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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번에는 거란(契丹)의 야율씨(耶律氏)와 고구려(高句麗)와의 관계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거란(契丹)은 원래 우문선비(宇文鮮卑) 계열의 한 부류로서 대표적인 유목 민족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훗날 요(遼)나라를 세운 거란의 일족인 야율씨(耶律氏)가 원래 성(姓)이 고(高)씨라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이런 사실은 1985년에 요(遼)나라 진국 공주의 묘지석이 발견되면서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 데요. 진국공주(陳國公主) 묘(墓)에서 발굴된 묘지명(墓志銘)에 다음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公主姓耶律氏 ... 本其姓高之裔 乃六葉 帝王之族矣
진국공주의 성(姓)은 야율씨(耶律氏)인데 본래 그 성(姓)씨는 일찍이 고(高)씨의 후손으로 6대 후손이다. 그리고 제왕 족이다.
『진국공주(陳國公主) 묘(墓)』
이를 통해 야율씨(耶律氏)의 원래 고구려(高句麗) 왕족 출신일 가능성이 높은 데, 그렇다면 왜 야율씨의 고씨가 고구려의 후손인지 이에 대해 알아 보도록 겠습니다.
1. 진국공주(陳國公主) 묘(墓)
1985년에 발견된 진국공주묘(陳國公主墓)는 내몽고자치구 통료(通遼, Tongliao)시 내만기(奈曼旗, Naiman) 청룡산진(青龙山鎭, Qinglongshan-Zhen) 동북10Km에 위치한 사포격도촌(斯布格圖村, Sibugetu-cun) 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진국공주는 요나라 경종 아율현(5대, 재위 969~982)의 손녀이며 아버지는 성종의 동생 야율율경(973~1016)의 딸인 진국 공주 야율씨와 그녀의 남편이자 외삼촌인 부마(駙馬)도위 소소구(蕭紹矩:982~1018)의 합장묘입니다.
진국공주의 묘비에는 성씨의 시작을 고(高)씨의 후예로서 6대 후손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야율씨는 고구려 고씨의 왕족의 후예일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또한 고려(高麗) 시대에 향을 몸에 휴대하고 다니는 풍습이 있는데, 왼쪽의 것이 고려의 은제 도금향합, 오른쪽이 진국 공주(陳國公主)의 묘에서 나온 금제향합입니다. 고려는 고구려(高句麗)를 계승한 후손으로서 같은 풍습이 있었다는 것은 민족의 동질성이 있다는 부분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2. 야율씨(耶律氏)는 거란(契丹)의 건국 성씨가 아니다.
원래 거란(契丹)은 원래 우문선비(宇文鮮卑) 계열로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유목 민족들의 부족 연맹이 였습니다. 따라서 실제 국가로 강성하기 전까지는 수, 당에 붙었다가 고구려에 붙었다가 하면서 통합된 국가적 정체성이 없었으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거란의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드디어 국가체제가 확립되었습니다.
당(唐) 나라 이후에는 거란의 우두머리는 대하씨(大賀氏)가 되었고 그 후에 다시 요련씨(遙輦氏)가 되었는데, 해락(楷落)이라는 이가 처음으로 왕이라 일컬었으며 흠덕(欽德)에 이르러서는 흔덕근가한(痕德菫可汗)이 되었습니다.
거란의 대하씨는 당태종에 투항하여 대하굴가(大賀窟哥, 590년 ~ 669년)가 당나라를 지원하였으며 이에 고구려 보장왕은 장군 안고(安固)를 보내 말갈군사를 거느리고 거란을 공격하였습니다. 이후 대하씨(大賀氏)의 이소고(李邵固)가 가돌우(可突于)에게 살해 당하자 요련굴렬(遙輦屈列)이 거란의 왕위에 오르게 되어 요련씨(遙輦氏)가 새로이 거란의 연맹장이 되었습니다. 이 요련씨가 우두머리가 되고 이때 요련씨를 도와 이때 처음 등장한 질랄부(迭剌部)의 야율 열리(耶律涅里, 734년)라는 자가 등장하는 데 이 사람이 문헌 사료에 최초로 들장하는 야율씨(耶律氏) 선조입니다. 즉 야율씨는 처음 부터 등장한 거란의 종족이 아니였습니다.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한 후 66년이 지난 후에야 야율씨가 처음으로 사료에 등장한 것입니다. 즉 질랄부(迭剌部)의 우두머리였던 열리(涅里)의 후손이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거란의 부락들을 차지하고 이리근(夷离菫)이 됩니다. (이리근이란 군마(軍馬)를 통솔하는 큰 벼슬 이름을 말합니다.) 906년 요련흠덕(遙輦欽德)이 질랄부(迭剌部)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게 대권을 넘겨 요련씨는 연맹장에서 내려왔으며 야율아보기가 거란 부족들을 통합하여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사료에 등장하는 야율씨 계보(耶律氏 系譜)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료가 부족하여 이들의 생몰 연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야율열리(耶律涅里) 가 734년에 처음 등장하고 사료에 기록된 요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872년 ~ 926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성씨와 이름에 대한 비밀
야율아보기의 이름에 관한 비밀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아보기(간체:阿保机)의 한어(漢語), 중국어 발음(Ābǎo jī)이 한국어 아버지입니다. 들어 보시기 바립니다.
과연 이것이 단순한 우연일까요?
또한 야율(耶律)의 발음이 예루(Yelu)인데 그 발음이 읍루(挹婁:Yì lóu)와 매우 유사합니다. 즉 이는 유목민들이 발음을 한자로 옮겨 적는 음차어(音譯語)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읍루의 발음인 이루(Yì lóu)는 압록(鴨綠:Yalu)의 발음 야루(Yalu)와 유사하며, 야루(Yalu)는 만주어로 백마(白馬) 입니다. 즉 야율(耶律), 읍루(浥婁) 압록(鴨綠)은 말(馬)을 뜻하는 같은 발음에서 유례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발음 들이 말(馬)과 관련 되었다는 내용은 거란고전(契丹古傳)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瑪玕 靺鞨 渤海 同聲相承...賜名閼覆祿卽浥婁也
瑪玕(마간)과 靺鞨(말갈)과 渤海(발해)는 같은 발성이 서로 이어온 것이요...閼覆祿(알복록:압록)이란 이름을 주었으니 곧 浥婁(읍루)이다.
『거란고전(契丹古傳)』
그리고 고구려 또한 마한(馬韓), 말갈(靺鞨) 등 말(馬)과 관련이 깊습니다.
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
마한(馬韓)은 즉 고구려이고 , 변한은 백제이고 진한은 신라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최치원 전」
즉 야율, 읍루, 압록, 마한은 만주어 야루(Yalu) 백마와 모두 뜻이 통합니다. 또한 이를 뒷 받침하는 사실이 야율씨의 상징이 바로 백마(白馬)이며 그 왕비가 성씨가 소씨(蕭氏)이고 그 상징이 소(牛) 청우(靑牛)입니다. 이는 야율씨의 신화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거란의 시조에 대한 신화. 청우백마(靑牛白馬) 신화가 대표적인데 청우백마는 푸른 빛을 띄는 검은 소와 하얀 말이 나오는 신화이다. 요서 북부, 흥안령 남서부 일대의 초원에 어느 한 남자가 흰말을 타며 시라무렌 강을 따라 내려갔고, 한 여자는 검은 소(또는 푸른 빛을 띄는 소)를 타고 랴오허 강을 건너서 두 강 사이에 있는 흥안령 남서부 초원에 만났는데 둘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이었으며, 둘은 서로 한눈에 반해 아들 8명을 낳았다. 이 8명의 아들들이 크면서 각자 여덟 부족들이 되었는데, 이들이 거란족의 시조이며, 여덟 부족들을 합쳐서 글단(거란, 契丹)이라 불리었다."
『나무위키 거란 야율씨의 건국신화』
이는 야율씨가 거란의 8대 부족을 통합하면서 만들어진 신화로 추정됩니다. 또한 아보기(阿保機)의 발음이 '아버지'로 소씨(蕭氏)를 소우(牛)로 인식했다는 점은 우리와 언어 체계가 같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4. 야율씨(耶律氏), 소씨(蕭氏)와 환국(桓國)과의 관계
야율씨(耶律氏), 소씨(蕭氏)는 환국(桓國)과 관련이 깊은 성씨입니다. 먼저 흠정사고전서(欽定四庫全書) 요사습유(遼史拾遺)의 내용을 보면 야율아보기를 안파견(安巴堅)이라 하였습니다.
太祖大聖大明神烈天皇帝姓耶律氏 諱億字安巴堅歐陽修歸田錄曰契丹安巴堅
태조 대성대명신열천황제의 성씨는 야율씨이다. 휘는 억이며 자는 안파견(安巴堅)이다. 구양수의 귀전록에서 이르기를 거란 안파견이라 한다.
『欽定四庫全書(흠정사고전서) 遼史拾遺 (四庫全書本) 요사습유 (사고전서 본)』
여기서 안파견은 야율아보기의 정체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는 갖습니다. 안파견은 환국(桓國)의 초대 왕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민족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소씨도 환국과 관련이 깊은 성씨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진주 소씨(晉州蘇氏)가 있으며 그 족보에 환국(桓國)에서 출발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임금의 후손인 기곤오(己昆吾)가 소성의 하백에 봉해졌다. 기원전 2266년 소성이 단군조선에 영속되었으며 기씨(己)를 소씨(蘇, 邵, 蕭) 로 고쳐서 소씨가 생겼다고 한다. 소곤오(기곤오)의 후손이 신라 6부 촌장 중의 한사람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라고 한다.
『소(蘇, 蕭, 邵)氏의 유례』
帝芬三十三年昆吾氏子于有蘇
제분 33년 곤오씨(昆吾氏)의 아들을 유소(有蘇)국에 봉했다
『죽서기년(竹書紀年)』
太夏公卽赤帝祝融之六十一世孫彼卽風夷人也
태하공 즉 적제 축융의 61세 손 태하공 기풍己豊은 이인(夷人:동이)이다.
『부서보서(扶蘇譜序)』
赤帝之後孫爲風姜姬己等諸姓至赤帝61世孫太夏公號昆吾諱豊本姓己改蘇
적제赤帝의 후손으로 풍風, 강姜, 희姬, 기己 등의 姓이 되었다. 적제 61세손에 이르러 태하공 곤오昆吳(號) 풍風(諱)이 본성本姓 기己를 소蘇로 바꾸었다.
『동근구보서(東槿舊譜序)』
그리고 야율씨 왕들은 대대로 소씨(蕭氏)하고 만 결혼을 하는 데 이는 같은 민족의 왕실 끼리 결혼한 것입니다. 야율아보기의 어머니 선간황후(宣簡皇后)도 소씨(蕭氏)입니다.
序言:太祖大聖大明神烈天皇帝,姓耶律氏,諱億,字阿保機,小字啜里只,契丹迭剌部霞瀨益石烈鄉耶律彌里人.德祖皇帝長子,母曰宣簡皇后蕭氏.
太祖의 姓은 耶律氏이고 휘(諱)는 억(億)이다. 이름이 아보기(阿保機)며 어릴 적의 이름은 철리지(啜里只)이고, 거란(契丹) 질랄부(迭剌部) 하뢰익석열향(霞瀨益石烈鄉) 야율미리(耶律彌里)사람이다. 德祖 皇帝의 長子이며, 어머니는 선간황후(宣簡皇后) 소씨(蕭氏)이다.
『遼史』 「卷一 本紀第一 太祖上」
요나라의 역대 황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 야율아보기만 소씨 부인이 없습니다.
5. 고려(高麗)와 거란(契丹)과의 고구려(高句麗) 정통성 계승 대립
고려와 거란이 서로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하는 내용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고려사』에 기록된 소손녕과 서희의 담판의 내용을 보면 거란도 스스로 고구려의 후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遜寧語熙曰, 汝國興新羅地, 高勾麗之地 我所有也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그대들이 침범해왔다.
熙曰, 非也. 我國卽高勾麗之舊也. 故號高麗, 都平壤, 若論地界, 上國之東京, 皆在我境, 何得謂之侵蝕乎?
서희가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나라가 곧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서경)에 도읍하였으니
만일 국토의 경계로 말한다면 상국(거란)의 동경(東京)은 전부 우리 지역 안에 있는데 어찌 영토를 침범한 것이라 하는가?
『고려사』권94, 「열전」7 [제신] 서희
또한 요사(遼史)에는 요나라는 조선에서 유례했다고 다음과 같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遼史』 「卷49」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
요사의 지리지에는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본래 조선의 땅이라.
『遼史』 「地理志」
요나라 스스로 조선의 땅에서 유래 했으며 고조선의 팔조범금(八條犯禁)을 따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해 볼때 왜 거란(契丹)의 야율씨(耶律氏)는 고구려(高句麗)의 후손이며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댓글 요나라 - 916년에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세운 나라. 몽골ㆍ만주ㆍ화베이의 일부를 지배하였으며, 송나라로부터 연계(燕薊) 16주를 빼앗아 전연(澶淵)의 동맹을 맺어 우위를 차지하였다. 1125년에 금나라와 송나라의 협공을 받아 망하였으나 왕족인 야율대석이 중앙아시아로 도망하여 서요를 세웠다.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 에서 之 가 들어가면
다 조작된 사서라고 보시면 됩니다.
영어의 "of"
중국어의 "的"
왜어의 "の"
한자의 "之"
한글의 "~의"
는 전부다 인공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럼으로 저 사서는 후세에 새로
만든 가짜라고 보면 됩니다.
"너의 아버지"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니아부지라고 했지요
"울(우리)엄마"라고 했지 나의 엄마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기 너의 삼촌이 간다라고 하지 안 았습니다.
쩌기 니삼촌 간다 라고 했지...
내것이라고 했지 나의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집이지 나의 집이라고 하지 안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