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택 스님
“성철스님 선양은 한국불교 전체를 위한 일”
해인사에서 3000배 마친 뒤 ‘자기를 속이지 말라’ 좌우명 받고
29세 출가…‘영원한 시자’ 돼
“성철스님은 종단의 자산 자기의 역사를 방치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최근엔 성철-법정스님 ‘설전’ ‘시봉이야기, 그 후’로 추모사업
“스님을 곁에서 모시며 일거수일투족을 배우다 보니
핵심은 ‘자기를 속이지 말라’는 것
‘자기를 이기지 못하면 절대 큰일을 하지 못 한다’는 절절한 당부였습니다.”
지난 3월23일 산청 겁외사에서 만난 원택 스님.
스님은 “지금껏 수행자로서 올바르게 살 수 있었던 건
성철스님 덕분”이라며 존경의 뜻을 표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한일 위안부 정부협상과 한국사교과서 국정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즐겨 활용하는 윈스턴 처칠의 격언이다.
결국 역사란 기억하고 기록하는 자의 몫이고, 복인 셈이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지식이었던 성철스님(1912~1993).
열반한 지 20년도 더 흘렀건만,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종교인 분야에서 여전히 최상위권이다.
알다시피,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택스님이 수훈갑이다.
백일법문 선림고경총서 사리탑 겁외사 성철스님기념관…
오늘날 불자들은 거의 대부분 원택 스님이 모으고 가꾼
성철스님의 말과 몸을 통해 성철스님을 배운다.
지난 3월23일 성철스님의 생가 터에 지은
산청 겁외사에서 원택 스님을 만났다.
맞은편에 성철스님기념관이 있다.
작년 4월 건립된 2층 높이 연면적 792㎡(240평) 규모의
석굴형 법당이다.
1층은 성철스님의 대리석 설법상을 모신 참배 공간,
스님의 법호를 딴 2층 퇴옹전(退翁殿)은 일반인을 위한 참선공간이다.
당신의 탄생일(음력 2월19일)을 맞아 3월20일부터 27일까지
‘7일 7야 참선정진법회’가 진행됐다. 방부를 들인 불자는 38명.
가르고 찌르고 욕심내고 뒷말하는 중생의 마음을 초월한 겁외(劫外)를 꿈꾼다.
성철스님기념관은 은사의 정신을 선양하자는 취지에서
친딸인 불필스님과 ‘영원한 시자(侍者)’ 원택스님이 원력을 내고
문도(門徒) 스님들이 의기투합한 결과다.
원택스님은 “열반 후 20여 년간 이어진 추모사업의 마침표를 찍는 불사”라며
“이제는 할 일을 다 한 기분”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사실, 믿지 않았다. 이후로도 성철스님의 돈오돈수론을 정리한
<명추회요>, 성철스님기념관 용상(龍象) 봉안,
성철스님과 법정스님 간의 대담을 담은 <설전(雪戰)> 출간,
베스트셀러 <성철스님 시봉이야기>의 증보판인
<시봉이야기, 그 후(가제)>가 이어졌다.
원택스님이 살아있는 한 추모사업은 계속될 것이다.
지난 2월 출간된 <설전>은 한국불교의 양대 아이콘인
성철스님과 법정스님의 문답을 묶고 인연을 소개했다.
‘舌戰(설전)’이 아니라 ‘雪戰(설전)’. 극강의 수행자들의 뱉어낸
서릿발 같은 말들의 향연이다.
‘가야산 호랑이’로 불렸던 성철스님 앞에선 모두가 벌벌 떨었다.
스스로도 누구에게나 엄했으나 강직했던 법정스님은 ‘열외’였다.
호랑이가 사자를 알아본 격이다.
스무 살 어린 법정스님은 때때로 성철스님을 찾아가
질문도 하고 쓴 소리도 했다. 성철스님은 사진집을 발간하면서
법정스님에게 서문을 요청했다.
책에는 ‘본래부처’라는 진리에 동의하는 두 거목의 말과 삶이 눙쳐 있다.
<성철스님 시봉이야기 그 후>는 최근작이다.
2001년 베스트셀러로 기록된 <성철스님 시봉이야기>의 속편이다.
못다 한 이야기와 새로 진행한 추모사업을 정리했다.
다시 읽어도 시큰하다.
1981년 조계종 종정에 취임한 성철스님에게 방송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댔다.
“1300만 불자가 있는데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한 말씀이라…. 내 말에 속지 마라, 내 말. 내 말, 말 말이여….
내 말에 속지 마라, 그 말이여!” 사람이면 누구나 부처님처럼
영원한 생명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
애먼 데 가서 부처를 구하지 말라는 경책이었다.
원택스님은 여기에 반했다.
23년간 성철스님을 모셨다. 해인사에서 3000배를 마친 뒤
‘자기를 속이지 말라’는 좌우명을 받았는데, 그게 가슴에 사무쳤다.
“29세면 속세에서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는 중이 되어
부처님의 진리를 깨달아보라”는 꼬임에 머리를 깎았다.
경북고와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외무고시를 준비하던
수재의 삶이 완전히 뒤바뀌던 순간이다.
출가 이후의 삶은 온전히 성철스님에게 바친 삶이다.
매우 예민하고 강퍅했던 스승에게서 주야장천
‘곰 새끼’라 욕을 먹으면서도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말씀을 기록할 뿐 해석하진 않는다”는 게 원택 스님의 철칙이다.
모든 내용이 성철스님의 육성이자 친필이며 한 글자도 더하거나 덜지 않았다.
행여 흠을 낼까 그 흔한 석·박사 학위도 따지 않았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세태에서, 진정 주목할 만한 인욕이다.
스님에겐 불편할 질문을 던졌다.
“우려도 너무 우린다는 비난이 있다”고. 하지만
‘곰탕집 사장’이란 시샘에 이미 익숙한 스님이다.
헛웃음 속에 섞은 말은 단호했다.
“열반 후 23년간 추모사업을 쉬지 않고 전개해 왔다면
진정성은 보증된 것 아니냐”고. 은사에 대한 선양이 기껏해야
‘기(忌)제사’가 거개인 승가의 풍토에서 대단한 끈기다.
‘뻥튀기’ 논란에 대한 해명도 깔끔하다.
성철스님과 관련된 서적들은 재탕이 없고
끊임없이 유작을 발굴해내 엮은 신작이다.
은사의 흔적이 묻은 자료가 있다면 어디든 달려갔고 누구든 만났다.
이렇게도 바라보고 저런 식으로도 살펴보며 새롭게 꾸민 기획은
문헌의 객관성을 높였다. 성철스님을 찾아가는 일은
불성(佛性)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이래도 ‘곰탕집 사장’이라 한다면,
분명 ‘최고의 맛집 사장’인 셈이다.
물론 질투심에서 비롯된 지청구임을 잘 안다.
그래도 가끔은 힘이 빠지는데
“남이 보면 성철스님 개인을 위한 일처럼 보이겠지만
나중엔 불교 전체를 위한 일이었음을 그들도 알게 될 것”이란
대강백 무비스님(전 조계종 교육원장)의 위로가 힘이 된다.
“우리 문중에도 원택 스님 같은 인재가 있었다면
우리 큰스님이 이렇게 묻히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어느 원로의원 스님의 푸념을 들은 적도 있다.
스님은 “자기의 역사를 방치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며
“성철스님은 문중이 아니라 종단의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종단이 세간의 불신을 받거나 빈축을 살 때
네티즌들이 십중팔구 내세우는 모범이 바로 성철스님이다.
종단이 외부의 입김에 휘둘리지 않게끔,
청정과 고결을 상징하는 인물이 더 많아지길 바라는 원택 스님이다.
원택 스님은 철저하게 은사 스님의 그림자로 살아왔다.
성철스님이 한국불교의 큰 산으로 자리하게 된 것도,
원택 스님의 헌신이 없었다면 자못 어려웠을 일이다.
은사를 향한 상좌의 마음은 흠모를 넘어 합일이다.
“스님을 곁에서 모시며 일거수일투족을 배우다 보니
결국 가르침의 핵심은 ‘자기를 속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이기지 못하면 절대 큰일을 하지 못한다.’는
절절한 당부임을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제가 지금껏 수행자로서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었던 것도,
스님이 계셨던 덕분입니다.”
어쩌면 스님에겐, 스승을 찾아가는 길이 곧 자기를 찾아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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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택 스님은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외무고시를 준비하던 중
친구를 따라 찾아간 해인사 백련암에서 성철스님을 만났다.
스님의 법력에 매료돼 1972년 출가했다.
이후 40여 년간 성철스님에 대한 시봉과 추모로 일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중앙종회의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일하고 있다.
2016년 4월 16일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