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여래장 연기론
여래장 사상은《보성론》에서 완성되었다고 해도 좋겠지만, '여래장연기'의 사상은《대승기신론》에 이르러 성립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여래장과 무명無明이 일체화한 '아라야식'을 토대로 미혹의 인식계의 전개와 번뇌의 단진斷盡을 연기의 이론을 적용하여 개시開示한 것은《기신론》에 이르러서라고 볼 수 있다. '여래장연기'라는 말은 법장의《대승기신론의기》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여래장연기론은 진여연기론이라고도 한다.
1, 진여의 개념과 정의
아뢰야식연기론에서 우주만유가 생성 발전하는 연기의 주체가 아뢰야식이라고 했는데, 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몇 가지 쉽사리 수긍이 가지 않는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중생들이 시시각각으로 뿌려놓은 선·악의 종자를 저장해 두는 것이 아뢰야식이고 그 종자가 인연을 만나 우주만유로 전변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아뢰야식은 첫째 있었다[생] 없었다[멸]하며 변화하는 것이고, 둘째 생멸 변화하는 것이므로 거짓된 것[망]이며, 셋째 그러한 것은 결국 상대적인 현상계에 대한 고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만유의 연기의 주체이고 제1 원인이기 위해서는 첫째 생멸변화하지 않고 상주불변하는 것이어야 하고, 둘째 실재적인 것이어야 하며, 셋째 현상을 초월한 보편적인 본체이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그러한 논리적인 요청에 의하여 항상하고 실재적이며 보편· 절대적인 연기의 주체를 설정하여 설명하는 것이 바로 진여연기론眞如緣起論이다.
진여眞如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타타타(Tathata)로 본래 참다움이란 뜻인데, 끊임없이 생멸변화하는 우주만유 현상계의 이면에 실재하는 본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진'이란 거짓이 아닌 참이란 뜻으로 불생불멸의 항구적이고 상주적인 실재로서 아무런 변화도 없고 파괴되지도 않는 것을 의미하며, '여'는 한결같다는 뜻으로 유일하고 절대·보편적인 체성으로서 아무런 차별도 없고 쪼갤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여는 법계法界· 법성法性· 실제實際· 일심一心· 진제眞際· 실상實相· 여래장如來藏· 부사의계不思議界·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등 다른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한 마디로 우주만유에 보편 상주하는 참된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이와 같은 연기의 주체가 거짓이 아니라 참이라는 점은 이치상 타당하지만 그것이 연기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는 얼핏 수긍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즉 아뢰야식 자체가 시시각각으로 생멸변화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생멸변화하는 모든 현상계를 연기시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겠지만, 진여는 그 자체가 본래 진실한 것이고 어떤 변화도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불생불멸하는 진여가 어떻게 생멸변화하는 우주만유의 현상계를 연기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거짓이 거짓을 낳는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지만, 참이 어떻게 거짓을 낳을 수 있으며 또 만일 거짓을 낳는다면 그 참은 이미 진정한 의미에서 참이 아니지 않겠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진여연기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논증으로 진여가 모든 만물을 현상시키는 사실을 설명한다. 즉 진여에는 불변不變과 수연隨緣의 두 가지 측면이 있어서, 그 실체는 절대로 변함이 없어 어디까지나 불생불멸하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이며 평등하고 무한한 것이지만, 그 현상은 연緣에 따라 생멸하고 차별이 있고 유한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진여의 진이란 ‘변치 않는다[不變]’는 뜻이고, 여란 ‘인연을 따른다[隨緣]’는 뜻이다. 즉 본성은 언제나 변치 않으면서도 그 모양은 인연에 따라 천차만별의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 진여인 것이다. 예를 들어, 금으로 비녀· 반지· 팔찌· 귀걸이 등 여러 가지 패물을 만들었을 경우, 겉모습은 사람들의 가공에 의해 제각각의 양태를 나타내지만 그 본바탕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진여도 연에 따라 온갖 현상계를 나타내지만 그 본바탕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 진여의 연기상
그러면 그러한 진여는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순전히 철학적 내지는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문제이며, 실제에 있어서는 누구나 알기 쉽게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그와 같은 진여란 단적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기뻐하고 슬퍼하고 노여워하고 미워하는 범부들의 ‘중생심衆生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즉 중생의 마음의 실체가 바로 진여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중생심에는 본바탕[體]으로서의 불변하는 본체인 진여의 측면과, 겉모습[相]과 활동[用]으로서의 인연에 따르는 현상인 생멸의 측면이 있어, 실체는 평등· 불변하는 것이지만 현상은 차별 변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의 한 마음[一心] 안에 진여의 측면[心眞如門]도 있고 생멸의 측면[心生滅門]도 있다는 것은 얼핏 보면 모순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진여와 생멸이라는 두 가지 측면은 우리 마음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두 가지 의미로서 실체를 떠나서 현상이 있을 수 없고 현상을 떠나서 본체가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하나도 아니고[不一]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다[不異]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잔잔한 물과 바람에 부딪쳐 용솟음치는 파도는 그 겉모습이 엄연히 구별되므로 하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잔잔한 물이나 파도가 물이라는 본성을 떠난 것도 아니므로 다르지도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 중생심의 실체로서의 진여는 유일· 절대· 무한· 불변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깨닫거나 깨닫지 못하거나 아랑곳없이 항상 존재하며, 그 참모습은 마음으로 헤아리거나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이치는 말을 여의였다[眞理離言]’고 한다.
다시 말해, 진여는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절대 평등한 것이지만, 온갖 번뇌와 망념으로 뒤덮인 우리 중생으로서는 그 당체를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언어로 의논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색안경을 쓰고 주변을 바라보면 안경의 색깔대로만 보일 뿐 주변의 물건들이 지니고 있는 제 빛깔을 볼 수 없듯이, 망념의 안경을 쓴 우리 중생들은 아무리 해도 진여의 참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상상을 초월한 진여를 이언진여離言眞如라고 한다.
한편, 진여가 아무리 그렇게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할 수 있는[以心傳心] 경지에 이르지 못한 우리들로서는 역시 말이나 글을 빌리지 않고는 그것을 이해할 수도 이해시킬 수도 없다. 그러므로 구태여 말을 빌려 설명하는 진여를 의언진여依言眞如라고 한다.
그런데 의언진여에는 소극적인 표현과 적극적인 표현의 두 가지의 표현방법이 있다. 즉 진여를 소극적으로 표현하는 입장에서는 참답게 비었다는 뜻으로 여실공如實空이라 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입장에서는 참답게 찼다는 뜻으로 여실불공如實不空이라고 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진여의 참모습은 우리들의 망념을 가지고는 올바로 바라볼 수 없으므로 그것을 표현해내기 위해서 소극적 입장에서는 그저 아니다는 말로 일관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空하다고 한다. 그에 반해 중생들의 망념에 의해 파악되는 현상적인 존재[妄法]는 공하지만 그 실체는 항상 불변하는 실재로서 청정한 무루성공덕無漏性功德을 만족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공不空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을 여의였다거나[離言], 말에 의지한다거나[依言], 또는 공하다거나 공하지 않다거나[不空] 하는 것은 모두 진여의 본바탕을 표현한 말들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본래부터 불생불멸이며 청정무구하고 진실한 진여가, 어떻게 생멸변화하고 더럽고[染] 거짓된[妄] 일체의 현상계를 연기시키며, 그 연기의 과정은 어떤 것일까? 앞에서 진여의 본바탕은 불변이지만 그 모습은 연에 따라 변한다고 했는데, 진여가 우주만유를 연기시키는 그 연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을 바로 번뇌망상이라고 보는 것이 진여연기론의 입장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번뇌의 근본인 무명無明이 진여로 하여금 우주만유를 연기시키게 하는 연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잔잔한 물이 바람이라는 연을 만나 천차만별의 파란을 일으키고, 변함이 없는 금이나 흙이 장인의 손길이라는 연을 만나 천태만상의 물건이 되듯이, 진여라는 잔잔한 물이 무명이라는 바람을 만나 만유의 현상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진여가 무명을 만나 장차 무주만유를 전개시키려고 할 때 그 바탕으로 작용하는 것을 진여연기론에서는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고 한다. 여기서 아리야란 본래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뢰야식의 아뢰야와도 같은 말이지만 한역에서는 그 표기방법이 다른 것처럼 해석도 다르게 하고 있다. 즉, 아뢰야라고 표기하는 현장의 계통에서는 아뢰야식을 우주만유의 연기의 주체로서 유루이고 생멸하는 망식으로 해석하지만, 아리아로 표기하는 진체眞諦의 계통에서는 무명의 영향을 받은 진여가 만유가 전개하는 방향으로 움직임을 일으키는 자리로서, 생멸하는 현상적인 측면이 서로 화합하여 같지도 않고[不一] 다르지도 않은[不異]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뢰야식은 만유가 연기하는 제일차적인 것이지만 아리야식은 제2차적인 것이라는 점에 그 내용의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이 아리야식 가운데에서는 생멸하지 않는 진리와 생멸하는 망념이 통일체를 이루고 있으며, 그 양자는 결코 이질적인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잔잔한 물이 바람을 만나 움직일 때 그 물과 움직이는 파도는 절대로 이질적인 것이 아니어서, 그 겉모습은 같지 않지만 그 바탕은 다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