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회상
전쟁의 피해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1956년 서울은 각 처에 피난민들의 촌이 꽤많았다.
맨몸으로 북 쪽에서 피난을 나온 수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젠가 고향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어쩔 수 없이 서울에 거주하게 되었지만 거주할 집이 없어,
피난민들은 기존 남쪽의 사람들 중 본래 돈이 있던 사람들과,
전쟁의 틈새에서 돈 좀벌은 이들이나,
북에서 재물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이 집을 짓고 남은 부산물이나,
폐자재, 또 몰래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내어 종이같이 얇게 켠 판자로,
혹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각 종 종이 박스에,
비가 스미지 않도록 폐기름을 발라 말려,
그것으로 더위와 추위를 피할,
집이라고 부르기에는 어색한 거처를 마련해 살았다.
이런 집 아닌 집을 가리켜 학고 방 이라고 불렀다.
그러한 동네들 중 영등포당산동의 진주 소주주정공장과,
일본의 패망 전에 부자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그 당시의 신식가옥들이 마주하고,
서로 마주 바라보는 도로의 삼거리는 동 쪽으로가로 지르는 포장도로가 있고,
공업지대의 철길이 이어져 깔려 있어 공장들과
미군공병부대의 물자들을 실어 날랐고,
철길너머에는 미군기지의 공병부대가 있었으며,
미군 공병부대와 공장들의 진입로였던, 일반도로인 200M 길이의 도로는,
폭 12M의길을 사람이 겨우 지나갈 좁은 통로만 남기고 피난민들의 동네로 바뀌어,
학고방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통행할 수 있는 길이라야 폭이 2M 채 못 되는
좁은 길을 사이로 약 팔십 여 호 정도 되는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그 난민촌의 중앙쯤에(모든 학고 방이 방하나 부엌하나로 돼 있다)
그래도 비교적 깔끔해 보이고 장독대까지 있으며,
예전에 한 공장의 정문이었던 자리라 공간이 있고,
평상마루까지 있는 학고 방이 하나 있는데,
오월의 아침 해가 따뜻하게 비추는 날,
9 살 정도의 예쁘장한 소년이 그 마루에 누워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어른처럼 양팔로 목을 받치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눈도 깜박이지 않는다.
그 아이에게 모친인 여인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다가오며,
그 깜찍한 아이의 모습에
가슴 가득한 사랑을 느끼며 빙그레 웃음을 짓는다.
아이가 자신이 가까이 온 줄도
모르고 정신을 하늘에 뺏긴 채, 멍 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며,
아이의 머리쪽으로 가서 눈치 못 채게 재빨리 양손으로 눈을 덮는다.
‘저 하늘의 끝은 어디일까? 끝이 있다면 다음에 무엇이 있을까?
엄마도 나처럼 궁금할까?
아직 동무들이 모일 때 아니지?
오늘은 깡통 술래잡기를 하기로 했는데~
애들은 나를 너무 부러워하는 거 같아.
그런데 나는 내가 조금도 동무들보다 나은 것이없다고 생각이드는 걸,
왜 부러워하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동무들과 같이 신나게 놀고나서 집에 오면
왜 그렇게 즐거웠던 것이 다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지?
아! 이게 누구지?’
“정길아, 너 또 넋을 놓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거야? 호호호
우리 아들 이리앉아라, 엄마하고 사진보자.”
“아이 깜짝이야! 엄마 놀랬잖아요,
와! 무슨 사진이 이렇게 많아요?
음! 그런데사진 속의 이 아이는 누구예요? 나랑 닮은 것 같아요.”
“너의 아버지의 어릴 때 모습이야.”
“응! 아빠도 어릴 적이 있는 거예요?”
“그럼, 저기 앉아계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너와 같이 어릴 때가 있었지.”
“그럼 저 할아버지는 몇 살 이예요?”
“어른들 나이는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하는 거란다.
저 할아버지 연세는 올해 61세 환갑이시지,
몸이 무척이나 건강하셔서 아직도 정정하시다.”
“길준네, 할아버지보다 오래 사셨어요?
두 분이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란친구라고 했어요.”
“북한의 개성에서 같이 자라나시고 동갑이시지,
이북에서 같이 넘어오셔서 친구로서 우애가 남다르셨는데,
길준이네 할아버지는 병이 드신지도 오래되고 많이 아프셔서
곧 돌아가시겠어.”
“그런데 엄마, 엄마나 아버지 사진은 안 그런데,
여기 있는 할아버지나 할머니 사진들은 왜 얼굴이 쭈글쭈글해서 보기 싫은 거예요?
저기 할아버지나 할머니도 또 다른 할아버지들도.”
“얘는 참! 누구나 늙으면 이렇게 되는 거야.
너도 나이 먹으면 이렇게, 요렇게 얼굴 주름이 생긴다고,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는 거야. 알았니?
엄마도 늙으면 이렇게 되는 거란다.”
“아야 아파요. 난 그러면 나이 먹지 말아야지, 그러면 안 늙을 거잖아요.”
“그러면 얼마나 좋겠느냐.
자, 교회가야지, 예배 끝나고 오면서 점심으로 짜장면 사줄게.
시장 들려서 네 옷도 사자.
엄마는 밖에 빨래 널고 교회에 갈 준비해야하니까
얼른 사진 치워서 서랍에 넣어라.
뭘 물끄러미 엄마 얼굴을 보고 있니? 정옥이 옷도 입히고 그래야지.”
“나 내일은 아침 반이라 숙제도 해야 하고,
동무들하고 놀이를 하기로 약속했는데 안가면 안 돼요?,
놀이에 빠지면 나중에 친구들이 나와 안 놀아 준다고요.
엄마만 가면 안 돼요?”
“아니 여태 숙제를 안 했어? 요전에도 안 해서 혼났으면서
너 또 매 좀 맞아야겠구나.”
“공책에 쓰는 것이 아니라,
구구단 육단까지 외워 오랬단 말예요,
엄마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래? 그러면 교회당까지 걸어가면서 엄마하고 같이 외우며 가자.
엄마가 가르쳐 줄게.”
‘에이! 난 걷는 거 싫은데,
동무들하고 노는 것보다도 하늘을 보며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제일 좋은 걸,
엄마는 그 것도 몰라, 구구단은 벌써 다 외우고 있다고요.
나누기도 할 줄 아는데.’
성장
수원의 한국 공군기지는 송탄의 K55 미군 공군기지에 비하면,
미국과 한국의 국방력이 어느 정도 차이 나는지 알 수 있는 척도였다.
수원 공군 전투단이 옛 미군들이 쓰던 무스탕 전투기와 헬기,
경비행기 몇 대 뿐인 것과 비교해,
미 공군 비행장인 이곳은 신예 전투기들과 폭격기, 헬기, 수송기, 공중방어용 대공포 등,
미공군과 육군 또 카추샤들로 드넓은 부대 안이 차고 넘치는 것 같았다,
미국은 이번 한국전쟁을 기회로
일본의 오끼나와와 더불어 한국의 송탄에도
아시아와 태평양의 제공권을 망라하기 위해 활주로 공사와 막사,
또 첨단 시설을 쉬지 않고 건설 중에 있었다.
그로인해 고려개발을 비롯해 많은 건설 회사들과 인부들,
또 그들을 상대로한 창녀촌과 미군 상대의 창녀들,
또 그들을 위해 빠 들과 술집, 상점들로 용산의 이태원과 더불어 큰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정길의 집도 서울에서의 생활을 접고,
K55 공군기지 활주로 주변의 시설공사를 하청 받은 아버지를 따라 송탄 쑥 고개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부도위기로 먼저 몸을 피해 야 된다며,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하고 아버지가 떠나고 나자,
정길의 가족은 때 아닌 고난을 겪었다.
그 후 몇 년째 소식이 없는 그를 마냥 기다리며,
정길은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고생을 하고 있었다.
학업을 중단한 정길이 이발관과 빵집 등 몇 곳을 거쳐,
그의 아버지와 동향 사람이 사장인 평양냉면을 전문으로 하는
평양옥의 배달꾼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적은 돈일지언정 벌어서 간신히 식구들이 식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영등포에서 살 때에는 학고 방에 살았지만,
그래도 주정공장을 다니는 정길의 아버지로 인해
집에 여유가 있어 나름 안락한 삶을 살다가,
송탄에 와서 사업을 하면서는 방이 세 개인 집을 전세로 세를 얻어,
그 동네에서 떵떵거리며 살게 되어서 부족한 것이 없었었다.
그 집을 사자고 하는 모친의 말에,
아버지는 좀 있으면 통일이 되어 북한으로 가면
좋은 집과 할아버지와 할머니 또 친척들도 거기 다 있으니,
여기는 임시로 사는 거라고 하며 마다했었다.
남에게 빚을 져 본 적이 없는 정길의 모친은 견디기 힘들었다.
빚쟁이들이 몇 번인가 와서 기웃거리는 것만으로 창피해서 밖에를 나가지를 못 했다.
내 집이라면 팔아서 빚이라도 갚으련만,
셋집이라 전세 돈을 빼어 월세 방으로 옮기고
나머지 돈으로 그럭저럭 살았지만 그도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빚쟁이들이 닥달을 않아 어찌어찌 지내다가,
남의 일을 해 본적이 없고 생활력이 없는 그의 모친이 손을 놓고 있어
정길이 나서게 되었다.
어리지만 장남이라는 책임감으로 인해서이다.
어려서부터 공상하기를
좋아하던 정길은 취직해서도 그 습관이 그대로였다.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사장님이라고 했었는데,
아버지는 우리를 이곳 송탄에 데려다 놓고 어디에 가신거지?
K 55오산 비행장에서 큰 공사를 맡아 하더니,
어느 날 실패했다 하고서는 행방을 감추시고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니,
마냥 아버지만 기다리며 살아야 하나?
생활력이 없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 하면서 언제까지 아버지만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 사는 것인가?
어째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왜 배는 고프며, 왜 여자를 보면 치마를 걷어 속을보고 싶고,
길에서고, 시장에서고, 남의 집이고 간에 탐나는 것이 그렇게 많은지,
모두 다 갖는다고 하면 행복할 것인가?
나도 나이 먹으면 저 늙은이들 같이 꼬부랑 거리겠지?
인생 육십이라는데,
내 나이 벌써 열일곱 그러면 앞으로 사십 삼 년 후면 늙어서 죽는다는 거야?
아! 싫다. 남 들은 학교를 다니는데, 중학교 2년을 중퇴하고만 나는,
나중에 저들보다 못 살 것 아닌가?
음식 배달통을 들고 뛰어다녀 봐야 한 달에 겨우 팔천 원,
이것으로 동생 둘과 엄마까지 한 달을 살아가야만하니,
첫댓글 새로운 글의 시작인가요 ?
사뭇 기대가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