙였습니다.”
사찰불사의 어려움 속에서도 나눔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르신 무료급식소를 개원(2004)하고, 지역 소외계층을 지원하는
‘사단법인 참 좋은 세상’을 발족(2011)하는가 하면 조계종 포교원과 연계한 장학결연사업도 펼쳤다.
“옳고 해야 할 일이라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여건이 좋아질 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명예나 재정이 줄어드는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과감히 실행해야 합니다. 이것은 제 소신입니다.”
월간 ‘문학세계’와 월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덕진 스님은 시인이자 수필가이다.
시집이나 수필집의 한쪽이라도 열어 본 독자들은 안다.
부처님 법 하나라도 온전히 전하고자 하는 덕진 스님의 마음을 말이다.
‘언제나 기쁨’ ‘서원’ ‘빌고 빌어요’ 등의 시는
박이제, 김희남, 이종만 작곡가의 손길을 거쳐 찬불가로 거듭났다.
의식 한글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덕진 스님은
‘우리말 의식집’ ‘참회 발원 기도 행원참법’ 등도 제작해 보급했다.
“정법에 확신을 갖고 가능한 쉬운 말로 알아듣게 설법하는 건 불제자의 도리입니다.
말, 글, 수화, 노래, 그림 등의 그 어떤 방편을 써서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부처님 세계로 들어서게 해야 합니다.
저와 인연 닿은 그 누군가가 불안함을 떨쳐내고 평온을 찾는다면
저로서는 큰 보람이요 지중한 행복입니다.”
‘전도선언’을 온전하게 실천하고 있음이다.
자신의 시 ‘연꽃처럼’ 덕진 스님은 지난 여정이 그러했듯
앞으로도 ‘속은 비어도 고운 꽃 피우듯이/ 알찬 열매 영글듯이/
싱싱하고 아름답게/ 언제나 올곧게 당당하게’ 사문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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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진 스님은
성파 스님을 은사로 통도사서 출가. 범어사 승가대학 졸업.
통도사 극락선원, 김해 다보선원, 감포 관음사 무문관 등에서 수선안거.
울산 춘해대학 사회복지학과 졸업(2005),
동국대 불교문화대학원 선서화과 수료.(2019)
부산 금화사, 울산 보명사·수효사 주지, 부산지역 향토예비군 법사단장,
울산지방 경찰청 경승실장, 울산 남구 종합사회복지관장 등을 역임했다.
월간 ‘문학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월간 ‘한국수필’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연꽃처럼 햇살처럼’ ‘문 없는 문을 열고’ 등 네 권이 있다.
저서로는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 ‘님한테 할 말 있소’
‘자비롭고 위대한 스승 부처님과 만나요(그림동화)’ ‘희망 가꾸기’
‘찾기 전에 누리는 행복’ ‘불교 천자문’ 등 다수가 있다.
현재 정토사 주지를 맡고 있다.
2021년 7월 28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