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맥아더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아마 1942년 필리핀의 코레히돌 섬에서 호주로 탈출했을 때였을 것이다. 코레히돌에서 그는 자살까지 생각하고 있었고, 부하들을 버려두고 탈출했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괴로워했다. 호주에서 연합군 사령관이 돼 태평양 전선을 방어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건강이 나빠졌고 우울증 증세까지 보였다.
이때 태평양 지구 제5공군 사령관이 조지 C. 케니 중장이었다. 맥아더와 공군의 사이는 예전부터 좋지 않았다. 1932년 공군을 독립시키자는 논의가 연방의회에 상정됐었는데 이때 결사적으로 반대했던 사람이 맥아더였다. 게다가 맥아더는 언제나 존경만큼 제왕적이고 독선적이며 보수적이라는 악평을 달고 다녔다.
맥아더와 케니
케니는 맥아더와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용모와 목소리부터 카리스마가 없었고 권위를 세울 줄도 몰랐다. 제1차 세계대전에 조종사로 참전해서 두 대를 격추하고 자신도 한 번 격추됐었다. 다만 그가 격추시킨 독일군 조종사가 독일군에서 서열 3위의 격추왕(22대)이자 히틀러의 오른팔이었던 헤르만 괴링이었다. 괴링이 탄 전투기를 격추시켰다고 해서 실적을 더 높게 쳐주지는 않기 때문에 그는 에이스가 되지 못했다.
케니가 맥아더에게 처음 신고하러 갔을 때 주변에서 그에게 단단히 주의를 줬다. “맥아더는 신랄한 비판을 쏟아낼 거다. 그러나 무조건 꾹 참아라.” 정말로 맥아더는 케니를 보자마자 거의 30분간 숨도 쉬지 않고 불평을 토해냈다. 케니는 꾹 참으며 고민을 했다. ‘도대체 이 양반이 왜 이러는 걸까?’ 마침내 케니가 찾아낸 방법은 정공법이었다. 그는 대담하게 자신은 맥아더가 말한 모든 문제를 이미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을 해결해나갈 능력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맥아더는 놀라서 눈을 가늘게 뜨고 케니를 한참 쳐다봤다고 한다. 맥아더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건 보통의 자신감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는 누구보다 맥아더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맥아더는 케니에게 갑자기 다가와 어깨를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조지, 우리는 잘해 볼 수 있을 것 같아!”
이후 케니는 맥아더가 가장 좋아하고 신뢰하는 친구 같은 인물이 되었다. 케니를 알고 나서 얼마나 좋아했는지 우울증이 낫고 건강까지 좋아졌다고 한다. 왜 이렇게까지 케니에게 반했을까? 맥아더가 케니에게 반한 진짜 이유는 자신에게 대들 수 있는 배포가 아니라 케니의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전략이었다. 케니와 화해를 하고 전략을 의논하면서 맥아더는 케니에게 다시 반했다.
물수제비 뜨기 폭격
케니의 좌우명은 교과서에서 배운 것은 잊어버리고 혁신을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이 모토대로 그는 만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전술을 창조했다. 그가 개발한 기발한 전술 중 하나가 ‘물수제비 뜨기’ 폭격이었다.
1943년 3월2일부터 4일까지 남서태평양 뉴브리튼 섬과 뉴기니 섬 중간의 비스마르크해(海)에서 벌어진 비스마르크 해전에서 제5공군은 기막힌 전술을 보여줬다. 먼저 전투기가 돌진해 갑판을 기총소사로 휩쓸어 대공포화를 침묵시킨다. 그 다음 B25 폭격기 10대와 A-20 공격기 10대가 수면 위에서 수m를 나는 초저공으로 적함에 접근했다. 너무 저공이어서 대공포 사수들이 맞추기도 어려웠고 일본군 전투기들이 이 폭격기를 요격할 수도 없었다. 물론 이런 저공비행으로는 어뢰를 사용하는 것 외에 폭격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미군 뇌격기는 너무 느리고 허약해서 일본군 전투기의 밥이었다. 미군이 앞선 것은 폭격기였는데 폭격기는 해전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항공전술의 혁신을 이룬 전쟁으로 기억되지만 이때까지 항공기의 능력은 약점이 많았다. 특히 정밀 유도무기가 없어서 폭격의 정확성은 상상 이상으로 형편없었다. 해전에서 항공기가 하늘에서 함정에 폭탄을 명중시키는 것은 아주 어려운 기술이었다. 바다에서 움직이는 점을 향해 수직으로 명중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케니는 아이들이 납작한 돌을 물에 던져 튀기게 만드는 놀이에서 착안해서 폭격기가 수면을 스치듯이 날며 폭탄을 투하해서 폭탄이 해면 위를 튀겨 적함에 명중하게 하는 폭격술을 개발했다. 이렇게 하면 적함에 맞추기도 쉬워지고 적함에 주는 타격도 훨씬 컸다. 수면을 튀긴 폭탄이 그 탄력으로 선체를 뚫고 들어가 함정 안에서 폭발하기 때문이다. 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충돌하고 나서 5초 후에 폭발하는 지연신관을 달았다. 케니의 부하들은 여러 번의 실험 끝에 폭탄을 튀길 수 있는 적절한 높이와 적절한 속도를 찾아냈다.
비스마르크해에서 미군기는 어뢰보다 훨씬 강력한 225㎏ 폭탄을 튀겨서 날렸다. 일본군 수송선 8척 전부와 구축함 8척 중 4척이 침몰했다. 미군의 손실은 겨우 4대였다. 폭격 명중률 역시 신기록을 경신했다. 어느 해전에서는 37발을 투하해서 28발을 명중시켰다. 현대의 정밀 유도무기에 비견될 만한 명중률이었다.
폭탄에 낙하산을 달다
그 외에도 제5공군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시도했다. 그중 일부는 오늘날까지 첨단기술의 힘을 빌려 재생되고 있다. 예를 들어 폭탄에 낙하산을 달아 투하하는 방식도 케니의 작품이다. 폭격은 저공으로 할수록 정확도가 올라간다. 그러나 너무 저공으로 폭격하면 포격의 파편에 폭격기가 손상을 입는다. 케니는 폭탄에 낙하산을 달아 투하함으로써 초저공 폭격이 가능하게 했고 명중률도 높였다. 대공포대를 무력화하기 위해 백린(白燐)폭탄을 고사포대에 떨어트리는 작전도 썼는데 백린폭탄의 빛으로 사수의 시력을 상실시키는 것이었다.
케니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준 작전이 파푸아 공격이었다. 맥아더는 3개 사단을 투입해 모르즈비를 공략하고 싶었지만 코랄해를 건널 수가 없었다. 제해권을 일본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장군이라면 해군을 증강해 바다에서 승리를 거두고 그 다음에 바다를 건너 육군을 투입하겠다는 생각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맥아더 같은 뛰어난 승부사는 교과서적으로 싸우다가는 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국시대의 병법가인 손빈도 전쟁은 주도권 싸움이라고 말했다. 크고 넓은 전쟁일수록 예상치 못한 전술로 적을 혼란에 빠트리고 여러 전장, 여러 부분에서 최대한의 주도권을 확보해 전술을 주도하고 적의 실수를 유도해야 한다.
맥아더는 이런 변화를 원했지만 그런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져다주는 참모나 지휘관은 없었다. 그때 케니가 3개 사단 전체를 공수해서 뉴기니에 투입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C-47 수송기로 장병과 모든 보급품, 장비 일체를 공수한다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처음으로 공정(空挺)사단이 출현했지만 겨우 개인 화기만 지니고 적진에 투하하는 수준이었다. 사단 전체와 중장비를 공수한다니 즉시 한 참모가 손을 들었다. “C-47에 트럭은 실을 수 없습니다.” 케니가 즉시 쏘아붙였다. “실을 수 있어. 트럭을 반으로 잘라 수송기에 일단 적재한 다음 다시 용접해서 붙이면 돼.” 케니는 맥아더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5일만 주시면 미군 전체를 뉴기니로 공수하겠습니다.”
케니는 공수의 규모뿐 아니라 속도 역시 신기록을 세웠다. 9월5일 뉴기니 나자브에 302대의 미군 수송기가 날아왔다. 그들은 지상에 강한 연막을 투하하고 초저공으로 접근해 1700명을 불과 1분 사이에 강하시켰다. 전광석화 같은 투입에 일본군은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했다. 맥아더는 상공에서 이 작전을 직접 관전했는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공수작전으로 뉴기니를 점령함으로써 미군은 한순간에 전선을 1500마일이나 끌어올렸고 그 먼 후방의 일본군 진지를 폭격 가시권에 넣었다. 일방적인 공세로 가던 일본군은 반경 수천 마일에 걸쳐 공세와 방어를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입장이 됐다. 이것이 일본군의 작전, 군수, 병력배치 등 모든 분야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참모를 키우는 포용력
많은 사람들이 맥아더를 제왕적이고 보수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맥아더의 진가를 모르는 말이다. 그는 누구보다 혁신을 좋아했고 창의적인 전술을 원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케니였다. 맥아더는 나중에 케니에게 공군 창설을 반대했던 것이 자신의 일생일대의 실수였다고 사과했다. 맥아더는 물자와 병력도 부족하고 항공기와 전함의 성능도 떨어지는 상황에서 태평양 전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격적이고 혁신적인 전술이 필요하고, 혁신적 전술을 위해서는 첨단기술이 바탕이 된 발상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봤던 것 같다. 그가 공군에게 불만을 토해냈던 것은 그들이 항공기라는 첨단 장비를 보유하고도 열정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케니가 등장했던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명장도 자신의 열정과 생각을 이해하고 도와주는 참모가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반대로 뛰어난 리더, 경영자가 되려면 케니 같은 인물을 발굴하고 키울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리더는 케니 같은 인물보다는 순종적이고 자신의 의지에 맞춰주는 참모를 좋아한다. 세상에선 맥아더가 지나치게 완고하고 엄하며 독선이 강했다고 한다. 그러나 맥아더보다 부드러운 리더십을 지니고 있다고 자처하기 전에 케니 같은 인물을 찾아내고 포용하는 진취적인 심정을 지니고 있는지 먼저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