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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원문보기 글쓴이: 무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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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마을 ◆ 내파수도:조약돌이 만든 환상의 천연방파제 ◆ 압해도:원시시대 돌그물.「뻘낙지」사냥 ◆ 영산도:볼거리 풍성한 영산 8경 ◆ 맹골도:원시의 자연 속에 사는 사람들 ◆ 여서도:일단 들어가면 「애 배 나오는 섬」 ○ 갯마을 ◆ 갈남마을:동해의 희한한 물고기 세상 ◆ 신남마을:토속미 물씬 풍기는 해신당과 남근 신앙 ◆ 선운리:서정주의 「질마재 신화」와 개펄 드라이드 ◆ 교로리:서해바다에서 해돋이 본다 ◆ 문항리:된장 풀어 고기잡는 재미 ○ 강마을 ◆ 숙암리:줄나룻배에 여자 뱃사공 ◆ 어성전:심마니들의 세계 속으로 ◆ 안정리:빨치산 유적 순례 ◆ 중산리:지리산 천왕봉의 성모상 전설 ◆ 맹동산:한여름에도 추운 날씨, 신비의 천마농장 ○ 산마을 ◆ 구병리:솔샘물과 만수계곡, 충북 제일의 장수촌 ◆ 어성전:심마니들의 세계 속으로 ◆ 안정리:빨치산 유적 순례 ◆ 중산리:지리산 천왕봉의 성모상 전설 ◆ 맹동산:한여름에도 추운 날씨, 신비의 천마농장 |
충청남도 태안반도 서남단, 태안군 안면읍 방포에서 뱃길로 한 시간 남짓 남서쪽으로 가면 내파수도(內波水島)라는 섬이 있다. 또 그 섬에서 바깥쪽(서쪽)으로 3km 지점에는 외파수도가 있는데, 마치 내파수도의 지아비처럼 당당하게 서 있다. 안팎의 두 파수도에는 다른 섬에서는 볼 수 없는 명물이 있다. 맨들맨들하고 동그랗게 생긴 구석(球石)들이 한데 모여 천연의 방파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형형색색의 때깔 고운 구석들이 길이 3백50m, 높이 6m, 폭 30m로 쌓여 방파제를 만든 모습은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자연의 조각품이다. 구석은 억겁의 세월 동안 파도에 씻겨 닳고 닳아 만들어진 조약돌인데, 이것들이 또한 수없이 되풀이되는 파도에 점점 밀려와 섬 안쪽에서 바다쪽으로 길게 쌓여 방파제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 「구석 방파제」는 배들에게는 양탄자 노릇도 한다. 구석들 위로 배가 스르르 미끄러지면서 머리를 댈 수 있는데, 둥근 돌들이 밑창을 굴려주므로 배가 상하지도 않는다. 또 구석에는 희귀한 규석 원료가 들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쓰는 질 좋은 규석 원료는 프랑스 등 유럽산으로 일본이 수입해서 우리나라에 비싸게 재수출한 것이 대부분 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구석들이 어떻게 자연파괴적인 경제 논리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게다가 내파수도의 구석들은 색깔마저 일품이다. 돈맛을 아는 사람들이 이를 그냥 놔둘 리 없었다. 결국 뭍의 장사꾼들이 이 조약돌들을 일본에 정원석으로 수출하는가 하면 , 유리를 만드는 규석 원료로 쓴다고 광업권 허가를 따내 무지막지하게 실어내갔다. 그렇게 수난을 당했던 파수도(특히 내파수도)의 천연 구석 방파제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공짜로 이루어진 일이 아님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섬에 사는 칠순 할아버지 두 분이 외롭고도 끈질긴 싸움을 한 끝에 얻은 결실이다.
백발이 성성한 안종훈(76), 선동규(75) 두 할아버지는 아름다운 자연과 조상들의 아늑한 보금자리를 찾아온 지 30년 동안 이 섬을 지키고 있는 파수꾼들이다. 친구 사이인 두 노인이 뭍으로부터 11km 떨어진 내파수도에 정착한 것은 지난 1967년의 일. 미역 양식으로 돈을 벌어 조그만 섬을 개발해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내파수도는 10여 가구의 섬 사람들이 모두 떠난 채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미역 가격이 폭락하면서 두 분의 「섬 나라 건설」 꿈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때 실의에 빠진 두 노인에게 운명 적으로 닥쳐온 것이 뭍사람들을 상대로 한 「돌 지키기 싸움」이었다. 장사꾼들로부터 이 천연방파제를 지키기 위해 두 노인은 밤낮으로 보초를 서고 관계 당국에 수십차례 진정서를 냈다. 그 때문에 태안군청 공무원들이나 안면도 주민들로부 터 「고집불통 영감」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도 얻었다. 노인들의 외롭고 기나긴 싸움은 결국 지난 1987년 충청남도가 노인들의 편을 들어 구석 방파제를 문화재로 지정, 보호조치를 내림으로써 끝을 맺게 됐다. 내파수도의 천연 방파제는 안면도를 바라보는 쪽, 즉 섬의 동남쪽에 있다. 방파제 안쪽에는 잘디 잔 조약돌 해변이 펼쳐져 있어 물놀이 하기에도 좋다. 특히 내파수도에서 서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곳의 외파수도가 내파수도에 닥쳐오는 파도까지 막아주기 때문에 파도가 급하지도 않다. 물론 외파수도에도 조약돌 선착장이 있는데, 안종훈 할아버지의 젊은 동료인 김기환씨(43)가 현재 이 섬을 지키고 있다. 내파수도 섬 서쪽에는 억새풀이 많이 자란다. 가을에 하얗게 만발한 억새꽃이 바람에 날리는 장관은 수많은 양떼가 풀을 뜯고 있는 것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이 억새밭 속에는 메추리들이 떼를 지어 살고 있다. 또 안종훈 노인이 너무 적적한 섬 분위기를 생각해서 풀어 놓은 흑염소들이 새끼를 쳐서 지금은 수백마리의 야생 염소떼가 됐는데, 내파수도의 또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 내파수도 가는 길 안면도 방포에서 내파수도 안종훈 노인댁에 전화(0455-62-2511)를 걸면 안 노인이나 그의 동료들이 내파수도에서 배를 타고 나온다. 방포에서 내파수도까지 40분 정도 걸린다.
원시시대 돌그물, 뻘낙지 사냥 단순히 갯바람 쐬기나 해안절경 보기, 또는 흔하디 흔한 생선회나 매운탕을 먹어보는 정도는 어느 섬에서나 쉽게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쉬 만나기 어려운 볼거리와 진귀한 먹을 거리를 찾는다면 권할 만한 섬이 있다. 전남 목포 북항에서 철부선에 차를 싣고 10여분을 가면 닿는 섬 압해도. 찾아가기도 쉬우면서 별난 풍물 두 가지를 지니고 있는 섬이다. 구석기시대 선조들이 사용했을 법한 돌그물인 「독살」과 낙지 중에서도 맛이 좋기로 유명한 「뻘낙지」가 그것이다. 이중 개펄(뻘)에서 살기에 이름 붙여진「뻘낙지」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리나라에서는 서·남해안이 낙지의 주산지. 이중 개펄이 많은 서해안에서는 뻘낙지가 나고 개펄이 적은 남해안에서는 「바위낙지」가 많이 난다. 뻘낙지는 개펄색을 그대로 뒤집어써서 짙은 회색인 반면 바위낙지는 문어처럼 불그스레하다. 맛은 두말할 것도 없이 뻘낙지가 월등하다. 쫄깃쫄깃하면서도 부드럽고 달콤하고 구수하다. 전라도 말로 「개미있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뻘낙지처럼 씹을수록 우러나오는 깊은 맛을 일컫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 문어처럼 바위에 붙어 사는 낙지는 씹히는 맛이 팍팍하고 깊은 맛도 안 날 뿐 아니라 약간 누린내가 나기도 한다. 서울이나 대도시에 출하되는 낙지들은 물론 이 바위낙지가 주류를 이룬다. 그런데 요즘은 중국의 값싼 뻘낙지가 염장(鹽藏)으로 들어와서 토종 뻘낙지로 위장, 식당가 낙지볶음 같은 메뉴에서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한편 뻘낙지는 남해안 가운데서도 전남 신안군 일대에서 나는 것이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이유는 그곳의 뻘(개펄)이 맛이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 뻘낙지는 뻘을 먹고 산다. 맛있는 뻘을 먹고 사니까 자연히 낙지도 맛이 좋은 것이다. 사실은 뻘 속에 있는 플랑크톤 등 각종 영양분을 먹고 사는 것이리라. 신안군 개펄이 「맛이 좋다」는 데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개펄은 육지의 흙이 바다로 흘러내려와 바닷물에 잠겨 우려지면서 형성된다. 그런데 신안군의 섬들은 모두 섬 중심부에 경사가 완만한 작은 산을 두고 있다. 그런 산에서 내려오는 흙이 장기간에 걸쳐 바닷물과 만나 곰삭으면서 맛있는 개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태토(胎土)가 되는 흙은 남도땅을 뒤덮고 있는 황토다. 황토는 적조(赤潮)를 퇴치하는 약으로 쓰일 만큼 생명력이 강한 것이다. 바로 그 황토가 곰삭은 개펄에 구멍을 뚫고 사니 뻘낙지가 맛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신안산 뻘낙지들 가운데도 우열이 있어, 압해도의 뻘낙지를 최고로 친다. 이 역시 압해도의 입지 때문인 것으로 짐작이 된다(누가 일부러 그 원인을 밝혀낸 바는 없다 ). 압해도는 목포와 신안군의 많은 섬들이 마주보는 길목 한가운데 있다. 이 때문에 압해도 주위로는 좁은 물목이 많다. 이 좁은 물목으로 빠른 물살이 드나들면서 풍부한 산 소와 영양분을 활발히 공급한다. 자연히 뻘(개펄)의 질이 뛰어날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압해도에서 나는 뻘낙지는 다른 섬에서 나는 뻘낙지보다도 값이 더 비싸다. 목포 북항에는 압해도에서 건너오는 뻘낙지를 받아 파는 아주머니 10여명이 좌판을 벌여놓고 있다. 여기에서는 간혹 뻘낙지 공급이 달릴 때 완도나 강진 쪽에서 오는 바위낙지를 섞어놓기도 한다. 압해도의 뻘낙지는 산 채로 훌훌 훑어서 그대로 먹어도 맛이 있고, 연포를 해서 파를 썰어 넣고 국물과 함께 마셔도 개운한 맛이 일품이다. 압해도 사람들은 주로 낙지를 통째로 넣어서 미역국을 끓여 먹는다. 낙지 미역국은 산후조리용 음식으로는 최고다. 송아지를 낳은 어미소에게 뻘낙지 한 마리를 던져주면 받아먹고 금방 기운을 차려 벌떡 일어선 다. 뻘낙지는 압해도 가룡리에서 주로 많이 나는데, 보통 때는 뻘에 구멍을 파서 잡는다. 그런데 매달 초순(음력) 무렵에는 물이 적게 드는 「조금」이라는 물때가 있다. 이때는 물이 안 닿는 곳에 사는 낙지들이 저녁 7시부터 10시경까지 물을 맞으러 개펄 낮은 곳에 있는 물골로 기어내려와 앉아 있다. 바로 이 시간을 맞추면 손전등을 비춰가면서 낙지를 그저 주워담기만 하면 된다. ● 압해도 가는 길 목포 북항에 가면 「압해농협」이라는 마크를 단 철부선들이 수시로 다닌다. 압해면사무소 소재지인 학교리에 여관 한 곳과 서너군데 식당이 있다. 막배 시간을 잘 알아두었 다가 목포로 나와야 숙식이 편안하다.
볼거리 풍성한 영산8경 전라남도 신안군은 8백여개의 섬으로만 이뤄진 군이다. 그렇잖아도 섬 부자인 우리나라에서 신안군이야말로 정말 섬 세상이라고 할만하다. 남서해 모서리에 있는 홍도와 흑 산도 역시 신안군 소속인데, 이제는 신안을 대표하는 섬으로 자리잡았다. 홍도는 「관광의 섬」으로, 흑산도는 예전엔 어업전진기지 또는 새끼섬인 홍도를 포함해 흑산군도 의 어미섬으로 뚜렷한 역할을 해오고 있는 것. 그런데 새끼섬인 홍도보다, 또는 어미섬인 흑산도보다도 더 그윽한 유래를 가지고 흑산군도의 주인공 역할을 남 모르게 해온 섬이 있다. 흑산도 남서쪽 2km 전방에 있는 영산도가 바로 그 섬이다. 영산도는 10여개에 이르는 흑산도의 새끼섬 가운데서도 풍치가 제일 좋고 물고기가 많이 나 밥 반찬이 너무나 좋다는 곳이다. 그래서 같은 김치라도 영산김치와 흑산김치는 색깔과 맛이 다르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흑산도를 소개하는 책자에 흑산도의 대표적인 볼 거리로 영산도에 모여 있는 영산팔경을 끼워 넣는다. 실제로 영산도는 흑산도의 새끼섬으로 어미섬인 흑산도와는 탯줄을 대고 있는 것만큼이나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영산도에 가려면 반드시 흑산도를 거쳐야 한다. 그리고 흑산도에 간 여행객들도 영산도까지 들어가 봐야 흑산도에 온 본전을 찾을 수 있다. 또 영산도의 역사를 말하려면 흑산도부터 언급해야 한다. 흑산도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유배의 섬」이었다. 60년대 이후에는 어업전진기지로서 「풍어의 섬」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어업현대화로 어선들이 흑산도를 거쳐갈 필요가 없어지자 흑산도는 홍도 관광길에 거쳐가는 섬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흑산도 젊은이들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흑산도 새로 알리기 운동」이다. 그것은 흑산도를 관광의 섬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그러나 관광하면 이미 홍도에 주도권을 뺏긴 터라 새로이 관심을 끌 수 있는 묘안이 필요했다. 거기에 딱 맞아떨어진 것은 바로 「영산팔경 알리기」인 것이다. 이렇게 흑산도 되살리기 운동 덕분에 빛을 보게 된 것이 바로 영산도다. 영산도에 있는 영산팔경은 당산의 소나무, 아침햇살을 받은 기봉의 선경(仙境), 해안절벽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폭포, 자연 석탑, 용이 승천했다는 큰 바위굴, 사람의 코를 닮은 해변의 바위굴, 해안의 바위대문, 영산도에서 바라보는 흑산도 문암산의 구름 낀 경치 등을 말한다. 흑산도에서 영산도까지 가는 여객선은 아직 없다. 흑산도 예리항에서 남서쪽으로 잔등 하나를 넘으면 대목이라는 아담한 어항이 있는데, 영산도에서 건너오는 어선들이 닻을 내리는 곳이다. 그 배들은 흑산도로 고기를 팔러오기도 하지만 주로 목포에 갈 영산도 사람들을 실어오기도 한다. 뭍에서 영산도에 가는 사람들도 대목에서 영산도 어선들을 타면 된다. 영산도에는 20가구에 4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고려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영산도에는 어미섬인 흑산도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만큼 섬 주변에 고기가 많이 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어찌나 왜구가 들끓던지 영산도 사람들은 영산강 중간 지점에 포구를 개척해서 피난처로 삼았다. 그곳이 바로 영산포. 영산강이라는 이름도 영산도 사람들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한다. ● 영산도 가는 길 흑산도 예리항 너머 대목에서 영산도의 어선을 타고 간다. 영산도의 어선을 낚싯배로 대절하면 하루에 15만원 정도다. 민박시 방값, 밥값까지 모두 합쳐 20만원을 받으니 싼 편이다. 문의 0631) 75-9997 (영산도 이장 최경동씨).
원시의 자연 속에 사는 사람들 전남 진도군 조도면 맹골군도의 섬들은 우리나라 제일의 바람받이인 서남해의 모서리에 있다. 이곳은 서해와 남해의 물살이 직각으로 교류하며 소용돌이치는 험한 바다로 바닷바람이 아주 거센 곳이다. 맹골도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가운데서도 뭍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진도 섬들의 방풍·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곳 섬 사람 들의 삶 역시 거친 자연에 무방비로 내던져져 있다시피 하다. 맹골군도는 어미섬인 맹골도, 죽도, 뇌도(곽도라고도 함)로 이뤄져 있다. 섬사람은 모두 합쳐 1백20명(95년 1월 현재). 맹골도에는 26가구가 살고 있는데 섬 중앙에 높이 3백 m의 깃대산이 있으며 마을은 섬 북쪽 해안의 선착장(배를 대는 곳) 부근에 몰려 있다. 풍랑이 조금이라도 일면 목포에서 출발한 배가 맹골도 집 앞까지 왔다가도 사람들을 다시 싣고 서거차도로 가버린다. 부근 바다에는 고기가 우글우글해서 낚시꾼들이 많이 찾아오는데 역시 배를 못대고 침만 흘리며 돌아가기 일쑤다. 그래서 맹골도 사람들은 자조 섞인 푸념으로 맹골도를 『맹탕 골탕만 먹이는 섬』이라고 부른다. 뭍에 오기가 힘들다 보니 맹골도 사람들은 급한 병이 생기면 헬리콥터를 타고 목포의 병원에 간다. 자동차는 못타도 비행기를 자가용처럼 타는 셈이다. 그러나 자연조건이 이렇다 해서 맹골도 사람들은 좌절하지 않는다. 맹골도 사람들은 오히려 원시의 자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바람과 풍랑이 세고, 배 대는 시설이 없어 사람들이 배를 제대로 못부리기 때문에 맹골도 주변에는 고기와 조개, 해초류가 낙원을 이루고 있다. 물고기 중에서도 특히 흑돔·홍돔이 많아서 뭍의 낚시꾼들은 불편한 교통을 무릅쓰고 한사코 이 섬을 찾아든다. 해삼과 전복도 새까맣게 널려 있지만, 맹골도에는 노인밖에 없어서 이웃 섬의 잠녀들이 와서 돈을 내고 따 간다. 바닷가에 자라는 미역이나 돌김, 톳, 청각 등 자연산 해초류만이 맹골도 사람들의 손길에 맡겨져 주요 소득원이 되고 있을 뿐이다. 해초는 맹골도 사람들의 생명줄이나 다름 없다. 큰 바다에서 거센 물살에 단련되며 자란 것들이라 깨끗하고 영양분이 가득하며 훨씬 진한 맛을 낸다. 맹골도 사람들은 무척 낙천적이다. 여행객들이 맹골도에 첫발을 디디면 얼굴조차 모르는 사이인데도 모두 갯가로 달려나와 마중한다. 거센 파도가 치는 갯가에는 그물 손질 하는 아낙네들의 함박웃음이 꽃피고, 험한 뱃길에 주눅든 나그네는 섬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에 저절로 풀어진다. ● 맹골도 가는 길 목포에서 정기 여객선 한양호와 신해호가 서거차도를 거쳐 맹골도까지 다닌다. 서거차도에서 맹골도까지는 30분 걸린다. 맹골도에서는 쉽게 민박을 할 수 있는데 1박 2∼3식에 1만원 ∼1만 2천원. 서거차도에서 맹골도에 이르는 남서방향의 대각선 뱃길은 서해와 남해의 다른 섬 여정에서 만나기 어려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우선 서거차도와 동거차도는 우리나라에서 멸치와 삼치가 가장 많이 나는 섬이다. 삼치는 멸치를 먹이로 하기 때문에 멸치와 같이 다닌다. 서거차도 부두에서 보면 방파제 사이의 가물가물한 수평선 위로 병풍처럼 두른 섬이 안개빛으로 다가온다. 그 섬은 생긴 모습 그대로 이름이 병풍도다. 병풍도는 맹골도에서 조도쪽으로 가면 정면으로 만날 수 있다. 병풍도의 풍광은 아름답기로 이름난 홍도나 거문도와는 또 다른 원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섬은 꽤 크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고 무인도로 남아 있다. 섬 전체가 사방팔방으 로 병풍을 친 듯 해안까지 몇겹의 주름으로 겹쳐 있다. 여름에는 관광유람선이 조도에서 병풍도 주변 구경을 위해 자주 다닌다. 조도-병풍도 또는 맹골도-병풍도 뱃길은 30 분 거리다.
일단 들어가면 「애 배 나오는 섬」 『그 섬에 들어가면 애 배 나온다!』 섬이 얼마나 멀고 뱃길이 험하면 그런 말이 나왔을까? 전남 완도항 일대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런 말을 달고 다니는 섬들이 있다. 그 중 한 곳이 청산도 너머에 있는 여서도라는 섬이다. 여서도는 수평선을 허리에 감고 있어 자태가 매우 수려하고 완도항 쪽에서 보면 안개빛 얼굴색으로 가물가물 햇빛을 반사해내는 몸놀림 또한 아름답다. 완도항에서 여서도 를 향한 노스탤지어가 배어나는 것은 여서도가 앉아 있는 자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서도는 완도 섬들 가운데 남쪽으로 가장 바깥쪽에 있다. 청산도와 제주 추자도간 거리의 꼭 중간에 있기 때문에 완도와 제주도 사람들은 서로 자기쪽 땅이라며 애정을 표시한다. 여서도는 완도항을 출항해서 청산도를 지나 두 시간이면 간다. 생각보다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애 배 나오는 섬」이라고 한 데는 꼭 드나들기가 힘들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여서도의 자연과 풍치가 자아내는 낭만성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여서도 아낙네 중에는 제주도 출신이 많다. 여서도로 물질을 와서 아예 눌러 앉은 잠녀나 여서도 총각한테 시집온 경우일 것이다. 수평선 너머 동네 출신인 제주도 잠녀 들은 한번 물질을 오면 오랜 기간 머물러야 했고, 또 돌아가고 싶어도 요즘처럼 배들이 잘난 게 아니어서 마음대로 섬을 떠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여서도 총각들과 원시적인 사랑을 나누고, 말 그대로 「애를 배게…」 됐을 것이다. 그러한 「여서도의 사랑」은 도시의 타산적인 남녀관계와는 거리가 먼 정말로 「인간적인 정 나누기」였을 것이다. 완도항을 떠난 배가 청산도까지는 별 일 없이 잘도 간다. 그러나 『얼굴 예쁜 계집 속마음과 바다 잔잔한 것 믿지 말라』고 했듯이, 청산도를 지나면서부터 여서도까지의 물 길은 뱃사람들도 늘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요즘엔 배가 크고 속도도 빨라져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추억이 여서도로의 여정을 풍성하게 할 뿐이다. 여서도는 청정해역 완도 바다의 가장자리에 있기 때문에 자연산 해산물이 풍요롭다. 그래서 여서도엔 사시사철 뭍에서 오는 낚시꾼들의 발길이 끊어질 새가 없다. 또 여서도 마을 앞 부둣가에서는 유달리 문어가 많이 난다. 망망대해 파도에 시달린 문어들이 아마 떼지어 부둣가 방파제에 쉬러 기어드는 모양이다. 방파제에서는 언제나 잠녀 한두 명이 문어 물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여서도 가는 길 완도항에서 격일제로 배가 떠난다. 여름 피서철에는 여객선이 매일 운항하며 두 시간 걸린다. 거의 모든 집이 민박을 친다. 여서도는 대부분 암석해안이며 곳곳에 높은 해식애가 발달해 있다.
동해의 희한한 물고기 세상 산골에서 동해안 갯마을로 시집온 새댁이 있었다. 남편이 잡아온 송어를 손질하여 석쇠에 굽는데,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도 생선 색깔은 원래의 불그죽죽한 그대로였다. 새댁은 불이 잘못됐는가 싶어 풍로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생선을 뒤집어 보기도 하면서 속만 태웠다. 시어머니는 빨리 밥상 들이라 재촉하는데 고기는 익을 기미를 보이지 않자 새댁은 다급한 마음에 울어버리고 말았다. 동해안 한적한 갯마을 갈남마을의 송어에 얽힌 이야기다. 동해안에서 잡히는 송어는 찌건 굽건 튀기건 간에 주홍빛 살색이 변하지 않는다. 날마다 송어를 입에 붙이고 사는 갯마을 아낙들조차 송어를 굽다보면 이리저리 뒤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고 한다. 동해안 갯마을을 돌다보면 희한한 생김새에 별난 이름을 가진 고기들을 만날 수 있다. 강원도 끄트머리의 삼척군 근덕면 갈남1리. 그 마을에서 만난 아주머니에게서 들은 별난 물고기에 관한 이야기들은 더 있다. 이곳 사람들이 「새치」라고 부르는 「임연수어」. 원양어선들이 잡아와 도시에 내다파는 「이면수」라는 물고기와 사촌뻘쯤 되는 생선이지만, 맛과 생김새가 이면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생선은 어른 팔뚝굵기만하게 자라야 맛이 제대로 나며, 또한 기름에 튀겨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튀긴 새치 껍질이 얼마나 맛있던지 시아버 지와 며느리가 서로 눈치보며 먹었다고 한다. 점잖은 시아버지가 새치 껍질까지 몽땅 먹어버리자 혹시나 하고 기다리던 며느리가 야속해 했다는 맛깔스런 고기다. 그만큼 임연수어라는 생선은 비린내가 나지 않는 고급 생선인데다 파삭파삭하게 튀겨진 껍질 맛이 최고다. 예로부터 『부자들이 새치 껍질 맛에 녹아 논 팔아먹는다』고 했 으니 값도 만만치 않았나 보다. 하지만 여름 한철 동해안 어촌마을 어판장에 가면 인천 먹갈치보다 훨씬 싼 값에 살 수 있다. 갈남마을 사람들은 가을이면 배추김치에 꾸득꾸득 말린 새치를 토막쳐 넣고 김장을 담근다. 새치를 넣은 배추김치는 메가리젓(전갱이 새끼로 담근 젓갈)의 진한 맛과 어울 려 겨울이 깊어질수록 깊은 맛이 생긴다. 특히 김치속에 든 새치 살점을 뼈째로 씹으면 고소하기 이를 데 없다. 이밖에도 빨간 색깔과 큰 눈동자가 생뚱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미친년 바람 고기」라는 해때기, 멋대가리 없이 길기만 한 장치, 불룩한 배에 짜리몽땅한 꺽뚝어, 광어보다 더 맛을 쳐주는 도다리, 꺼끌가재미, 씽퉁어, 삼숙이… 등 이상야릇한 이름을 가진 물고기들이 많다. 이 벼라별 고기들은 이름 못지 않게 맛 또한 각각이라 동해안 갯마을 순 례를 즐겁게 해준다. 강릉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길을 잡으면 삼척시를 지나면서부터 동해안의 탁 트인 바다와 멋진 해안이 눈길을 끈다. 근덕에서 울진 사이에는 해안선이 들락날락하 면서 군데군데 작은 마을들을 끼고 있다. 갈남마을도 움푹 들어간 해안선이 작은 모래밭과 축항을 앞에 두고 앉아 있다. 앞바다에는 동해안 갯가답지 않게 크고 작은 바위들 이 자리잡고서 갈매기떼의 쉼터가 되고 있다. 갈남마을은 작은 어촌으로 마을 앞에는 꽤 큰 고깃배도 댈 수 있는 축항이 있다. 이 마을에서는 모두 30여척의 배를 부리는데 독자적인 위판시설도 갖추고 있다. 또 공동어 장에서는 성게, 해삼, 전복, 멍게 등이 많이 난다. 축항에서 만난 나복자씨(44)는 건조대에 널어둔 고기를 뒤집고 있었다. 『어제 우리 아저씨가 공동어장에서 잡아 온 고기래요. 요즘 며칠 동안 나울(너울:태풍이 왔을 때 이는 파도를 일컬음)이 쳐서 배가 멀리 못나가고 가까운 어장에서만 조업 해요』 그러고 보니 축항이 텅 비어 있다. 태풍 경보가 내리면 마을 사람들은 임원이나 가까운 죽변 등 큰 항구로 어선을 대피시킨다고 한다. 갈남마을 앞 바닷가에서 5백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월미도(月美島)는 소나무가 우거진 바위섬이다. 동해안에서 그처럼 섬다운 섬을 보기도 어렵다. 월미도에는 작은 백사장 이 있어 물결이 잔잔한 날에는 배를 대 건너가는 사람들이 많다. 예전부터 월미도 돌틈에서 약수가 솟았는데 피부병 치료에 매우 효과가 좋다고 한다. 마을 남쪽에도 작은 배로 들어갈 수 있는 「순구무」라는 바위굴이 있는데 경치가 아름답다. 갈매기들의 쉼터인 꽃대바위, 바닷물에 쏙 잠겼다가 쑥 드러나곤 하는 물친바 위, 돗대바위, 납데기 등 마을 앞 지척에 있는 작은 바위섬들은 동해 바다의 밋밋한 해안선을 아기자기하게 해주는 장식품이다. ● 갈남마을 가는 길 강릉에서 포항, 울진 가는 직행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있는데 갈남마을 정류장에 선다. 강릉과 포항을 잇는 7번 국도를 타고 삼척군 근덕읍을 지나 15분 거리에 있다. 문의: 갈남어촌계 0397) 72 -4215
토속미 물씬 풍기는 해신당과 남근 신앙 갯마을 사람들은 바다를 섬기고 순종하며 바다가 주는 열매를 감사히 얻어먹고 살아간다. 그러나 바다는 갯마을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도 하지만 단번에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갯마을엔 과부가 많다. 강원도 삼척군 근덕면 신남마을은 모질고 모진 갯마을 살이의 전형을 보여주는 갯마을 중 하나다. 또 그곳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완벽하고도 특이한 해신당(海神堂)과 남신당(男神堂)을 모시고 있다. 해신당은 물에 빠져 죽은 처녀를 모시는 「처녀신당」인데 남신당보다 훨씬 좋은 자리에 정중히 모셨다. 동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옛날에 어떤 처녀가 해초 따는 것을 돕기 위해 장차 그녀의 남편될 사람이 마을 앞 애바위라는 곳에 데려다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처녀는 시집도 못가고 그날 폭풍우를 만나 죽어버렸다. 동네 사람들은 죽은 처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당을 만들어 해마다 제를 지내준다. 시집 못가보고 죽은 여자들은 그 원한이 너무 커 달래주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해꼬지를 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신남마을에서는 특히 해신당에 남근(男根)을 깎아 처녀신을 모시는 것으로 유명하다. 신당 안에는 춘향이를 닮은 처녀의 초상이 모셔져 있고, 신당 모퉁이에는 나무로 깎은 남근이 수십개 새끼줄에 잘 엮여 걸린 것을 볼 수 있다. 신당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깊은 신심(信心)은 남근을 그토록 정성껏 실감나게 깎은 데서도 쉬 느껴진다. 남근들은 긴 것, 짧은 것, 토실토실한 것, 향나무로 깎아 흑인 것처럼 꺼무뎅뎅한 것 등 다양한 모양으로 새끼줄에 매달려 있다. 신남마을은 생김새부터가 해녀들의 가파른 삶을 닮았다. 동해안의 갯마을들이 대부분 험준한 태백준령의 가파른 산등성이를 타고 들어앉아 있는 것이 특징인데, 그 중에서 도 신남마을은 경사가 급한 골짜기의 틈바구니에 비집고 들어앉아 있다. 거친 파도가 부채꼴 모양으로 자리잡은 마을 집들을 집어삼킬 듯 덮치고, 뒤로는 험준한 산자락이 버티고 있어서 갯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함부로 나아갈 수도 기어오를 수도 없다. 그리고 처녀가 해초를 따다 애를 쓰며 죽었다는 애바위와 꽃바위는 바닷가에 솟아 있다. 마을 풍경만 보자면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이다. 신남마을은 포구가 작다보니 큰 배를 댈 수 없고 고깃배라고 해야 전마선 몇척에 머구리배가 3척이다. 10여년 전 동네 어촌계에서 돈을 모아 마을 앞바다에 정치망을 설치하 고 어장을 만들었다. 어장을 드나들거나 잠녀들이 마을을 벗어나 물질을 갈 때 타고 다니는 교통수단이 전마선이나 머구리배다. 마을 남자들은 금망이나 호망 같은 그물을 써서 오징어, 방어, 숭어 등을 잡고 공동어장에서는 전복, 해삼 등을 채취해 집집마다 연간 1천만원 정도의 소득을 올린다. 옛날에 비해 워낙 해물값이 올라서 작은 포구치고 는 수입이 괜찮은 편이다. 마을 사람들은 폭풍이 오면 죽은 듯이 문을 닫고 들어앉아 있다가도 바람이 자면 「까꿀대」와 양동이를 들고 바닷가로 나선다. 거센 파도에 밀려온 미역이나 다시마를 건져 올리기 위해서다. 큰 파도가 일면 바다물이 속까지 뒤집히며 용틀임하기 때문에 바닥에서 자라는 해초들이 튕겨 떠올라 바닷가로 밀려온다. 동네 사람들은 젊은이 노인네 할것없이 까꿀대로 건져올리는데 한시간 남짓만 해도 미역 서너장 만들 만큼 수확을 거둔다. 방파제에서 미역을 말리던 최영옥할머니(72)는 미역줄기를 끊어 맛보기를 권한다. 바다 냄새가 물씬 풍기는 생미역 줄기는 달착지근하고 사근사근 씹히는 맛이 그만이다. 미역줄기를 무릎에 탁탁 쳐서 맛보라고 권하는 인심은 이젠 동해안 갯마을에나 가야 만날 수 있는 토종 인심이다. ● 신남 마을 가는 길 강릉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삼척을 거쳐 울진쪽으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다. 마을 뒤로 7번 국도가 지나고 있는데 강릉-울진행, 강릉-포항행 직행버스가 수시로 있으며 신남 정류장에 선다. 문의 : 이장 김진철 0397) 72-4241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와 개펄 드라이브 전북 부안과 고창 사이의 갯가 줄포만은 여느 해안과는 다른 찬란함과 풍성함이 눈에 띄게 드러난다. 변산 격포에서 시작해 모항 왕포 곰소 줄포로 이어지는 수려한 풍치도 그렇거니와 부안 방면의 상포와 하전 쪽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너르고 토실토실한 개펄이 펼쳐진다. 부안쪽 해변 상포와 하전 사이, 장수강이 흘러 내려오는 곳에 선운리(仙雲里)가 있다. 서당몰 신흥리 안현 질마재 등 4개의 마을로 이루어진 갯마을 선운리는 시인 서정주의 고향마을로서 『질마재 신화』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서정주 시인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던, 고향 마을 질마재에서 일어났던 얘기들이 훗날 『질마재 신화』라는 산문시로 엮어져 나오게 된 것이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고향 진메 마을에서 일어난 얘기들을 묶은 산문집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로 농촌 문학을 일궈냈듯이,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는 우리네 시 골 고향 어디에서나 일어남직한 애기들을 시인의 손길로 다듬어놓은 것이다. 따라서 선운리에 가서 질마재 얘기를 듣는 것은 우리 고향 얘기를 좀더 절절하게 듣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지난 봄 질마재에 갔었다. 그리 크지 않은 저수지 옆길 질마재 고개를 넘어섰을 때는 해가 지기 전 45도 쯤의 각도를 남겨놓고 있었는데 밀물이 막 들기 시작한 줄포만의 광활한 개펄이 햇살을 받아 아름다운 빛깔을 토해내고 있었다. 질마재에 들어선 나는 서정주 시인의 생가와 그 집을 지키는 서시인의 동생 정태옹을 찾았다. 서옹은 그날 마을 뒤 소요산에서 난을 캐고 돌아와 동네 구멍가게에서 젊은이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분을 졸라 따라간 집은 서정주 시인의 생가 바로 옆집이었는데, 89 년 2백만원을 주고 사서 1백만원 들여 수리한 것이라고 한다. 딱 세칸 짜리로 방 하나에 난실 하나, 그리고 부엌이 전부다. 바깥 벽에는 「우하정(又下亭)」이라는 당호를 붙 였다. 이 집에서 만년을 홀로 유유자적하고 있는 서옹은 『몸과 마음에 근심 걱정 없는 것이 최대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의 삶이 그렇다. 소요산과 질마재고개를 오르내리며 줄포 바다를 바라다보고, 봄에는 난을 캐고 농사철에는 밭을 갈고, 물때에 맞춰 개펄에 나가고, 겨울에는 글을 읽고 쓰고, 그리고 심심하면 마실을 돌며 마을 사람들과 대포잔을 주거니 받거니…. 그의 질마재 삶은 그 자체가 <질마재 신화>의 맥잇기인 것이다.
도회지에서 지식인으로 반평생을 보낸 그의 귀향을 질마재 마을 사람들은 서정주 시인보다 더 「질마재 신화」의 자긍심을 부추겨주는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나는 우하정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서 정주 시인의 『질마재 신화』에 나오는 「침향(沈香)」 얘기부터 꺼냈다. 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침향을 만들려는 이들은 산골 물이 바다를 만나러 흘러내려가다가 바로 바닷물과 만나는 언저리에 굵직굵직한 참나무 토막들을 담가둡니다. 침향은, 물론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참나무 토막들을 다시 건져 말려서 빠개 쓰는 겁니다. 아무리 짧아도 2~3백년은 가라앉아 있던 것이라야 향내가 제대로 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1천년쯤 잠긴 것은 냄새가 더 좋겠지요. 그러니 질마재 사람들이 침향을 만드는 것은 자기들이나 아들딸이나 손자손녀들을 위해 쓰려는 게 아니고, 훨씬 더 먼 미래의 후대들을 위한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넣는 이 와 꺼내 쓰는 사람 사이의 수백, 수천 년은 이 침향 냄새 그대로 바짝 가까이 그리운 것일 뿐 따분할 것도 아득할 것도 너절할 것도 허전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서정태옹이 들려준 침향 얘기는 좀 달랐다. 서옹은 과학적 관점으로 침향의 유래에 접근했는데, 그분의 말이 사실이라면 서정주 시인의 침향은 무지하게 과장된 이야 기라고 할 수 있겠다. 『2백~3백년 전에 갖다 박은 것이라고? 그게 다 헛소리여.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에 그런 넋나간 짓 할 위인들이 있었겄어? 그 참나무덜언 선운산에서 홍수에 저절로 떠내려 온 것이여. 뻘 속에 파묻혀 있다가 물이 들면 그 자리에서 뽀글뽀글 가스가 올라오니까 어부들이 무슨 큰 고둥이 들어 있는 줄 알고 파보았다가 아까우니까 말려서 불때보니 냄새가 괜찮은 거라. 그래서 침향인지 심향인지가 된거라. 아, 또 하나 있어. 옛날에 이 근방 출신 검단선사라는 스님이 가난한 이 고장 중생들을 위해 육염(소금) 굽는 방법을 가르쳤지. 이쪽 개펄이 워낙 곱고 단단해서 그 위에 방 한칸 크기로 「섯등」을 만들고 갯물을 가둬. 거기서 완전 정제가 안 되니까 그 옆아래에 참나무 재목으로 우물 정(井)자 모양의 옹달샘을 만들어. 섯등 밑에 물꼬를 터 놓으 면 그 옹달샘으로 갯물이 스며들면서 완전히 정제가 되는 거라. 그러면 그 물을 황토흙과 느릅나무를 이겨 만든 가마솥에 넣고 달여. 최고로 맛 있는 구운 소금 육염이 되는 거여. 소금은 구워야 맛이 있제. 그런데 그 가마솥 만든 참나무 재목들이 나중에 침향이 된 거여. 지금 손바닥만한 것만 나와도 수백만원씩 할 것이구먼. 인사동에 가면 쪼가 리라도 있을까?』 서옹은 저녁때가 되자 서울로 떠나려는 나를 한사코 용기리에 있는 풍천장어 전문식당으로 끌고 갔다. 그 집 주인 오복금 여사(50대 중반)는 잠자다가 일어나서 맞았다. 그날 복금씨가 구워주는 풍천장어는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산이 아니라 비닐하우스에서 나온 것이었다. 풍천장어는 이젠 자연산이 없다. 복금씨의 「자연의 집」 등 풍천장어 파는 데서는 자연산을 찾는 서울 사람들에게 자잘하면서 꺼뭇꺼뭇한 것들을 골라주고 값을 배로 받는 다고 했다. 그러면 서울 사람들은 폼 잡으며 잘 먹는 모양이다. ● 질마재 마을 가는 길 고창읍에서 흥덕을 거쳐 종점인 선운리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선운리에서 내리면 된다. 질마재 마을은 선운리의 네 개 마을 중 하나다. 승용차는 서울에서 호남고속도로를 거쳐 정읍 인터체인지로 들어간다. 선운리에 숙식시설은 없다. 15분 거리인 선운사 관광단지로 나오면 된다. 서정태옹 연락처: 0677) 63-8878. 자연의 집: 0677) 64-1723 (오복금 씨). 선운리 바로 아래 하전마을 앞에는 광활한 개펄이 펼쳐지면서 개펄드라이브 코스를 제공한다. 경운기들이 바지락 캐러 들락거린 자국을 따라 개펄 위를 시속 30km 정도로 달리면 바다쪽 물 닿는 데까지 30분 거리가 족히 된다.
서해바다에서 해돋이 본다! 서해안 갯마을에서도 해돋이를 볼 수 있다? 그것도 동해안의 그것보다 훨씬 영롱하고 토실토실한 모습으로…. 아마 쉽게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신비라는 게 사람의 상식을 넘어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서해안의 해돋이도 그런 경우라고 하겠다. 충남 당진군 석문면 교로리 왜목마을은 서해바다에서의 해돋이를 현실로 보여주는 곳이다. 어쩌다 교로리에 온 사람들은 왜목마을의 아침을 『이게 생시인가 꿈인가?』하면서 맞는다. 교로리의 해돋이는 소박하면서도 진지하다. 동해안의 해돋이는 거의 바다 안개에 가려 쉬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거만을 떨거나 어쩌다 한 번 모습을 드러낼 때도 주위를 온통 뻘겋게 물들이며 요란을 떠는 데 비해, 교로리의 해돋이는 맑은 날이면 정열에 불타되 눈부시지 않을 정도로 해의 모습을 곧이곧대로 보여준다. 교로리 해변가에는 숙박시설이 「태공장 여관」 한 군데밖에 없는데, 이 여관 2층 앞쪽 가운데 방은 우리나라 최고의 호텔방보다 입지가 좋다. 이 방에서는 베란다문을 열어 젖히면 해돋이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교로리의 해돋이는 2막 3장 정도의 다양한 연출을 보여준다. 해가 수평선에 머리 끄트머리를 내밀기 전 20~30분 동안은 하늘과 바다가 짙은 안개색이다. 그러다가 해가 머리끝에서부터 얼굴 전체를 턱걸이 하듯 전부 내밀 때까지 또 20~30분 동안은 주변 바다가 단풍색에서 주홍색으로 또 황토색으로 되풀이해서 변한다. 그 뒤 해가 수평선에 서 10m 쯤 떠오르면 바다와 하늘이 짙은 초콜릿색으로 바뀌어버린다. 그때 교로리 앞바다 중간 중간에 닻을 매둔 고깃배들과 굴 양식장 말뚝, 그리고 덤장그물과 저만치 떠 있는 섬 국화도까지 모두 같은 색깔을 띤다. 왜목 마을이 서해안인데도 해돋이를 볼 수 있는 것은 지형이 남북으로 길게 뻗은 땅꼬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해안과 같은 방향의 수평선을 가짐으로써 동해안에서처럼 일출 일몰을 볼 수가 있다. 왜목 포구는 아름다운 해돋이만으로도 서해안 다른 갯마을들이 갖지 못한 손님 대접거리를 마련한 셈이지만 오목하게 휘어진 해안 또한 매우 옹골지다. 개펄, 모래, 잘고 큰 자갈들이 차례로 해안에 펼쳐져 있어 갯마을에서 나는 「갯것」은 고루 다 난다. 갯것의 백화점이라고나 할까?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적어 한적한 곳에서 갯마을의 진면목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왜목 마을에서 이른 아침에 해돋이 구경을 마치면 새벽참으로 개에 나왔던 아낙들이 한사코 손짓을 한다. 그리고선 막 깐 굴을 입에 넣어준다. 왜목마을 해안 한 중간에는 또 거대한 덤장(해안가에 치는 정치망 그물의 한 종류)이 쳐져 있는데 물때에 맞춰 가면 그물 주인과 함께 그물걷이를 하는 즐거움을 경험해 볼 수 있다. ● 왜목마을 가는 길 당진읍에서 고대면 석문면으로 나가는 615번 지방도로를 타고 30분 쯤 달리다 보면 동인장여관과 대방주유소를 지나 대호방조제가 보이면서 오른쪽으로 교로리 가는 샛길 이 나온다. 왜목 마을에 여관은 태공장 하나가 있고 식당은 세 곳 있다. 왜목 마을에서 갔던 길을 다시 나오면 큰 길가에 여관이 두 곳 더 있다. 문의 0457) 53-6619 (김종득 선장)
된장 풀어 고기잡는 재미 개펄 옆에서 살았던 나는 방학 때는 물론이고 학교만 끝나면 개펄에서 뒹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니 개펄에서 나는 것은 다 잡아봤다. 쇠스랑게, 농게, 뻘떡게, 명씨 고동, 삐틀이 고동, 청각, 톳, 운저리, 범치, 짱뚱이…. 그 가운데서도 잡는 방법이나 구수한 맛 때문에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쏙새비」라는 것이다. 쏙새비는 모양으로 치면 새우와 가재의 중간쯤 된다. 요즘도 소래포구에 가끔 쏙새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서해안 개펄 어딘가에는 쏙새비들이 겁나게 많은 모양이다. 그런데 이름에 「새비」라는 말이 붙는 걸로 봐서는 새우쪽에 가까운 것 같다. 새우를 사투리로 새비라고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가리가 새우보다 좀 크고 몸통이 납작한 것을 빼고는 하는 짓도 새우와 비슷하다. 이름 앞에 「쏙」이라는 말이 붙은 것은 아마 쏙새비의 박진성을 가리키는 것일 게다. 쏙새비는 썰물 때 드러나는 개펄 위에 물이 한 1~2 cm 쯤 고여 있는 웅덩이 비슷한 곳에 산다. 그러면 사람들은 바지를 무릎 위까지 걷어붙이고 다투어 그곳으로 돌진해 간다. 거기에는 쥐구멍 만한 쏙새비 구멍이 2~3m 간격으로 맞뚫려 있다. 양쪽 구멍에는 말간 물이 차 있기 때문에 쏙새비가 엎드려 숨쉬고 있을 것이다. 한쪽 구멍에서 맞은쪽 구멍을 향해 발바닥으로 뻘 잔등을 꾹꾹 눌러 밟아가면 맞구멍에서 분수처럼 말간 물이 점점 높이 솟아오른다. 그러다가 맞구멍에 30~40cm 쯤 다가 갔을 때 그 자리를 온 힘을 주어 땅이 꺼져라 밟아버리면 맞구멍에서 분수처럼 치솟는 물기둥과 함께 쏙새비가 『쏙-!』 튕겨져 나온다. 그래서 이름하여 쏙새비다. 대개의 경우 한번 더 밟으면 한 마리 더 튀어오른다. 쏙새비도 다른 갯것들처럼 5~6월에 알을 배는데, 누런 알을 보듬어 안고 나오는 쏙새비를 잡을 때는 『아따, 옹골지다!』며 함성을 지르곤 한다. 그 쏙새비에 관한 추억을 나는 얼마전 경남 남해섬의 한 갯마을에서 되새김질할 수 있었다. 그곳은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라는 마을이다. 문항마을은 아늑한 산(대국산 : 해발 2백20m) 아래에 꼬막같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갯마을이다. 마을 앞쪽 저만치 바다 한가운데에는 장도라는 매우 소박해 보이는 섬이 모래톱으로 마을과 이어지는데, 하루에 꼬박 두 번씩 일년 내내 「모세의 기적」을 연출한다. 바로 이 마을의 명물이 「쏙」이다. 쏙은 쏙새비와 거의 비슷하면서도 모양이 약간 달라 보였다. 이름이 쏙인 것은 쏙새비와 사정과 같았다. 그러나 잡는 방법은 쏙새비처럼 무지막지하지 않았다. 주로 마을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양재기를 하나씩 들고 갯가로 나간다. 양재기 안에는 주먹만한 된장 덩어리가 한개씩 들어 있다. 개펄에서 사람들이 조금 물렁한 듯 단단한 개펄 거죽을 한 2~3cm씩 걷어내니 게구멍 같은 구멍들이 무수히 드러났다. 그 구멍 위에 된장을 물에 풀어서 뿌려준다. 그러고는 글씨 쓰는 붓대롱을 구멍에 집어넣고 살살 흔들면서 천천히 들어올린다. 붓 끄트머리가 구멍 밖으로 내비칠 무렵 웬 커다란 집게다리가 붓 끄트머리를 쥐어잡고 있다. 이때 붓대롱과 함께 그것을 『쏙-』 잡아 빼버리면 된다. 그래서 고기 이름이 「쏙」이다. 짭짤한 된장국물 맛 보러 올라 왔다가 짭짤한 쏙국 신세가 돼버린 것이다. 쏙은 국처럼 끓여서 국물을 훌훌 마시거나 건더기를 따로 건져서 술안주로 먹기도 한다. 맛은 쏙새비처럼 구수하면서도 약간 단 듯하다. 쏙을 많이 드셔서 그런지 문향마을 사람들은 장수한다. ● 문향마을 가는 길 남해대교를 건너 남해일주도로로 좌회전하여 25분쯤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문항마을이 나온다.
줄 나룻배에 여자 뱃사공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숙암리. 오대천은 이곳 산자락을 휘돌면서 물도리동 숙암리를 만들어 놓고 정선쪽으로 흘러간다. 마을 뒤는 해발 1천1백70m의 가리왕산이 두르고 있다. 이처럼 산에 막히고 강에 갇혀 있는 숙암리 대지마을 사람들은 언제나 줄나룻배를 타고 오대천을 건너 외지로 나다닌다. 깊은 협곡에서 나룻배가 다니는 정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그래서 그런지 숙암리 사람들은 예술감각이 발달한 듯하다. 검푸른 산, 쪽빛 하늘과 강물 사이에 있는 나룻배는 빨강색으로 칠해 놓았다. 마을 사람들은 다른 건 몰라도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만은 만끽하며 산다. 그래서 도시 사람들이 부럽지 않다. 네것 내것 야박하게 따지는 마음도 없다. 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 출신 김정본씨(60)가 도시생활하다가 병을 얻어 다 죽어가는 몸으로 돌아왔을 때 집도 절도 없는 그를 반겨 맞아들였다. 김씨는 서울 살 때 임금 인상을 요구하다 공장에서 해고됐고, 대구로 가서는 사업을 벌였다가 벌어놓은 돈도 다 날려버렸다. 먹고 살기조차 막막해진 그는 알코올 중독자가 돼버렸다. 병원 의사들은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가족들도 너무 지쳐버린 터라 그는 이리저리 떠돌다가 고향인 숙암리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김씨가 처음 숙암리에 왔을 때는 걸음도 제대로 못걸어 부축해서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요즈음 그는 등짐을 지고 숙암리 맞은편 산 위에 있는 그의 오두막까지 혼자 다닐 정도가 됐다.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동네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로 소일하는 게 도시생활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보약이다. 외따로 혼자 산에 살면 무섭지 않으냐는 말에 그는 또렷이 대답했다. 『무섭다면 사람이 무섭지 산짐승은 괜찮답니다』 숙암리에는 세 곳에 자연마을이 흩어져 있다. 그중 대지마을에는 모두 8가구가 산다. 이 마을까지 버스가 들어오지 않아 버스 내린 곳에서 30분 이상 빙 돌아 걸어야 마을로 들어올 수 있다. 아이들의 통학이 불편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을에 급한 환자가 생기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몇년 전 강건너로 마을의 코앞을 지나가는 405번 지방도로가 포장됐지만 그림의 떡이다. 궁리 끝에 마을 사람들은 오대천에 나룻배를 띄우기로 했다. 3년전 8가구가 1백만원을 모아 꿈을 이뤘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려 나룻배를 타고 마을까지 5분도 안 걸려서 집으로 올 수 있게 되었다.
숙암나루터의 백미는 역시 빨간 페인트칠을 한 줄나룻배, 쇠로 만들어진 줄나룻배에 누군가가 녹슬지 말라고 빨간 페인트칠을 해버렸다. 레드 콤플렉스에 주눅든 마을 사람 들이라 처음엔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 405번 국도를 지나다가 빨간 나룻배가 푸른 오대천에 떠있는 것을 보고서 탄성을 지르며 차를 세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숙암마을의 그림같은 풍경에 빨간 페인트 칠을 한 줄나룻배는 바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던 것이다. 요즘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새로 생긴 솔밭가든 휴게소 앞에서 차를 내린 뒤 일부러 줄나룻배를 타고 마을까지 들어와보기도 한다. 줄나룻배가 오가는 숙암리 나루에서 제일 가는 화제의 주인공은 숙암리에서 줄나룻배를 가장 잘 다룬다는 박순옥씨(여·42 )다. 뱃사공이 따로 없는 숙암리에서 마을사람들 은 모두가 스스로 줄을 당겨 배를 오가게 하는 사공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박순옥씨가 꼽힌 것은 사연이 있다. 그녀는 숙암리 대지마을 출신 옆집 총각과 일찍이(19살에) 담넘기 연애로 결혼했다. 그런데 내리 다섯이나 딸을 낳았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못먹어도 고!』한 끝에 여섯번째엔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학교에 다니는 이 여섯명의 아이들을 아침 저녁으로 데려다주는 동안 그만 배몰기에 도가 터버린 것이다. 또 거기에다 아이들의 친구들까지 하루에도 몇번씩 나루터 를 오가니, 박순옥씨의 나룻배 솜씨는 전국 나룻배 빨리 몰기 경연대회에 출전해도 될 만큼 최고라고 자부한다. 뱃삯을 받는 것도 아니어서 호기심 많은 외지 사람들은 일부러 숙암리 빨간 줄나룻배를 타고 왔다갔다 하면서 차만 타고 다니던 한을 마음껏 풀기도 한다.
진부에서 오대천을 따라 나 있는 405번 도로를 타고 정선쪽으로 간다. 진부에서 20분정도 가다보면 정선군 북평리 안내판이 나오고 얼마 안가 숙암리 솔밭가든 휴게소가 나온다. 여기서 냇가로 내려가면 빨간색 줄나룻배를 타고 마을로 건너갈 수 있다. 숙식은 하진으로 나오는 게 편리하다. 문의 0398)62-0511 (이장 김봉순씨)
갈대밭의 터질 듯한 풋냄새 여행을 다녀오면 꿈속까지 그 잔영이 남아있는 곳이 있다. 그런 여행지는 모두 자연의 생명감이 넘쳐나는 곳들이다. 금강가의 강마을인 충남 서천군 한산면 신성리도 그런 곳이다. 신성리는 호젓한 여행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이나 도시의 잿빛 먼지를 일거에 걷어내버리고 싶은 사람, 남녀관계가 깨지는 쪽으로 가고 있으나 아직 깨지지는 않은 사람들, 그리고 「이혼이나 해버려?」 하고 서로 상대방에 식상한 부부들에게 꼭 한 번 가보라고 권할 만한 곳이다. 신성리에 뭐 별난 게 있는 건 아니고, 강가에 넓디 넓게 펼쳐진 갈대밭의 싱그러움이 우리의 눈과 가슴에 생명감을 꽉 채워주기 때문이다. 「갈대의 순정」이니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느니 하면서 바람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갈대의 지조없음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 그런 의태적(擬態的)인 시각을 떠나 갈대를 단순히 자연물로만 본다면 갈대처럼 다양한 건강색으로 우리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들풀도 드물다. 뿐만 아니라 갈대는 우리에게 별별 쓰임새로 도움을 주는 식물이기도 하다. 갈대의 어린 순은 식용으로 사용하며, 다 자란 원줄기로는 발을 만들어 볕가리개나 고추, 솜 등의 건조기구로 쓰인다. 또한 이삭은 빗자루를 만들며, 이삭에 붙은 털은 솜 대용품도 된다. 신성리의 갈대밭은 7만~10만평의 엄청난 규모로 마을 앞 금강변에 끝없이 펼쳐져 있다. 아마 우리나라 갈대밭 가운데 가장 넓고 깨끗하고 건강한 갈대밭일 것이다. 이곳의 갈대는 예전부터 인삼밭의 햇볕가리개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워낙 갈대가 많다보니 겨울엔 갈대밭에 불을 놓기도 한다. 그래야 이듬해에 건강한 새순이 나기 때문이다. 그 래서 신성리 갈대밭은 갈대 새순과 반쯤 잘린 묵은 순, 그리고 온전한 묵은 순들이 그대로 남아서 서로 몸을 섞고 있다. 갈대숲에서는 개개비, 도요새, 청둥오리들이 어찌나 울어대는지 그것만으로도 활력을 느끼기에 족하다. 갈대밭 바닥은 마른 개펄이어서 양탄자 위를 걷는 듯 푹신푹신한 감촉을 느끼며 산보를 할 수 있다. 개펄바닥에는 작은 구멍들이 무수히 뚫려 있는데, 갈대밭에서 살기 좋아하는 「갈게」들의 집이다. 특히 철새인 청둥오리들은 철이 바뀌어도 날아가지를 않고 이 갈대밭에서 새끼를 까는 놈들이 아주 많다. 6월 중순쯤 가면 오리새끼들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아장아장 바깥으로 산보를 나오기도 한다. 이처럼 신성리 갈대밭은 묵은 순, 새 순, 갈대꽃, 거기에 깃들이는 각종 새들의 노래소리와 갈게들의 「옆으로 행진」 등 매우 다양한 이벤트가 벌어지는 생명의 마당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을에 30~50cm 가량의 이삭들이 늘어져 나부끼는 모습이 장관이다. 갈대밭 한 귀퉁이에는 이 마을 곽상목씨(45)가 개발한 논도 있는데, 노란 벼이삭이 갈대이삭과 모가지를 부벼대며 하늘거리는 정겨운 광경이다. 초록과 갈색, 노랑, 회색, 흰색, 그리고 새들의 터질 듯한 노래소리…. 이런 자연색과 자연의 몸짓을 머리속에 잘 입력시켜 두면 나중에 꽉 막힌 도시 안에서나마 생명력 전수 를 위한 연상 대상으로 좋을 것이다. ● 신성리 갈대밭 가는 길 군산에서 장항 쪽으로 금강하구둑을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금강을 오른편에 바라보면서 강변길로 20분쯤 올라가면 부여군 양화면 시음리와 경계를 이루는 곳에 신성리가 있다. 충남 서천읍에서 602번 지방도를 타고 한산까지 가서 찾아가는 방법도 있다. 숙식을 위해서는 군산이나 장항 또는 서천읍내로 나와야 한다. 문의 0459) 951-3191 (신 성리 곽상목 씨).
강물 위 환상의 구름다리와 고즈넉한 강변역 녹음이 무성한 초여름의 강변길은 나른하면서도 한적한 분위기를 풍겨낸다. 그 강변길에 작은 다리라도 하나 걸쳐 있으면 풍경화 배경으로는 안성맞춤일 것이다. 섬진강 중하류인 전남 곡성군 오곡면 송정리에 바로 그림같은 다리 「두가교」가 있다. 그리고 그 아래 1km 지점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즈넉하고 주변 풍치가 아름다운 강변역인 「압록역」이 자리잡고 있다. 맑디 맑은 섬진강과 그 위에 걸린 정감어린 다리, 그리고 다리 아래에서 강변역으로 이어지는 발길은 선경(仙境)에 이르는 여정이라고나 할까. 두가교는 구름다리 또는 바람다리라고도 한다. 섬진강 마을인 곡성군 오곡면과 고달면 끝자락을 연결하는 다리인데, 섬진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곡성에서 구례까지 20 여km에 이르는 강줄기에 다리라고는 이것 하나밖에 없다. 따라서 다리 동쪽에 사는 곡성 구례 마을 사람들은 「육지 속의 섬」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두가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현수교를 닮았다. 길이는 4백m, 강바닥에서 다리 바닥까지의 높이는 70m, 다리 폭은 2.5m쯤 된다. 서너 사람이 나란히 서서 가면 다리 폭이 꽉 찬다. 다리 바닥은 지하철 공사장 윗덮개로 쓰이는 철판을 깔았고 바닥과 쇠줄 난간엔 짙은 하늘색 페인트를 칠했다. 주위 자연색을 짓누르지 않는 그 색조는 뻘건 성산대 교나 잿빛 한강대교 등 한강의 다리들보다 색깔이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이 다리는 정식다리가 아니라 가교 형식의 철제다리다. 강 가운데 시멘트 기둥을 둘 세우고 양쪽에 쇠줄을 연결해서 그 위에 철판을 올려놓은 모양이다. 말만 들으면 그런 다리를 무서워서 어떻게 건너 다니느냐고 겁부터 먹게 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두가교를 지날 때 혼자서 발을 굴러대면 다리가 출렁출렁한다. 여럿이 갈 때는 물론이 고 살짝 바람만 불어도 다리가 출렁댄다. 그러나 아무리 출렁대도 삐끄덕 소리가 나지 않고 무섭기는 커녕 한번 더 건너갔다 오고 싶어진다. 두가교는 차량은 못 다니고 사람과 오토바이 정도만 지나다닌다. 다리 들머리 양쪽에 시멘트로 좁은 문을 세웠고, 그 가운데 자리에는 아예 작은 기둥 두 개를 세워 차는 얼 씬도 못하게 해 놓았다. 두가교 바로 밑은 섬진강에서 고기가 놀기 좋은 여울목이 가장 많은 곳이어서 투망하기에 좋다. 그리고 두가교 아래쪽에 있는 압록역은 정취가 그윽한 강변역이다. 지리산 줄기가 틈을 벌려주는 넉넉한 골짜기와 당당한 섬진강 줄기, 그 사이 강변길을 쉴 새 없이 자동차들이 오가고 있다. 압록역 앞 섬진강 위로는 한 척의 줄나루가 쇠줄을 걸치 고 손님들을 실어나른다. 압록역에는 명물이 하나 있다. 강릉 근교의 정동진역이 드라마 「모래시계」의 무대로 유명해지면서 그곳 「고현정 소나무」가 명물이 되었듯이, 압록역에는 「김영애 소나 무」가 있다. 압록역 역시 「모래시계」의 무대로 나왔는데, 빨치산 남편을 둔 김영애가 투신자살하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다. 압록역의 「김영애 소나무」는 정동진역의 「고현정 소나무」와 모습이 비슷하지만 맑은 강바람을 쐬며 살아서인지 무척 건강한 푸르름을 과시하고 있다. ● 두가교 가는 길 곡성읍을 빠져나와 섬진강 물줄기가 보이기 시작하는 곳으로부터 시속 60km의 속도로 15분 정도 내려오면 왼쪽에 「구름다리 가든」이 보이고 곧이어 두가교 난간이 보인 다. 구례구에서 섬진강 동쪽 강변도로를 타고 올라오면 20~25분 걸린다. 압록역은 두가교에서 차로 3분거리다. 문의 0688) 62-8477 곽공석씨(두가리 1구 이장). 0688) 62- 8429(압록역 가야산장)
문명의 오지를 찾아서 전북 임실군 덕치면 구담리는 섬진강마을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진메마을과 천담리 쪽에서 흘러오는 섬진강 물줄기가 이 마을 앞을 새을자(乙)로 흐르 고 있고, 마을 뒤로는 회문산을 기대고 있어서 강마을과 산마을의 특성을 함께 두르고 있는 곳이다. 이 마을은 현재 16가구 중 7가구가 홀로 사는 노인이고 나머지 주민들도 칠순 또는 팔순에 이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다. 마을이 외지다 보니 문명의 혜택을 거의 못받고 산 다. 거의 모든 들일이나 집안 일은 손으로 해야 한다. 일손이 부족해서 일꾼을 사려고 해도 길이 멀어 들어오려는 사람이 별로 없고, 온다 해도 그들을 모셔오고 데려다 줘야 할 택시비가 만만치 않다. 생활이 좀 불편하기는 하지만 모든 농작물이나 물산을 손으로 만들어내는 수공예 공장과도 같은 곳이다. 도회지 사람들이 오래 머물기에는 화장실 등 불편한 요소가 많지만, 하루 이틀쯤 머무르면 싱싱한 자연의 냄새가 싫지 않다. 이 마을엔 예전에 조상들이 써 오던 전통 생활도구가 많다. 구담리에 들어가면 마치 아직 살아 있는 선사시대 주거지마냥 문화인류학 책에서나 나오는 재미있는 물건들이 많다. 즉 조상들이 강이나 산을 근거지로 하여 문명과 담을 쌓고 살던 시절의 생활상을 엿볼 수가 있다. 구담리에서 제일 젊다는 이유로 이장을 맡고 있는 박주상씨(62) 댁(0673-43-5450)에 가면 물고기를 잡는 「쑤기」를 비롯해서 토종벌 분가시킬 때 쓰는 임시 거처격인 「벌 멍덕」 등 구담마을의 살림살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수 많은 골동품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물고기를 잡는 희한한 도구 중 하나인 「쑤기」는 요즘의 통발과 똑 같은 원리로 만들어진 것인데, 산에서 나는 산죽이나 물싸리나무로 만든다는 점과 통발보다 훨씬 크다는 점이 다르다. 쑤기는 물이 흘러내려가는 반대쪽으로 한문으로 팔(八)자형 돌담을 쌓고 그 꼭지에 돌을 눌러 놓는다. 쑤기를 놓는 시기는 물고기들이 가리(짝짓기)를 시작하는 봄(양력 4월경)이 제일 좋다. 놓는 자리는 갈대나 물풀이 잘 우거져 물고기들이 남의 눈치 안보고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밀회 장소가 좋다. 그런 곳은 쑤기를 놓기가 무섭게 고기를 퍼담을 수 있는 명당이어서 나락 몇섬을 주어도 안 바꾼다. 쑤기 놓는 일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고 한다. 고기 잡는 데 취미가 남달라야 할 뿐 아니라 여간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쑤기를 잘 만들고 쑤기 자리를 잡고 쑤기 를 놓고 아침 저녁으로 가서 고기를 꺼내오는 번거로운 일들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게 바쁜 농촌 일과에는 쉬운 일이 아니다. 쑤기를 만드는 재료는 산에서 나는 산죽이 제격이다. 산죽은 물에 오래 있어도 잘 썩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음의 쑤기감이 물싸리다. 산속 소나무 숲 아래 무더기로 자라는 반듯반듯한 싸리비감을 꺾어다 말려 만든다. 쑤기의 또 다른 재료는 다래나무다. 다래나무는 그 줄기가 유연해서 잘 구부러지기 때문에 소 코뚜레로도 쓰이는데, 쑤기에는 소 코뚜레 같은 것이 세 개쯤 쓰인다. 쑤기에 드는 고기들은 메기, 쏘가리, 은어, 잉어, 붕어, 달납줄개, 모래무지 등 많을 때는 40여 가지나 된다. 가장 많이 드는 고기는 멀리까지 물을 타고 오르는 고기인데 주로 꺽지, 메기, 쏘가리, 동사리, 자가사리 등이다. 쑤기는 이른 봄에서 늦가을까지 놓지만 농번기는 시들해진다. 그리고 가을이 되고 서리가 내리면 쑤기자리를 거꾸로 막는다. 여덟 팔자(八)자를 거꾸로 세운 것처럼 해서 물이 오는 쪽으로 구멍이 가도록 해둔다. 그러면 밤에 게란 놈이 몸을 잔뜩 오르린채 물을 타고 동동 떠내려오다 쑤기 구멍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들어간다. 그리하여 늦가을 까지 게를 잡는 것이다. 구담리는 회문산 자락에 등을 기대고 있어서 일년 내내 멧돼지가 가족단위로 몰려다니며 논농사를 망쳐놓기 일쑤다. 특히 벼가 패서 막 벼알에 물기가 차면 달콤한 그 물기 를 빨아먹기 위해서 난리를 벌이고 다닌다. 구담리 사람들은 그 멧돼지를 잡아버리면 속이 편할 텐데도 그러질 않는다. 드럼통을 갖다 놓고 밤새 그것을 두들겨대면서 멧돼 지를 쫓을 뿐 그것들을 죽이거나 해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한낱 산짐승일망정 사람과 함께 산에 기대 살아가는 운명 공동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구담리 가는 길 순창읍에서 27번 국도를 타고 북쪽(전주쪽)으로 30분을 가다 보면 「회문산 자연휴양림」 간판이 나온다. 거기서 우회전하여 15분쯤 가면 진메마을(장산리)이 나오고 20분 을 더 가면 천담리가 나온다. 천담리에서 또 20여분을 더 가면 섬진강 끝마을 구담리가 나온다.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가며 장산리, 천담리 등 섬진강 강마을을 들러보는 재 미도 좋다. 구담리에서 민박이 가능하다. 전주에서 내려오다가 강진 면사무소 소재지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도 된다.
발 마사지에 물속 데이트 강물이 완만히 흐르는 곳에는 넓은 모래밭이 생긴다. 그런데 그 물줄기가 한바퀴 빙 휘돌아드는 데는 모래가 더욱 기름져서 영락없이 마을이 들어서는 법. 사람들은 이런 마을을 가리켜 「물도리동」이라 부른다. 낙동강 7백리 물줄기는 산을 휘돌고 들판을 가로지르면서 곳곳에 「물돌아 가는 마을」을 이뤄 놓았다. 안동의 유명한 하회마을도 물도리동이다. 그런데 낙동강엔 하회마을보다 훨씬 감동적인 물도리동이 있다. 예천군 용궁면 대은2리 의성포가 그곳이다. 의성포마을은 풍치뿐만 아니라 후한 인심 또한 물돌아가듯 넘치 는 곳이다. 마을을 찾는 외지인의 소맷자락을 한사코 끌고 들어가 밥먹여 보내는 인정이 남아 있는 곳이 의성포 마을이다. 의성포는 한마디로 육지 속의 섬이다. 의성포 들머리에 서면 우선 아늑한 모래밭 위로 걸쳐진 철판다리가 눈길을 끈다. 지하철 공사장 철판을 갖다 얹어 놓은 것 같은 다리다. 그러나 이 다리는 의성포 사람들의 한을 풀어준 「초현대식 구조물」이다. 다리 아래로는 다리에서 떨어져도 별로 지장이 없을 듯한 깊이와 속도로 강물이 흐른다. 겨우 무릎 아래에 차는 깊이에도 수줍은듯, 다리 알통을 살랑살랑 간질이면서 물이 흐르는 자태가 그렇다. 의성포 다리 옆구리 물속으로는 그 순한 강물에 지워지지 않는 경운기 바퀴자국이 나 있는데, 그간 문명의 혜택을 입지 못한 의성포의 속사정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의성포는 모두 11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다. 요즘은 아무리 궁벽한 시골마을이라도 마을 앞에 자가용 몇대씩 버티고 있는 법. 하다못해 1t짜리 농사용 픽업이라도 한 대씩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의성포 마을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자가용이 한 대도 없는 마을이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강물이 둘러싸고 있으니 바퀴달린 것은 자전거건 자동차건 맥을 못춘다. 오직 「데후(뒷바퀴 동력전달 장치)」를 단 경운기만이 물도리동 의성포에서 겨우 행세를 하는 이동수단이다. 의성포가 차라리 완전한 섬이었다면 배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성포 앞을 흐르는 내성천은 배를 띄우기에는 물이 너무 얕다. 그렇다고 11가구만 사는 마을에다 수천만 원씩 드는 다리를 놓아줄 만큼 군재정이 여유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의성포 사람들은 자력으로 다리를 놓기로 하고 마을 공동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주민들의 간절한 「다리 추렴」에 감복했는지 군에서는 작년 가을에야 1천만원을 들여 다리를 놓아 주었다. 한사람이 간신히 통행할 수 있는 미니다리다. 아마 씨름선수 강호동처럼 밥 많이 먹는 사람이 지나간다면 그 자리가 휘어져 강바닥에 닿고 말 것이지만 이 다리는 의성포사람들이 매번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려야 하는 수고를 덜어 주었다. 그런데 강물이 불면 다리가 아예 물속에 잠겨버리기 때문에 아이들이 학교에 못가는 것은 물론이고 갑자기 사람이 아파도 웬만큼 급하지 않으면 병원갈 엄두를 못낸다. 사정이 그러하니 의성포 사람들에겐 경운기가 만능 운송수단이다. 장에 가서 생필품과 농기구, 비료 등을 사올 땐 늘 경운기를 이용한다. 그런데 이곳 경운기는 그냥 경운기 가 아니다. 「의성포 경운기」는 바퀴가 모래밭에 약간 빠지더라도 강을 건널 수 있도록 70만원 정도 웃돈을 얹어 데후를 단 4륜구동식이다. 지난 봄 의성포를 찾은 어느날, 마을 사람들은 못자리 준비에 눈코뜰 새 없이 바쁜 듯했다. 마침 반장인 김병준씨(50세) 부부를 동네 들머리에서 만났다. 하루해도 늘여 쓴다 는 농사철이고 보면 외지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이 귀찮을 시기인데 김병준씨 부인은 불청객의 점심밥 걱정부터 했다. 그 때가 오후 2시 반, 동네를 찾는데 워낙 시간이 걸려 점심을 거른 터였지만 차마 밥타령하기가 미안했다. 그런데 반장님 사모님은 내 행색을 금방 눈치채고 흙묻은 손을 털고 일어나 한사코 집으로 끌어 들여 점심을 챙겨줬다. 아무리 바빠도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동네를 찾아온 사람을 굶겨 보낼 수는 없다고 했다. 의성포마을 사람들의 인심은 동네를 한바퀴 돌고 나오면서 또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장에 갔다오는 동네사람들이 점심 진지라도 드셨냐고 묻기를 거듭했다. 필시 물돌이의 너그럽고 아름다운 자태가 의성포 사람들의 심성을 그렇게 촉촉하게 적셔 놓았을 것이다. 의성포의 물돌이 내성천은 참으로 마음껏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마을 전체가 거의 3백60도 강물에 둘러싸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내내 물 깊이가 무릎정도니 어린 시 절 동네 냇가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추억을 마음껏 재현해 볼 수 있다. 강 가운데서 물씨름 대회라도 벌여보면 어떨까. 아마 물씨름 경기를 특허라도 낼 수 있다면 의성포마을 에만 있는 세계적인 경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가족이나 연인끼리 물 가운데를 걸어서 의성포 둘레를 한바퀴 도는 것도 물도리동 의성포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멋진 데이트 겸 발 마사지가 될 것이다. ● 의성포 가는 길 문경에서 예천방면 34번 국도를 타고 용궁면 소재지까지 온다. 용국우체국을 지나 첫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향석초등학교가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오른쪽으 로 접어들면 향석초등학교가 나온다 . 그곳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대은 2리를 가리키는 팻말이 나온다. 문 의 0584)63-6598(반장 김병준씨).
솔샘물과 만수계곡 충북 제일의 장수촌 십승지지(十勝之地)는 전쟁이나 천재가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땅 열 군데를 말한다. 원래 승지(勝地)란 경치가 좋은 곳, 또는 지형이 뛰어난 곳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굶주림과 전쟁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의미한다. 신라 말기의 도선(道詵)을 비롯하여 고려 말기의 무학(無學), 조선 중엽의 남사고(南師古), 이지함 등은 이른바 도인(道人)으로서 승지를 고르는 풍수가(風水家)로 유명했다. 민간에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10개소의 승지가 있어 보통 십승지라고 부른다. 그 중에는 남사고가 선정한 십승지가 가장 유명해 특별히 「남사고산수십승보 길지지(南師古山水十勝保吉之地)」라고 칭한다. 그가 말한 십승지는 풍기의 금계촌, 안동의 내성, 보은 속리산 산록의 증항 근처, 운봉 두류산 산록의 동점촌, 예천의 금당동 북쪽, 공주의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 영월의 정동 상류, 무주 무풍 북쪽의 덕유산, 부안 변산의 호암, 가야산의 만수동이다. 그 분포를 보면 경상도 4개소, 전라도 3개소, 충청도 2개소, 강원도 1개소로서 대체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하지만 그 소재지가 정확히 어디인가를 가늠하기가 곤란한 곳도 적지 않다. 이들 십승지는 대부분 깊은 오지에 위치하므로 임진왜란이나 6·25 전쟁 때도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사회적 혼란기나 일제강점기 및 6·25 전쟁 등 난리를 거친 후 「정감록」을 신봉하는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이른바 정감록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보은의 속리산 아래 증항 근처는 전란 때 이곳에 몸을 숨기면 한 사람도 상하는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충청북도에는 증항보다도 더 십승지에 가깝다고 자타에 의해 공인된 마을이 있다.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구병리가 그곳이다. 마을 주민들의 그러한 자긍심이 효력을 발휘하는 때문인지, 구병리는 또한 충북 제일의 장수촌이기도 하다. 구병리는 보은읍 서쪽 열두굽이의 말티고개를 지나 삼기저수지를 끼고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만한 좁은 도로로 이어진다. 그 중간쯤의 길목엔 만수계곡이 있는데, 그 물 이 너무 맑고 좋아 구병 마을의 장수와도 연관이 있지 않나 싶다. 마을 들머리에 서면 마을 집들은 잘 보이지 않고 마을을 병풍처럼 두르고 선 구병산의 위용이 제일 먼저 눈 에 찬다. 바로 이 구병산이 외부로부터 마을을 차단해 마을로 들어오는 길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만수계곡의 생명수와 속리산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공기 때문에 사람들은 구병리를 십승지지라 일컫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구병리 들녘에서 보리를 베거나 나무를 지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팔순 이상의 노인들이다. 그만큼 장수촌이라는 얘기다. 이 마을 최고령인 송영봉 할아버지(94)는 아직 한 섬 가마를 거뜬히 져 나른다. 어떤 건강 전문가들은 구병리 노인들의 건강유지 비결이 11자 걸음에 있다고도 한다. 발끝을 11자로 하고 양 무릎 안쪽이 서로 스치듯 걸으면 아랫배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 자연스럽게 단전호흡이 이뤄진다고 한다. 구병 마을의 또 다른 장수비결은 채식 위주의 소식(小食)이다. 이것은 여느 장수마을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장수비결이지만 다른 곳과는 달리 구병리에서는 먹을 거리 형편이 어려워서 굳어진 습관일 뿐이다. 구병리는 고랭지여서 논농사가 거의 불가능했던 만큼 마을 사람들은 예부터 꽁보리밥이나 감자 등을 주식으로 했고 반찬 역시 배추, 무, 김치, 고사리나 취 같은 산나물 몇가 지가 전부였다. 요즘은 영지버섯 재배, 흑염소와 토종벌 치기 등으로 소득이 넉넉해졌지만 먹는 습관은 바꿀 수가 없다고 한다. 따라서 구병리 사람들 중에는 뚱보가 없다. 구병리 마을의 또 다른 장수 비결은 끊임없는 노동(운동), 숙면, 그리고 낙천적인 인생관이다. 마을 노인들은 밭농사, 가축기르기, 산나물과 약초채취 등으로 늘 몸을 움직여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일로 적당히 피곤해진 몸은 맑은 공기와 물이 잘 걸러주므로 숙면을 취할 수 있다. 자고 나면 거뜬해진 몸으로 그림같은 산천을 대하니 저절로 인생이 즐거워지면서 낙천적인 기질을 갖게 된다. 구병리 주위엔 유난히 좋은 샘들이 많다. 구병마을 가는 길목 만수계곡에는 만수샘이 있다. 또 구병리 들머리의 만수계곡이 바깥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개천 옆에는 노송 한 그루가 매끈한 몸통을 자랑하고 있는데, 그 밑둥에 「솔샘」이 똬리를 틀고 있다. 솔샘물은 맛도 상큼하지만 솔향을 살포시 풍겨 혀에 긴 여운을 남긴다. 구병리 앞산에 있는 약샘은 돌굴 안에 있는 것으로 겨울엔 더운 기운을, 여름엔 냉기를 뿜어내는 신비의 샘이다. ● 구병리 가는 길 보은읍에서 속리산 들어가는 말티재를 넘어가면 갈목으로 우회전하는 삼거리가 나온다. 거기서 우회전하여 삼가저수지를 오른쪽에 끼고 20분쯤 가면 삼가초등학교가 나온 다. 그 학교를 넘어서면 구병리가 있다. 숙식은 속리산관광단지로 나와야 한다. 문의 0433) 42-5386 (임경순씨).
심마니들의 세계 속으로 오대산 산마을 어성전은 산이 베풀어주는 모든 혜택을 누리는 곳이다. 어성전에는 산의 생명기운이 늘 분수처럼 솟구쳐 나오고, 산새 소리가 마을을 홍수처럼 뒤덮는다. 어성전은 주문진에서 양양쪽으로 국도를 타고 가다가 중간쯤에서 좌회전하여 25분쯤 들어간 곳으로, 사방이 오대산 줄기로 둘러싸인 마을이다. 마을 사람들은 토종벌 치기, 장뇌 재배, 산나물 캐기, 송이버섯 따기, 그리고 산삼 캐기 등으로 살아간다. 기름진 오대산 줄기에 마을이 깃들여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산에서 나는 거의 모든 산물이 다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그게 모두 「진짜」 「100%」 「순」 자연산 토종이라는 것이다. 어성전에는 80여 집에 3백50명 남짓 산다. 양승철씨(57· 0396-672-1537)의 인생은 어성전 살이의 전형으로 꼽을 만하다. 그는 어성전에서 태어나서 60년 가까이 살며 열 흘 이상 이곳을 떠나본 일이 없다. 양씨네 식구는 모두 건강 색깔 일색이다. 장수하는 노모(91)를 모시고 4대가 함께 산나물 먹으면서 토실한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그 집에 들어서면 산삼 냄새와 더덕 냄새가 어우러져서 코를 찌른다. 양씨는 30여년 전부터 산삼 씨를 받아다 길러오고 있다. 집 뒤란에는 그 씨가 자란 장뇌가 가득하다. 마 을사람 대부분도 양씨의 권유로 집 뒤란 대밭에 장뇌를 기르고 있다. 그런데 양씨의 진짜 장뇌밭은 귀신도 모르는 산속에 있다. 거기에는 15~20년씩 자란 알짜배기 장뇌가 수백 뿌리, 돈으로 치면 수억원 어치가 있다. 15년 이상 된 장뇌는 한 뿌리에 20만~30만원 받는다. 그러나 막상 장뇌 재배를 시작하고자 할 때에는 망설여지는 경우가 많다. 수확하려면 적어도 10년은 지나야 하기 때문 이다. 『명 짜른(짧은) 사람이 그것 하겠어』하는 것이 장뇌 재배를 권할 때마다 듣게 되는 소리라고 양승철씨는 말한다. 양씨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산삼을 캐러 다니기도 한다. 어성전 사람들 모두가 「심마니」들인 셈이다. 양씨는 지금까지 30여 뿌리의 산삼을 캤다. 그의 경험에 따르면 산삼 한 뿌리가 나오면 그 주위 반경 1백50m 이내에 반드시 또다른 산삼이 있게 마련이라고 한다. 다람쥐나 노루가 씨를 먹고 가까운 곳에 가서 똥을 싸서 번식시키는 경우도 있 다. 산삼이 있는 곳은 북향(北向)한 산등성이에 너무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은 곳, 낙엽이 너무 많이 쌓이거나 일년생 잡초가 너무 크게 우거지지 않은 곳이라고 한다. 지난해에 도 양씨는 오대산 줄기에서 50년 된 산삼 한 뿌리를 캤다. 그리고 올해 한 마을 사람에게 그 자리를 일러줬는데 그 사람이 그곳에 가서 2백년 된 산삼을 캤다. 산삼은 해마다 새 순을 내서 씨를 맺고는 겨울에 그 순이 말라 없어지기를 되풀이하는데, 간혹 4~5년 동안 새순내기를 멈추는 삼도 있다고 한다. 그 삼을 「잠자는 삼」이라고 하는데 2백년 된 삼이 잠자고 있다가 「발각된」것이다. 올해 5월에는 이웃 사람이 산삼을 발견해 두고 양씨더러 돋구어(캐) 달라고 해서 갔다가 그 주위에서 세 뿌리를 더 캤다고 한다. 양씨가 『삼이다』하고 외쳤더니 같이 간 나 머지 두 사람은 그 소리에 무서워 주저앉아 한참 동안 오들오들 떨었다고 한다. 산삼의 기(氣)가 그만큼 센 것이라고 한다. 일단 일행 중 한 사람이 산삼을 캐면 다른 사람들은 현 위치에서 그대로 동작을 멈추는 것이 심마니 세계의 예의다. 첫 발견자가 혹시 더 있을 다른 산삼을 찾도록 해주고 그 가 허락을 하면 비로소 함께 다른 삼을 찾게 된다. 양씨의 산살이는 5월 중순 새순이 돋은 산나물을 뜯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취, 곰취, 나물취, 두릅, 노루대, 참나물…등 20여가지의 싱싱한 산나물이 양씨집 토방에 쌓이면 서울 사람들의 자가용이 찾아든다. 한편 어성전이 누리는 산의 축복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송이버섯이다. 어성전에는 소나무 있는 곳엔 어디나 송이가 있다. 양씨 댁 뒤쪽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송이 밭이자 돈밭이다. 송이버섯은 1kg에 40만원 하는데 양씨는 자연산 송이버섯으로 한 해에 2천여만원을 벌어들인다. 어성전 마을 전체가 송이버섯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한 해에 4억~5억원 가량. 소나무 밑동이 가을만 되면 돈다발을 마을에 굴려내려 주는 셈이다. ● 어성전 가는 길 주문진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양양 쪽으로 가다가 현북에서 좌회전한다. 어성전에 식당과 민박집이 많다. 문의 0396) 672-1537 (양승철씨).
빨치산 유적 순례 산마을 여정에서 빼놓지 말고 꼭 들러보도록 권하고 싶은 곳이 빨치산들의 은거지들이다. 반세기 전 국방군과 공산당이 피를 강물처럼 쏟았던 빨치산 현장이야말로 우리에게 이념과 민족과 통일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처연한 문화유산이요 살아있는 역사교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연은 사람을 순수하게 변화시키는 미덕이 있다. 산마을에 가서 빨치산들의 발자취를 만나보는 것은 이념의 문제를 떠나 피끓는 젊은이들이 한때 지향했던 모습이 어떤 것이었나를 맑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빨치산들의 은거지나 빨치산들이 들락거렸던 「빨치산 마을」들은 주로 태백산 줄기를 따라 숱하게 퍼져 있지만, 아직까지 진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 빨치산 주둔지는 여순 사건의 무대였던 여수 순천 벌교 인근의 지리산, 광양 백운산, 승주 조계산, 순창 회문산 일대에 많다. 그런 곳의 주민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피해의식이 강해서 입조차 뻥긋하려 하지 않았지만 시대가 달라진 요즘엔 빨치산 이야기 들려주기를 별로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빨치산 마을 하면 전북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를 떠올리곤 한다. 그곳은 언젠가 내가 텔레비전 특집 프로그램에서 한번 보고난 뒤 최근 3~4년 사이에만 서너번이나 찾아가본 곳이다. 안정리는 회문산(8백27m) 자락에 안긴 산마을이다. 맨 처음 내가 안정리에 갔을 때는 초여름이었는데 영락없이 자연의 품에 싸인 느낌을 주었다. 길도 순창읍에서 한 20여 분을 달려온 다음부터는 비포장이었고 그 길 위로 맑디 맑은 개울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티 하나 없는 하늘에는 회문산 봉우리들이 거침없이 솟아 있었고, 구림천에는 무 엇에 쓰려고 그러는지 아낙네들이 허리까지 물에 잠겨 다슬기를 잡고 있었다. 그 옆에서 동네아이들은 소외감과 경계심을 감추지 못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때 회문산 자락의 무성한 자연만 보고 빨치산들이 은거했을 만한 이유를 짐작 하며 돌아왔다. 안정리가 있는 회문산 일대는 빨치산 남부군이 조선로동당 전북도당 사령부를 설치하고 장군봉(780m), 회문봉, 천마봉, 투구봉 등의 골짜기를 기지로 사투를 벌였던 곳이다. 그곳 빨치산들의 숫자가 많을 때는 군,면 당원과 민청원, 여맹 등 모두 합쳐 1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곳에서 지뢰와 수류탄을 만들고 피복공장과 간이수력발전에 의한 무선시설을 운용했으며, 「노령학원」을 설립해서 간부들에게 2주간 정치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빨치산들의 보급투쟁로이자 토벌군의 빨치산 사냥 길목이었던 안정리 일대는 양쪽 총알이 콩볶듯하면서 밤낮으로 좌와 우가 바뀌곤 했다. 한동안 회문산 일대에서 위세를 떨치던 빨치산들은 51년 3월 지리산으로 밀려났고 51~52년에 걸친 대토벌작전으로 모두 숨지거나 흩어졌다. 내가 두 번째로 안정리를 찾은 것은 이듬해 가을이었다. 산마을 들녘에 웬 감이 그렇게도 많은지 안정리 사람들은 감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른 새벽 산에 올랐던 사람들이 석양 무렵에 짐보따리를 두서너개씩 메고 끙끙대면서 산을 내려오는데 그게 다 감, 양볼에 검댕칠을 한 「먹감」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감을 따도 일손이 모자라서 들에 있는 감의 반도 못 딴다고 했다. 그것을 보면 빨치산들도 가을 한철에는 지천에 널린 감으로 요기를 때워 허기는 면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바쁜 중에도 안정리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빨치산 얘기를 들려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안정리 사람들이라고 해야 모두 60~70대 노인들이었으니 빨치산을 직간접 으로 경험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회문산 노령학원터로 안내했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20여평 가량 돌담으로 둘러쳐진 노령학원터와 빨치산들의 대피호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곳엔 「회문산 자연휴양림」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대피 호 중 몇 개는 이미 매립돼버렸다고 했다. 노령학원터 옆에는 물놀이장이 생기고 평상도 몇개 마련해놓아 유흥객들이 삼겹살도 구워먹고 낮잠도 잘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그러나 그 앞 돌담 허물어진 곳이 빨치산 정치학교 교실이었다는 안내팻말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어쨌든 살아 있는 역사교육 현장인데 똥 친 막대기 취급하는 산림청 관계 자들의 몰상식이 안타까웠다. 나는 지난 봄 세번째로 안정리 부근까지 갔었다. 노령학원터의 운명을 보고 싶었는데 어이가 없어 그냥 와버렸다. 김용택 시인을 따라 물우리, 미륵징이, 진메마을, 천담마을 등 섬진강 상류의 강마을들을 취재하는 길이었는데, 미륵징이 마을까지 갔더니 시멘트로 만든 회문산 자연휴양림이라는 안내판이 길가에 겁나게 크게 버티고 있었고 길은 모두 시커멓게 포장돼 있었다. ● 안정리 가는 길 순창읍에서 구림면 소재지(구림)까지 시외버스가 자주 다닌다. 구림에서 안정리 안심마을(노령학원터가 있는 회문산 자연휴양림 마을)까지 군내버스가 다닌다. 안심마을에 서 민박을 할 수 있다. 문의 0674) 52-8948 (안심마을 이장 이 기만 씨), 53-4779 (회문산자연휴양림 관리사무소), 52-8444 (구림면사무소).
지리산 천왕봉의 성모상 전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는 지리산 산마을 가운데 천왕봉에 가장 가까운 마을이다. 천왕봉이 해발 1천9백15m이고 중산리는 해발 6백20m이니, 중산리에서 천왕봉에 오르 면 평지에서 왕시루봉 정도에 오르는 등정밖에 되지 않는다. 시간으로도 중산리에서 천왕봉까지 오르는 데 4시간, 내려오는 데 3시간 걸리기 때문에 당일치기로 갔다 올 수 있다. 요즘엔 중산리까지 도로가 잘 닦여 있어서 지리산 천왕봉을 밟아봤다는 추억거리를 장만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중산리에 몰려들고 있다. 그러나 예전의 중산리는 속세를 떠나 약초와 산나물을 캐며 신선처럼 살아가는 산사람들만의 세상이었다. 그때만 해도 중산리는 천왕봉에 모아지는 지리산의 신성한 기운이 스며들었던 곳이다. 지리산이 수많은 산 속의 산들을 안고 있으면서 인간 또한 넉넉하게 품어주는 산이어서 그런지 지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은 예로부터 경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것은 영봉 천왕봉을 감고 도는 「성모 설화(聖母說話)」에서 엿볼 수 있다. 천왕봉에는 이미 1천년 전에 성모사라는 사당이 세워져 성모 석상이 봉안되었으며, 이 사당을 찾는 백성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성모 마야고는 「마야고 전설」을 통해 지리산 능선 곳곳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사연은 이렇다. 마야고는 반야를 사랑했다. 어느날 반야는 돌아오겠다고 기약하고 마야고 곁을 떠났으나 영영 오지를 않았다. 마야고는 기다리는 초조함으로 나무를 할켰다. 이것이 지리산 주능선 부근의 고사목이다. 그리고 할켜서 얻은 올로 베를 짜던 자리가 세석평전이다. 지금도 천왕봉의 돌무덤 위에 앉아서 서쪽 하늘을 보면 낭군봉인 반야 봉이 마치 달려올 듯한 산세로 눈에 들어온다. 지리산 성모 설화는 또한 「무조설(巫祖說」로 전해지기도 한다. 먼 옛날 천신의 딸 성모 마고가 지리산에 하강하여 딸 여덟명을 낳아 모두 무당으로 길러 팔도에 보내 민속( 民俗)을 다스리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천왕봉의 성모 석상은 석가여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을 산신령으로 모셨다는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옛 문헌에는 지리산을 地利山으로 표기한 예도 보이는데, 이것 역시 불교에서 연유한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고대 불교에서는 지리산을 문수 도량으로 불렀다. 지혜의 보살 문수 대성이 이 산에 머물면서 불법을 지키고 중생을 깨우치는 도량으로 삼았다는 것이다.그래서 이 산을 문수사리(文殊師利)의 「리(利)」자를 따서 地利山으로 표기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이것이 地理山으로 변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어쨌든 1천여년 동안 지리산 천왕봉에서 민족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던 성모 석상은 고려말 이후 숱한 시련을 겪었다. 고려 말 황산전투에서 이성계에 쫓긴 왜구 패주병들이 성모상을 칼로 쳐서 이마에 깊은 상처를 냈다. 또 일제 때 일본인들은 성모상이 민중 무속신앙의 지주가 되는 것을 시샘해 사당을 철거하고 성모상을 벼랑 아래로 굴려버렸다. 그 뒤 모진 어려움 끝에 천왕봉에 돌아온 성모상은 1945년 11월 지리산 마을의 한 주민에 의해 이불보쌈을 당했다가 이듬해 겨우 다시 천왕봉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성모상은 또다시 천왕봉에서 밀려나게 되는데, 1972년 5월 천왕봉에서 철야기도를 마친 한 개신교 단체 신자들이 목과 몸통을 갈라서 없애버린 것이다. 이 부숴진 성모 석상은 1986년 1월12일 진주 비봉산 과수원에서 머리 부분이, 같은 해 5월 9일 천왕봉 남쪽 5백m 지점의 통신골에서 몸통 부분이 발견됐다. 중산리에 있는 천왕사의 주지 혜범 스님이 이것들을 찾아내서 자기 절에 안치해 놓았다. 혜범은 천왕사 요사채 오른편에 1백평 가량의 가건물을 따로 짓고 그 앞에 성모 석상을 아예 시멘트로 단단히 안치해버렸다. 그런데 중산리 아랫 마을 덕산에 있는 두류산악회 회원들이 성모 석상을 원래의 자리인 천왕봉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 다. 성모 석상 앞에서 기도를 하면 기도발이 잘 선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하긴 민족의 영산 지리산 천왕봉에서 천년 세월을 수 많은 사람들의 기도받이자 벗이 되어준 영물인데, 그만한 신통력도 없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성모 석상은 작은 체구에 무척 단아한 좌상이다. 앉은 키가 50cm 정도 된다. 갸름한 콧날과 미소 띤 눈가, 그리고 전형적인 달걀형 얼굴에 머리는 쪽을 쪘고 양 볼이 두툼하게 살아 있어서 인자한 여신이라기보다는 여염집 규수처럼 청순한 친근감을 준다. 그것이 1천여년 전 조상들이 앉혀 놓았던 제 자리, 지리산 천왕봉 맨꼭대기에 앉아 있다면 지리산은 한층 더 자애로운 산으로 사람들을 안아주지 않을까 싶다. ● 중산리 가는 길 경남 산청에서 하정을 거쳐 시천 덕산 등을 지나간다. 산청에서 중산리까지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이어지며 1시간~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중산리에 지리산 모텔 등 여관 10여 곳과 민박집 20여 곳이 있다. 민박집에서 식사를 해결할 수 있으며 식당도 10여 곳이 있다. 여관은 보통 2만~3만원씩 받는다. 중산리 근처에 민박 마을인 내대리, 예치, 동당 마을 등이 있다. 문의 0596) 72-1149 (김순이씨), 72-1473(동당리 한두갑씨)
한 여름에도 추운 날씨, 신비의 천마농장 경북 영양은 한국의 오지 하면 늘 앞머리에 들 만큼 깊은 산골이다. 영양군 석보면 한 가운데를 흐르는 화매천 50리에 이르는 물줄기를 따라 수십리를 오르다가 붕의골이라 는 인적드문 골짜기를 타면 우리나라에 이런 원시림이 있었나 의아심이 생길 정도로 무공해 자연이 펼쳐진다. 이 골짜기를 따라 다시 십리쯤 오르면 갑자기 하늘이 탁 트이 면서 널따란 평원이 나타난다. 바로 맹동산(8백50m·석보면 삼의리 산 1번지) 정상이다. 이곳에는 또 사람의 힘으로 가능했을까 싶은 45만평의 약초농장과 바람에 날아갈 듯한 집 한채가 있다. 지금도 웬만한 도시사람이 몇 달이라도 속세를 잊고 푹 지내보자 작심하고 찾아갔다가는 한 이틀 지내고 나서는 『아이구 무섭고 외로워라』며 뛰쳐나올 만한 자리다. 이곳에서 「천마(天麻)」라는, 산삼보다도 더 귀하다는 약초를 재배하면서 가족과 단출하게 살고 있는 유성길씨(67)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천마 인공재배에 성공한 사람 . 천마를 이용해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유씨가 멧돼지가 득실대는 맹동산 꼭대기에 「천마연구소」를 지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일. 충남 청양군 남양면이 고향인 유씨가 맹동산으로 들어온 것은 6·25전 쟁 참전과 광산산업 실패의 후유증으로 거의 폐인이 된 몸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요 아래쪽에 화전민 마을이 있었지요. 거기서 움막집 하나를 얻어서 살면서 개간을 시작했습니다. 나무를 베어내고 강냉이와 감자를 심기 시작했는데 그때 고생이야 말로 다 못하지요』 그렇게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기를 몇년, 유씨는 어느날 우연히 칡넝쿨 속에서 천마싹을 보았다.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힘이 솟구쳐 천마를 캤다. 모두가 팔뚝만 한 것이었다. 이렇게 천마밭을 발견하여 몫돈을 마련한 그는 당장 집 한채를 짓고 산을 개간해 면적을 넓혀 나가면서 다시 여기서 얻어진 수익을 천마재배에 투자했다. 그는 이후 야생 천마의 생태를 연구하기로 결심하고 야생천마가 자생하는 곳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 그 결과 인공재배 방법을 터득하고 약효가 산삼보다 나은 점을 임상실험 을 통해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유씨는 교통사고로 뇌사진단이 내려진 어느 여학생을 천마생즙을 먹여가며 살린 것을 비롯해 고혈압, 저혈압, 뇌출혈, 불면증 등을 치유하고 술독을 술로 풀 수 있는 천마술의 신비도 찾아냈다고 한다. 깊은 산중이지만 천마의 신통한 약효가 소문을 타면서 요즘은 유씨를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환자들이 오면 우선 생천마를 먹여본다. 그러면 사람마다 체질에 따라 천 마 맛이 달거나 시거나 쓰거나 심지어 맵다고 반응한다. 그 반응에 따라 생천마를 먹일 것인가, 천마 가루를 먹일 것인가, 천마즙을 먹일 것인가를 결정한다는 것. 천마의 약효에 대해 신들린 듯 설명하는 그는 천마를 재배하는 일이 국민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되고 우리 농촌 소득도 증대시키는 길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실제로 유씨의 천마는 마른 것 한 근에 1만8천~2만원씩 치니 좋은 인삼보다 훨씬 값이 더 나간다. 지금은 천마 외에 곰취와 복령도 재배하고 있다고 한다. 3년 전부터는 대구 사는 배재칠씨(45살)가 상황버섯 연구를 위해 합류했다. 폐교된 삼의분교에다 상황버섯 연구실을 차려 상황버섯을 재배하면서 천마와 상황버섯으로 암퇴치제 연구를 하는 등 천마연구소의 꿈을 날로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일단 맹동산 천마농장에 오르면 누구나 한두끼 밥은 먹고 가야 한다. 거기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시간이 식사때를 거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씨의 부인 「청양댁」은 찾아오 는 손님 식사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자칭 「밥공장장」이라고 자랑한다. 청양댁은 따지고 보면 평균 한국 아낙들이 하는 일의 대여섯배 노동을 해왔다. 아이를 아홉이나 낳았고, 밥을 하루 평균 다섯사람 분량을 더 하고, 또 약초농장에 나가서 일년내내 김매고 약초캐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청양댁은 젊은 시절 몇번이나 도망칠 생각도 했으나 아이들이 불쌍해서 그러질 못했노라고 한다. 천마로 병도 고치고 으스스할 정도로 서늘한 천마밭에서 피서도 하고 청양댁의 부덕(婦德)도 접할 겸 이번 여름에 맹동산 유성길씨 마을에 가보는 것도 즐거운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 맹동산 천마농장 가는 길 안동에서 345번 국도를 타고 월전까지 가서 좌회전하여 석보를 거쳐 간다. 숙식을 위해서는 영양읍으로 나오는 게 가장 빠르다. 문의 0574) 82-1751 (유성길 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