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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계시록!(26) : 온 인류에게 내린 마지막 재앙!”
+ 본 문 : 요한계시록 16장 1절 - 11절 (신약성경 414쪽)
1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2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
3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4 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5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이르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6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7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8 넷째 천사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9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
10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11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아멘!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든, 그 가치는 환경에 의해서 다르게 적용되어 집니다.
그 유명한 타이타닉이란 영화를 보면, 배가 침몰을 하면서 사람들이 배에서 너도나도 탈출하기 위해서,
우왕좌왕할 때 구명조끼를 구하지 못해서 쩔쩔매던 어떤 돈 많은 부자가 구명조끼를 가진 사람에게,
돈을 한 뭉치 주면서 그 조끼를 팔라고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 상황에서 과연 조끼를 팔겠습니까?
배가 침몰을 하는 상황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은, 자신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구명조끼입니다.
돈 보다 더 자기 목숨이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돈 몇 뭉치에 자기 생명을 절대로 팔지 않습니다.
돈이라는 것도 자신이 살아있을 때 좋은 것이지, 죽은 다음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배가 침몰할 상황을 대비해서 준비해둔 구명조끼는, 평소 상황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배가 침몰을 하게 된다면, 구명조끼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가치가 있게 됩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듣고 방주를 만들 때에, 사람들은 노아를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땅을 덮어버리는 홍수를 일으켰을 때, 방주의 가치는 생명을 살리는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심판이라는 상황에서 무엇이 소중하고 귀한 것이며, 어떤 삶이 지혜 있는 삶인가가 증명됩니다.
돈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소중하고 귀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돈을 버는 것이 지혜 있는 삶은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은 돈을 소중하고 귀한 것으로 여깁니다. 모든 지혜와 지식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과,
방법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은 심판을 외치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서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 제발 믿어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일이 이루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손해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안 믿으면 우리가 잘못되고, 우리가 손해를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이나 목사에게, 그리고 교회에 선심을 쓰듯 믿음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믿지 않고 교회에 안 나가면 하나님에게, 목사에게, 교회에게 큰 손해가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걸 아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발 나를 믿어달라고 부탁하고 애걸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믿어달라는 부탁을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목사와 교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부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 인간들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이루시는 분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은 행하십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아멘! - 이 말씀은 명령 선포입니다.
그리고 2절부터는 차례차례 진노의 대접을 땅에 쏟음으로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말씀을 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우리 예수님이 재림주로 다시 오시면 되어 질 일로 여기시면 안 됩니다.
이미 이 세상에 쏟아진 진노의 대접이고, 따라서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쏟아졌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미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이 쏟아진 세상에서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앞서 말한 대로 배가 침몰하는 위기에서 정말로 소중한 것은, 평소 하찮게 여겨지던 구명조끼입니다.
배가 침몰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구명조끼는 아무런 필요도 없지만, 침몰하는 상황이 되면 달라집니다.
구명조끼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생명을 살리는 가장 소중하고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쏟아진 세상에서, 우리를 구할 구명조끼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믿음을,
소중하고 귀한 것으로 여기지를 않습니까? 오히려 믿음을 귀찮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세상 현실을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진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든 교회만 붙들면 그것으로 믿음이 인정되고 천국 갈 수 있다는 생각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이 세상에 쏟아졌는데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구명조끼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6장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진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구명조끼를 입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구명조끼를 입은 우리 성도들의 진가는 하나님의 심판 때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인가를 확인되는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가다 보면, 애굽에서 내려졌던 하나님의 일곱 재앙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의 대접이 쏟아졌을 때, 세상에 내려진 재앙이 애굽의 재앙과 똑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이 되게 하신 것이나, 또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순순히 이스라엘을 내어 보내지 않게 하시고,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는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 백성이 아닙니다.
인간은 모두가 똑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해서, 애굽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처음 재앙들은 이스라엘과 애굽에 구분이 없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구분됩니다.
이것이 명확히 드러난 것이 마지막 열 번째 재앙입니다. 열 번째 재앙은 이스라엘도 포함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도 누구든 어린양의 피를, 집 문설주에 바르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드러내신 새로운 생명의 근원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곧 생명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 생명의 근원을 자신의 힘으로 거둬들인 세상의 소산물 – 돈에, 물질에 두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에 두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어야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참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로 하면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세상 것에 있지 않고, 어린 양 예수의 보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재림이 중심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예수님이 중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로 죄 씻음 받을 때, 구별된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양과 동행하는 삶이라면, 어린양의 희생의 피를 자기 몸에 두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참으로 부끄러운 자들입니다. 진심으로 피 흘리신 어린양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두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몸에 주님의 흔적, 보혈이 흐르고 있습니까?
세상은 어린양의 피의 저주 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피가 없으면 저주 아래 살아갑니다.
이미 쏟아진 진노 아래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돈, 성공, 출세,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세상에 오실 때,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참된 것이고, 무엇이 지혜로운 것이고,
최후의 승리자가 누구인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 믿고 어린 양의 피가 있어야 마지막 승리입니다.
배가 침몰할 때, 돈을 타고 목숨을 구할 수 있을까요? 권력이 그를 살려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의 대접이 쏟아진 세상 바다에서, 나를 건져 줄 구명조끼는 오직 예수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나를 살리려고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려 죽으신, 나의 어린양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너무 무가치한 일로 여겨집니다. 내가 왜 믿지?
내가 왜 교회에 다니지? 내가 왜 예배드리지? 내가 왜 성경 읽지? 내가 왜 기도하지? 왜 사역하지?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의 대접이 쏟아진 세상에서, 나를 건져 줄 구명조끼는 오직 예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의 대접이 쏟아진 세상에서, 예수님은 나를 살려 줄 어린 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걸 모르고 믿으면, 자신의 신앙생활이 모두 무가치하게 느껴 질 때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애굽의 바로 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열 재앙이 거듭 이어집니다.
당시 애굽에 내려졌던 열 재앙은, 그 하나 하나가 놀라울 수밖에 없는 엄청난 재앙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바로는 아홉 번째 재앙이 내렸을 때까지도 하나님에게 완전히 굴복하지를 않았습니다.
마지막 장자 재앙으로 인해 항복했지만, 다시 군사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뒤쫓아 오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재앙을 당해도 어린 양의 피가 없으면,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완악함을 보여 줍니다.
더 놀라운 것은, 어린 양의 피를 통해 살림을 받고 출애급의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끊임없이,
지도자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에게 구원과 수많은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도 원망했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 쉽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이 쉽다고 생각됩니까?
예배입니까? 아니면 기도입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뭔가 쉽다고 여겨지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예배! 가만히 앉아 있다 가면 되니까 쉽습니까? 기도! 하나님 부르며 소원 아뢰면 되니까 쉽습니까?
봉사! 비록 시간과 노력과 돈이 있어야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으니까 쉽다고 생각합니다.
전도를 하는 것은, 구제하는 것, 조금 어려울지 모릅니다. 헌금 액수가 커지면 역시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잘 하는 것, 기쁨으로 하는 것, 그래서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쉽게 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를 한다는 것, 쉬울까요?
사실 회개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은, 어렵다는 생각보다는 쉽다는 생각이 지배적일 수 있습니다.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단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신앙생활은, 어렵다 쉽다는 것을 구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을 우리가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다 어렵다라고 구분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신앙이 있는 자의 삶을 말합니다. 신앙이 있음으로 보여 지는 삶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을 우리 쪽에서 쉽다.
어렵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우리가 만들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 즉 믿음은 내가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있어야 신앙생활이 있고, 신앙생활과 신앙인의 삶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 쪽에서 어렵다 쉽다라고 판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우리가 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신앙생활 역시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예배는 예배당에 모여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설교 듣는 것으로 됐고,
예배가 끝나고 교회 문을 나서면, 예배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 마음 대로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부르며 내가 원하는 것을 부탁하고 아무런 기대감 없이 일어서서, 내 힘으로 삽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며 기도했던 것, 다 잊고, 하나님 도움없이 동분서주 바쁘게 살아갑니다.
기도응답을 준비하시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며 “그래, 니 맘대로 살아라.”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감동받고 돌아오게 하는 삶은 살지 않습니다.
회개하며 주께 용서를 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180도 돌이키는 삶이 아니라, 예전과 똑같이 삽니다.
왜 그럴까요? 신앙생활을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적인 행위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어떤 종교적인 행동이 아니라, 신앙과 삶의 일치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신앙행위가 세상의 삶에서 구체화되어지고 실천되어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특별히 회개에 대해서 오늘 본문 10절,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회개란? 현재의 자신에 대해서 부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부인이 없는 회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6장의 재앙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미래에 일어날 재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일어날 재앙이지만, 이미 이루어졌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재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나와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걸 알지 못하니까, 지금 내가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들을 당하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느냐?' 고만 항변합니다. 왜 내가 이런 재앙을 당하는가를 알고,
용서를 구하고, 회복을 구하는 회개를 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런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의 용서와 회복의 구원을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어린양의 피를 흘려 완벽하게 준비하셨는데, 우리는 원망만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님을 원망하는 것은, 그 만큼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면, 즉시 그것이 하나님의 재앙인 줄 알고,
용서와 회복을 구하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용서함 받습니다. 회복됩니다. 치유됩니다. 아멘!
애굽의 재앙에서도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완악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 바름을,
통해서 살아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린 양의 피를 통해 이루시는 용서와 회복을,
구하는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린양의 피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양 예수님의 십자가와 흘리신 보혈을 통해서, 우리의 완악함과 불순종을 씻어내야 합니다.
용서와 회복을 구하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용서함 받습니다. 회복됩니다. 치유됩니다. 아멘!
제발 원망하지 마십시오. 불평도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위한,
일곱 대접의 재앙은 이 세상에 이미 부어졌고, 지금도 부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부얼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현재의 삶에 원망이 있습니까? 불평 불만이 있습니까?
힘든 일이 생기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께,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아프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 원망과 불평이 나오려고 할 때에,
용서와 회복과 치유의 기적과 축복을 주시려고 미리 예비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 십자가에서 흐르고 있는 어린 양 예수님의 피로 내 안에 흐르게 하여, 재앙이 물러가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아들로서 묵묵히 하나님이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셨던 우리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악함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서 회개하여 용서와 회복과 치유의,
기적과 축복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행복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