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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문화(충주지역) 답사기
1. 언 제 : 2013년 6월 27일(목요일)
2. 어디로 : 충청북도 충주시(탄금대-충주 박물관-중원탑-봉황리 마애불상군-
청룡사지)
3. 누구와 ; 포항시 문화재 두레단.
날씨는 장마철에 접어들어 더위와 눅눅함이 온몸을 감싸는데 오늘 아침은 얕은 구름이 깔리어 기분으로나마 시원하다. 오늘도 중부지방에는 30도를 웃도는 더위라는데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다.
06:40분 버스는 문화원을 출발하고, 영천 휴게소를 지나서 회장의 인사말과 처음 오신 분들의 소개와 인사가 있고는, 칠곡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가지고서 조범현 부단장의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삼각관계의 정세와 충주의 지리적 역할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다음으로 나의 한국의 도로망과 교통표지판에 대한 발표를 마치고, 잠시 달리는 버스 안에서 간단히 다과를 나누는 사이, 버스는 충주 나들목(09:30)을 빠져 나왔고, 충주외곽도로를 타고서 달려서 탄금대에 도착을 하니(10:00), 충주시 문화해설사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고 인사를 나눈 뒤 본격적인 답사가 시작되었고, 탄금대와 창동리 일대의 답사를 마친 뒤 점심식사(곤드레 비빔밥과 밤 막걸리)를 하고는 충주 박물관일대와 고려비전시관, 봉황리, 청용사지를 둘러보고 다시 탄금대로 돌아와 답사 후의 간담회와 함께 소주와 족발을 곁들인 간단한 뒤풀이를 마치고 자리를 정리하고 모두 버스에 오르니 포항으로 차머리를 돌린다.
백제와 신라 그리고 중원 문화권을 형성하는 충주지역 답사는 새로운 역사인식의 눈을 뜨게 해주었고 무더운 날씨임에도 답사준비는 물론 같이 해주신 임원진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7월 답사에도 기대를 해본다.
충주 탄금대(忠州 彈琴臺: 국가지정 명승 제42) :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 산1-1 남한강 상류와 달천강이 합류되는 지점에 대문산을 중심으로 한 수려한 경관을 품은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1400여년전 신라 진흥왕 시대에 가야국의 제일가는 악성 우륵이 멸망을 애견하고 우거지를 찾아 온 것이 충주 였었는데 이곳 대문산의 아름다운 풍치에 감동되어 제자 법지 계고 만덕에게 가무 음곡을 가르치며 가야금을 탄주하니 그 미묘한 음악 소리에 이끌려 모여든 사람들이 부근에 부락을 이루었다고 하여 이러한 연유로 탄금대라 호칭하게 되었고 우리나라 국악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는 순변사 신립장군이 휘하 8000여기를 이끌고 이속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적의 무리를 맞아 사력을 다하여 선전 분투 하였으나 중과 부족으로 천추의 한을 품은채 장열하게 최후를 마친 전적지 이기도 하다, 남한강이 절벽을 따라 휘감아 돌고 있으며 송림이 우거져 경관이 아름다우며 그림같이 펼쳐져 절경을 이루는 탄금대는 산책코스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탄금대에는 넓은 주차장과 야외음악당, 조각공원, 산책로, 황토광장, 궁도장, 충혼탑, 열두대, 탄금정, 팔천고혼위령탑, 우륵선생 추모비, 신립장군순절비, 조웅장군기적비, 탄금대기비, 감자꽃 노래비, 탄금대사연노래비, 충주문화원 등이 있다.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忠州 鳳凰里 磨崖佛像群 : 보물 1401)
충북 충주시 가금면 봉황리 산27
산비탈 두 곳의 커다란 암벽에 시기를 약간 달리하여 부조(浮彫)로 조각되어 있는 9구의 불·보살상(佛·菩薩像)이다. 상부에는 높이 3.5m, 폭 8m의 바위면에 불좌상 1구가 양각되어 있고, 하부에는 불좌상 1구와 공양상(供養像)·반가상(半跏像)을 중심으로 5구의 보살상 등 모두 8구가 새겨져 있다. 비바람에 의한 마멸로 부분에 걸쳐 윤곽이 뚜렷하지 않지만, 마애불상(磨崖佛像) 중 비교적 초기의 예로 한강유역과 낙동강유역을 연결하는 중간지역이라는 특수한 역사적·지정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조성되었다. 이 마애불상군은 신라시대 불상조각의 흐름은 물론 고구려 불상의 경향까지도 함께 보여주는 매우 귀한 자료로 그 학술적 가.. 충주시 가금면 봉황리 안골(內洞)을 흐르는 봉황천이 남한강에 합류되기 전 구부러진 곳에 해발 80여m의 햇골산이 있다.
불좌상에 이어 반가사유상과 함께 보살 5구를 새기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상체와 팔 등이 너무 세장하며 하체는 굵고 듬직하다. 왼쪽[向左] 보살상 1구와 오른쪽에 4기의 입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세장한 체구와 단정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충주박물관[忠州博物館] :
충주박물관은 1986년 ‘충주유물전시관’으로 출발하여 1992년 ‘충주박물관’으로 등록하고 1995년 충주시와 중원군이 통합되면서 ‘시립충주박물관’으로 성장하였다. 대지 8448㎡, 건물면적은 1층 1595㎡, 2층 781㎡(2층 전시관) 규모다. 제1관은 불교 미술실로 중원지방에 산재해있는 사찰과 탑 그리고 불상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충주 문화재 분포지도가 있는 ‘역사1실’, 특별전 등 기획전시실로 충주와 관련된 도·토기류, 수·공예품, 과거나 천문과 관련된 자료 등을 상설 전시하는 ‘역사2실’, 별신제, 줄다리기, 모내기 등을 재현하여 전시한 ‘민속1실’, 그리고 <경직도(耕織圖)>를 비롯하여 옛 집안의 살림살이 등 생활용구들이 전시되어 있는 ‘민속2실’로 구성되어 있다. 제2관에는 선사·삼국실, 고려·조선실, 충주항쟁실, 충주명현실이 있다
중원탑평리 7층석탑(국보 제6호) :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11
지리적으로 한국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하여 속칭으로 중앙탑이라 불리어 지는 현재 남아있는 신라석탑으로는 가장 높다. 신라 원성왕대(785 ~ 798)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일반형석탑이지만 탑신에 비해 기단부의 너비가 넓어졌다. 기단은 각부를 몇 장의 돌로 조립하고 면석에 탱주 네개씩을 세워 놓았다. 탑신부 역시 각부를 몇장의 돌로 구성 하였는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좁아들면서 중첩되었고 옥개석 받침은 각층이 모두 5단으로 되었으며, 옥개석 각층마다 낙수홈이 파여져 있다. 상륜부는 노반을 이중으로 포개어 쌓았고 그 위에 복발 앙화만이 남아있다. 세부수법에 있어서 약식과 섬약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며 전체의 형태도 높이에 비하여 너비의 비례가 적어서 지나치게 높은 느낌을 준다. 1917년의 보수 때에 제6층 옥신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가 발견 되었는데 제6층 옥신 에서는 경감 2매, 칠합 1개, 은제사리병과 그안에 들어있던 유리제사리병 하나씩이 발견되었으며, 기단에서는 청동제 유개합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 중 경감은 고려경으로 창건이후 2차적인 사리납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 :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280
석비의 형태는 사각 석주형인 자연석의 각면을 다듬고 비문을 새겼는데, 비두부터 광개토대왕비와 흡사하며 글체는 예서풍이다. 비문은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이 판독 가능한 상태이나 서두의『고려대왕』이란 명문의 고려는 고구려를 가리킨다.
고구려만의 관등과 광개토대왕비문에서 보는『고모루성』이 있고,『신라토내』란 명문이 두곳에 있어 이는 신라아닌 다른나라 곧 고구려가 신라쪽을 가리킨 것이 분명하여 이 비가 고구려비임을 확신케 해 준다. 건비 년대는 고구려 최성기인 5세기경 장수왕 69년(481) 에 건립 된것으로 추정되는남한 유일의 고구려비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큰 이 비의 성격은 고구려가 한강유역의 여러성을 빼앗고 개척한 척경비로 보이지만, 앞면과 왼쪽 측면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비문의 판독이 완전하지 못한 상태이로 확실한내용은 계속적인 조사연구를 요하고 있다 앞면이 10행 23자씩이고 왼쪽 측면이 7행 23자씩이며 오른쪽 측면은 6행이 분명하지만 뒷면은 너비로 보아 9행 정도로 각자(刻字)의 흔적만 확인 됐다.
충주청룡사위전비
귀부에 비신을 세우고 가첨석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가첨석의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비문에는 사찰의 경영을 위하여 신도들이 출원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음기에 시주한 불자들의 이름과 출원품의 양이 명시되어 있고 이 비를 세운다고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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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박춘덕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