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世祖 민안인(閔安仁) 중직대부(中直大夫-종3품) 교서감지제(校書監知製敎-정3품)
민칭도(閔稱道)시조(始祖) → 민세형(閔世衡) → 민의(閔懿) → 민영모(閔令謀) → 민식(閔湜) → 민명화(閔命莘) → 민휘(閔輝) → 민지(閔漬) → 민상정(閔祥正) → 민선(閔璿) → 본인
○ 1343(고려 충혜왕 4)년 ∼1398(태조 7)년 56세에 卒
○ 자(字)는 자복(子復), 고려말~조선초 문관
○ [고려사마] 공민왕(恭愍王) 14년(1365) 을사(乙巳) 진사시(進士試) 1등(一等) 1[장원(壯元)]위 합격
○ [고려문과] 1374(공민왕 24)년 급제
○ 공은 중직대부(中直大夫-종3품) 교서감지제(校書監知製敎-정3품), 평양교수(平壤敎授)를 지냈으며, 재직중 56세에 병사하였다, 성품이 근면하면서도 질직돈후(質直敦厚)하였고, 고려말에는 지제고에 기여하였으며, 조선개국초에는 유학진흥과 의례의 정비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권근(權近)과 교우가 깊었다,
○ 증조부는 추성수정보리공신 삼중대광 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推誠守正保理功臣三重大匡僉議政丞右文館大提學)을 지낸 판첨의부사 여흥부원군(判僉議府事驪興府院君) 민지(閔漬). 조부는 첨의부(僉議府) 찬성사(贊成事-정2품, 평장사(平章事)의 후신)를 지낸 민상정(閔祥正)이다. 아버지는 봉익대부(奉翊大夫-종2품) 판도사(版圖司)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에 증직된 민선(閔璿)(閔璿)이다,
○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전주최씨(全州崔氏)로, 찬성사(贊成事),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최비일(최毗一)의 증손녀이고, 첨의참리(僉議參理-조2품)를 지낸 최문도(崔文度) 양경공(良敬公)의 딸이다, 부인은 숙인(淑人) 전의이씨(全義李氏)로, 병부시랑(兵部寺郞) 이도손(李道孫)의 딸이다,
○ 형제는 4남 3녀, 7남매이다, 공이 첫째 장남이고, 둘째 차남은 고려말 지익주사(知益州事)를 지낸 민유의(閔由誼) 중현조이며, 셋째 삼남은 사농시(司農寺)의 종사품 벼슬 사농소경(司農少卿)을 지낸 민공생(閔公生) 소경공파(少卿公派)파조이고, 넷째 장녀는 정언(正言)을 지낸 이존오(李存吾)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섯째 차녀는 찬성사(贊成事-정2품)를 지낸 왕복명(王福命)에게 출가하였고, 여섯째 삼녀는 조선조 태조(太祖)의 넷째 아들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에게 출가하였으며, 민도생(閔道生)이 일곱째로 막내이다,
○ 자녀는 2남1녀, 3남매를 두었다, 장남은 공조 정랑(工曹正郞-정5품)을 지낸 민진(閔進)이고, 차남은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종5품), 사헌부(司憲府)의 정오품(正五品) 관직 사헌지평(司憲持平)을 지낸 민소(閔逍), 딸은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해주최씨(海州崔氏) 최관(崔關)에게 출가하였다,
○ 1365(공민왕 14)년 10월 전리판서(典理判書) 한천(韓蕆) 주재하의 국자감시(國子監試)에서 1등으로 합격, 1374(공민왕 24)년 급제하고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에 보직, 그뒤 고려대를 통하여 14년간이나 관직(館職)을 띠고, 임금의 조서(詔書), 교서(敎書) 등의 글을 지어 바치는 일을 맡은 지제고(知制誥)에 참여하였다.
1377(우왕 3)년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 예의총랑(禮儀摠郞-정4품)을 거쳐 전법사(典法司) 전법총랑(典法摠郞-정4품, 시랑의 후신)이 되었다가 권귀(權貴)의 뜻을 거슬려 파면, 4년 뒤 군부사(軍簿司) 군부총랑(軍簿摠郞-정4품)으로 복직, 고려말에는 나라의 재정을 담당한 삼사(三司)의 좌,우윤(左右尹)을 지냈다.
1392년(태조 1) 사은사(謝恩使)인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정2품) 우인렬(禹仁烈)의 부사가 되어 명(明)나라를 내왕, 귀국 즉시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종3품, 사성 전신)에 제수되었다. 곧 교서감감(校書監監)을 거쳐, 평양교수(平壤敎授)로 파견되었다. 문묘(文廟)를 수리하고, 학규(學規)를 엄히 하면서 훈회(訓誨)에 전력하는 등 유학진흥과 유교의례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1395(태조 4)년 서울에 태묘(太廟)가 세워지자 전고(典故)에 밝음으로 해서 왕명으로 악기(樂器)를 정리하고 제도를 바로잡아 대례(大禮)를 완성했다. 많은 학자들에 일고(逸稿)를 정리 수집하여 1백여질(帙)의 책을 역으며 국왕의 친관(親祼: 親祭)을 위한 대례(大禮)의 완비에 공헌하였다. 병이 나자 곧 퇴직하여 후진을 교육하면서 여러 학자들의 일고(逸稿)를 수집하여 정리하다가 완성을 보지 못하고 56세로 병사했다, 중직대부(中直大夫-종3품) 교서감지제(校書監知製敎-정3품) 역임. 성품이 근면하면서도 질직돈후(質直敦厚 : 질박 정직하면서 성품이 너그러움)하였고, 고려 말에는 제고에 기여하였으며, 조선개국 초에는 유학진흥과 의례의 정비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권근(權近)과 교우가 깊었다,
○ 참고문헌 - 고려열조등과록(高麗列朝登科錄),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祖實綠),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고려사(高麗史), 민안인묘지명(閔安仁墓誌銘), 여흥민씨족보2002년판,
○ 조선실록 일지 ○
태조 7년(1398) 3월 7일. 간관(諫官)이 전 교수관(敎授官) 민안인(閔安仁)을 탄핵하였다. 안인(安仁)은
일찍이 제 집에 있는 《강목통감(綱目通鑑)》을 전조(前朝)의 세자(世子)에게 바쳤었는데, 전하여져서 지금의 세자부(世子府)에 있으므로, 안인(安仁)이 환자(宦者) 강인부(姜仁富)에게 부탁하여 다른 책과 바꾸어 내려고 하였다. 세자가 두 가지 책을 정자(正字) 우습유(右拾遺) 황희(黃喜)에게 보이니, 황희가 세자에게 사뢰기를, “새 책이 묵은 책만 못합니다.” 하였으므로, 세자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사수(思修)와 희(喜)가 동사랑(同舍郞)에게 말하여 탄핵한 것이었다.
태종 3년(1403) 1월 29일. 민진(閔進)에게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제수하였다. 진(進)이 이때에 응봉사 장무
(應奉司掌務)가 되어 안인(安印)의 일로 인해 표문(表文)을 받들고 들어왔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누구인가?” 하였다. 좌대언(左代言) 이승상(李升商)이 대답하기를, “고(故) 민안인(閔安仁)의 아들 진(進)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보고 의심하였다. 옛날에는 얼굴빛이 맑고 야위었었는데, 지금은 살이 쪘다. 지금 무슨 벼슬을 받았는가?” 하니, 부유후(副留後) 당성(唐誠)이 대답하기를, “전 잡단(雜端)입니다.” 하였다. 곧 명하여 공조 정랑을 제수하였다.
○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인 양촌 권근(權近)(1352~1409)의 시문집인 양촌집(陽村集) 제39권 묘지류(墓誌類)에는 여흥 민氏 민안인(閔安仁)의 묘지명(墓誌銘)인 유명조선국 중직대부교서감지제교충예문춘추관편수관(中直大夫校書監知製敎充藝文春秋館編修官) 민공(閔公) 묘지명(墓誌銘) 병서(竝序)가 실려 있다. 이 내용 속에 민안인(閔安仁)이병부시랑(兵部侍郞) 이도손(李道孫)의 딸에게 장가 들어 2남1녀를 낳았으니, 맏아들 진(進)은 과거에 급제하여 시헌감찰(司憲監察) 벼슬에 있고, 둘째 아들 소(逍)는 진사(進士)이며, 딸은 예조총랑(禮曹摠郞) 최관(崔關)에게 시집 갔다.
○ 해주최씨 대동보 ○
13世 諱 關 (관), 字는 자고(子固).號는 월파정(月波亭).호군(護軍)을 지낸 諱 [ 언 ]의 외동아들, 고려 우왕 8년(1382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은 예문관 직제학(藝文館 直提學),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냈다. 墓所는 현(現) 충남(忠南) 홍성군(洪城郡) 홍성읍(洪城邑) 남장리(南長里)에 합봉(合封)하였고, 배위(配位)는 여흥 閔씨로 부친은 삼사좌윤(三司左尹) 민안인(閔安仁)이고, 조부는 판서(判書) 민 선(閔璿)이며 고조는 문인공(文仁公) 민 지(閔漬 :號 默軒 ).외조는 이도손(李道孫 :전의인)이다.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 :
① 조선시대 성균관(成均館)에서 교회(敎誨)하는 일을 맡아보던 종삼품(從三品) 관직으로 1401년(태종 1)에 사성(司成: 從三品)으로 고쳤다.
② 조선시대 성균관의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으로 정원은 1원이다. 위로 지사(知事: 正二品)가 1원으로 대제학(大提學)이 정례대로 겸직하며, 동지사(同知事: 從二品) 2원, 대사성(大司成: 正三品) 1원이 있고, 아래로 사성(司成: 從三品) 1원, 사예(司藝: 正四品) 2원, 사업(司業: 正四品) 1원, 직강(直講: 正五品) 4원, 전적(典籍: 正六品) 13원, 박사(博士: 正七品), 학정(學正: 正八品), 학록(學錄: 正九品), 학유(學諭: 從九品) 각 3원이 있다. 대사성 이하 성균관에 소속된 관원을 총칭하여 관직(館職)이라고 하였다.
1658년(효종 9)에 설치하였으며,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이 뛰어난 사람으로 제수(除授)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부터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까지 잉대(仍帶)하였다. 잉대라 함은 종전의 직명(職名)을 띠는 것을 말한다.
지제교(知製敎) :
조선시대 국왕의 교서(敎書) 등을 작성하는 일을 담당한 관직이다.
고려시대의 지제고(知制誥)를 고친 것으로, 조선 전기에는 승정원(承政院)‧사간원(司諫院)의 관원으로써 임명한 내지제교(內知製敎)와 다른 문관 10명으로 임명한 외지제교(外知製敎)로 구분하였다.
세종 때 집현전(集賢殿)이 설치되면서 학사들이 외지제교를 겸직하다가 1430년(세종 12)에 집현전의 녹관(祿官)을 내지제교, 다른 문관 10명을 외지제교로 삼았다. 그 뒤 집현전을 폐지하고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면서 부제학(副提學: 正三品) 이하 부수찬(副修撰: 從六品)까지 지제교를 겸하게 하고, 따로 6품 이상의 문관을 뽑아 지제교를 겸직하게 하였다. 전자를 내지제교, 후자를 외지제교라고 불렀다.
아울러 규장각의 직제학(直提學: 正三品) 이하 관원은 전‧현직을 막론하고 외지제교를 겸직하게 하였다.
중직대부(中直大夫) :
조선시대 종삼품(從三品) 동반(東班) 문관(文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종삼품의 상계(上階)로서 중훈대부(中訓大夫)보다 상위 자리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후로 문관에게만 주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종친(宗親: 임금의 4대손까지의 친족)과 의빈(儀賓: 임금의 사위)에게도 이 품계를 주었다.
해당 관직으로는 종친부(宗親府)‧돈령부(敦寧府)‧봉상시(奉常寺)‧사복시(司僕寺)‧군기시(軍器寺)‧사섬시(司贍寺)‧군자감(軍資監)‧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사역원(司譯院)‧선공감(繕工監)‧사도시(司䆃寺)‧사재감(司宰監)‧제용감(濟用監)‧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예빈시(禮賓寺)의 부정(副正), 의빈부(儀賓府)의 첨위(僉尉), 규장각(奎章閣)의 직각(直閣), 사헌부(司憲府)의 집의(集議), 사간원(司諫院)의 사간(司諫), 홍문관(弘文館)의 전한(典翰), 성균관(成均館)의 사성(司成), 춘추관(春秋館)의 편수관(編修官), 승문원(承文院)의 참교(參校), 통례원(通禮院)의 상례(相禮)‧익례(翊禮), 사옹원(司饔院)의 제거(提擧), 팔도(八道)의 도호부사(都護府使), 숭의전(崇義殿)의 사(使) 등이 있었다.
직각, 편수관은 모두 예겸(例兼)하였다. 처(妻)에게는 숙인(淑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편수관(編修官) :
조선시대 춘추관(春秋館)의 정삼품(正三品)에서 종사품(從四品)까지의 당하관(堂下官)으로 역사의 기록과 편찬을 담당하던 사관(史官)이다.
홍문관(弘文館)의 직제학(直提學: 正三品)‧전한(典翰: 從三品)‧응교(應敎: 正四品)‧부응교(副應敎: 從四品)와 의정부(議政府)의 사인(舍人: 正四品)과 사헌부(司憲府)의 집의(執義: 從三品)‧장령(掌令: 正四品)과 승문원(承文院)의 판교(判校: 正四品)와 종부시(宗簿寺)의 정(正: 正三品)이 겸직하였으며, 경외(京外)의 삼사품(三四品) 관직은 춘추관에서 임금의 재가(裁可)를 받으면 겸임하였다.
고종 즉위 초에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이 편수관을 겸하는 것은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