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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 강화(12)
집주인과 도적 비유
마태복음 24장 42-44절/ 42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43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합니다. 예수께서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으로부터 내버림을 받아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이렇게 주님과 함께 데려갈 자와 주님이 내버릴 자를 갈라놓으십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두 사람이 밭에서 일하고 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합니다(마24:40-41). 이 기막힌 일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실제 일어납니다. 밭에서 함께 일하는 두 사람과 맷돌을 함께 가는 두 여자는 부자지간이요 모녀 또는 고부지간 입니다. 한 솥밥을 먹으면서 일생을 곁에 같이 있는 사람인데 그것도 잠시 뿐이지 서로 영원히 나누어지는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 나누어짐은 마치 알곡과 가라지가 분류되어 나누어지듯이 그렇게 서로 다른 존재로 나누어져서 영원히 떨어져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하시는 것에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항상 같이 있도록 하겠다”(요14:3)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계신 예수께서는 왜 세상에 다시 오셔서 이처럼 사람을 갈라 나누어 놓는 일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실 자를 정해 놓으신 데 따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 전에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말입니다. 모든 인간이 누구나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는 조건 하에서 되어진 결정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만군의 주 여호와께서 몇 사람만이라도 건져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와 무엇이 다르겠느냐”(롬9:29)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그 수가 얼마이든지 간에 그들을 모든 악한 일들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어 죄인의 상태에 두시고서 심판하여 멸망시키기로 이미 작정하셨습니다(롬1:28-32, 2:12-15, 3:9, 19, 9:28) 그리고 하나님은 또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계획을 정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택하셨으며, 우리를 하나님께서 친히 보시기에 흠과 점이 없는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실 것을 작정하셨습니다(엡1:4).
하나님의 뜻은 자신이 정하신 바에 따라서 모든 사람이 죄 아래서 버림을 받는 것에서 하나님의 것으로 택한 자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믿음을 통한 구원의 은혜를 주심으로써 내버림을 받는 자들 속에서 데려가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행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세상에 보내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다시 세상에 오실 때까지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분리하여 분류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자신의 오른편에 서게 하여 데려갈 자와 왼편에 서게 하여 버릴 자를 분류하고 분리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그들을 데려가실 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들이 지은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벌을 받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내릴 진노를 거두시고 구원하시고 이를 온 세상의 복음으로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게 하는 것을 통해서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이름을 시인함으로 믿음에 있게 하시며 또한 자신의 이름을 부인하여 불신앙에 있게 하여서 그들이 서로 다른 곳의 다른 길을 갈 자인 것을 분류해 놓는 일을 하십니다. 우체국에 가면 우편을 배달하는 직원이 우편에 써 있는 각 주소로 갈 자를 분류해 놓는 일을 합니다. 지역 번호로 정해진 우편 번호에 따라서 서울로 갈 자, 인천으로 갈 자, 부천으로 갈 자, 부산으로 갈 자, 대구로 갈 자, 광주로 갈 자, 그렇게 분류합니다. 그리고는 각 지역에서 다시 부천에서 원미구의 상동으로 갈 자, 심곡동으로 갈 자를 분류합니다. 그 우편물은 그렇게 분류되어 있는 상태에 있으면서 마침내 한 곳에 있던 곳에서 각각 분류되어 있는 곳으로 분리되어 갑니다. 그렇게 각각 제 갈 곳을 향하여 제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에게 있어서는 말입니다. 갈 곳이 단 두 곳입니다. 주님이 계신 천국으로 갈 자와 주님이 계시지 않는 지옥으로 갈 자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곳으로 갈 자를 그들이 갈 곳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세상에 오실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분류하여 놓는 일을 하십니다. 밭에서 함께 일하던 두 사람과 맷돌을 함께 갈던 두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한 사람은 버림을 당하는 것은 아무런 이유도 모르고 까닭을 알지 못한 채 겪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각각 자신들에게 정해진 하나님의 정하신 바에 따라서 자신들이 저질러 놓은 행위대로 갚음을 받게 함으로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십니다.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여 영접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인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을 받으며,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한다”는 부인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그들이 들어갈 곳인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어떤 성격의 것으로 있는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밭에서 일하는 것이든 맷돌을 가는 일을 하는 것이든 지금은 같은 일을 하면서 함께 한 곳에 있지만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에 따라서,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살았는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서 살았는지에 따라서 천사들에 의하여 모아져(마24:31)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감으로 당하여 그 나라에서 영생할 자가 되는가 하면, 버림을 당하여 남겨진 채 영원한 형벌의 지옥에 떨어질 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데려가심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와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에 의하여 지옥에 들어갈 자의 그 분리에 이르기까지 분류되는 일을 하나님의 아들이 하십니다. 이 분류하시는 일에 의하여 함께 밭에 있으면서 일하고 함께 맷돌을 갈고 해도 자신이 어떤 부류의 성격에 있는 사람인지를 나타내 보이게 됩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때 그 차이는 확연한 차이를 갖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적절한 비유를 쌀 씻는 것과 밀물과 썰물을 가지고 말한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이것을 제가 가진 경험으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제가 부엌 일을 잘 보는 편은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밥을 지어본 경험이 몇 번 있습니다. 솥에 잘 씻은 쌀을 넣고 물을 붓는데 손을 집어넣어서 손 등에 말이 찰랑찰랑 찰 때까지 붓습니다. 그런 후에 솥뚜껑을 닫고 밥이 다 될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밥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쌀을 잘 씻어야 합니다. 바가지에 먹을 만큼의 쌀을 넣고 불을 부은 다음에 두 손으로 쌀을 움켜쥐었다 놓았다 하면서 두 손으로 빨래하듯이 박박 문지릅니다. 그러면 쓸 뜨물이 뽀얗게 됩니다. 그 물에는 쌀겨도 떠있고 지푸라기도 떠있고 또는 다른 이물질도 떠 있습니다. 그 물을 따라 붓고 다시 새 물을 받아 버리기를 몇 번하면 더 이상 뽀얀 물은 생기지 않고 어느 정도 맑은 물로만 남습니다. 그러면 쌀이 뚜렷이 보이는데 그 쌀 안에 있는 돌멩이도 보이고 다른 찌끼 같은 것도 보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손으로 끄집어내어 버립니다. 손으로 쌀을 헤집어 구석 구속 숨어 있는 것까지 다 찾아내서 끄집어내어 버립니다. 후에는 조리 라는 게 생겨나 쌀을 일어서 쌀과 돌멩이를 분리하여 밥을 짓게 되었지만 나는 그게 서툴러서 그냥 손으로 돌멩이를 찾아 끄집어냈습니다. 이렇게 쌀을 씻을 때 처음에는 뿌옇게 보이는 것이 여러 번 쌀을 일면서 씻어내면 점차 쌀과 돌멩이와 다른 이물질이 뚜렷하게 보여 분류가 되고 마침내 분리되어 각각 다른 처지가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상은 되풀이해서 씻어지면서 쌀과 돌멩이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또한 바닷가에 가면 밀물과 썰물을 보게 됩니다. 밀물이 들어왔다가 썰물이 되어 나가면 그 지나간 갯벌 바닥에는 그동안 물에 잠겨 보이지 않던 온갖 것이 나타나 보입니다. 바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조개류를 비롯해서 소라, 게, 이름도 잘 알지 못하는 곤충들, 망둥어 등 이 모든 것들이 새삼 보이게 됩니다. 그렇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속적으로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곳에서는 누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누가 지옥의 백성인지가 뚜렷하게 분류되어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분류해 놓은 자들을 분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지옥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세상에 다시 오십니다. 그 때는 모든 사람은 그동안 분류되어 온 데 따라서 두 부류로 분리되는 확연한 차이를 가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깨어 있을 것을 거듭하여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깨어 있을 것을 말씀하시는가 하면 자신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는 아무도 알지 못하여 아무도 예수님의 오심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래서 생각지 않은 때에 예수님의 오심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집에 침입하여 가산을 탈취하는 도적, 곧 도둑을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집주인이 밤에 도적이 드는 시간을 알았다면 깨어 있어서 도적을 지킬 것입니다. 그래서 도적이 결코 자기 집에는 침입하지 못하게 하여서 자기가 소유한 물건을 도적 당하지 않고 지킬 것입니다. 그런데 집주인은 도적이 언제 드는지 그 시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냥 깨어 있을 수만은 없어서 잠에 들어 있게 됩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물건을 도적 당하지요. 그것처럼 인자는 사람이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예고도 없이 오셔서 자기의 할 일올 할 것입니다. 인자가 언제 오실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러기에 도둑을 들어서 인자가 이렇게 아무도 알지 못하여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때에 오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깨어 있을 수가 없는 상태인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서 예수님의 오심은 도둑이 침입하는 것처럼 아무도 알지 못하게 몰래 오시는 것이 됩니다. 그런 그들에게는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가운데서 미처 준비를 할 수 없게 갑작스럽게 오시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집주인과 도적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집주인이 깨어 있으면 도적이 침입해 들어와 가산을 탈취해 가는 일을 하지 못할 텐데 깨어있지 못하므로 도적의 침입과 그로 인하여 있게 되는 재산상 손실과 또는 상해나 심지어는 도적이 강도로 변함으로써 생명을 잃기도 하는 일 등 이 모두를 결코 집주인이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주인과 도적 비유는 말이죠. 깨어 있으면 우리가 그러한 도적을 막아 자신의 가산과 생명을 능히 지킬 수 있을 것이 아니냐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통해서 도적이 올 때까지 집주인이 깨어 있지 못함으로 도적의 침입을 막지 못하는 것처럼 인자의 오실 날에 있을 일을 사람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인자가 오실 날을 도적을 들어서 그가 오는 것 같이 오실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있게 되는 예수님의 오심은 이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이할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가운데서 오시는 것이라는 것이며, 그래서 이것은 그래야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은 자인 것을, 곧 예수님을 미워하고 배척한 자인 것을 꼼짝없이 낱낱이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현장 확인의 사실에 있게 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깨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깨어 있으라’는 앞에서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정신을 차리고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이 오시는 때를 알지 못하며, 그래서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인데, 제자들에게는 깨어 있어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 속에 있게 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든지 맞이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는데 맞이할 아무런 준비 없이 잠들어 있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자신이 주로 섬기는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 오시든지 간에 맞이할 수 있도록 항상 맞이할 준비로 있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여 배척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그리고 또한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들의 악한 활동에 의한 미혹이 있는 것속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따르는 제자들은 그들이 주이신 예수께 가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인내함으로 더욱 견고하게 서나가게 하실 것을 의도하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말입니다. 그렇게 깨어있는, 그래서 준비해 있는 그것으로 예수님을 하나님나라의 주로 맞이하게 되어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세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란 노아의 때에서 보게 되는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으로, 또한 롯의 때에서 보게 되는 사고 팔고 심고 집짓고 하는 것으로 말해질 수 있는 일상생활에서 그것이 전부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그 모든 것을 행하는 것에서 우리 생명과 그 삶을 지배하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는 그 믿음에 있어야 합니다. 혹자는 그러한 삶을 외롭고 고독한 삶일 것이지만 잘 참고 인내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성경의 인물로서 그러한 삶을 살면서 자신의 삶을 외롭고 고독한 것으로 여기고서 인내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의 인내는 주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겪는 외롭고 고독한 인생 길을 걸어가는 것에 대한 참음과 견딤으로 가져간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고난을 당한즉 또한 주님과 함께 영광을 볼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주님의 오심으로 있게 될 주님과 함께 할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소망하는 신앙에 있는 것으로서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