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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Dewey(1916). Democracy and Education.
이홍우 역(1987). 『민주주의와 교육』. 서울: 교육과학사. (역자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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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해설
<1> 역자가 대학 신입생이었을 당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에는 졸업반 학생들이 신입생들을 몇 명씩 맡아서 과외지도를 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 과외지도의 내용과 방법은 거의 전적으로 지도자인 졸업반 학생의 제안에 달려 있었다. 역자가 속해 있던 집단의 지도자는 그 과외활동으로서 존 듀이의 『민주주의와 교육』을 읽고 토론하기를 제안하였고, 우리 사 오명 집단은 그 제안을 만장일치로 받아들였다. 그 당시에는 오천석·임한영 양 교수의 번역판이 상하 두 권으로 나와 있었다. 역자는 우선 그 중의 첫째 권을 입수하여 읽어 보았다. 첫 페이지를 넘겼을 때 역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이 책에 나와 있는 대로, 돌과 생명체가 외부의 힘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말하자면 돌은 그것보다 큰 힘과 대적할 때에는 산산조각이 나지만, 생명체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것에 적응하며 나아가서는 그것을 이용한다는 식의 설명이다. 이 설명에서 시작하여, 교육은, 마치 번식이 생물학적인 삶을 계속 유지해 나가는 수단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삶을 계속 유지해 나가는 수단이라는 내용이 첫째 장을 이루고 있다.
대학의 교육학과에 갓 발을 들여놓은 우리는 학문적으로 무지했던 것만큼 성급하기도 했다. 우리는 그 당시 교육학의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 알려진 그 책에서 교육에 관한 모종의 심오한 통찰 — 교육학을 공부하지 않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발언 같은 것 — 에 접하게 되리라는 성급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그 기대가 성급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 당시의 우리로서 그런 기대를 가진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그 기대는 첫머리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돌을 세게 두드리면 깨어진다든가, 생명체는 외부의 힘에 대하여 이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다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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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을 모를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도대체 그런 명백한 사실들이 교육에 관하여 무슨 심오한 진리를 말해 주는가? 이러한 의구심은 비단 첫 장을 읽을 때만 아니라 그 이후 계속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예컨대 3장 ‘지도로서의 교육’의 열두째 문단(3:12)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어머니가, 아이가 가지고 싶어 하는 물건을 건네주면, 아이는 그것을 잡으려고 손을 뻗는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은 서로 대응한다. 물건을 받은 뒤에 아이가 그것을 다루는 방식, 다시 말하면 ‘그것을 사용하는 용도’는 아이가 어머니를 줄곧 관찰해 왔다는 사실에 의하여 분명히 영향을 받는다. 아이가 부모들이 어떤 물건을 찾는 것을 볼 때에는 자기도 그 물건을 찾으며, 그것을 찾았을 때에는 부모에게 넘겨준다. 이것은 또한 그 반대 경우에, 부모가 찾아서 넘겨주는 물건을 아이가 받는 것과 조금도 다름없이 자연스럽다. 매일매일의 교섭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사례들을 일일이 자세하게 그려 보면, 거기에는 아이들의 활동을 일정한 방향으로 지도하는 가장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방식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3:12).
요컨대 그 당시 우리에게 이런 말은 거의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 당시 우리는 어리석게도, 그것이 우리 자신의 이해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교육학의 가장 중요한 문헌’이라는, 이 책에 붙여진 칭호를 의심하였다.
돌이켜 보면, 역자가 이 책을 처음 대했던 그 당시는 지금부터 정확하게 석 달이 모자라는 30년 전이다. 이렇게 헤아려 보면서 역자는 그 세월의 짧지 않음에 스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 긴 세월 동안 역자는 『민주주의와 교육』을 계속 읽으면서, 예컨대 돌을 세게 두드리면 산산조각이 난다든가, 생명체의 반응양식은 이것과는 다르다는 식의, 대학 신입생 당시에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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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역자는, 어느 편인가 하면, 이 책에서 인용된 한 두 마디 말 또는 이 책이 대표하고 있는 한두 가지 아이디어를 간접적으로 읽는 것 이상으로 이 책을 천착해 본 일이 없다. 그동안 역자에게 『민주주의와 교육』은 ‘현대 교육학의 가장 중요한 문헌’이라는 막연한 상투적 칭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역자는 『민주주의와 교육』을 읽기를 그만두고, 그 대신 그것과는 다른 방향에서 학문적, 또는 대체로는 학문과 무관한 방황을 해왔다. 만약 대학 신입생 때부터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더라면, 아마 역자는 현재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는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학문과 무관한 방황은 젖혀두고 학문적 방황만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그 동안의 방황이 『민주주의와 교육』을 이해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지 모른다. 그동안 역자의 학문적 편력은, 대체로 말하여, 이 책이 나타내는 것과는 거의 정면으로 반대되는 교육관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만약 하나의 아이디어는 그것에 반대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더 잘 이해된다는 말이 옳다고 하면, 그동안 역자의 학문적 방황은 『민주주의와 교육』의 이해를 위해서는 전화위복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할지 모른다.
이상과 같이 장황한 사담을 늘어놓는 것은 그것이 이 해설을 쓰는 역자의 의도 또는 심경을 보여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책을 손에 든 독자는 십중팔구, 30년 전의 역자보다는 이 책의 주장이나 중요성에 대하여 훨씬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 중에는 혹시, 30년 전의 역자와 마찬가지로, 첫 페이지의 돌 부서지는 이야기나 그와 비슷한 말에서 실망을 느끼고, 책에 대한 세평은 참으로 알 수 없다고 머리를 흔들면서 안심하고 이 책을 팽개쳐 버릴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이 해설은 우선 그러한 불상사를 어떻게 해서든지 막아보자는 데에 그 의도가 있다. 이 책에 대한 세평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이 책은 그야말로 ‘현대교육학의 가장 중요한 문헌’임에 틀림없다. 만약 교육학을 얼마간 공부한 사람이 이 책을 세밀히 읽어 본다면, 현대 교육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대부분의 주제들이 이 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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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태아적인 형태로나마, 취급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정도로 이 책은 교육학의 ‘종합 교과서’요, 나아가서, ‘현대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라는 화이트헤드의 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현대 교육학은 『민주주의와 교육』의 주석’이라고 말해도 별로 틀림이 없다. 역자의 능력으로 보아, 현대 교육학의 중요한 주제들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그것들이 이 책의 어떤 부분에 어떤 방식으로 취급되어 있는가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또한, 듀이의 철학을 ‘종합적으로’ 해설할 능력도 역자에게는 없다. 이 해설은 오직 이 책, 『민주주의와 교육』이 듀이 철학을 ‘가장 포괄적으로, 가장 충분하게 제시한’ 책이라는 듀이 자신의 고백 [각주 1: John Dewey, ‘From Absolutism to Experimentalism,’ G. P. Adams and W. P. Montague (eds.), Contemporary American Philosophy, Vol. Ⅱ (1930), reprinted in R. J. Bernstein (ed.), On Experience, Nature, and Freedom: Representative Selections by John Dewey, New York, Bobbs-Merrill, 1960, p. 14.] 을 믿는다. 이 고백에 뒤이어 듀이는 『민주주의와 교육』이 교육에 직접 관심을 가진 사람들 이외의 일반 철학자들에게 널리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하여 유감을 표하고, 그것은 그 일반 철학자들 자신이 바로 ‘교육에 직접 관심을 가진 사람들’임에 비추어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해설에는 위에서 말한 것 이외에, 아마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해야 할 또 하나의 의도가 있다. 이 둘째 의도 때문에, 이 해설은 보통의 ‘해설’과 다르며, 보통의 ‘해설’의 범위를 벗어난다. 누군가가 책 한 권을 번역하고 난 뒤에 그 책을 해설할 때, 보통의 경우라면 ‘중립적인’ 입장에서, 또는 더 흔히는 그 책의 주장에 동조하는 입장에서, 그 책의 요점을 말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할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설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다. 앞의 사담에서 약간 시사되어 있는 바와 같이, 역자는 이 책의 주장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해설할 수가 없다. 적어도 현재의 시점에서 역자가 교육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은 가장 근본적인 점에서 듀이의 그것과 맞지 않는다. 좀 더 대담하게 말하면, 역자는 듀이의 교육관이 극복되지 않는 한, 교육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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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할 수 없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사정을 안다면, 독자는 역자가 어째서 해설의 통상적인 관례를 어기고 군데군데 역자 자신의 관점을 삽입할 수밖에 없는가를 양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학의 이론적 추세에 예민한 사람들은, 이제 듀이의 이론은 ‘한 물 간’ 이론이요, 지금 와서 듀이를 들추어내어 왈가왈부하는 것은 송장을 상대로 씨름하는 격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교육학을 전공하지 않는 대학생들에게 상당한 기간 교육학 개론을 가르쳐 본 역자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듀이의 생각은 오늘날 교육에 관한 일반적인 통념 — 흔히 ‘상식’이라고 하는 것 — 이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학생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무심코 하는 말들, 그것은 거의 그대로 『민주주의와 교육』에 들어 있는 것들이다. 학생들이 모두 그토록 열심히 이 책을 읽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만큼, 역자는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늘 궁금하게 여기고 있다. 그것은 존 듀이의 이론 자체가 전부터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통념(‘상식’)을 말한 것이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존 듀이의 이론이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져서 오늘날에는 상식화되었기 때문인가? 이 두 가지 중의 어느 쪽 설명을 받아들이든지 간에, 듀이의 생각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교육관을 크게 사로잡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또한, 그 중의 어느 쪽 설명을 받아들이든지 간에 이 사정은 앞으로도 달라질 것 같지 않다. 그러므로 듀이의 이론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에 대하여 찬반 어느 쪽으로든지 의견을 가지는 것은 곧 교육학이 교육에 관한 일반적인 통념을 받아들이는가 부정하는가에 관련될 정도로 중요하다.
<2> 우선, 듀이 사상의 핵심을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두 개의 명제를 제시해 보겠다.
(1) 이론은 실제에서 파생되며 실제에 응용되는 한에서 가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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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과 ‘실제’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각각 theory와 practice이다. 이 용어는 그 원의(原義), 즉 어원적 의미에 가장 가깝게 해석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그것은 이와 같은 명사형으로 보다는 the theoretical(이론적인 것), the practical(실제적인 것)이라는 형용사형으로 이해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어원적 의미에 가깝게 해석할 때, ‘이론적인 것’은 ‘보는 것’, 다시 말하면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아는 것을 뜻하며, ‘실제적인 것’은 ‘하는 것’, 즉 모종의 조치를 취하는 것, 또는 간단하게, ‘행하는 것’을 뜻한다. (theory의 희랍어 어원 theoria는 ‘보는 것’을 뜻하며, practice의 어원 praxis는 ‘하는 것’을 뜻한다.) ‘보는 것’이 어떤 것이며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위의 명제가 나타내고자 하는 양자 사이의 관련 문제와 전적으로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각각을 위와 같이 일반적인 수준에서 규정한다 하더라도, 양자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모종의 조치를 취하는 일’(즉, 실제 또는 ‘하는 것’)에 종사한다고 할 때, 우리의 관심은 사태에 무엇인가 변화를 일으키는 데에 있다. 물론, 그 변화는 우리가 바라는 변화이다. 만약 무엇인가 변화를 일으키는 데에 ‘관심’이 없다면 그 ‘모종의 조치’라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이론’, ‘보는 것’,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아는 것’에는 실제의 경우에서와 같은, ‘우리가 바라는 변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모종의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해당되지 않는다. 이 때 우리는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다. (위의 명제가 이 책의 핵심에 해당되는 만큼 이론과 실제 및 양자의 관련 문제는 이 책의 전편에 걸쳐 취급되어 있지만,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20장이다. 이 장의 제목, ‘Intellectual and Practical Studies’는 이 번역판에서는 ‘이론적 교과와 실제적 교과’로 번역되어 있다. 사실상, 이 장의 제목은 ‘Theoretical and Practical Studies’로 될 수도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앞의 명제에서 ‘이론’이라는 말은 ‘지식’ 또는 ‘지적 활동’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정도로 이론과 실제의 ‘구분’을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곧장 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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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 필연적인 ‘관련’이 있다는 주장을 내세워 그 ‘구분’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말하자면, ‘아는 것’이 ‘하는 것’과 어떻게 무관할 수 있으며, ‘하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다소간 앞의 명제에 요약된 듀이의 사상에 동조하는 것이다. 앞에서 잠깐 말한 바, 교육학 개론 과목에서의 학생들의 반응을 미루어 짐작하건대, 오늘날 그런 식의 이의를 제기할 사람들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런 사람들은 이 책에서 듀이가 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에 대해서도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과학은 유용한 사회적 직업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생겨났다. 물리학의 한 중요한 분야인 역학을 ‘기계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원래 기계에 관한 학문이었다는 증거이다. 지렛대, 바퀴, 경사면 등은 인류의 최초의 위대한 발견이며, 이것들이 실제적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고 해서 지적으로 열등하다고 볼 이유가 없다. 지난 20여 년 동안 전기에 관한 과학이 크게 진보한 것은 교통, 통신, 도시와 가정의 조명, 그리고 상품의 경제적 생산의 수단으로서 전력을 적용한 것과, 원인으로 또는 결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 이와 마찬가지로 화학은 염색과 표백, 금속 다루기 등에서 생겨났고, 근래에 와서는 산업에 무수하게 많은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 … 오늘날 수학은 고도로 추상적인 학문이 되어 있다. 그러나 기하학은 원래 ‘지측학(地測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물을 파악하기 위하여 숫자를 세고 또 측정을 하는 데 있어서 수가 가지고 있는 실제적 용도는 원래 이 목적을 위하여 숫자가 발명되었을 때에 비하여 오늘날 더욱 중요하다. … 어떤 학문의 역사를 따져 보더라도 이와 마찬가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15:14-15).
물론, 이 말은 단순히 여러 학문의 역사적 기원을 제시하는 데에 그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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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그런 학문이 그런 종류의 실제적 목적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나타내고 있다.
위의 첫째 명제는 이론 또는 지식의 의미와 성격을 나타낸다는 뜻에서 ‘인식론적 명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한 보다 자세한 고찰을 하기에 앞서서, 그것과 밀접한 병렬을 이루는 또 하나의 명제를 제시해 보겠다.
(2) 이론과 실제의 괴리는 사회적 계층분열을 반영하며 그것을 영속시킨다.
앞의 첫째 명제가 지식의 의미와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이 둘째 명제는 올바른 사회의 모습을 규정한다. 이 점에서 이 명제는, 앞의 ‘인식론적 명제’에 대하여, ‘사회철학적 명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론’과 ‘실제’라는 말의 의미를 앞에서 정의한대로 해석하여, 이 둘째 명제를 고쳐 쓰면, ‘지식과 실제적 활동, 또는 “아는 것”과 “하는 것”의 괴리는 각각을 고립된 관심사로 삼는 계층으로 사회가 분열되어 있는 상태를 반영하며 그러한 상태를 영속시킨다’는 뜻이 된다. 이 명제는 이중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하나는, 사회가 계층으로 분열된 상태는 올바른 또는 바람직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이와 같이 사회가 바람직한 상태에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명제(1)에 제시된 ‘이론과 실제의 관련’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명제(2)는 명제(1)에 함의된 사회철학적 의미를 명백히 드러내어 말하고 있다. (또한, 명제(1)은 명제(2)에 의하여 그 타당성이 확인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론과 실제가 그와 같이 관련을 맺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깨어진 상태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각주 2: 또한 듀이는 이것과는 별도로, 명제(1)에 대한 보다 ‘과학적인’ 근거로서 1) 생리학 및 이와 관련된 심리학의 발달(즉, 뇌의 기능과 ‘마음’의 작용), 2) 생물학의 발달(즉, 진화론), 3) 실험적 방법의 발달을 들고 있다(25:8-10). 이 마지막 실험적 방법에 관해서는 이하의 해설에 약간 언급되어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실제’라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변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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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으키기 위하여 모종의 조치를 취하는 것이며, ‘우리가 바라는 변화’의 가장 두드러지는 예는 의식주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과 관련된 변화이다. 그리고 ‘이론’이라는 것은 사태가 어떻게 되어 있으며 왜 그렇게 되어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론과 실제가 괴리되어 있다는 것은 ‘사태를 보는 것’이 ‘조치를 취하는 것’과 관련을 맺지 못하고 각각 별개의 관심사로 추구된다는 뜻이다. 이론과 실제가 괴리될 때, 실제는 단순히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데에 필요한 물자를 얻는 ‘물질적 관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되며, 이론은 이와는 무관하게 세계와 우주를 관조하는 ‘관념적 관심’을 나타낸다(19:3).
이 책에서 듀이는, 이러한 이론과 실제의 괴리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론과 실제가 별개의 관심사로 추구되는 것은 그것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론과 실제의 괴리가 사회적 조건의 우연적 산물이라는 것은 사회적 조건 여하에 따라 양자의 괴리가 보완 또는 극복될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듀이는 이론과 실제의 괴리를 배태한 가장 원초적이고도 전형적인 보기를 희랍 사회(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희랍의 교육사상과 사회사상에 반영된 희랍 사회)에서 찾고 있다(19장-20장). 희랍 사회에서는, 적어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기술되고 정당화된 바에 의하면, 이론적 활동과 실제적 활동에 종사하는 계층이 별도로 존재하였다. 전자에 종사하는 계층은 귀족, 지식층, 지배계층이며, 후자에 종사하는 계층은 평민이나 노예(직인), 생산자, 피지배계층이다. 희랍 사회는 전자의 계급이 생산 활동에 종사할 필요가 없는 사회였고, 또 이 상태를 마땅한 것, 바람직한 것으로 공공연히 표방한 사회였다. 실제적인 활동에 종사하지 않고 이론적 지식을 탐구하는 계층이 있다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근육과 땀에 얹혀서 ‘놀고 먹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올바른 사회, 듀이의 용어로 ‘민주적인’ 사회가 아니다. 듀이에 의하면 ‘민주적인’ 사회는 이론과 실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별개의 계층으로 분열되어 있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는 벽이 허물어진 사회’(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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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누구나 ‘동일한 종류의 일’ — 그 일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양하더라도 — 에 종사하는 사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논평한 듀이의 다음과 같은 말은 길게 인용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해, 동정적(同情的) 인식, 아이디어의 자유로운 구사에 비하여 단순한 일을 수행하는 기술, 외적 산물의 단순한 축적을 열등하고 종속적인 지위에 있는 것으로 본 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타당하다. 거기에 잘못이 있었다면 그것은 양자가 필연적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용품을 생산하고 남에게 봉사하는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것과 스스로 생각해 나가는 것 사이, 그리고 의의 있는 지식과 실제적 성취 사이에 자연적인 괴리가 있다고 본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단순히 그의 그릇된 파악을 이론적인 면에서만 시정하고 그런 그릇된 파악을 만들어 내고 복돋우어 준 사회적 조건은 그대로 묵인한다면, 우리는 조금도 사태를 개선한 것이 아니다.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운 시민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결과라는 것이 오직 생산을 위한 인간도구의 기계적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라면, 우리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지력이라는 것은 행동을 통하여 자연을 통제하는 수단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면서도, 자연을 사용하는 일에 직접 종사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비지적(非知的)이고 부자유한 상태에 있고, 지성의 통제력은 현장에서 먼 과학자나 산업의 우두머리의 독점물이 되어 있는 현실에 만족한다면, 우리는 확실히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다. 삶이 여러 기능으로 따로따로 갈라져 있고 사회가 여러 계층으로 따로따로 갈라져 있는 현실을 정직하게 비판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단순히 생산 기술을 사용하는 일에 많은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소수에게만 문화적 장식품으로서의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실제를 영속시켜 나가는 장본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요컨대, 삶과 교육에 관한 희랍의 철학을 극복하는 능력은 자유라든가 이성이라든가 가치 등을 나타내는 이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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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들을 이리저리 바꾸어 본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존엄성, 초연하게 남과 어울리지 않는 독립된 자세에 비하여 남에게 봉사하는 삶이 우월하다는 점에 대한 정서적인 변화만으로 그러한 능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론적, 정서적 변화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중요성은 참으로 민주적인 사회, 모든 사람이 유용한 봉사에 참여하고 모든 사람이 가치 있는 여가를 즐기는 그런 사회를 발전시키는 일을 실지로 추진하도록 한다는 데에 있다(19:11).
앞의 명제(2)에 요약되어 있는 의미를 이 이상으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아마 없을 것이다. 확실히, 오늘날의 교육은, 듀이가 보기에는, 현상의 지적 이해를 위한 ‘이론적 교과’와 실용적인 결과를 얻기 위한 ‘실제적 교과’를 분리시키고 전자를 후자의 우위에 둔다는 점에서 희랍 교육의 전통을, 희랍보다는 덜 ‘순수한’ 형태로(19:13), 이어받고 있다. 이것은 희랍의 교육관을, 그것이 이미 적용될 수 없는 엉뚱한 사회적 조건에 잘못 적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교육이 참으로 민주적 사회에 알맞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각주 3: 교육과 민주주의의 관계 —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육이 민주적 사회를 건설하는 ‘원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 에 대하여 듀이가 정확하게 어떤 견해를 나타내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 해설과는 별도로 자세하게 고찰해야 할 복잡한 문제이다. 23: 21 주석 참조.] 그 희랍의 교육관이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상의 지적 이해를 위한 이론적 교과가 실제적 활동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또는 ‘내재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듀이의 견해로 보면, 명백히 민주적 교육의 적대행위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으뜸가는 원리로 신봉되고 있는 평등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평등을 거의 절대적인 가치로 신봉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명제(2)에 나타난 의미 또한 명제(1)의 경우에 못지않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널리 호응을 받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자가 보기에, 듀이의 교육이론 또는 그의 사상 전체는 위에 제시된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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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제 — ‘인식론적 명제’와 ‘사회철학적 명제’ — 에 들어 있는 의미를 부연, 적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령 그의 교육이론의 핵심개념이라고 생각되는 ‘경험’의 의미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듀이에 의하면 ‘경험’은 ‘해 보는 것’(trying)과 ‘당하는 것’(undergoing), 또는 능동적 요소와 수동적 요소의 특수한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11:1). 이 두 가지 요소 중에서 ‘해보는 것’ 또는 능동적 요소는, 앞에서 쓴 용어로는, 실제적 측면을 나타내며, ‘당하는 것’ 또는 수동적 요소는 이론적 측면을 나타낸다. ‘해 본다’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변화를 얻기 위하여 모종의 조치’를 취하는 것이며, ‘당한다’는 것은 그 조치와 결과 사이의 관련을 파악하는 것 또는 이해하는 것을 가리킨다. 조치를 취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이 양자의 종합이 경험을 이룬다.
앞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듀이의 ‘경험’의 개념은 희랍적 개념의 비판에 기초를 두고 있다(20장 1절). 희랍인 사이에서 경험(empeiria)은 이성(logos)과 대립되는 것으로서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경험’이라는 말은 요령, 주먹구구, 돌팔이 방식 등의 의미로서, 이성에 입각한 합리적 설명이 없이 다분히 요행에 의하여 모종의 결과를 얻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성 또는 참된 지식은 항구불변의 진리 또는 ‘실재’를 대상으로 하는 데에 비하여 경험은 변화하는 ‘외양’ — 다시 말하면, 일들이 이루어지고 좌절되는 현상 — 을 다룬다. 희랍인에 있어서 경험은 ‘실제적 관심’과 관련되어 있었으며, 이것이 참된 지식과 대립되어 있었다는 것은, 듀이의 경험의 개념에 비추어 보면, ‘당하는 것’과 유리된 ‘하는 것’, 또는 ‘이론 없는 실제’에 해당된다. 다시, 희랍인들이 그러한 경험관을 가졌던 것은 그들이 처해 있었던 사회적 조건 때문이었다. 이 희랍인의 경험관은 존 로크로 대표되는 현대적 경험관에 의하여 수정되었지만, 여기서의 경험은 희랍인의 실제적 의미가 배제된, 순전히 지적 이해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었다(20장 2절). 희랍인의 ‘경험’이 ‘이론 없는 실제’에 해당된다면, 이 현대적 의미의 ‘경험’은 그 반대쪽 극단, 즉 ‘실제 없는 이론’에 해당된다.
듀이는, 자신이 의미하는 바로서의 ‘경험’(experience)은 ‘실험’(experimentation)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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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20장 3절). 실험이라는 것은 단순히 ‘해 보는 것’도 아니요, 단순히 ‘당하는 것’도 아닌, 양자 사이의 종합을 나타낸다. 실험에는 반드시 무엇인가 얻고자 하는 결과가 있으며, 여기에 ‘관심’(interest, 또는 ‘흥미’)이 작용한다. 실험에서 지식은 그 얻고자 하는 결과를 얻는 것(실제)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 수단으로 등장한다. 또한, 실험의 결과는 반드시 그것과 관련된 지적 침전물(이론)을 남겨 놓는다. ‘실험은 “노동”이 단순히 외적 결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지적 결실을 낼 수 있는 그런 조건을 우리에게 예시해 주고 있다’(20:26). 그러므로 ‘“하는 것”과 “아는 것” 사이의 전통적 분리, 그리고 순전히 “지적” 교과의 허세에 대하여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실험과학의 발전이었다’(20:26).
교육은 과학의 한정된 토픽을 다루는 실험이 아닌, 사회적 규모에서 행해지는 실험이다. 마찬가지로, 실험 또한, 사회적 규모에서 행해지는 실험이다. 이 실험, 즉 경험(또는 교육)에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한다. 교육의 문제는 바로 경험의 이러한 의미 — 실험법의 정신 — 를 충분히 살리는 데에 있다. 교육의 가치문제와 관련하여, 듀이는 교육에 관한 자신의 문제의식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교육적 가치의 이론에 있어서의 문제점은 경험의 단일성과 종합성에 있다. 어떻게 하면 경험이 충만하고 다양하면서도 그 단일한 정신을 잃지 않게 되는가? 어떻게 하면 경험이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좁고 단조롭지 않게 되는가? 궁극적으로 말하여, 가치와 가치표준의 문제는 삶의 관심을 조직하는 문제이다. 교육의 입장에서 보면, 그 문제는 학교의 교육내용과 방법을 어떻게 조직하면 폭넓고 풍부한 경험을 이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된다. 어떻게 하면 폭넓은 조망을 가지면서도 일의 능률을 희생시키지 않게 되는가? 어떻게 하면 관심의 다양성을 살리면서 고립의 대가를 치루지 않게 되는가? 어떻게 하면 개인이 자신의 지력을 없애 가면서가 아니라 지력을 발휘하면서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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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록 할 수가 있는가? 어떻게 하면 예술, 과학, 정치가 각각 서로를 희생시키면서 목적을 추구하지 않고, 풍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로를 강화시켜 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삶의 여러 관심과 그것을 시행하는 교과가 사람들을 서로 분열시키지 않고 인간의 공통된 경험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가?(18:32)
<3> 만약 앞에서 말한 두 개의 명제가 듀이 사상의 핵심을 나타낸다는 역자의 생각이 옳다면, 듀이의 교육이론이 타당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대체로 그 두 명제의 타당성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교육의 이론으로서의 듀이의 사상은 그 두 명제의 타당성 여부에 따라 서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는 것이다. (‘지식이나 이론은 특정한 사회적 조건의 산물이다’라는 최근 교육학에서 유행하는 주장 — 이 주장은 또한 듀이 자신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 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듀이의 이론은 그 당시 미국 사회의 특수한 조건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할 뿐이며, 그 타당성이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생각은, 역자가 보기에는 옳지 않다. 흔히, 이론은 그것이 나온 사회적 조건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이 모종의 객관적 절대적 기준에 의하여 평가될 수 없다는 것 사이에는 논리적인 관련이 있어서, 전자에서 후자가 논리적으로 따라온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앞의 ‘이해’에 관한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이른바 ‘지식의 상대성’을 부정한다고 해서 논리적 모순이 생긴다고 볼 이유가 전혀 없다. 다시 말하면, ‘이해’와 ‘평가’는 논리적으로 별개의 것이다. 듀이의 이론을 ‘이해’만 하고 ‘평가’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듀이의 이론이 우리와 하등 관계가 없어도 좋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제,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앞에 제시된 두 명제의 타당성을 약간 자세하게 검토해 보겠다. (1) ‘이론은 실제에서 파생되며 실제에 적용되는 한에서 가치를 가진다’는 명제를 조사하는 첫 단계로서 우선 ‘학문의 기원’ 문제를 생각해 보자. 앞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에게 명제(1)은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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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이론적 지식의 기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에게는 예컨대 물리학은 기계를 다루는 과정에서, 화학은 염색, 표백을 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기하학은 땅을 측량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고 하는 말이 어김없이 역사적 사실을 나타낸다고 생각되고, 나아가서 그것이 곧 그 학문의 목적 또는 성격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생각은 오직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말의 애매성에 힘입어서만 타당한 것이 된다. 가령 ‘화학은 염색을 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말을 ‘화학적 지식이 생겨났을 당시, 또는 그 이전에 사람들이 염색을 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이 말은 그야말로 어김없는 역사적 사실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만약 사람들이 염색(또는 그와 유사하게 화학적 지식으로 설명되는 활동)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것을 화학이론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학은 염색을 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말은 또한 ‘화학은 염색을 하는 “수단”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그 말의 역사적 사실로서의 진위를 확인할 도리가 없다. 그 말을 하는 사람 자신을 포함하여 아무도, 화학을 만들어 낸 사람이 과연 염색을 하는 수단으로서 화학적 지식을 정립했는지 물어볼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은 ‘역사적 사실’을 가장하여 학문의 성격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견이 타당한 것처럼 들리는 것은 오직 앞의 첫째 해석(‘화학이라는 이론적 지식과 염색이라는 실제적 활동이 공존한다’)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사소한 지적이 아니다. 역자가 보기에, 이른바 ‘이론과 실제의 관련’에 관한 듀이의 견해는 이론적 지식과 실제적 활동의 ‘공존 관계’를 ‘수단-목적의 관계’로 부당하게 번역한 데서 나온 것이다. (게다가, 듀이는 그 ‘공존관계’를 인정하는 것은 사회적 분열을 받아들이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하 참조.)
교과의 성격에 관한 장에서 듀이는, ‘농부나 선원, 상인과 의사, 또는 실험실의 실험가들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데도, 유독 교육에서만 지식은 일을 하는 것으로부터 초연하게 떨어져서 주로 정보의 축적을 의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14:9)고 말하고 있다. 이 말에서 ‘지식’은 ‘이론’,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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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는 것’은 ‘실제’를 나타낸다. 그리고 ‘정보의 축적’은 — 적어도 듀이에게는 — ‘실제와 관련되지 않은 이론’을 의미한다. ‘실험실의 실험가’의 경우를 일단 보류하면, 듀이는 교육에서 다루는 지식이 ‘농부나 선원, 상인과 의사’에 있어서 지식이 가지는 의미와 다르게 취급되고 있다는 점에 대하여 탄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과연 탄식의 대상이 되는가 하는 데에 있다. 농부나 선원, 상인과 의사는 실제적 결과를 얻기 위한 활동(즉, 실제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교육에서 다루는 지식이 과연 그런 실제적 활동에서 다루어지는 지식과 동일한 의미를 가져야 하는가?
사실상, 이 책에서 지식이나 교육의 문제를 논의하는 동안에 듀이가 사용하고 있는 예시는 대부분이 농부의 일(8:12), 타자치는 일(10:16), 전쟁 중의 사령관의 일(11:15), 의사의 일(13:16), 연이나 보트를 만들고 사냥하고 요리하는 일(15:9, 17, 18, 16:5), 목수나 판화가가 하는 일(25:8) 등, 실제적 활동에 관계되는 것들이다. (심지어, 도덕을 설명하는 데에도 듀이는 ‘도랑 건너뛰는 것’(26:3)을 예시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듀이의 예시 중에는 교육사태에서 흔히 다루어지고 있는 ‘이론적 지식’ — 실제와의 관련이 불분명하여, 듀이의 입장에서 보면 능히 ‘정보의 축적’이라고 볼 수 있는 지식 — 도 들어있다. 그러나 듀이의 생각에는 이런 이론적 지식과 실제적 지식(즉, 실제적 활동에 필요한 지식)의 구분이 용납되지 않는다. 듀이는 과학적 방법 또는 실험적 방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예컨대 ‘구두장이가 구두를 만드는 일’과 ‘돌멩이에 산(酸)을 붓는 것과 같은 과학 실험’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가령 돌멩이에 산을 떨어뜨려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는 것과 같이, 물리적 사물을 가지고, 또 그것에 대해서 행위를 한 결과로 지식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송곳에 밀납 칠을 한 실을 꿰어 가죽 조각에 찔러 넣는 일에서 지식이 나온다고 하는 것만큼 터무니없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과학 실험의 방법이 생겨남으로써 밝혀진 바에 의하면, 적절하게 통제된 조건하에서는 고립된 논리적 추론보다 이 [실험적] 방법이 지식을 얻는 더 올바른 방법이 된다는 것이다’(15:16). (이 예는 동일한 맥락에서 또 한 번(20:21) 사용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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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일은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물론, 구두장이가 밀납 칠을 한 실을 송곳으로 가죽에 찔러 넣을 때, 또는 화학자가 돌멩이에 산을 떨어뜨릴 때, 이들은 모종의 ‘관심’(tnterest)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관심’의 내용은 동일하지 않다. 구두장이의 경우에 관심은 한 켤레의 구두가 만들어지는 데에 있지만, 화학자의 경우에는 구두에 해당하는 그런 결과 — 실제적 결과 — 가 없다. 구두장이의 관심이 ‘실제적 관심’이라면, 화학자의 관심은 화학에 관한 지식을 발견하는 ‘이론적 관심’이다. 사실상, 이 두 가지 관심이 구분된다는 것은 바로 듀이 자신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인정되고 있다.
물에 관한 일상적인 개념은, 마신다든가 씻는다든가 농작물에 물을 댄다든가 하는 일상적인 용도에 있어서는 화학자의 개념보다 더 적절하다. 그러나 화학자가 물을 H₂O로 기술하는 것은 과학적 탐구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나 용도로 보아 일상적 개념보다 훨씬 우월하다. 그것은 물의 성질을 다른 사물에 대한 지식에 연결시킴으로써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그 지식이 어떻게 고출되었으며 사물의 구조에 관한 다른 지식들과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보여 준다. 엄밀하게 말하여, 물이 H₂O로 되어 있다는 것과 물이 투명한 액체로서 맛도 냄새도 없고 갈증을 없애준다는 것을 비교해 볼 때, 전자가 후자보다 물의 객관적 관계를 더 잘 나타내어 준다고는 말할 수 없다. 물이 무색, 무미, 무취의 액체라는 말은 물이 수소분자 두 개와 산소분자 한 개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객관적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사실을 밝히기 위한 과학적 연구를 한다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H₂O라는 관계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14:22).
다시 말하면, 물이 H₂O로 되어 있다는 과학적 지식은 농부가 농작물에 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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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양자는 전혀 별개의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H₂O 이외의 다른 과학적 지식은 농사짓는 데에 직접 도움이 된다는 식의 반론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이 단 한 가지 타당한 예라도 제시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예컨대 비료를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하여 특정 비료의 분자구조를 알 필요가 있겠는가? 도대체, 화학이라는 것은 예컨대 비료의 올바른 사용법을 가르쳐 주는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화학자가 있다면, 우리는 이 화학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문제는, ‘물은 H₂O로 되어 있다’는 과학적 지식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않는가, 그리고 그 ‘특별한 목적’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하는 데에 있다.
이 문제는 결국 ‘교육의 가치’에 관한 듀이의 견해에 집약되어 있다.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18장 ‘교육적 가치’는 그 내용은 고사하고 그 논리 전개의 방식에 있어서 이 책의 어느 장보다도 ‘문제가 많은’ 부분이다. 용어와 논리의 비일관성, 비철저성이 하도 심하여, 이 부분을 세밀히 읽는 독자는 누구든지, 듀이가 고의로 문제를 호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보다 예리한 분석력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이 장에 나타난 논리적 오류를 청천백일 하에 드러내어 주기를 바란다.) 간단하게 말하여, 듀이는 가치문제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구분인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와 ‘수단적 가치’(instrumental value)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내재적 가치’라는 말의 의미를, 흔히 하듯이,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지는 것’이라고 풀이한다면, [각주 4: 그러나 이 일반적인 해석은 ‘내재적 가치’의 규정으로서는 어이없이 부적절하다. R. S. Peters(이홍우 역), 『윤리학과 교육』, 교육과학사, 1980, ‘번역판 이해를 위한 해설’, ⅹⅸ-ⅹⅹⅲ 참조.] 듀이에게 있어서는 ‘모종의 실제적 결과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가치를 가지는 것’과 관련되지 않은 ‘그 자체의 가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교육의 목적에 관하여 논의하는 대목에서 듀이는 ‘목적을 가지는 것’을 ‘총으로 토끼를 쏘는 것’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컨대 한 마리의 토끼를 겨냥한다고 하자. 우리가 바라는 것은 똑바로 총을 쏘는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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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우리가 하고자 하는 활동이다. 이와는 달리, 우리가 바라는 것이 그 토끼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 토끼는 우리의 활동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활동 속의 한 요소이다. 우리는 토끼를 먹으려고 한다든지, 우리의 총 솜씨를 자랑하고 싶어 한다든지, 하여간 무엇인가를 하기 위하여 토끼를 쏘려고 한다. 그것 자체, 다른 것들과 유리된 그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것 —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다’(8:11). 또한, ‘농부건 의사건, 교사건 학생이건 간에, 다른 사람에게 가치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 경험과정의 부산물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의 직분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9:24). 여기에 비하여, 실제적으로 유용한 결과를 얻는 것과 관련되지 않는, 그야말로 순전히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지는’ 교과 또는 지식이 있다는 생각은, 듀이에 의하면, 오직 교육에서나 통용되는 신화이다(14:26 참조). 그리하여 ‘수단적 가치는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된다는 내재적 가치를 가진다’(18:21)는, 분명히 철학적 괴물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이 듀이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된다.
그럼에도, 듀이는 교육이 그 자체로서 목적을 가진다는 것을 강조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최근에 와서 교육 또는 교과의 ‘내재적 가치’를 주장한 R. S. Peters조차도 그렇게 보고 있다. [각주 5: R. S. Peters, ‘John Dewey’s Philosophy of Education,’ R. S. Peters (ed.), John Dewey Reconsidered, RKP, 1977, p. 107. Peters의 내재적 가치에 관해서는 R. S. Peters(이홍우 역), 『윤리학과 교육』 5장 참조.] 아마 그것은 ‘교육의 과정은 그 자체 이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지 않으며 교육 그 자체가 목적이다’(4:18)라든가, ‘성장에는 더 성장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이 없으며, 따라서 교육에도 더 교육받는 것 이외의 다른 고려사항이 없다’(4:22)는 듀이 자신의 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Peters와 같은 의미에서의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주장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여기서 ‘교육 그 자체’, ‘성장 그 자체’라고 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미 이론과 실제, 수단과 목적의 관련을 그 의미의 한 부분으로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적 활동과는 무관한 이론적 지식이 ‘내재적 가치’를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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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고 말하는 것은 ‘땀 흘려 일하는’ 계층과 ‘놀고 먹는’ 계층으로 사회가 분열되어도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명제(2)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질문이다. 가령, 듀이가 말한 바와 같이, 이론적 지식과 실제적 활동을 별개의 관심사로 추구하는 경향이 희랍의 사회적 조건의 산물임을 인정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바로 그 이유에서) 오늘날 그 두 가지를 별개의 관심사로 생각하는 것은 희랍에서와 같은 계급 분열을 인정하는 셈이 되는가?
약간만 생각해 보면, 명제(2)에 요약된 듀이의 견해는 길게 반박할 필요도 없는, 터무니없이 그릇된 견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견해의 밑바닥에는 ‘이론적 활동’에 대한 듀이의 편견이 깔려 있다. 듀이는 ‘이론적 활동’(더 정확하게는, ‘실제적 활동’과 분리된 이론적 활동)을 ‘여가를 즐기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19장). 말하자면, 유용한 실제적 결과를 얻는 것과는 관계없이 ‘한가하게’ 세상을 이해하는 일은 유한계층의 여가 활동이며, 이것은 누구에게나 ‘좋은 것’으로서 어느 특정한 계층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듀이는 희랍 사회가 이 원리를 어긴 원초적이고 전형적인 경우였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희랍에서는 소수의 특권층이 다수의 근육과 땀에 얹혀서 한가한 이론적 활동을 즐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선, 이 점부터가 의심스럽다. 듀이의 말대로라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가’를 즐기며, 유한계급의 ‘특권’을 누린 사람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과연 그러했는가? 백번 양보하여, 희랍 사회가 그러했다고 하자. 특히 학문적 논의에는 ‘인신(人身)에 관한’(adhominem) 질문이 금기라는 것을 잘 알지만, 이 경우에만은 듀이에게 ‘인신에 관한’ 질문을 해야 한다는 충동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듀이 자신은 어떠한가? 이 책과 그 밖의 수많은 책을 쓰는 동안, 듀이는 ‘여가’를 즐겼는가? 아니면, 그동안 듀이는 모종의 실제적 활동을 했고 ‘여가를 타서’, 또 그 실제적 활동을 한 결과로, 그 책을 썼는가? 가령, 듀이가 구두 가게에 가서 구두를 맞추었을 때, 그 주인이 ‘당신은 아무런 실제적 활동도 하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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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계층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말했더라면, 듀이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 모르기는 해도, ‘나도 당신에 못지않게, 또는 당신 이상으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론적 활동이 ‘여가 활동’이기는커녕, ‘죽을 고생’이라는 것이 어찌하여 듀이 자신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앞에서 한 차례 인용한 바와 같이, 듀이는, ‘참으로 민주적인 사회’는 ‘모든 사람이 유용한 봉사에 참여하고 모든 사람이 가치 있는 여가를 즐기는 그런 사회’(19:11)라고 말한다. 듀이가 보기에, 교육은 주로 실제와 관련 없는 이론적 지식을 가르침으로 해서, 유용한 봉사를 하는 사람들과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별개의 계층으로 분열된 사회적 조건을 반영하며 그것을 영속시킨다. 그러나 ‘유용한 봉사를 하지 않고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때, 듀이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가? 물론, 어느 사회에나 그런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유용한 봉사를 하는가 아니면 여가를 즐기는가 하는 것이 실제적 활동에 종사하는가 아니면 이론적 활동에 종사하는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으로 민주적인 사회’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종류의 활동’에 종사하며 ‘동일한 종류의 경험’을 하는 사회가 아니라, 이론적 활동과 실제적 활동이 각각 그 의미를 잃지 않으면서 정당하게 존중되는 사회이다. 듀이가 민주적인 사회를 그와 같이, 이론적 활동과 실제적 활동에 종사하는 계층의 구분이 없어진 상태로 규정한 것은 오직 그가 이론적 활동의 의미를 잘못 파악했거나 아니면 고의로 그것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명제(1)에 관계되는 문제가 ‘교육의 가치’에 관한 듀이의 견해로 집약된다면, 명제(2)와 관계되는 문제는 ‘직업교육’에 관한 그의 견해로 집약된다.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23장 ‘교육의 직업적 측면’은 18장 ‘교육적 가치’ 다음으로 ‘문제가 많은’ 장이다.) 이론과 실제의 괴리는, 구체적인 교육사태에서는 ‘직업교육’과 ‘교양교육’(또는 자유교육, 또는 인문교육)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이 문제에 대한 듀이의 견해는 요컨대, 일체의 교육은 직업교육이라는 것이다. 듀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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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가장 높은 수준에서의 고등교육을 보면 그것은 대학교수와 전문연구원을 위한 직업교육이다. 누가 보더라도 빈둥빈둥 노는 일, 문필업, 지도자의 자리를 위한 준비를 시켜 주는 일을 주로 하는 교육이 비직업적(非職業的) 교육이요, 심지어 특이하게 교양적인 교육이라고 생각되어 왔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묘한 미신이다. 책이건 신문 사설이건 잡지 기사건 간에 저작활동에 간접적으로 적합한 문학훈련은 특히 이 미신의 대상이 되고 있다. 수많은 교사와 저자가 전문화된 실제적 교육의 침범을 경계하고, 문화적, 인간적 교육을 옹호하는 글을 쓰고 주장을 펴고 하면서도 자신이 자유교육이라고 부르는, 자신이 받은 교육이 주로 현재 그가 종사하고 있는 그 직업을 위한 훈련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23:12).
이 말에 깔려 있는 미묘한 복선, 미묘한 감정적 뉘앙스를 완전히 파헤치는 것은 역자의 능력 범위를 벗어난다. 어쨌든, 여기에 나타난 ‘직업교육’이라는 말의 의미는 교육의 내용이나 성격을 지칭하는 통상적인 의미와는 다르다. 그리하여, ‘일체의 교육은 직업교육’이라는 듀이의 말은, 적어도 위의 말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누구나 교육을 받고 난 뒤에는 (그 교육의 내용이 어떠한가에 관계없이), 직업에 종사하게 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다. 이 명백한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듀이는, 교육의 내용에는, 특히 이론적 관심을 추구하는가 실제적 관심을 추구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성격상 하등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오히려, 듀이는 전통적으로 ‘직업교육’이 오직 실제적 관심과 결부된 것으로 경멸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을 시정하기 위하여 ‘인문교육’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내세우고 있다.
만약 ‘일체의 교육은 직업교육’이라는 듀이의 말이, 과거에 있어서나 오늘날에 있어서나, 사실과 부합한다면, 또한 만약, 듀이의 말과 같이, 이 책에서 취급한 이론과 실제, 여가와 노동 등의 대립이 궁극적으로 인문교육과 직업교육의 대립으로 귀착된다면, 듀이는 무엇을 그토록 걱정하는가? 오늘날 교육은 바로 듀이가 바라는 대로 되어 있지 않은가? 이렇게 보면, 이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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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와 대립,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여러 가지 대립을 해소하려는 듀이의 노력을 포인트를 잃고 만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의 밑바닥에는 ‘삶’에 관한 기본가정이 깔려 있다. 확실히 우리의 삶은 ‘총체’(totality)이며, 따라서 유일한 ‘실재’(reality)이다. 삶이 총체라고 하는 것은 곧, 삶은 이론과 실제(‘보는 것’과 ‘하는 것’)를 위시한 일체의 대립(즉, 모순)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다. 시각적으로 비유해서 말하자면, 우리의 삶은 이론과 실제가 씨줄과 날줄로 짜여 있는 천과 같다. 씨줄과 날줄의 어느 것을 보더라도, 올은 이 쪽 끝에서 저 쪽 끝까지 천의 전체를 덮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삶에는 이론과 실제가 천의 씨줄과 날줄처럼 공존하고 있다. 그 중의 어느 것도 다른 어느 것에 종속되거나 부차적인 지위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삶’이라는 총체를 이론이라는 씨줄로 파악하는가, 아니면 실제라는 날줄로 파악하는가 하는 것이다.
듀이는 어느 편인가? 듀이가 이론과 실제의 관련을 강조했다는 점에 비추어 그는 씨줄과 날줄을 한꺼번에 들어서, 그야말로 삶을 ‘총체’로서 파악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상의 고찰은 이와는 다른 해석을 지지한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실제’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듀이가 보는 ‘실재’(reality)는 ‘실제’(practice)이다. 1:21 참조.) 그리고 그에 의하면 이론적 활동은 실제적 활동의 ‘시녀’ 정도로만 취급된다. 그것은 실제적 활동이 이론적 활동의 ‘시녀’로 취급되는, 그 반대의 경우에 못지않게 삶을 편파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듀이가 보는 삶이 이런 것이기 때문에, 그의 철학에서는 세상을 지적으로 이해하려는 ‘죽을 고생’이 삶과 교육에서 차지해야 할 응분의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다. (이 점에 비추어 보면, 이 책 첫머리의 ‘돌이 부서지는’, 일견 뻔한 말이 엄청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생각해 보라. ‘돌과 사람의 차이는 세상을 지적으로 이해하는가 않는가에 있다’는 말은 ‘돌과 사람의 차이는 주위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가 아닌가에 있다’는 말에 못지않게 옳다. 그러나 앞의 말을 『민주주의와 교육』의 첫머리에 내세운다는 것은 듀이의 철학으로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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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듀이가 ‘삶은 지적, 도덕적 성장’(23:8)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한편 놀라면서도 또 한편, 그 ‘지적, 도덕적 성장’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4> 마지막으로, ‘듀이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생각해 보자. 이 질문에 대하여, 그는 몇 년에 태어나서 몇 년에 세상을 떠났다든지, 어디서 태어났고 어디서 교육을 받았다든지 하는 식의 대답은 우리가 바라는 대답이 아니다. [각주 6: 듀이의 생애를 가장 자세하게 다룬 책은 아마, George Dykhuizen, The Life and Mind of John Dewey,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973일 것이다. 또한, 앞에서 인용한 ‘From Absolutism to Experimentalism’은 듀이 자신의 학문적 생애를 기술한 자서전적 논문으로서 이 방면의 중요한 참고자료이다.] 우리가 바라는 대답에 비추어 보면, 그 질문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그 질문에 대답하자면, ‘듀이는 상식에 철학의 거창한 옷을 입한 사람’이라는 대답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상식에는 상식에 알맞은 옷이 있고 철학에는 철학에 알맞은 옷이 있다. 상식이 옳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철학의 힘을 빈다는 것은 확실히 어색하다고 생각된다.
듀이의 경우에 상식에 입한 철학의 성복(盛服)은 ‘이원론’(dualism) 대 ‘단속성’(continuity)이라는 옷이다. (이원론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용어는 ‘일원론’(monism)이겠지만, 듀이는 이 용어를 쓰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는 ‘이원론’을 ‘분리’(separation), ‘대립’(opposition), ‘고립’(isolation)등과 섞바꾸어 쓰고 있다.) 듀이는 이론과 실제를 위시하여, 몸과 마음, 주관과 객관, 개인과 사회, 마음과 세계 등, 철학에서 다루어 온 일체의 이원론적 대립을 ‘극복’한 ‘종합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듀이가 극복하려고 한 이원론적 대립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아는 것’과 ‘하는 것’, 또는 이론과 실제의 대립이다. 25:8 참조.) 그러한 듀이도 ‘이원론’과 ‘단속성’의 대립만은 끝까지 철두철미하게 견지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면, 이원론과 단속성의 대립은 듀이가 극복하려고 한 여러 대립들의 동열(同列)에 들어 있는, 그 여러 대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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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 대립들의 존폐가 달려 있는 ‘절대수준의’ 대립, 즉 ‘형이상학적’ 대립이다.
이 책에서 ‘이원론’이라는 용어는 그 반대되는 ‘단속성’과 마찬가지로 광범하게, 또 다양한 맥락에 사용되고 있다. 듀이가 말하는 ‘이원론’(또는 일반적으로 ‘이원론’이라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리고 또한 이원론을 극복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은 별도로 고찰해야 할 어려운 문제이다. 다만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이론적 활동으로서의 철학은 개념적 구분을 그 생명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비하여, 상식의 세계에는 개념적 구분 또는 이론적 구분이라는 것이 불필요하다. 상식의 세계는 희랍 철학에서의 ‘경험’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좁은 실제적 관심 — 우리가 바라는 실제적 결과를 얻는 일 —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이다. 이론과 실제를 관련지음으로써, 아마 듀이는 상식인들에게도 이론적 지식의 혜택 — 이론적 활동을 겉으로만 보는 사람에게는 다르게 보일지 모르나, 그것에 다소간 깊이 입문한 사람은 누구든지, 이 혜택은 ‘혜택’보다는 ‘형벌’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안다 — 을 맛보도록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상식인들에게 이론적 지식의 ‘혜택’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론적 지식을 그야말로 ‘이론적 지식으로서’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만약 듀이처럼, 이론적 지식의 성격을 바꾸어 버린다면, 여기서 생기는 결과는 듀이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상식인들의 좁은 개념을 더욱 부채질하는 셈이 된다. 상식인들은 ‘남에게 유용한 봉사를 하고 여가를 즐기는’ 그들의 생활방식에 안심하고 주저앉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혹시 듀이는, 개념적 구분을 없애는 데에, 개념적 구분을 생명으로 삼는 철학을 동원하려고 한 것은 아닌가? 이때 철학은, 그것이 부정해야 할 상식을 정당화하는 데에 잘못 사용되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전적으로 그릇되다고 볼 수 없는 것은, 그것이 학문 또는 이론적 활동에 관한 듀이의 견해와 일관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듀이의 견해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철학의 중요한 과제로 생각되어 온 이론적 구분은, 모종의 중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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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적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 한, 무의미하다(24:14-15). 이것은 단순히 앞의 명제(1)을 철학의 경우에 맞게 고쳐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