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학덕이 높으신 교수님을 모시고 해마다 새봄맞이 특별법회를 주관해 온 대한 불교 조계종 승보종찰 송광사 LA 분원인 고려사(회주:현호스님,주지:범경스님)에서 무자년 출가재일과 열반재일에 즈음하여 박성배박사(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부룩대학 불교학교수) 를 초청,“불교의 선(선)사상, 깨침과 닦음을 중심으로” 라는 주제로 지난 3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에 걸친 특별법회를 마련하여 평소 불교 공부에 뜻을 둔 많은 사람들에게 명강의의 감명을 선사하였다.
특별히 현호스님께서 3일 내내 친히 법석을 열고 닫으시며 박성배교수님과의 오랜 인연을 소개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이 법석을 도왔으며 박교수님은 이 무차법회에 참석한 청중을 위해 강의내용을 미리 프린트해서 배부하였고 그리고 여러가지 개인사정으로 부득이 참석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법회에 동참하는 기회를 제공하느라 범경스님은 고려사 홈피인 www.koreasah .com에 강의 전문과 법회장면 사진을 그날 그날 올려 명교수 명강의의 혜택을 널리 베풀었다.
법회에 참석한 대중은 십인십색(十人十色)이었으나 미국대학에서 31년강의하신 고급품격의 지성과 달통한 자비의 감성으로 아낌없이 법문을 하시는교수님에게 그야말로 말그대로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잡음하나 없이 한결같이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법회청중의 한 사람이었던 강광명화 포교사는 첫날 법회시간에 박교수님이 너무나 쉬운 말로 강의를 해서 좀 실망스러웠는데 9시쯤되어서는 무슨일이 있어도 내일 꼭 와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강의가 아주 재미있고 배울 것도 많았으며 3일째 되는 날 함께 온 남편은 강의 듣고 뿅갔다”라고 말하며 이러한 하이클래스 강의를 듣게 된 기쁨이 말할 수없이 큰 만큼 곧 더 듣고 싶다는 큰 아쉬움을 남겼다고 했고 또 가슴에 남는 것은 교수님께서 공부를 진짜 하신 분이라는 생각과 “인간은 사람다워야 된다”라고 하신 말씀이라고 했다.
LA재가불자 선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마하선원의 김재범 선원장은 아예 선원 일정을 다 미루고 선원의 도반들과 적극적으로 이번 특별법회에 치중하였다.
박교수님이 개인적으로 김선원장을 모르지만 1998년 백양사에서 개최한 무차대회에 논문공모가 있어 그 논문을 쓰기 위해 박교수님저술을 모두 독파하였고 또 그 논문공모에 응모하여 선정이 된 인연으로 그 때 무차대회에 참석하여 힘찬 비판을 서슴치 않으셨던 교수님을 뵌적이 있는 김선원장은 누구보다도 이번 특별법회에 가슴두근거리며 참석하였다. 쉽고도 유연하게 전개하시는 강연을 들으니 그간의 연륜탓인지 대중강연의 특성탓인지 10년전 학회에서 뵙던 모습과 다르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느꼈고 가능하면 이러한 법회가 자주 열렸으면 싶고 선원의 도반들도 모두 너무나 좋아하였다고 말했다. 바램이 있다면 3일 강의도 훌륭했으나 3일은 충분하지 않다 싶고 별도로 자리를 마련하여 더 깊이있는 실천과 체험방법에 대해서도 말씀을 더 들을 수 있었으면 하는 점이라고 했다.
그리고 법보선원의 정정달선원장과 신도들도 본원의 일요정기법회를 취소하고 나날이 휘발유값이 급등함에도 불구하고 참된 선수행 체험을 치열하게 한 노학자와의 소중한 만남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서 오렌지카운티에서 부터 먼길을 차를 타고 와서 참석하였으며 법문이 참으로 유익하였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한 태고사 신도인 문청우(文靑牛)거사는 박교수님이 직접 출가 수행한 경험을 토대로 살아있는 말씀을 하시리라는 기대를 갖고 이법회에 참석하였다. 문거사는 “부처님 말씀에 옛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도 따르지 말고 경전에 씌여 있다 해서 따르지 말고 부처님말씀이라 해서 따르지 말고 본인이 체득한 것만을 믿어라 하셨다 ”라고 말하며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인도의 간디가 살았을 때 , 하루는 한 모자가 아주 먼데서 부터 간디를 찾아 와서 그 어머니가 간디에게 부탁하기를 우리 아들이 설탕을 너무 좋아하니 이아이에게 설탕은 몸에 해롭다고 한말씀만 해주세요 하니 간디가 2주일만에 다시 오라고 해서 그 모자는 먼길을 갔다 다시 왔다.간디가 설탕을 먹지말라고 그제사 말하자 그 어머니가 항의했다. 왜 그말을 2주전에 진작하지 않았냐고 그러자 간디가, “ 사실 나도 설탕을 좋아해서 내가 2주 설탕을 끊어봤더니 확실히 몸이 좋더라” 했다는 그 분명한 체험의 가르침이야말로 바로 와 닿는다고 했다. 앵무새 같은 불교학자가 아닌 온몸을 던져 실참 경험을 한 수행자인 교수님의 진면목을 평소에 흠모하였던 대로 실제로 강의를 들어보니 역시 말씀이 생생히 살아있는 점에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참선수행을 하고 있는 시인(詩人) 김한주씨는 이번 법문을 듣고보니, 사실 학자로서 어렵게도 할 수 있는 내용을 소탈하게 우리생활에 필요한 진리가 무엇인가를 들어 보이신 <이런분이 계시다>는 자체가 너무나 좋다고 하였다. 참선이 별난 일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깨고 깨치는 것이 선(禪)의 생활화가 아닌가 알아차릴 수 있었다고 말했고 살아있는 불교를 전달하시는 교수님을 더 모시고 싶은 안타까움이 남는다고 했다.
남가주에서 불교를 심도하게 공부하고 있는 신행 단체인 우담바라회 회장인 송도광거사는3일 강연중 이틀을 들었으나 첫날의 내용을 반복 요약해 주셔서 연결에 문제가 없었다고 말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불교학자의 양변을 겸비한 강연이 인상적이었으며 이(理) 와 사(事)가 분명하게 합치되게 설명해서 아주 와 닿았다고 했다. “믿음(信)은 사람 인 변에 말씀언자라 사람의 말을 믿는 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부처임을 믿는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우리 모두는 부처라는 확실한 희망관을 피력하셨던 것이 공감이 갔고 대체로 불자로서 정체성이 부족해서 우물쭈물 가지고 있는 일반적 모호성을 확실하게 규명하는 계기였다고 말했다.
일반불자들이 가진 적대감,대립을 벗어나 적어도 불자라면 기독교의 장점도 인정하도록 기독교를 인용하면서 설명하신 점도 훌륭하였고 이와같은 법문을 좀더 많은 사람들이 못들은 것이 아깝고 그분의 불교관을 이해한 만큼 좀더 적극적 신행에 매진하겠다고 말하였다..
다음은 첫날의 강의내용을 간추려 본 것이다.
먼저 강의에 앞서 삼귀의례와 반야심경봉송을 집전하신 현호스님이 옛이야기를 하셨다. 박교수가 광주고 1회졸업생이었고 현호스님이 9회졸업생인 선후배관계로 당시 동국대학교 교수였던 박 교수가 성철스님 법문 듣고 발심하여 해인사에 출가하였을 때 마침 현호스님도 해인사에서 대중생활을 하던 시절이었다. 학교는 선배지만 절집안으로는 후학이었던 박교수님이 300여명의 대중 공양주를 3개월 하고 묵언을 틀때 현호스님이 “원조(박 교수의 법명)스님, 어느 것이 진묵언고?”물으니 원조스님이 “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이라고 하셨다. 3년 스님생활을 한 원조스님은 해인사 오백여 대중이 보는 앞에서 환계식을 여법하게 하신 후 환속하여 미국 텍사스 달라스의 남감리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버클리대학에서 박사학위받고 뉴욕 주립대학교 종교학과 불교학교수로 30년 후학을 지도하며 보조스님의 점수사상을 제창, 현대 한국철학사의 돈점논쟁을 주도하는등 30년동안의 공부의 총집결을 선보일 것이라고 박교수님을 소개하였다
교수님은 현호스님께서 너무 소개를 잘 해주어서 상품보다 포장이 좋으면 나중에 실망할까 두렵다고 말하면서 미리 나눠 준 강의 내용도 여기 청중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고 평소 글쓰는 식대로 쓴 것이니 그대로 읽어 보면 되고 오늘 강의는 생각나는 대로 하겠다고 전제한 후, “ 1969년 3월 19일 미국에 도착하니 그당시 못살던 한국에 비해 깨끗하고 모두가 잘 살아 놀라웠으며 한국에서 동대교수로 재직하던 1년 봉급보다 석달 여름 방학 허드렛일 품팔이 수입이 더 많았던 점, 모르는 사람도 길에서 마주치면 미소짓는 풍속등 여기가 천국인가 싶던 생각도 한학기 지나고 1년 지나니 없어지고 미소의 이면이 의심스러워 졌다. 세상 모든 것이 겉보기와 다르더라. 이 말은 한국사람이 더 좋더라는 것은 아니고 미국인이 천사가 아니더라는 것 일 뿐이다. 또 신학을 구약 신약 3년을 공부해 보니 전혀 이해가 안 되던 하나님,신(神) 개념에 변화가 왔다. 아 저게 이런 뜻이었구나 모르던 것을 아니 환희심이 났다. 그때 열심히 공부하는 나를 보고 30명 되던 한국인 동급생들 사이에 불교학교수 전직승려가 개종했다고 소문이 났으나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하느님이 단어도 다르고 지리 사회 역사가 한국불교와 모든 것이 다른데 불교를 봤더니 불교에 그것이 있어 기뻤다. 남을 이해하면서 나를 더 아는 현상이 내마음속에서 정리 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피상적 사회적 관습 관찰이 참 위험하구나. 남을 안다는 것이 자기를 아는 데 중요함을 느꼈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 , 지구촌시대,다원화, 복수시대다 . 하나의 원칙으로 사는 사회는 지났다.
미국에 온 것, 신학교에 다니면서 내 종교가 아닌 바올서간집, 요한신학, 폴신학을 공부한 것이 참 잘한 일이다. 자기와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자기와 다른 종교문화를 배워 종교세계가 깊어지고 자기 인생 자체가 깊어져야 하고 지식이 아닌 자기 인생이 깊어 진다는 것은 자기가 용납할 수 없는 남을 우선 존경하는 일이다. 일체중생 다가 불교인이니까.” 라고 말했다.
“ 동국대학에서 교수생활 하는 데 내가 모르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자각에 이 무의미한 일에 회의를 느꼈다. ‘깨달았다’는 지식으로 알았으나 아직 행동으로는 옮겨지지 않은 상태고 ‘깨쳤다’는 지금까지의 잣대가 부서져버린 것이며, 세상을 보는 시각,사고방식,종교관이 변한 것,새로 태어난 것의 이름이다. 깨친 다음에는 옛 잘못을 그대로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한국말이 참 종교적이다.
“깨침(긍정적, 건설적)) ”과 “깨짐(부정적, 파괴적)” 은 “깨다”가 어원이며 잘못된 자기가 부서져 없어짐임으로 반불교적 행동은 깨침이 아니다.
한 예로 자기 체험없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베스트셀러 책을 쓴 저자가 현실적 인생문제에 봉착하게 되어 그가 그책의 저자인 줄을 모르는 어떤 신부님께 찾아가 상담을 하자 ‘하나님의 사랑’이란 책을 읽어라. 그 글을 읽고도 변화를 못하면 구제불능이다. 라고 했다고 한다. 이게 사람이다. 깨쳐야지,깨치기 위해서는 자기가 깨져야 한다. 잘난 맛으로 사는 심리상태로는 종교세계를 모른다. <자기가 깨졌다>는 것에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이 나에게는 성철스님이었다. 깨침의 세계란 무디어 못쓰게 된 칼을 1,000도 용광로에 넣어서 녹이고 망치로 두들겨 명검을 제조하는 작업 같은 것이다. 아내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으나 출가 경험은 나에게는 정말 잘한 일이였다.”고 말했다.
박교수는 1933년 전남 보성에서 출생하여 청년이던 시기는한국 현대사의 수난기로 당시 의대생이던 그가 착한사람은 상하고 악한사람이 득세하는 사회현실에 속을 끓이다가 급기야 상기병이 들었는데 그때 출가전 시인이었던 어느스님의 책 서문을 보고 그 말에 크게 동의하고 그말 때문에 불교에 반했다. 즉 “불교는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가 아니다”는 말을 수긍한 그 과오가 10년갔다고 말하며 첫 단추를 잘못한 경험을 설명하여 청중들의 공감을 얻었다.
“그 말에 집착해서 지내다가 동국대 사표 내고 해인사 에서 출가하고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600명의 대중이 일사불란하게 예불 정진하는 모습을 보고 “불교야 말로 믿음의 종교”라는 것을 알고 잘못된 믿음을 고치게 되었다. 이 세월이 10년이 흘렀다. 불교에서는 인간관계를 통해서 믿음을 가르친다. 즉 스님과 제자와의 관계에서 제자가 스님을 믿는 그것이 믿음이다. 과거 큰스님들이 제자를 훈련시키면서 믿음을 가지게 하는 가르침이 독특하다. 출가하면 스승과 함께 사는데 한철 지나면 스승의 단점이 보이고 존경심이 없어져서 제자는 스승과 불교를 떠나든가 스승 밑에서 버티든가 양자 택일한다. 버티면 스승이 변하기 전에 자기가 변한다. 지는 사람은 자기의 잣대를 버리고 그대로 받아드린다. 내가 내 잣대를 버리면 내 세계가 커져. 자기가 변했기 때문에 자기가 부처가 됐기 때문에 부처님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불교믿음은 그때 생긴다. 자기의 독특한 업 때문에 충돌하다가 자기가 깨지면서 일체중생을 부처님으로 보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깨침이라고 하고 다시태어나 사는 것을 닦음이라고 한다. 이 이상의 기도,불공이 어디 있나?”
박 교수는 첫날 강의를 통해 불교공부에 있어 첫 단추를 잘 끼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으며 또 우리시대의 도처에서 믿음이 사라진 불신의 시대에 살고있다고 진단했다.
보리화 / LA주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