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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의 시선으로 예술작품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그림 속 천문학』은 김선지 작가의 첫 책임에도 ‘믿고 읽는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인류가 오랫동안 동경해온 별과 우주,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 이야기를 솜씨 좋게 엮어놓음으로써 단순한 재미와 교양을 넘어 가슴 두근거리는 색다른 경험을 독자에게 선사했다.
『그림 속 천문학』 출간 1년 만에 김선지 작가가 이번에는 그림 속에 담긴 그리스 로마 신화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유럽 문명의 근간이 되는 만큼 수많은 예술작품에 담겨 전해진다. 따라서 어떤 주제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는데, 『그림 속 별자리 신화』에서는 봄철의 처녀자리, 겨울철의 오리온자리 등 계절별 대표 별자리에 황도 12궁에 속하는 별자리를 더해 그중에서 16개 별자리를 길잡이 삼아 신화 속을 여행한다. 각각의 별자리와 관련 있는 신화의 내용과 관련 인물을 알아보고, 해당 주제를 화가들이 어떤 식으로 그림 속에 담아냈는지 살펴본다.
『그림 속 천문학』이 명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읽는 동시에 우주 행성에 관한 천문학적 기본 지식을 함께 쌓을 수 있는 재미를 주었다면, 『그림 속 별자리 신화』는 영웅들의 모험이나 신들의 사랑 이야기를 넘어 선과 악, 욕망과 이성, 반목과 화해, 시기와 질투, 위선과 교만, 편견과 허영 등 인간의 희로애락이 투영된 신화의 진면목을 예술작품을 통해 생생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인간의 삶이 투영된 거울
아름다운 동화가 아닌 희로애락이 펼쳐지는 격정의 파노라마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과 별 사이를 이어 익숙한 형상으로 그려냈고,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안드로메다, 페르세우스, 큰곰, 작은곰 등 그 형상에 맞춰 신화 속 신과 영웅, 동물들의 이름을 붙여 별자리 신화를 만들어 후대에 전했다. 이 책은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16개 별자리를 중심 주제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더 흥미롭게, 새로운 시각에서 들여다보고자 한다.
◑ 정의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이 책에 등장하는 첫 번째 별자리는 봄철 대표 별자리인 처녀자리로, 정의의 여신 별처녀 아스트라이아가 이 별자리의 주인이다. 아스트라이아라는 이름이 낯설더라도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다른 손에는 거울을 쥔 채 눈을 가린 여신상을 한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아스트라이아 조각상은 주로 법과 정의의 상징으로 법원 앞에 세워져 있다.
태초에는 신과 인간이 어울려 같이 살고 있었으나 차츰 인간 사이에 다툼과 갈등이 생겨나자 신들이 모두 하늘로 올라가버렸는데, 아스트라이아만이 끝까지 남아 타락한 인간 세상에 머물며 정의를 설파하다 결국에는 하늘에 올라 순수와 결백을 상징하는 처녀자리가 되었다. 이 장면은 17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살바토르 로사의 〈아스트라이아, 결백과 순수의 여신〉에 잘 표현되어 있다(29쪽). 로사가 인간 세상에 대한 비관주의를 표현한 것이라고도 하는 이 그림에는 인간의 타락과 불의에 실망해 떠나는 아스트라이아의 손을 잡아끌며 만류하는 듯한 남자와 슬퍼하는 여자의 모습이 삼각 구도로 펼쳐져 있다. 부조리하고 험한 세상에서 정의마저 사라진다면 인간의 삶은 얼마나 더 비참해질 것인가!
◑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신화가 품고 있는 의미를 다양한 상징물로 절묘하게 표현해낸 그림도 있다. 여름철 별자리 중 하나인 헤라클레스자리의 주인 헤라클레스는 영웅 중의 영웅으로, 육체적으로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지혜와 미덕까지 갖춘 인물이다. ‘헤라클레스의 선택’은 유명한 이야기로, 청년기에 접어든 헤라클레스 앞에 두 여인이 나타나 시련과 고통이 펼쳐질 미덕의 길과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악덕의 길을 선택하게 한다. 인생의 갈림길에 선 헤라클레스는 결국 힘들지만 옳은 길인 미덕의 길을 택한다.
이 장면은 베로네세가 고대 영웅을 16세기 베네치아 신사로 둔갑시켜 묘사한 재미있는 그림으로 남아 있다(91쪽). 흰색 비단옷을 입고 있는 남자가 헤라클레스인데, 녹색 드레스를 입고 월계관을 쓴 미덕의 여인에게 몸을 돌려 그녀를 안은 것을 통해 헤라클레스가 결국 어느 길을 선택했는지를 보여준다. 헤라클레스의 뒤에 있는 빨강과 파랑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왼손에 나태와 유흥, 사행심을 상징하는 카드를 들고 있고, 그 뒤에 있는 스핑크스 앞에는 칼이 세워져 있어 쾌락의 길이 곧 죽음과 파멸의 길임을 암시한다.
◑ 사랑에 배신당한 마녀 메데이아의 광기
아르고자리는 초봄 남쪽 하늘에서 볼 수 있는 커다란 별자리로, 원래는 하나의 별자리였으나 너무 커서 현재는 고물자리, 돛자리, 용골자리, 나침반자리의 네 개의 별자리로 나뉘어 있다. 아르고자리와 관련 있는 신화는 단연 아르고호를 타고 황금양털을 찾아 나선 이아손과 아르고원정대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신화의 백미는 이아손과 사랑에 빠진 마녀 메데이아의 복수극이다. 아버지를 배신하고 남동생까지 죽여 가며 황금양털 찾기를 도왔지만, 그녀를 기다린 것은 해피엔딩이 아닌 이아손의 배신이었다. 자기 자식까지 낳은 메데이아를 버리고 다른 여인과 결혼하려 한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 자식들을 살해함으로써 이아손에게 끔찍한 복수를 하고 만다.
섬뜩한 이야기지만 그림 소재로 이보다 더 매력적인 주제가 또 있을까? 메데이아의 이야기는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고 그중에서도 프레더릭 샌디스의 〈메데이아〉는 분노와 슬픔, 격렬한 질투와 광기 등 복합적인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다 표현되어 있어 걸작으로 인정받았다(148쪽). 사랑이 아닌 비틀린 집착과 자기애로 똘똘 뭉친 메데이아의 표정은 그 어떤 뛰어난 배우도 따라하지 못할 만큼 강렬해서 피하고 싶지만 자꾸만 계속 들여다보게 만든다.
로맨스로 미화된 여인 강탈 신화
오늘날의 시선으로 신화와 그림을 새롭게 읽다!
아름답게 각색되고 ‘수위 조절’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대로의 신화를 읽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될 때가 있다. 현대에 쓰이는 소설이 현재의 인식과 시대상을 반영하듯 고대에 만들어진 신화에는 당연히 그 시대의 관습과 사회 인식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신화 속에서는 유달리 여인 강탈의 장면의 많이 등장한다. 하데스의 페르세포네 납치는 물론이고 상습 납치범 제우스, 레다의 쌍둥이 두 아들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 또한 여성을 납치해 신부로 삼았다. 신화에 고대의 약탈혼 관습이 반영된 결과다. 이 같은 주제는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는데, 사실상 폭력적이고 소란스러웠을 그 순간을 남녀 간의 격정 로맨스 정도로 묘사하거나 여성이 순응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린 그림도 상당히 많다. 알레산드로 알로리의 〈페르세포네의 납치〉(38쪽)에서 납치당하고 있는 페르세포네의 표정은 특징적일 만큼 심드렁해 보이고, 월터 크레인의 〈페르세포네의 운명〉(33쪽)에서도 페르세포네는 자신을 데려가려는 낯선 남자 앞에서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특히 황소자리의 주인공 에우로페는 황소로 변신해 자신을 납치해 가는 제우스의 등에 올라타서 오히려 그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159쪽)
그저 신화를 묘사한 것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김선지 작가는 당대의 인식이 반영된 점을 인정하면서도 지금의 독자, 관람객이라면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한번쯤은 현재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해석해볼 필요도 있지 않겠느냐고 지적한다. 여인 강탈 주제뿐 아니라, 양자리 신화의 주인공 프릭소스와 헬레 남매 이야기(125쪽)는 악독한 계모와 어리석은 친부 스토리의 원형으로 아동 학대의 비극적 결말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페르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한 메두사의 이야기(104쪽)를 통해서는 어쩌다 메두사가 여성 혐오의 아이콘이 되어 남성의 영역을 침범하려다 처단당한 위험한 여인의 상징이 되었는지, 수천 년의 시간을 뚫고 나와 성차별의 숙주가 되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16개 별자리를 지도 삼아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https://youtu.be/5oOeeIx2l2g
미술의 세계는 무궁무진해서 제대로 된 안내자가 없다면 길을 잃고 헤맬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김선지 작가는 일반적이지 않은 루트를 찾아내 가장 흥미로운 길로 독자를 이끄는 솜씨 좋은 안내자임에 틀림없다. 이 책은 그리스 로마 신화 전부를 다루지도 않고, 모든 별자리(국제천문연맹 공식 별자리는 88개)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다만 신화 속에는 단순한 사랑 놀음이나 영웅의 놀라운 모험만이 아니라 그보다는 더 심오한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심리적 상징과 의미가 담겨 있음을 깨닫는 데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 흥미진진한 삶과 죽음의 드라마를 자신의 독창적인 작품 속에 담아낸 예술가들 덕에 독자들은 조금 더 쉽고 재미있게 신화 속으로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옛날 사람들이 별자리를 지도 삼아 밤바다를 항해하고 먼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것처럼 독자들도 이 책에 실린 16개의 별자리를 하나하나 쫓아 선과 악, 욕망과 이성이 뒤얽힌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로 떠나보면 어떨까.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책속으로
아스트라이아는 ‘별아가씨’, 혹은 ‘별처녀’라는 뜻으로 무결점의 고결하고 깨끗한 성품을 지닌 여신이다. 아마도 아스트라이아는 인간의 오욕칠정을 갖고 온갖 말썽을 일으키는 그리스 신 중에서 가장 신다운 품격과 고귀한 덕목을 갖춘 신일 것이다. 신이라면 모름지기 아스트라이아 정도의 품격은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 p.20~21, 「처녀자리」 중에서
레다와 백조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벽화와 조각상 주제로 다뤄졌지만, 종교적 엄숙주의를 표방하는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는 잠시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 르네상스에 와서 이 주제가 다시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등 거장 미술가들의 관심을 끌었고, 오늘날에도 많은 현대 예술가들이 회화와 조각으로 재현하며 그 맥을 잇고 있다. 성애, 혹은 성적 욕망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자 삶의 원천적 에너지로, 레다와 백조 주제가 이를 표현하기에 매우 적합하기 때문이다.
--- p.46, 「백조자리」 중에서
메두사는 서양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여성에 대한 혐오와 경계의 아이콘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유행한 팜 파탈의 개념이 메두사에게 덧입혀지고, 막 싹이 트기 시작한 페미니즘과 동일시되면서 서구 가부장적 사회에서 메두사는 페르세우스 같은 선하고 용감한 남성에 의해 처단되어야 할 사악하고 파괴적인 여성의 상징이 되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 등 여성 정치인, 여성 지도자들은 자주 메두사로 비유되곤 했다.
--- p.103, 「페르세우스자리」 중에서
이 신화는 악독한 계모와 자신의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친부 스토리의 원조다. 재혼 가정에서 의붓자식을 학대하거나 살해하는 사건이 종종 보도되곤 한다. 장화홍련, 콩쥐팥쥐, 백설공주, 신데렐라 같은 동서양의 동화나 실제 인류의 역사에서도 종종 사악한 계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항상 합리적 판단력을 잃은 무기력한 아버지가 있다. 동화에서는 주인공의 착한 심성과 노력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해피엔딩을 맞지만 프릭소스와 헬레의 이야기는 현실 속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낭만적이지 않아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 p.127~128, 「양자리」 중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살인과 배신을 밥 먹듯이 한 악녀의 본성은 이즈음에 이르러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희대의 악녀 메데이아는 코린토스 왕과 글라우케, 자신의 두 아들까지 모조리 죽인 후 아테네로 도망쳐버리고, 모든 것을 잃은 이아손은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연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여인, 자식까지 죽인 악독한 마녀, 그림 소재로 이보다 강렬한 인물이 또 있을까?
--- p.142, 「아르고자리」 중에서
여성 강탈과 약탈혼은 야만과 폭력의 역사다. 예술작품 속에서는 아름답게 표현되었지만, 실제로 강제 약탈혼을 당한 당사자와 가족의 고통은 깊었다.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는 정의의 이름으로 약탈당한 자신의 여동생을 구하려 했을 것이다. 더구나 헬레네는 열두 살의 미성년이었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그들 역시 자신의 사촌들과 정혼한 여인들을 강제 납치해 아내로 삼았다. 두 사람은 생사까지 같이한 영혼의 짝이었지만, 악행까지 함께하는 우정, 혹은 우애가 바람직한 관계일까? --- p.180, 「쌍둥이자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