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아는 어느새 현장에 있었다.
혼탁한 한국의 사회상은 여러 군데에서 진단을 받아야 한다고 제아는 생각하였다.
내과, 외과, 이비인후과, 안과, 비뇨기과, 신경전신과 등등에 이르기까지, 해방 나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제대로 자리 잡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아는 8.15 광복세대도, 6.25전쟁 세대도, 4.19혁명의 세대도 아니다. 제아는 10.26과 5.18을 거친 개혁세대다.
허리띠를 졸라메고 끼니를 거르고 일하며, 환부까지 덮어두고 숨겨주는 미덕은 이제 더 이상 미덕이 아니었다.
이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개혁의 주인세대들은 새로운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제 3세계와 후진국에서, 값비싼 권위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한 도전이, 대양을 건너 서서히 한국에도 강한 태풍이 되어 불어 닥치고 있었다. 혁명의 기운이었다. 군부독재와 권위주의는 민주화의 대세에 떠밀리는 조짐이 서서히 일어났다.
제아에게도 불붙은 이 열정은 고 김세진 군에게 바치는 시를 내 놓았다.
'天使의 등불이 꺼지기 전에'
- 故 김세진君에게 바치는 詩 -
아아-
꽃다운 나이에
장하다
의기롭다
드높다
애·국·충·절
全生을 다 바친
前生을 다 바친
흙이 되지만 어찌 흙이랴
한줌의 재가 되지만 어찌 한줌뿐이랴.
다시 태어날 때
너는 살아서
우리 우에서
백두에서 한라까지 무궁화를 심어다오
민주를 심어다오
꽃을 피워다오.
자유가 무엇이냐
평화가 무엇이냐
진리가 무엇이냐
정의가 무엇이냐?
분단국
15년 교육동안 어찌
반공을 몰랐으랴. 방공을 모르랴!
수많은 후배들이
끌려가는 캠퍼스에 4월의 봄이 있을까
피 끓는 아우들이
쓰러져 가는 이 난세에
무엇이 두려울까
무엇이 무서우랴!
흑백논리의 강요에도
정변의 와중에도
새싹들은 자라므로
아이들이 자라기전에
저들까지 피맺히기 전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최루가스에 눈이 매웁지만
두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가고
나중엔 없다
順天者는 存하고
逆天者는 滅하리라 하였거늘,
아아-
우리는 가고
歷史는 남는다. 歷史는 남는다
아무렇게나 간 인생은 아무렇게나 남고
의기롭게 산 인생은 의기롭게 남고.
최후에 심판이 있으리라
만찬이 있으리라
아-아
당신은 갔지만 당신은 있다.
당신은 갔지만 타오르는 당신의 등불은 있다.
-1986년 5월 10일 -
산자여 따르라
그 기운은 1987년 「6월 항쟁」에서 극치를 이루었다.
제아는 절규의 함성이 온누리에 메아리치던 그날, 동참한 영등포 로타리에서의 노상집회에서 「민중」들의 요구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노태우의 6.29 항복선언 이후, 수많은 노동형제들이 이번에는「노동해방」을 부르짖었다.
잠시나마 노동자의 천국을 맛보는 듯하였다.
새로운 노동조합이 각종공작의 와중에서도 탄생하고, 어용노조가 무너졌다.
곳곳에서 노사 간, 노노 간 충돌이 끊이질 아니하였다.
정부의 재벌위주 성장정책과 비호로, 정경유착의 악덕기업주는 거나한 한상을 차려놓고, 분탕질하고 있었다.
주인은 철저히 주인 행세를 하려 하였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근로자가 아니라「종」이었고 차라리 중세의 농노였다.
껍질깨기의 망치질은 우렁찬 해머질로 중장비의 육중함으로 모아져 갔다.
블루칼라들의 처절한 「투쟁」이 전국도처에서 일자, 화이트칼라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아도 개혁의 충동을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었다.
20년 역사의 흥국생명보험 노조는 늘 권력과 사용자의 편에 기운 때가 많았다.
제아는 민주노조의 닻을 높이 올려 선거에 승리하였다.
많은 조합원들은 현상 유지 보다는 현상 타파를 더 원하고 있었다.
제아는 바뀐 새 집행부의 운영위원과 소속부서의 지부장을 맡았다.
또한 단체 교섭위원과 고충처리위원이 되었다.
격동의 한해였던 그해는 증시조작설이 나돌고, 직선제의 대통령 선거가 임박하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 직전은 어지러운 세상이 되었고, 각사에서도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하였다.
타회사에 비해 복지후생제도가 현저히 뒤지는 것을 터트리는 시기는 이때가 호기라고 모두들 입을 모았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내조자였던 생명보험회사들은 너무 비대해 있었다.
과당경쟁과 부실계약모집으로 사회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지만, 부동산과 주식에 투기한 평가차액은 실로 엄청났으므로 주식시장에 상장이 될 경우 족히 십만 원이 넘을 것 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온상에서 자라났지만 너무 커진 세칭 「돈줄」이었다.
운영위원회에서 결정된 투쟁방법은 단식이었다.
집행부가 모범적인 투쟁을 벌여 참여와 호응도를 높이고 막판에는 총파업으로 「쟁취」해 나가자는 방식이었다.
많은 조합원들이 용기를 더해 주었고, 비조합원인 부·과장들도 걱정과 관심을 보여주었다.
협상은 오래도록 계속되고 단식기간도 길어져, 일주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리본 패용과 피켓팅에 이어 파업전야를 위한 태업의 방편으로, 남직원은 노타이와 여직원은 바지입기를 하였다.
간부들의 팀웍은 의지와 동지애로 하나가 되어 있었고, 조합원들도 모두 결전의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다.
단체교섭
제아는 사장으로부터 「열성분자」로 직접 면전에서 지목을 당했다.
제아는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와 한국노총에서 이론을 다른 금융노조 산하 기업에서 실무를 겸비하였다.
그의 이론과 논리의 주장은 진부한 경영자의 앵무새 논리에 상당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단체교섭위원들은 강했다.
허기와 탈진으로 쓰러져 아무렇게나 잠이 든 동료들의 새우잠을 지켜보면서 제아는 새벽녘까지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쟁취해내지 못하면 노조원들에게서 쏟아지는 무능력의 화살을 피할 수 없고, KO로 이겨버리면 회사는 다음 게임에 출전의사를 가질 것인가?
협상에서 메뉴의 다양성을 어떻게 조합하고 선택하여 힘으로, 지략으로, 정책과 대안을 제사하며 구사해 갈 것인가?
전략과 전술은 조합원이 함께 해야 구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결전의 각오는 파업으로 채택되었다.
파업 다섯 시간을 앞두고 철옹벽이던 회사 측도 문을 열고 나왔다.
일주일을 끌었던 「힘겨루기」는 회사에는 명분을 주고, 노조는 실리를 취하는 선상에서 타결이 되었다.
완전히 이기지도 아니하였다.
그렇다고 져 준것도 아니었다.
많은 것을 돌려받은 것이었다.
결코 빼앗지도, 빼앗기지도 아니하였다.
제아는 언제나 투쟁의 장에 서있었다.
계속되는 분규의 현장으로 늦은 시각까지도 달려가야 했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는 이제 흥얼거림이 아니었다.
모든 일천 만 노동자의 단결된 하모니였다. 우렁찬 합창이었다.
가난한 품팔이 노동자의 아들 제아가 「노동의 새벽 현장」에 뛰어 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다시 대학으로
서울 올림픽이 열리는 해인 1988년 3월 제아는 「중대결단」을 하여야 했다.
4년 전 입학했으나 학교를 다니지 못해 제적당한 고려대학에는 재입학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가능하다면 직장은 언제 그만 둘 것인가?
고려대학에는 두 번의 휴학과 재적기간이 지나 88년 봄에 재입학을 못할 시에는 완전 퇴학이 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 사이에 재입학을 생각했었지만, 여러 사정들이 닥치는 통에 바쁘게 세월만 4년을 흘려 보내고 말았다.
마침 1987년 가을에, 학생운동으로 제적된 학생들의 재입학을 신년 첫 학기에 허용한다는 특별법규가 나와 그나마 졸업정원제의 틀 속에서도 재입학을 노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 측의 답변은 제아가 당시의 졸업정원제 저촉학생이어서 결원이 생길 시에 가능하므로, 바늘구멍이라고 알려 주었다.
3월이 다가도록 입학허가를 내 주지 않았다.
제아는 4월 진급을 앞두고 있었다. 이제는 목표했던 금액도 달성해 놓았고 결혼도, 아버님 입원치료도 다 했지만, 정작 다시 입학이란 쉽게 허락되질 않았다.
제아는 고려대 총장님께도 편지를 드렸다.
열심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3월 말일에야 학교에서 재입학을 허락해 주었다.
학교 측에서는 실시 첫 번째의 학사편입학생인데다, 적당한 규정이 없어 재입학시키기가 곤란했는데, 열의를 보아서 허락을 해 주었노라고 일러주었다.
동국대와 고려대 두 대학을 모두 재입학하였음은 얄궂은 인연이었다.
12년 전 무턱대고 상경했던 촌뜨기 모습에 비해, 왜 진작 공부에 몰입할 용기를 내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제아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각이면 항상 아내와 세 살 난 딸아이가 버스 정류장으로 노학생을 마중 나왔었는데, 그 날 따라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불길한 예감으로 급한 걸음을 하여 집으로 오는데, 동네 아주머니들이 애기엄마가 오늘 죽었다 살아났다며, 빨리 가보라고 하였다.
아내는 팔에 기브스를 한 채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아빠, 나 시험 당했어!』첫마디였다.
아내는 제아와 결혼하면서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좋은 집안에서 착하고 바르게 자랐고, 이제 얼마 되잖은 신앙생활 기간 중에 시험을 당했다는 말에 제아는 깜짝 놀랐다.
아내는 4미터도 넘는 장독대 위에서 아무도 없었는데 누가 밀듯이 갑자기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얼마동안 기절했었고, 손목과 팔이 부러져 손목뼈가 밖으로 나온 것을 동네 할머니들이 뼈를 맞추고, 전도사님 한 분이 마침 지나다가 병원에 응급치료 했다는 것이다.
의료보험증을 대학의 재입학을 위해 회사에 퇴사로 반납한지 일주일 밖에 안 된 날이었다.
의사는 제아를 불러 자기의 병원에서는 뼈가 너무 산산 조각이 나서 치료가 곤란하니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못을 박아 꿰멘 후 6개월 뒤 다시 못을 빼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아내는 제아에게 이렇게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저 기도하고 나을 수 있어요.”
밤마다 아픈 상처를 붙들고 2주일여를 뒹굴어야 했다.
부은 자리의 통증이 아주 심했다.
그럴수록 제아와 아내는 더 열심히 기도를 하였다.
구역장님과 전도사님, 목사님이 오셔서 뜨겁게 기도해 주었다.
3개월이 지난 뒤 X-RAY에서 뼈가 감쪽같이 잘 붙었다며, 의사도 의아해 하였다.
치유의 은사를 받고, 또 한편 제아는 전세사건과 재입학에 이어 감사를 하여야 했다.
그렇게 공부는 어렵게 시작하였지만 대소변을 받아내는 아버님과 이제 어린 딸아이, 가족의 생활비, 학비 등이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문제도 하나님께서는 채워주시는 것이었다.
5공화국의 과외금지 조치가 슬그머니 사라지면서 과외가 가능케 되었던 것이다.
제아는 과외가 중지당할 때 대학을 마쳤고, 다시 시작할 때 재입학이 되었음을 감사해야 했다.
제아는 새벽 다섯 시부터 늦은 시각까지 여러 장소로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내도 짜증내지 않고 제아의 학업을 도와주었다. 제아는 연이어 장학금을 받았다.
1989년 6월 24일, 제아는 당시 통일민주당에서 전국의 청년지도자를 대상으로 교육한 제 1기 민주청년정치학교 졸업식에서 “한국정치와 정치자금”이라는 논문으로 최우수 졸업생이 되어 김영삼 총재에게서 상을 받았다.
그 때의 민주를 외치던 동지들은 지금 정치권에서 활약하는 이가 많다.
3-2
대학원 진학
2년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1990년 2월 24일, 어느새 서른 세 살이 된 제아는 학부에서의 노학생을 마감 하였다.
많은 이들이 제아의 졸업을 축하해 주었다.
무엇보다 아내에게 고마워해야 했다.
직업도 없는 남편의 공부와 홀아버지를 모시고 자녀까지 키우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 세월이었으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상경하여 제자리를 찾아 대학을 졸업한 것은 14년 만이었다.
10년의 세월이 더 걸린 셈이다.
땀으로 이뤄진 결실은 땀에 비례해서 탐스럽고 축복된 것이었다.
제아는 첫 딸인 영은이를 보며 자신의 어렸을 적 세 살배기가 얼마만한 정도며, 네 살은 어땠을까를 생각하고 학생이지만 좋은 부모가 되려고 애썼다.
다음의 글에서 제아와 딸 영은이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으리라.
'아빠는 나하고 친구지?'
아가 이름이 뭐야? 「문영은」
몇 살? 「네 살」
무슨 띤데? 「무슨 띠? 호랑이띠」
와 무섭겠구나!
아빠? 「응」
나 키 크지? 「응」
나 유치원에 갈 수 있지이? 「그럼」
나 지금 유치원에 가고 싶은데…
「다섯 살 때 가는 거야」
애기는 아빠가 더 좋아 엄마가 더 좋아? 「엄마!」
왜? 「아빠는 나하고 맨날 맨날 안 놀아 주잖아」
그럼 우리 할아버지하고 외할아버지하고는
어느 할아버지가 좋아?
「외할아버지」
왜? 「뭐 사주니깐!」
우리 할아버지는? 「뭐 안 사주니까 싫어!」
아가 동생 있어? 「응」
어디에? 「엄마 뱃속에」
동생은 몇 살인데?
「내 동생은 동그라미 살이구
내 동생 나오면 나는 다섯 짤이야.
이케 (손을 펴 보이며) 다섯 짤!」
「아빠 우리 캔디 맞추고 놀자」(캔디 : 만화영화 그림 맞추기 블럭)
아빠 우리 캔디 맞추고 놀아요 그래야지.
그런데 아빠는 싫다고 그랬잖아?
「아까 전에? 지금은 아니야」
왜에? 「같이 놀아 주니까」
이번에 뭐를 물어 볼까?
애기야 너 결혼식 알아? 「으응」
결혼식은 어떻게 하는 건데?
「(흉내를 내면서) 딴따다단, 딴따다단」
아빠 엄마는 결혼했지? 「으응」
너도 결혼할래? 「안 돼」
왜? 「남자가 없잖아」
두 번째 대학을 마치자 제아는 대학원 진학을 고심하였다.
다시 일반 대학원을 간다면 가족들에게 너무 부담을 주는 것 아닌가. 야간 대학원으로 가 낮엔 일을 하자.
고려대 정책대학원 국제관계 전공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학부 때는 동대에서 수학정교사 2급 자격증을 받은 덕분에 제기동의 학원에서 화, 목, 토는 수학을 가르쳤고, 월, 수, 금은 집근처 고등학생의 영어와 수학을, 주말에는 토, 일요일반을 가르치다 보니 휴일이라고는 일요일 오후 정도 뿐 이었다.
늦깍이의 서른 한 살, 두 살에 학부 공부를 다시 마치니 자식의 도리와 지아비 노릇과 아이들의 아빠 노릇을 제대로 못해 죄스러울 따름 이었지만 잘 인내하고 참아준 아내가 고마웠다.
부업으로 단추도 달고, 구슬도 꿰어 가계에 보탬이 되야겠다던 그런 아내였다.
2남 9녀나 되는 11남매 중 막내로 고생이라곤 모르고 자랐다는데….
두 번째 취업
대학원은 직장과 같이 하기로 하고 새로 문을 여는 한국생명보험 회사에 전회사 경력을 인정받으니 대리로 입사를 시켜주었다.
면접을 치르러 갔던 날 두 번이나 놀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하나는 면접을 주무하는 인사과장이 동대의 ROTC 19기 동기생이었고, 면접을 보던 임원은 1988년 3월 제아가 학업을 위해 사직서를 제출했던 전 직장의 ROTC 3기 부장님이셨기 때문이다.
대학원은 월, 금에 주로 강의가 있었으므로 화, 목, 토는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 학부 때 시작한 제기동 학원을 5년이나 계속하였으니, 남편과 아빠로서는 많이 모자라는 세월을 보낸 셈이다.
그러면서도 제아는 회사일도 열심히 하였다.
제아는 공로사원으로 대만을 다녀오며 하늘에서 지구를 내려다보았다.
'雲海를 지나며'
태평양 상공에서 구경을 한다
대평원에 전시된 雪景은
청명한 하늘에 둘러진
南洋畵와 北洋畵.
화폭에는
雲山들이 길 없이도
群像지어 옮겨 다니는 요술 한마당
하늘까지 걸어서 가지 못하고
서로 부둥켜안고 포옹을 할 때
저 아래
太平洋 活魚는 국경이 없지만
사람들은 다툼과 시기를 하려드네.
미움도 질투도 살지 않는 저 끝 너머로
아이들이 새를 타고 하늘을 넘나들 때
구름은 내기를 노가로 한다
섬 마을, 새 깃 속, 산 떼거리, 솜털사탕,
안개 자니 계곡, 한 뭉터리 구름과자들…….
雪山엔 어느 샌가 새 눈이 쌓이고
새들이 찾아오면
햇살에 모두는 잠을 청한다.
깨어보니
길도 많고 땅도 넓네
바람은 길을 따라 풍경을 바꾸지만
구경꾼도 바뀌네
雪海를 붙들고 사진 한 장에다
2만 7천 피트 상공에서 그림을 그릴 라면
白雪은 山에 걸터앉아 휴식을 하네
평온한 쉼터에서 우리는 가지만
구름은 하늘에 스스로 남아주네
평온한 세상 천질세.
-타이페이에서 서울로 오는 機內에서 -
*노가로 = 인천 앞 바다 영종도 사투리 '쉬임 없이'의 뜻
3-3
구리아저씨 운명하다
1991년 7월 11일, 제아의 아버님 구리 아저씨는 72세로 갑자기 운명을 하셨다.
오래된 지병과 병고로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지만….
이미 제아가 군에서 제대할 무렵인 1983년 여름에는 지병인 전립선의 치료를 목적으로 가나마이신 주사를 과다 사용한 이후로 두 귀의 청력을 완전히 잃어 청각장애자가 되었으며, 1985년 겨울, 서울로 입원을 할 즈음에는 두다리를 쓰지 못할 정도로 거동이 불편하였고, 퇴원 이후로는 목발로 바깥출입을 2~3년 간신히 하셨으나 아예 대소변은 방에서 받아내야 했다.
결혼한 지 한 달 만인 1986년 4월에 모셨으니, 5년여를 뒷바라지한 제아 두 부부의 노력도 고통 속에서 사신 부친의 병치레에 큰 보담이 되질 못하였다.
처음 몇 년은 당신의 거동이 불편 하시니 문 앞 계단까지 나가셔서 아이들의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모습이나 지나는 이들을 물끄러미 보시더니 나중엔 아예 돌아가실 때까지 방에서 나오시지를 못하고 누워 계시기만 하셨다.
운명하시기 이틀 전, 평소 잘 잡수시던 식사를, 감기기운이 있다며 식사를 줄이시기에 감기약을 지어드렸었는데, 운명하시는 날 아침 회사로 출근하는 제아에게 밥상 앞에서 오늘은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걱정 말고 어여 회사에나 잘 다녀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날 오후 4시경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아버님께서 많이 편찮으신데 집에 좀 일찍 들어오세요.”라고.
그러나 제아는 오후 시간에 새로 입사한 ROTC 27기들과 '선배와의 대화'라는 교육이 서초동에서 있었으므로 그곳에서 교육을 6시쯤 마치고 제기동에 갔을 때 원장 선생님이
“집에 급한 일이 있으니 바로 오시랍니다.”라고 일러주며
“천천히 가세요.”라고 하였다.
제아가 서초동에서 제기동으로 이동하는 시간에 운명하시자 아내가 학원으로 전화를 넣어 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동안 제아는 예감을 하였다.
「그토록 고생을 하시더니 돌아가셨구나. 불쌍하신 아버님」
이렇게 생각하니 임종도 지키지 못한 죄송스러움과 만 가지 생각에 운전이 제대로 되질 않았다.
급히 집에 돌아와 보니 교회에서 목사님이 오시고 남선교회의 친구들이 어느새 와 있었다.
제아는 엎드려 임종을 못한 불효자식을 용서 받아야 했다.
아내 혼자 임종을 하였으니 젊은 부인이 혼자 애를 썼으리라.
며느리의 손을 애써 잡으시고 아들을 기다리다 눈을 못 감고 돌아가신 것을 아랫집 동서 형님이 오셔서 눈을 감아 드렸다니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그토록 고생하시던 긴 세월이 언제였는가 하듯, 평온히 돌아가신 모습에 제아는 감사해야 했다.
그날은 아버님의 생신날이셨다.
생신날에 운명하면 한명이라는데, 한강성심병원에 입원하셨던 해부터 6년을 더 연장하셨던 것이었다. 병환기간 중 부자간에 나눌 얘기들은 필담으로 나누어야 했고, 가족들은 멀리 다녀오거나 외박이 거의 불가능 하였다.
그동안 가정의 풍파로 한 번도 문병 오지 않았던 영월집에 계시는 어머니와 대구의 동생 환에게 부고를 알리고 상경토록 하여 장례식을 같이 지냈다.
부산의 여동생과 영월의 막내 효는 오질 못하였다.
그토록 많았던 제아네 식구 중 셋만 모여 장례를 치르니 쓸쓸하기 그지없었고, 유달리 제아의 아내만 눈물을 많이도 흘렸다.
조금만 불편해도 불같고 대쪽 같으신 성격에 소리를 지르시고 식사에도 투정을 부리시고, 자부가 딸 둘을 내리 낳자 가문이 끊긴다고 며느리를 구박하시더니 그 많은 자식 중 임종을 며느리 혼자 할 줄 누가 알았으랴.
제아는 영월에 있는 조부모와 어머님 산소에 가 인사를 올리고 부친의 장례를 잘 마쳤음을 아뢰었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지은 시를 읊어 보자.
'아버지 팔벼게'
네 살은 넘었을까?
하늘에서 유리비가 내리고
천둥치던 여름날 밤
강가가 내려다보이던
팔괴리집 툇마루에서 아버지는 팔벼개로
아들을 누이고는 천장을 올려다보셨다.
아버진 아무 말도 안하셨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하신 말씀이 있었을 터인데
너무 어렸을 적이어서 기억해 내질 못 하겠다
'에미 없는 눔, 불쌍한 눔
얼마나 힘든 세상살이가 닥칠는지 몰라
아들아 제발 잘 헤쳐가 다고'
아버지는 꼭 안아주셨다
번갯불이 번뜩이는 밤에
두려움이 아버지 품으로 같이 숨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정담이 밤을 감쌌다.
겨울이 먼 그 밤에
우리는 바람소리를 들었다
때 이르게 들려오던 문풍지 소리
지금도 산을 넘어 다가 온다
아버지의 따스한 체온이 그립다
아버지 되고 보니 더 그리운 아버지.
대학원 졸업
1993년 2월, 제아는 “북한의 핵개발 가능성과 쟁점”이라는 논문으로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제아가 평소 관심이 있던 통일에 관한 논문을 근사하게 써봐야겠다는 욕심은, 통일에 장애가 되고 있는 핵개발 문제로 자연히 귀결되었고 논문의 서문에 그는 이렇게 감사의 글을 썼다.
「충만함도 다 못한 작은 정복을 해봅니다.
16년전, 「사람은 나서 서울로」라는 말만 믿고 무작정 상경했던 시골뜨기 고학도의 감회를, 이쯤에서 넌즈시 느낄 수 있을 듯합니다.
민족의 대학 고대에서 보낸 8년의 기간은 정복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었습니다.
그동안 자상함으로 학부 때부터 세심한 배려를 아껴주시지 않으신 존경하는 지도교수 이호재 교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를 올리며, 귀중한 자료를 흔쾌히 준비해 주신 한국국방연구원 김민석 선임연구원, 국방대학원의 ROTC 동기생 한성욱 소령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분주하기만한 남편대신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님을 모시고 영은, 정은, 정호 세 아이를 훌륭히 키워준 아내에게도 고마움을 표합니다.
이제,
통일될 조국을 꿈꾸며
또다른 정상을 향하여 다시 힘찬 출정을 시작하려 합니다」
이제 제아는 겨우 보통사람이 되었으나, 지금 제아가 이룩한 것은 없다.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이만큼 성장하여 축복된 가정을 꾸리고 건강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뿐이다.
제 3라운드를 마친 그의 다음의 싯귀를 음미해 봄은 의미가 있으리라.
'남자 서른 여섯'
한 나그네가
초여름 땡볕에 땀을 흘리고 서있네
잠시 숨을 몰아쉬고 있네
바람은 무심코 그 옆을 지나고
해는 무시로 서산으로 가네.
지난밤
혼자 걷던 산행 길은
아침나절 준령으로 거기 놔두고
지금은 넌즈시 돌아보고 있네
태산도 땀을 흘리며
자꾸 어여 가라 하네.
아이들은 나무 그늘 밑으로 이리 오라 하고
아내는 쉬었다 가라 하지만
달려야 할 길이 저 만치서
나그네를 어서 오라 하네.
다시
땀을 훔치고
길을 또 가려 하네
바람은 자고
해는 점점 중천으로 가는데
길도 같이 가고 있네
서른여섯이 달려가고 있네.
앞만 보고 달렸던 험하고 힘든 세상살이를 돌아다보니 덧없는 세월만 허비한 셈이었다.
그러나 아직 더 많은 태산준령이 앞에 있다.
제아는 이제 더 넓은 대로를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더 넓은 무대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넘어지기도, 지치지도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제아는 가난에서 부지런함을 배웠고, 빈곤에서 절약함을 배웠다.
산비탈에서 끈기를 배웠고, 마라톤에서 의지를 배웠다.
경기에서 도전을 배웠고, 친구에게서 의리를 배웠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사랑을 배웠다.
제아는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늘 간직하고 있다.
하나님이 천지창조 후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기록 되었듯이, 제아는 「정복정신」을 삶의 지표로 삼고 있다.
제아는 아직 정복할 단계가 아니다.
그는 우선 충만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정복하여야 한다.
그가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지금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제아에게 기대를 걸어도 좋으리라.
에필로그. 1
이글을 연재하기까지는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남보다 더 많은 고생을 한 것도, 유달리 잘 나지도 못하고 이룩한 일도 없는데 글을 3부작이나 쓰게 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이 더 많은 미완인 제 자신을 돌이켜 보는 시간이 되었으며, 많은 분들이 과분한 격려를 주셨습니다.
격려에 힘입어 더욱 열심히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인생을 살아가겠습니다.
이 지면을 빌어 3부작 원고를 게재해 준 <월간 ROTC>에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