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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함부르크 이야기
난생 처음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으로 날아가는 길이었음에도, 인야는 그저 자신이 있는 장소만 바뀔 뿐이라는 자세였기 때문에... 여행에 대한 특별한 호기심이나 두려움도 없었다.
그렇다고 물론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었다.
어찌 됐든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기에 걱정이 아니 될 수 없었고, 절박감에 쫓기고도 있었다.
남들의 도움으로 가게 된 이번 독일행 여정은 값싼 항공권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중간 기착지가 많아 두 차례나 환승을 해야 했고, 비자 없이 미국 공항을 거치는 일 역시 피할 수 없었다.
지난 경험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인야는 미국의 공항에서 중죄인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처음 멕시코로 올 때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겪었던 수모를 이번에는 뉴욕 'JFK 공항'에서 다시 마주한 것이다.
포박까지는 아니었지만, 철저하게 감시당하고 끌려다니는 '중대 범죄자' 신세가 된 세상을 인야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내가 무슨 범죄자도 아니고 더더욱 테러범이 아닐진데, 더구나 이 세상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울 일이 없는 내가, 왜 미국 땅에 발을 딛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중대 범죄자'가 되어 수많은 인종이 뒤섞인 세상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그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더구나 '존 에프 케네디'라 함은 미국의 대표적인 훌륭한 대통령일 텐데, '미국 놈'들은 그런 분의 이름을 내 건 공항에서 '인류의 평등'과는 너무나도 괴뢰감이 있는 '불평등의 만행'을 저지르고 있으니...... 야, 무식하고 예의도 없는 놈들아! 나 같이 '법 없이도 살 사람'에게 그런 식의 대접을 하다니, 니들 손해지 내 손해냐?' 하는 심정으로, 겉으론 당당하고(인야 자신은 굳이 그들에게 주눅까지 들 필요는 없었으므로) 태연한 척도 했지만,
그런 수모를 당하고 있던 인야의 마음이 편할 리는 없었다. 아니, 정말 이를 득득 갈고 있었다.
'더구나 천성적으로(어릴 적부터 그래서 내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도 그런 내용이 나와 있다.) 나는 '준법정신'이 철처하고, 그래서 니들 법 어길 사람 역시 아닐 뿐더러, 추호도 그럴 생각도 없는 사람인데... 무식하고 우둔한 것들이, 정작 해를 끼칠 사람은 받아들여 별 짓을 다 당하고 살면서, 나 같이 선한 사람은 죄인 취급을 하며 발도 못 붙이게 하다니!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들! 오죽했으면, '시케이로스(Siqueiros. 멕시코 벽화 3 거장 중의 한 사람)'도, 나 같은 경우를 당한 뒤, '다시는 미국에 가지 않겠다'며 평생 미국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잖은가 말이다.'
어쨌든, 비행기를 갈아타고 유럽으로 날아가면서도 인야는,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어떻게 이놈들에게 앙갚음을 한다지?' 하는 심정이었지만, 그가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글쎄, 오직 한 가지 길이 있다면... 내가 정말 세계적인 화가가 되는 것이겠지. 그래서 그놈들이, '제발 미국에 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도록.' 하기는 했지만, 그건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리고 생각해 보면... 그 것 역시 자신의 운명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인야가 맨 처음에, 1990년에 외국으로 나가려고 할 때, '스페인'을 택하지 않고 '미국'을 정했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 당시엔 미국도 인야가 떠나고자 했던 한 후보지였고, 당시의 인야는 미국비자를 받을 좋은 조건 중의 하나인 '교사'라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이런 절차에 상관없이 미국에 갔을 테니까.
그러면서 생각해 보니 이제는,
'그래서 미국이란 나라가 지금 나에게 앙갚음을 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글쎄, 설사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제 와서 내가 스페인에 간 걸 후회한다는 건 아니다. 내 스페인 생활도, 지금 천금을 주고서도 바꿀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기억이니까.' 하고도 있었다.
뉴욕 공항에서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밤새 날아와 벨기에 브뤼셀 공항에 기착했다.
비행기를 갈아탈 때마다 스페인어에서 영어로, 다시 불어로, 이제는 독일어로 언어가 바뀌고 있었다.
미국에서 너무 시달린 탓인지 인야는 정신이 없어, 하마터면 소중한 그림 뭉치를 잃어버릴 뻔해...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놀란 가슴을 추슬러야만 했다.
겨우 도착한 유럽은 생각보다 덜 추웠지만,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지... 뱃속이 울렁거리고 부글거리기까지 했다.
피터 씨 부부가 함부르크 공항에 마중 나온다고는 했지만, 잘 모르는 외국인 집에 가서 지낼 일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원래 그것이 이번 출타의 목적일 수는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11시 대낮에 도착한 '함부르크' 공항엔 피터씨의 부인 '루티(Lutti)'만 나와 있었다.
피터씨는 일하는 중이라 혼자 나왔다는 루티는, '지프(Jeep)' 차를 운전하기에... 인야는 속으로 놀랐다.
겨우 딴 면허로는 운전을 할 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차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인야지만, 그래도 갖고 싶은 차가 있다면 바로 그 차였는데... 그것도 여자인 루티가 직접 운전하는 모습에, '멋지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다 못해 그 차에 실제 타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게 인야의 함부르크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서며 본 집들은 멕시코와 달리 무척 깨끗했고, 세련된 옷차림에 모자를 쓴 사람들의 모습에서 북유럽 도시의 인상이 깊게 박혔다.
피터 씨의 아파트는 강가에 위치한 고급스럽고 전망이 좋은 주거지였다.
거실 창 너머 고즈넉한 풍경과 아늑한 실내 분위기에 인야는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는데, 그래도 현관 복도에 자신의 자화상 석 점이 조화롭게 걸려 반겨주는 모습에... 깊은 감동과 나르시시즘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루티는 자신도 가게에 나가야 한다며, 인야에게 샤워를 하고 편히 쉬라며 바로 나갔다.
샤워를 하고 한 시간 반가량 잠을 자고 일어났으나, 집이 좋으면서도 낯설었다.
그리고 짐을 정리하면서 보니, 멕시코에서 힘들여 가져온 테라코타는 안타깝게도 다 깨져 있었다.
"아......"
수습할 수 없게 부서진 작품들을 마주하며, 인야는 가슴이 깨질 것 같은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정성 들여 만들고 포장했는데, 비행기 화물에 맡긴 것이 화근이었을까?' 하는 후회와 억울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저녁에 피터씨가 직장에서 돌아와 환영 저녁식사가 있었고,
인야는 그들과 편하고 맛있는 저녁을 먹은 뒤 멕시코에서 가져온 작품들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들 역시 깨진 테라코타 작품을 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이었지만, 사진으로 가져온 그 외의 다른 작품들을 보면서는... 감탄을 연발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져오다 깨진 작품들이 더욱 아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피터씨는,
"인야, 너는 테라코타 작품을 이제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앞으로 얼마든지 좋은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낼 테니, 여기서 실망은 멈추는 게 좋겠어. 그리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론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거나, 이렇게 작품 사진을 먼저 보여주는 식으로 구매자와 거래를 해도 될 것 같고......" 하는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다음 날 인야는 피터 씨와 시내에 나가 화구들을 사고 한 화랑에 들러 다음 주 월요일에 자신의 자료를 보여주기로 약속을 잡았다.
코끝에 와닿는 함부르크의 싸늘한 공기가 설렘을 주었지만, 날씨는 이내 안개 자욱하고 축축한 겨울로 바뀌었다.
집으로 돌아온 인야는 혼자 남은 거실에서 새로 산 스케치북을 펼쳐 창밖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저녁에는 한국의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렸고, 피터 씨 부부의 세심한 배려를 느끼며 이들과의 인연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
'독일 사람들이 확실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진지하고 실제적인 사람들인 줄은 몰랐다. 어서 기회가 와서, 이들에게 진 신세도 보답해야 할 텐데......'
그러다 인야는 그 집에서 한국미술의 거장 '박수근' 화백의 진품을 마주하는 경이로운 경험을 했다.
한국에 있을 때 피터씨가 인야의 그림을 사갈 때, 자신이 옛날에 박 수근 화백의 그림을 살 때의 얘기를 해주었었는데...
1960년대에 자신이 박 수근 화백의 집까지 찾아갔는데, 물론 그 때는 박 수근 화백은 돌아가신 뒤였고, 그 분의 부인을 통해 열 몇 점의 작품을 샀다고 했었다.
그래서 인야가 조심스럽게 그 작품을 보여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피터씨는 너무나도 쉽게, 그저 서류 봉투 안에 넣어 보관 중이던, 박 수근 화백의 조그만 스케치 일곱 점을 가지고 나와 보여주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진품'이었다.
인야가 미대를 나와 '화가'랍시고 이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도, 미술관에 걸려있는 작품을 제외한 '거장의 진품'을 이렇게 사석에서 대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물론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림을 만지는 것까지도.
그러니까 박 수근 화백이 직접 그 종이를 만지고 그렸던 그림을 만지면서는,
'박 수근 화백님! 제가 한국도 아닌 독일에 와서, 이렇게 화백님의 진품을 만질 줄을... 어찌 감히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하고 경의를 표하기까지 했겠는가.
그런데 피터씨는, 그 작품들 외의 수채화, 스케치 등 몇 점은, 자신과 이혼한 전처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루티와는 재혼한 사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피터씨는 전처와 이혼하면서, 그 전처와 박 수근 화백의 집까지 찾아가서 구입했다던 박 수근 화백의 작품을 반반 나누었다는 얘기도 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야는 은근히 욕심도 생겨, 피터씨에게... 그 전처가 가지고 있는 작품들도 좀 자료로 남겨둘 수 없겠냐고 물으니,
피터씨는 난색을 표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인야가 더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튼 이들은, 한국 화랑가의 큰손이자 유명 화랑 주이기도 한 '박 00'씨의 중개로, 박 수근 화백의 4호 그림을 3천만 원에 판 1986년 영수증도 가지고 있는 등... 한국의 예술과도 깊은 인연이 있음을 인야에게 보여주었다.
그런 하나 하나의 뒷얘기에 깊은 감동을 받고 있던 인야에게 피터씨는 갑자기,
"인야, 우리는 너도 이 화가처럼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그래서 니 작품을 샀던 것이고......" 하는 것이었다.
인야는 갑자기 말문이 콱 막히면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말도 감동이었지만.
"그런 내가... 한국이거나 외국이거나, 작품 하나 제대로 팔지 못해... 맨날 실패만 하고, 이렇게 떠도는 신세가 돼 있는 데도요?"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래도 너는 성공을 할 거야! 우리는 그렇게 믿어." 하고 피터씨가 확신에 젖어 말을 하니,
"고맙습니다......" 하는 말밖에, 인야는 더이상 말을 덧붙일 수 없었다.
그러면서 인야는 생각했다.
'이들 말대로, 이들은 나(내 작품)를 신뢰했기 때문에... 내 그림을 사갈 때도, 한국에서 몇 차례 '항동 작업실'을 방문하면서까지(그들이 옛날 박 수근 화백의 그림을 샀던 때와 똑 같은 방법으로) 그림을 사갔던 것이로구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천만금을 얻은 것보다 더 기쁘기도 했지만,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두렵기도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인야는 스스로 다짐을 했다.
'아무튼, 한 가지 너무나도 분명한 건, 나는 나만의 작품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나만의 작품 세계가 정립이 됐다고 말할 수 없는 화가이니, 앞으로도 끊임없이 내 길을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분들의 말이 다 헛될 수밖에 없을 터고, 내 작품의 가치도 떨어질 것이니, 이분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정말 각고의 노력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니 이 칭찬에 너무 들뜨지 말자. 이분들의 말은 나를 시험하는 것일 뿐이다. 거기에 속아넘어가면, 그 길로 나는 천길만길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
일요일, 아침을 먹자마자 피터씨 부부는 인야를 데리고 시내 안내를 했다.
얼음이 둥둥 떠내려가는 겨울 항구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철새들, 그리고 추운 날씨에도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이 이채로웠다.
그런 뒤 시립미술관을 둘러보고, 또 루티 가게에도 들러 보았다. (옷 가게였다.)
오후 4시 반이 되자 날은 어두워져 도심의 가게들은 불을 밝혔고, 그들은 집에 돌아왔다.
피터씨는 인야에게 자꾸만 스페인에 전활 걸으라고 했는데, 인야는 신세지는 게 싫어... 그 집 전화 사용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막상 누리아에게 전활 걸어도 받지를 않았다.
저녁에는 한국 식당 '소나무'에 가서 먹었다.
물론 피터씨가 인야에게 한국음식을 먹게 하기 위한 배려도 있었지만, 우선은 인야와 한국인을 만나게 하여 한국사람들끼리 정보교환을 해보라는 의도가 컸다.
아무튼 인야는 한국식당에 가서, 공교롭게도 같은 또래이던 식당 주인과 여러 얘기도 했고, 그의 호의적인 태도에 기분이 좋아진 상태였다.
그렇게 집에 돌아온 인야는, 이들 부부에게 '깜짝 쇼' 하나를 연출했다.
전날 그렸던, 그 집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화(제목: 함부르크 풍경)를 감사의 보답으로 선물했던 것이다.
그림의 존재를 모르고 있던 두 부부는, 깜짝 놀란 건 물론 그 그림을 너무 맘에 들어했기에...
인야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고도 있었다.
'나야 뭐, 어차피 이 집에 머누는 신세도 갚을 겸, 내 스스로도 조금 가볍게 이 집에서 지내기 위한 생각이니까......'
인야에게 조금씩 현실 문제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피터씨 부부는 큰 관심을 가지고 인야 일에 적극적이었는데, 매 식사 때마다... 인야의 작품에 대해 그리고 독일의 미술계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비록 이들이 미술 전문가가 아니지만, 많은 지식과 자기들 나름대로의 예술에 대한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한 번은 인야에게,
"인야, 그런데 너의 그림은... 너무 개인적이지 않아?"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야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것은 어쩌면 인야의 문제 아니냐고, 그러니 세상을 더 배우라고...... 조언까지 해주었다.
인야는 그들 얘기를 심사숙고 하기로 했다.
인야가 독일에 와서 바로 느낀 점도 있었다.
독일 사람들 표정이 너무 무뚝뚝하다는 것이었다.
멕시코 사람들과 비교가 돼서 그런지, 그 차이가 매우 두드러졌던 것이다.
그런 것으로 인야는,
'아,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다 다르구나. 이 세상은 넓고도 다양하구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월요일에 인야가 찾아간 화랑의 반응은 냉담했다.
추상 표현을 선호하는 그들의 취향과 인야의 그림은 맞지 않았고, 지명도가 없다는 이유로 그룹전 정도를 제안받았을 뿐이다.
물론, '어떤 경우라도 담담해지자'는 각오가 돼 있던 인야였기에 그러려니 하긴 했지만, 실망이 아닐 수 없었다.
또 하루는 함부르크에서 활동 중이라는 한국인 화가 ‘노’ 교수를 만나 보았다.
그녀의 말을 들어도 희망적인 것보다는 그 반대쪽이라, 인야는 역시 조금씩 초조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인야의 인상이 좋다는 말과 자신은 거의 한국사람과 접촉을 하지 않는다면서도... 인야를 한 번 저녁에 초대하겠다기에,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함부르크에 온지 며칠이 지났어도 일은 긍정적으로 풀리지 않았고, 남의 집에 머물며 도움을 청하는 자신의 처지가 초조하고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인야는 혼자 집을 나와 항구 쪽으로 걸었다.
을씨년스런 함부르크 항구는, 얼음이 조류를 따라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유람선(식당 배)이 손님을 부르면서 인야에게도 타라고 하는데, 살짝 웃어주는 것으로 의사를 표하고는 그곳을 떴다.
물가가 비싼 곳이라 경제력이 없는 인야로서는 전화 카드 교통비 지불 외에는 아직 돈을 써보지도 않은 상태였다.
다행히 피터씨 집에서 먹고자니 다른 곳에 돈 쓸 일이 없기도 했지만, 쓸 수도 없는 처지였으니까.
시내에서도 그저 눈 쇼핑만을 했을 뿐, 인야는 항구를 따라 내내 걸어... 시내로 돌아왔다.
어쩐지 의기소침해지는 기분이었다.
'아, 여기서마저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나에겐 또 잔인한 고통이 될 텐데......'
저녁에 피터씨가 돌아와 조금 긍정적인 소식을 전해주었다.
엊그제 들른 화랑주와 통화를 했는데, 그는 인야의 먹물로 그린 간단한 그림에 관심이 많았고, 테라코타 작업도 좀 발전시킨다면... 전시를 한 번 마련해 볼 생각도 있어 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야가 지명도가 없기 때문에 여기 화가 두어 명과 함께 그룹전이라도 생각해보는 것 같기도 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룹전이면 어떠랴? 우선 나에겐 이들에게 내 작품을 보여 줄 기회가 필요한 것이니......'
그러다 이틀 정도, 낮인지 밤인지 모르게 음침한 날이 이어졌다.
함부르크 기후의 특징인 쓸쓸하고도 우울한 날씨라는 것이었다.
인야는 종일 방에 처박혀 종이로 찢어 붙이고 오려 붙이는(꼴라지 형식) 작업을 했다.
원래는 우체국에 나가 볼 생각이었는데, 꼴라지 작업 하느라 온 종일을 집에서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피터씨 부부의 반응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인야는 그 작업을 조금 더 발전시킬 생각이었다.
피터씨 부부의 의견도, 우선은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그림을 해서 보여준 뒤... 자리가 잡혀가면서 인야 자신의 작품을 내놓는 게 좋은 작전일 거라는 조언도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날이 쾌청하게 맑았다.
이곳 함부르크에도 이런 날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의 맑은 날이었다.
'이런 날도 있어야, 여기 사람들도 살 수 있겠지......' 인야는 생각했는데,
피터씨 부부와 함부르크 북쪽으로 120여 Km 떨어져 있는 '란데스 박물관(Landes Museum 한 그림 수장가가 800여점의 그림을 기증해 전시한다는)’에 갔다.
북부 독일의 너른 평야지대의 아우토반으로, 믿기지 않는 좋은 날씨에 여행을 한 것도 좋았다.
박물관에는 ‘다리파’ 그림들이 상당히 있었는데, 그 중에는 처음 보는 반할 만 한 그림도 여럿 있었고, 인야는 내내 흥분된 상태로 박물관을 돌았다.
반절도 못 본 것 같았는데 문을 닫기에, 그들은 다음에 한 번 더 오기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러면서 인야는 생각했다.
'독일은 역시 선진국 답구나. 어쩔 수 없이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이들의 강요나 부탁이 아닌 내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도 있구나.'
그 다음 날 아침, 루티가 시간이 있다면서 자기 초상화를(전에 인야가 약속했던) 할 수 있냐고 물어와서... 인야는 바로 일을 시작했다.
그랬던 것이 하루 종일 걸렸고, 여전히 끝내지는 못했다.
밑그림은 연필로 했지만, 종이를 찢어붙여 하다 보니... 시간이 여간 잡아먹히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괜찮게 진행중이라, 인야의 기분도 긍정적이었다.
인야는 원래 다음 월요일에 바르셀로나로 가려고 했는데, 피터씨 부부가 그날 밤에 또 다른 손님을 초대할 예정이라면서... 어쩌면 인야에게도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고 잡아서, 그 일도 끝낸 뒤 가기로 날을 늦췄다.
그리고 그날 인야는 밖에 나가 또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은 마침 가지고 있던 인야의 ‘종이 찢어붙이기’ 작품을 보더니, 얼마냐고 묻기까지 할 정도로 적극적이자 즉석에서 관심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들 독일인들은 언제라도 가격만 맞으면 그림을 살 의향을 가진, 잠재적인 '예술 소비자'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곧, 예술가에게도 그만한 기회가 있다는 뜻일 수도 있어서... 인야에게도 긍정적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인야는 또 다른 화랑에 갔다.
마치 ‘보따리 장사’처럼 이것저것 챙겨가지고 가서 자신의 작품을 보여준 뒤 그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그 화랑 측은 이미 다음 해까지 계획이 꽉 잡혀있어서 당장은 인야를 위해 뭔가 특별한 전시 같은 걸 해 줄 수 없다며, 혹 무슨 일(기회)이 생기면 연락을 하겠다고는 했다.
그런 반응은 인야의 실망이 클 것에 따른 인사치레일 수도 있기에, 인야는 포기하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인야는 씁쓸한 마음으로 멕시코에서 했던 ‘기타치는 사람’을 '종이 찢어붙이기'로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루티가, 다음 월요일에 초대하기로 했던 사람들이 시간이 맞지 않아 목요일로 연기했다고 해서, 인야의 바르셀로나 행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야는 함부르크에 와서도 일 속에 파묻혀 지내고 있는 꼴이었다.
물론 놀러오지 않았기 때문에 긍정적인 현상이긴 해도, 좀 지나치지 않나 싶기는 했다.
'아, 오늘도 일은 많이 했는데... 이것도 다 팔자 같다.' 하고 혼자 푸념을 내뱉기도 했다.
그렇긴 했지만, 인야는 어느새 열댓 점의 작품을 완성하고 있었다.
인야가 함부르크레 온지도 보름이 되었고, 그 사이 2월이 되었다.
하루는 지난번에 갔던 한국식당 ‘소나무’에 가서 주인인 '서00' 씨를 만났다.
거기서 세 시간 정도 그와 여러가지 얘기를 했는데, 그는 인야에게,
그렇잖아도 외롭던 차에 인야 같은 사람이 여기 함부르크에 온 것이 너무 좋다면서, 가능하면 인야와 오랫동안 함께 교류하며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여기 함부르크에 자기네가 얻어놓은 가게 하나가 비어 있는데, 인야가 거기서 작업할 의향이 있으면... 생각해 보라면서, 집세는 자기 조카 둘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것으로 대신해도 된다는 제안을 해오기까지 했다.
인야는 깜짝 놀라기도 했고, 약간 당혹스럽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글쎄, 나와 동갑내기라는 이 사람은 또, 무슨 인연인지는 몰라도... 나를 너무 좋게 봐주는 것 같아 내가 어리둥절한 상탠데, 내가 만약 독일에 온다면, 분명 좋은 관계가 될 법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인야는 이제 서서히 바르셀로나로 향할 준비를 해야했다.
다음 날, 인야가 아침에 조금 늦게 일어났는데,
피터씨가 슬그머니 한 전화번호를 주는 것이었다. 전에 인야가 박 수근 화백의 다른 작품을 볼 수 있느냐는 물음에 따른 답이었다. 그러면서 피터씨는, 현재 처인 루티에게는 비밀로 하라는 말도 덧붙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결국 그 전처와 통화를 하게 되었고, 또 바로 오라고도 해서... 인야는 그 집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에 들어가면서부터 인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3층 건물에 그림들로 빽빽한, 무슨 '화랑'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박수근' 화백의 그림 네 점과, 한국 민화 등, 한국의 소중한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그녀는 마치 자기 집을 박물관(미술관)처럼 꾸며놓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이 의사라는데, 두 부부가 평생을 수집한 그림들이 집안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까다로운 성격인 것 같았던 피터씨 전처는, 차츰 인야와 대화를 나누면서는... 한국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감성적인 성격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친밀감도 주고 있었다.
그렇게 인야는 박수근 그림을 슬라이드 필름에 옮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다음날에 인야의 작품 자료들을 가지고 다시 와 달라는 부탁까지 받게 되었다.
그리고 저녁에 루티의 손님들이 왔고, 저녁을 먹은 뒤 인야는 자기 그림들을 보여줬고...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잔뜩 기대를 걸었던 그들로부터는 별 큰 반응을 끌어내진 못했고,
오히려 피터씨 전처로부터의 호응은 인야에게 또 다른 기대감을 갖게 해주는 등...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인야는 피터씨 전처 집을 재차 방문해, 자신의 자료를 보여줬다.
그분은 몇몇 작품에 관심을 갖고 가격도 물어보는 등, 역시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한 것도 인야의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서, 인야가 언제까지 함부르크에 머물 것인가를 물어왔는데,
앞으로도 계속 연락하며 지내자면서... 시간이 맞다면(인야가 운이 좋다면) 자기가 아는 여기 미술학교 디렉터를 소개해주겠다고도 했다.
인야는 지금 상황이 불확실해서 뭐라 확답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생각지도 않았던 또 한 사람을 알아놓은 것만도... 커다란 힘이 되는 기분이었다.
오후에 집으로 돌아온 인야는, 짐 정리를 했다.
바르셀로나로 떠날 준비였다.
'아, 바르셀로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