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카의 명상
김창완
“우리 인간은
악(惡)들이 실제로 자기에게 닿기 전에는 절대로 악을 예측하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장례 행렬이 문 밖을 지나가도 우리는 절대로 죽음을 곰곰이
생각하지 않는다. 때 이른 죽음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우리들은 아이들을 위해 장래를 설계한다. 아이가 어떤 옷을 입을까, 군에서는 어떻게
처신할까,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유산을 어떻게 물려받을까 등등….”
세네카의 말을
인용한 알랭 드 보통의 철학 에세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을 읽고 있을 때였다. 섭씨 32도. 미지근한 마룻바닥에 배를 깔고 책을 읽었다. 몇
장 읽다 보면 밀착된 배와 마루 사이에 땀이 찼다. 그러면 자리를 옮겼다. 옮긴 쪽 마룻바닥은 조금 전 엎드려 있던 곳보다 쾌적했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몇 쪽을 읽었다.
그렇게
뒹굴뒹굴하며 읽는데 전화 메시지 도착 음이 울렸다. 힐끗 보니 친구 이름이 얼핏 보였다. 메시지 확인을 안 하고 책을 계속 읽었다. 한참을 읽다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보았다. 친구가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불과 일주일 전에 같이 자전거를 타며 히히덕거렸었다.
읽던 책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핸드폰이 놓여진 페이지의 소제목은 ‘좌절에 대한 위안’이었고, 제일 위쪽 세 줄은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들어 있다.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사고는 어떤 것이든, 그게 제 아무리 드물고 시간적으로 멀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것에 대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하는,
일어남 직한 일들이다.’
나는 끝 구절
“일어남 직한 일들이다”라는 말은 어렴풋이 이해를 하겠는데 그 앞의 대목은 그냥 눈으로만 읽었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엎드려 있다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를 걸어야겠기에 전화기를 들긴 들었는데 ‘이름으로 찾기’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 순간적으로 잊어버렸다.
나는 머릿속으로
‘찾을 이름’, ‘찾을 이름’ 하고 되뇌었다. 아무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다. 죽은 친구의 이름 말고는….
죽은 친구의
이름을 입력해 보았다. ‘알림 0001명이 선택되었습니다’라는 표시 창 다음에 그 친구의 전화번호가 떠올랐다. 그 번호를 아득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화면이 바뀌더니 현재시각이 나타났다.
나는 ‘수신
메시지’를 찾아 메시지를 보내 온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무슨 소리야?”
“나도 몰라.
가족들도 연락이 안 돼. 가 봐야 알겠어.”
“진짜 걔
맞아?”
“응.
그렇대.”
“내일이
발인이면 어제 그런 거야?”
“그랬나 봐.”
“몇 시에 갈
거야?”
“8시.”
“알았어. 이따
봐.”
전화를 끊고
나니 그제서야 가까운 친구 이름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전화를 해 보니 이미 연락을 받은 사람도 있었고 아직 모르는 친구도 있었다.
다시 전화기를
내려놓고 주먹 위에 미간을 대고 눈을 감고 지그시 눌렀다. 이마에 눈물이 고이는 것 같았다. 가리왕산 꼭대기에서 다같이 엉덩이를 까고 사진 찍던
생각이 났다.
“아이고
그림이네 그려. 저기 똥꼬에 흙 묻은 것 좀 봐요. 낄낄낄….”
친구는 말할
때마다 침이 튀었었다. 그 선한 눈동자가 와락 달려들어 더 이상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었다. 눈을 뜨니 읽고 있던 책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세네카의
명상. 운명의 여신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아. … 우리 모두는 죽을 운명을 타고 난 것들에 묻혀 살고 있네.
누구나 죽을 운명으로 태어났고, 우리 역시 죽을 운명의 아이를 낳는 법이야. 모든 것에 기대를 거는 한편으로 어떤 일이든 다 닥칠 수 있다고
예측해야지.”
엎드린 채로
세네카의 명상의 끝 구절을 반복해서 읽었다.
“어떤 일이든 다 닥칠 수 있다고 예측해야지,
예측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