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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 문화 바로보기 30 · 마지막회 王建의 후삼국통일 배후, 禪僧세력 |
영각산사와 여엄 | ||
최완수 <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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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왕의 자손’ 왕건의 탄생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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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용왕은 장보고의 청해진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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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들과의 인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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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 세력과의 합작품, 나주 정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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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의 등장 | ||
효공왕 7년(903)에 왕건이 나주 정벌에 성공하여 청해진 세력을 재건하고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자 중국에 유학하고 있던 선사들이 속속 왕건 선단에 의탁해 이곳 나주지방으로 귀국하기 시작한다. 형미는 가지산문(迦智山門) 제3대 조사인 보조선사 체징의 문인으로 그 본사가 장흥 가지산 보림사였고, 경유는 동리산문(桐裏山門)의 개산조인 적인(寂忍)선사 혜철(慧徹, 785∼861년)의 손상좌로 곡성 태안사(泰安寺)가 그 본사다. 그러니 견훤과의 대결에서 이들 지역 민심의 동향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으므로 왕건이 이들의 귀국을 재촉하였을 것이다. 그 다음 대경대사 여엄 역시 효공왕 13년(909) 7월에 왕건세력 판도인 무주의 승평(昇平, 현재의 승주)으로 귀국하는데, 이는 징효대사의 부도가 있는 동림사 부근이다. 여엄은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인 낭혜(朗慧)화상 무염(無染, 800∼888년)의 막내 제자다. 그래서 왕건은 일찍부터 신라 왕실의 비호를 받아 구신라 지역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세력을 떨치고 있는 성주산문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여엄으로 하여금 충주의 월악산을 거쳐 영주로 해서 기주(基州, 현재의 豊基) 소백산으로 들어가 선문을 개설케 한다. 그곳 민심을 왕건쪽으로 기울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여엄은 이곳 실력자인 기주 제군사(諸軍事) 상국(上國) 강훤(康萱)의 귀의를 받으며 선지를 펼쳐나가면서 기주 일대를 장차 왕건에게 투항하도록 유도해 간다. 그래서 왕건은 즉위하자마자 여엄대사를 징소하여 스승의 예로 대접하고 양주 지평(砥平) 용문산(龍門山) 보리사(菩提寺, 현재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 보리사터)에 머물게 하였다. 그래서 여엄대사는 이곳 보리사에 주석하여 선풍을 드날리다가 태조 13년(930) 2월17일에 법당에 앉아서 입멸하니 세수 69세, 승랍 50이었다. 이에 고려 태조는 국사(國師)의 예로 장례지내게 하고 대경(大鏡)대사라는 시호와 현기지탑(玄機之塔)이라는 탑명을 내리고 탑비를 건립하도록 명령하여 보리사 경내에 이를 세우게 하니, 열반에 든 지 9년이 지난 태조 23년(939)에 가서야 이를 모두 완성해낸다. <보리사 대경대사 현기탑(菩提寺 大鏡大師 玄機塔)>(도판 5)은 본래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延壽里) 보리사(菩提寺) 터에 남아 있었으나 1960년 대에 이화여대 박물관으로 이관되어 그곳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대경대사 현기탑>은 신라시대 부도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국보 제57호 능주 <쌍봉사 철감선사탑>(제 25회 도판 9) 양식을 기준으로 삼아 이를 대담하게 변형시킨 독특한 양식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기단부가 상대·중대·하대로 나누어지는 원칙은 일반 부도와 다름이 없다. 그런데 중대의 구성이 복잡하여 일반 부도와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마치 <개선사지 석등>(제29회 도판 13)의 중대석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복잡하니 3단으로 나누어 세 덩어리의 다른 돌로 구성해 놓았다. 마치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제29회 도판 1) 하대석같이 생긴 하단 받침에 <개선사지 석등>의 중대석 모양의 중단을 올려놓았는데 그것은 하단을 두쪽 맞붙여 놓은 듯한 모습이기도 하다. 상단은 한 돌로 되었으되 다시 2층 구조로 되어 있는데 아래층에는 가릉빈가가, 위층에는 비천상이 조각되면서 모두 구름 속에 파묻혀 있다. 하단은 하엽(荷葉; 연잎) 속에 사자상이 8면으로 장식된 형태이니 이런 유례는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상대인 연화대도 앙련(仰蓮)으로 표현하면서 그 씨방은 다시 연잎으로 윗면을 덮어내리게 하였다. 그리고 씨방의 8모에 세운 모서리 기둥에는 연잎 줄기를 세워 이를 상징하였다. 중대석이 복잡한 결구로 높아졌기 때문에 탑신석의 높이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모 탑신석의 각 모서리에 기둥을 새기고 앞·뒷면에 앞·뒷문을 나타내기 위해 자물쇠를 돋을새김했으며 나머지 6면의 공간에는 6구의 신장입상(神將立相)을 돋을새김해 놓았다. 옥개석은 기왓골과 연목의 표현이 분명하고 연목 안 처마 내부에는 비천상을 돋을새김하여 <쌍봉사 철감선사탑>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상륜부는 수연(水烟) 형태의 보주만 남아 있는데 아마 <쌍봉사 철감선사탑>의 상륜부와 같았으리라 생각된다. 보물 제361호인 <보리사 대경대사 현기탑비(菩提寺 大鏡大師 玄機塔碑)>(도판 6)도 역시 양평 용문산 보리사터에 남아 있던 것을 1915년경에 일제가 경복궁 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겨와 지금은 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귀부와 이수는 백색이 선명한 치밀한 석질의 화강암이나 비신은 오석(烏石)이다. 조각 기법이 섬세하고 날카로운데 재료의 한계 때문이었는지 귀부의 크기가 이수의 크기에 비해 작아 보이는 것이 흠이다. 이수의 운룡문 조각은 입체성이 돋보여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제27회 도판 6)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입체성은 그보다 떨어지고 조각 기법만 더욱 날카로워져서 전액판을 두고 기세를 다투는 두 마리의 용이나 이수의 네 모서리에서 머리를 치켜든 네 마리의 용이 모두 코브라처럼 사납게만 느껴진다. 목을 길게 표현한 것도 코브라처럼 느껴지게 하는 요소일 것이다. 비문은 최언위(崔彦, 878∼944년)가 지었다 했는데 그때 그의 벼슬은 태상 검교상서좌복야 겸어사대부 상주국(太相 檢校尙書左僕射 兼御史大夫 上柱國)이라 했다. 62세로 정승의 반열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글씨(도판 7)는 구양순체(歐陽詢體)의 대가인 이환추(李桓樞)가 썼는데 모질고 굳세기가 구양순보다 더 심하다. 대경대사 여엄은 김인문의 후손으로 남포에 내려와 살던 왕족이다. 경문왕 10년(870)에 9세 나이로 홍산 무량사(無量寺) 주종(住宗)법사에게 출가하여 화엄경을 배우고, 19세에 비구계를 받고 나서는 숭엄산 성주사로 가서 광종(廣宗)대사, 즉 낭혜화상 무염의 문하에 입실(入室)한다. 이때 무염화상은 벌써 81세의 극노인으로 경문·헌강 양대 왕사를 거치면서 성주사와 심묘사를 오락가락하며 지내고 있었다. 대경대사 여엄이 나이로 보아서는 증조부뻘이나 되는 무염화상 문하에 어떻게 직제자로 입실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아마 같은 태종 무열왕계의 왕손으로 일가가 되었던 인연이 크게 작용했을 듯하다. 그러나 무염화상에게 입실한 지 불과 8년 만에 무염화상이 입멸하자(888년) 여엄은 사형(師兄)인 심광(深光)화상이 주석하고 있는 덕유산 영각사(靈覺寺)로 자리를 옮겨 심광화상을 사사(師事)한다. 이로 보면 심광화상도 아마 내포 출신의 계림(경주) 김씨가 아닌지 모르겠다. 여엄대사는 30세 때인 진성여왕 5년(891) 전후한 시기에 입조사(入朝使)의 선편에 의탁하여 당으로 건너가서 홍주(洪州) 운거산(雲居山) 도응(道膺, ?∼902년)화상의 인가(印可)를 받는다. 그러고나서 효공왕 13년(909) 7월에 무주 승평으로 귀국했다.
그해가 경문왕 10년(870)이라 하니 왕건 태조보다 7세 연장인 셈이다. 12세 때인 헌강왕 7년(881)에 가야갑사(迦耶岬寺), 즉 갯굴절의 덕량(德良)법사에게 출가하여 반년 동안에 삼장(三藏)을 모두 탐독하고 스승으로부터 “유가(儒家)의 안회(顔回)요 석문(釋門)의 아난(阿難)”이라는 칭찬을 받을 만큼 신동의 기질을 발휘했다. 그래서 헌강왕 원년(886)에는 17세의 빠른 나이로 본사의 도견(道堅)율사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는다. 어떻든 내포의 가야산 가야사로 출가해 비구계를 받은 다음 이엄대사는 이곳에서 화엄학을 전공하는 화엄학도로 10여 년간 수행 정진했던 듯하다. 그런데 성주산문이나 가지산문 등 이곳 내포지방에서 발흥하여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남종선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던지 27세 되던 해인 진성여왕 10년(896)에는 당나라 입조사(入朝使) 최예희(崔藝熙)의 선편에 의지하여 당나라로 건너간다. 이 선단 역시 왕건의 지휘를 받고 있었을 테니 이엄 같은 천재 승려가 왕건이 쳐놓은 인재 사냥 그물에서 벗어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왕건 선단의 안내인을 따라 운거 도응에게 인도되어 6년 동안 수학하면서 사무외대사의 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운거대사로부터 그가 32세 나던 해인 효공왕 5년(901)에 다음과 같은 말로 인가를 받는다. “도(道)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니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힐 수 있다. 동산(東山)의 종지(宗旨)가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으므로 법의 중흥은 오직 나와 너에게 있을 뿐이니 내 도는 동쪽으로 가게 되었다. 이를 생각하여 이 속에 있도록 하라(道不遠人, 人能弘道. 東山之旨, 不在他人, 法之中興, 唯我與汝, 吾道東矣. 念玆在玆).” 운거대사는 이렇게 이엄대사를 인가하고 전법한 뒤에 가을부터 미질(微疾)을 보이다가 그 다음해 정월 초사흘에 열반에 들고 만다. 1500명의 문하대중 가운데서 이엄대사를 선택하여 의발(衣鉢)을 전수한 셈이다. 이에 이엄대사는 운거 법통의 적자(嫡子; 적통을 계승한 아들)를 자부하며 운거대사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중국 천지사방을 편답 순례한 다음 효공왕 15년(911)에 귀국길에 오른다. 바로 전해인 효공왕 14년(910)에 후백제왕 견훤이 왕건으로부터 제해권을 빼앗으려고 3000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나주를 포위 공격하다가 나주 포구에서 왕건이 거느린 수군에게 대패당하여 작은 배로 겨우 목숨을 부지해 달아나고, 후백제측 수군대장으로 수달이란 별명을 가진 압해도 출신 능창(能昌)이 사로잡혀 궁예에게 끌려가 처형당하는 일이 있었기에 이엄이 돌아오는 뱃길에는 왕건의 수군 선단만이 바다 위에 존재하는 평온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일찍이 김유신 장군의 후손으로 임나 왕족이라는 신김씨(新金氏) 진경(眞鏡)대사 심희(審希, 855∼923년)를 초빙하여 현재의 창원군 상남(上南)면 봉림리에 봉림사(鳳林寺)를 짓고 봉림산문을 개설하게 하는 등 혁신 이념인 남종선을 받아들이는 데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에 사굴산문(窟山門)의 제2대 조사인 낭공(朗空)대사 행적(行寂, 832∼916년), 내포 출신 계림 김씨인 가지산문의 진공(眞空)대사 혜운(慧運, 855∼937년), 역시 계림 김씨인 진공(眞空)대사 충담(忠湛, 869∼940년) 등이 이를 찾아가서 그의 외호 아래 선문을 개설하기도 한다. 이에 부담을 느낀 왕건은 이엄을 이곳으로 보내어 이를 회유해 들이려 했던 듯, 이엄은 왕건의 남쪽 해상 근거지인 나주 회진(會津)으로 귀국하고 나서 그 길로 김해부로 지사 소율희를 찾아간다. 소율희는 이엄이 승광산(勝光山)에 머물도록 절을 지어주는데, 이엄은 이곳이 경치는 아름답지만 후백제와의 접경지역이라 머문 지 4년만에 이곳을 떠나고자 한다. 그러나 바로 떠나지 못하고 12년 동안이나 머물러 있다가 고려 태조 10년(927) 정해년에 가서야 상주로 나와서 준잠(遵岑)에 이른다. 준잠이 영동(永同)군의 남쪽이고 영각산(덕유산)의 북쪽이라 했으니 아마 김천 황학산에 해당할 듯한데, 이엄이 김해지방을 떠날 결심을 한 것은 소율희를 회유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가 떠나고 나자 왕건 태조는 4월에 해군 장군 영창(英昌)과 능식(能式) 등으로 하여금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강주(康州, 현재 晋州)를 정벌하게 한다. 그리고 8월8일에는 왕건 태조가 직접 강주를 순행하고 돌아온다. 그러자 견훤은 이에 맞대응하기 위해 이해 11월에 신라 왕경으로 쳐들어가 왕경을 함락하고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며 후비를 능욕한 뒤 약탈을 자행하고 돌아온다. 이 급보를 접한 왕건 태조는 견훤을 응징하기 위해 친히 군사 5000을 거느리고 팔공산 동림수(桐林藪)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회군하는 견훤군을 요격하려 한다. 그러나 이곳 민심이 견훤쪽으로 기울어 견훤에게 이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왕건 태조는 5000 군사를 모두 잃는 대참패를 당하고 신숭겸이 왕의 의복을 바꿔 입고 대신 죽는 사이에 겨우 목숨을 구하여 빠져나오게 된다. ‘고려사(高麗史)’ 권1 태조 세가(世家) 태조 10년 정해조 등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런데 정조 즉위년(1775)에 급고자(汲古子) 수우(守愚)가 지은 ‘경상도 금산군 황학산 직지사 사적(慶尙道 金山郡 黃鶴山 直指寺 事蹟)’에 의하면 이때 왕건 태조는 황학산 직지사 근처에 능여(能如)라는 선사의 도움으로 겨우 사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해 초봄에 김해 부근 승광산을 떠나 영각산 북쪽 영동 남쪽의 준잠에 머물렀다는 이엄대사가 바로 능여선사는 아닐까. 이엄이 가야의 고토인 남쪽 김해, 진주지방을 떠나서 북상하면서 상주를 거쳤다거나 그가 머물렀다는 준잠이 영각산 북쪽에 있다고 한 것 등은 모두 성주산문의 별원인 영각산사와 심묘사를 연상시킬 수 있는 일이어서 그 절들을 거쳤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엄도 여엄처럼 가야사에서 화엄학을 이수한 뒤에 혹시 성주산문으로 입문해 갔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면 운거문하의 사무외대사 중 둘째 형인 여엄대사와의 반연으로 이 성주산문 별원을 거치면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거처를 마련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성주산문의 도반들은 거의 모두 내포 출신의 고향 선후배들이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도움으로 영각산(덕유산) 북쪽과 영동 백화산 심묘사 남쪽 사이에서 가장 높은 산인 황학산 직지사 부근에 터 잡고 있다가 왕건 태조가 위기에 몰리자 이를 적극 도와 벗어나게 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왕건 태조는 다음해인 태조 11년(928) 무자 2월에 전(前) 시중(侍中) 권열(權說)과 태상(太相) 박수문(朴守文)을 특별히 파견하여 이엄대사를 초빙해 올리고, 왕궁 곁에 지은 내불당(內佛堂)인 사나내사(舍那內寺)의 주지로 머물기를 청하며 왕사로 책봉한다. 왕건 태조가 52세, 이엄대사가 59세 되던 해의 일이다. 이때 왕건 태조는 왕사 이엄에게 삼한이 분열된 지 이미 36년 가까이 되었으나 아직 통일하지 못하여 서로 살상을 계속하고 있는데 자신은 일찍이 불계(佛戒)를 받았으므로 속에서 자비심이 일어나서 도적을 구경만 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다가 결국 몸이 위태롭게 되는 화를 당하기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삼한 통일의 방법을 묻는다. 이에 이엄왕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대저 도(道)는 마음에 있고 일에 있지 않으며, 법(法)은 자기에게서 말미암지 남에게서 말미암지 않습니다. 또 제왕(帝王)과 필부(匹夫)는 닦을 바가 서로 다르니 비록 군대를 이끌고 가더라도 또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왜 그러냐 하면 임금은 사해(四海)로 집을 삼고 만민(萬民)으로 자식을 삼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지 않아야 하나 죄 있는 무리들이야 어찌 논하겠습니까. 그런 까닭으로 제선(諸善)을 봉행(奉行)하면 이것이 널리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됩니다(夫道在心, 不在事, 法由己, 不由人. 且帝王與匹夫, 所修各異, 雖行軍旅, 且黎元. 何則 王者 以四海爲家, 萬民爲子. 不殺無辜之輩, 焉論有罪之徒. 所以諸善奉行, 是爲弘濟).” 무고한 백성은 죽이지 말되 죄 있는 무리들은 가차없이 응징하라는 적극적인 통일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왕건 태조는 공연히 염라대왕을 미리 두려워했더니 대사의 말씀을 들으니 천인과 말하는 것처럼 시원하다며 용기백배하여 공산 동수에서 참패한 좌절감을 떨쳐버리고 견훤에게 설욕하기 위해 친히 탕정군(湯井郡, 현재 온양)으로 내려가 새로 편입된 운주(運州, 현재 홍성) 관내에 옥산성(玉山城)을 쌓고 웅주(熊州, 현재 공주) 공략을 시도한다. 이엄왕사의 고향이 밀고 밀리는 전장으로 화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으므로 이를 구제하기 위해서였다. 아마 태조의 최측근 1등 공신인 면천 출신의 복지겸(卜智謙)과 박술희(朴述熙) 등도 자신들의 고향을 전란에서 구하고자 이 일에 적극 앞장섰을 것이다.
고향 선배이자 사무외대사 중 둘째형인 사형을 잃은 이엄왕사는 더욱 고향 내포 지역의 안녕을 위해 이곳을 후백제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노력을 경주한다. 이에 8월8일에는 태조로 하여금 친히 대목군(大木郡, 현재 木川)으로 내려가서 동서 도솔(兜率)의 땅을 합쳐 천안부(天安府)를 설치하고 후백제 정벌의 총지휘소로 삼게 한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태조 14년(931) 2월23일에는 태조로 하여금 다만 50기(騎)의 호위병만 거느리고 신라 왕경(王京)을 위무(慰撫) 방문케 하여 신라 왕경의 민심을 사로잡게 한다. 신라와의 평화통일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태조는 5월26일까지 머물면서 신라 왕경의 민심을 완전히 사로잡고 떠나는데 왕도의 남녀들이 그 덕화에 감읍하여 이별하는 자리에서 옛날 견씨가 왔을 때는 승냥이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공이 오시니 부모를 뵙는 것 같다고 했다 한다. 이엄왕사가 계획한 무혈통일의 방법을 왕건 태조가 실천한 결과였다. 신라 회유에 성공하고 돌아온 태조는 곧바로 11월28일 옛 고구려의 수도인 서경(西京, 현재 평양)에 행차하여 이곳 민심을 무마하고 돌아온다. 이 역시 이엄왕사의 가르침에 따랐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 서북지역이 고구려 멸망 이후 변방으로 전락하여 교화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교화 방안을 이엄왕사에게 자문하니 왕사는 스스로 그 교화를 담당하고 나섰던 듯하다. 그래서 태조 15년(932)에 해주만에서 서경으로 가는 길목 초입인 수미산(須彌山)에 광조사(廣照寺)를 세워 이엄왕사 자신이 문도를 거느리고 이주해 간다. 이로써 이엄왕사는 9산선문 중 최후로 세워지는 수미산문의 개산조가 된 것이다. 이엄은 내포의 서쪽 끝 해변인 태안에서 탄생하고 12세에 내포의 진산인 이산(伊山; 지금의 덕산) 가야사로 출가하여 그곳에서 구족계를 받고 사문(沙門)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인데 드디어 고려국 태조의 왕사가 되어 이제 고려 서북지역의 교화를 총괄하는 수미산문의 개산조가 된 것이다. 그의 나이 63세 때의 일이다. 이해 9월에 견훤은 태조의 이런 외교적 성과를 무위로 돌리기 위해 일길찬(一吉粲; 고려 태조 대의관직) 상귀(相貴)로 하여금 수군을 거느리고 예성강구를 기습하게 하여 3일 동안 강화만 일대에 정박해 있던 고려 병선 100여 척을 불사르고 저산도(猪山島) 목마장에서 말 300여 필을 탈취해 달아난다. 그러나 곡도(鵠島)에 유배되어 있던 대장군 유검필(庾黔弼)이 재빨리 전함을 수리하여 이들을 물리쳤기 때문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유검필의 고향은 황해도 평산이니 이엄왕사가 교화를 담당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엄왕사가 해주만에 있으면서 신속히 대처할 수 있는 묘방을 지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에 격분한 견훤은 다음해인 태조 16년(933) 5월에 이엄왕사의 고향 부근인 혜산성(山城; 현재의 면천)을 겁략하는데, 이때 견훤은 합덕 방죽에서 군마에게 물을 먹였다는 전설이 고로(古老)들에 의해 아직까지 전해 내려온다. 그러자 다음해인 태조 17년(934) 갑오년에 이엄왕사는 태조에게 예산진(禮山鎭)에 내려가서 삼한 백성에게 자신의 통치관을 피력하는 조서(詔書)를 반포하도록 종용한다. 이에 태조는 5월에 예산에 이르러 천하 만민에게 포고하는 조서를 반포한다. 그리고 아직 후백제 수중에 남아 있는 운주성(현재 홍성)을 친정(親征)하니 견훤은 5000 군사를 거느리고 이에 맞대응해 왔다. 이때 우장군 유검필이 경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3000여 급을 목베자 견훤군은 대패하고 운주성이 함락되었다. 이런 와중에 견훤의 시종 술사(術士)인 종훈(宗訓)과 의사인 훈겸(訓謙), 용장인 상달(尙達), 최필(崔弼) 등이 사로잡히니 이 소식을 들은 웅진 이북 30여 성(城)이 모두 태조에게 항복해 들어와 비로소 내포지역이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모두 이곳 내포 출신인 왕사 이엄의 심모원려에 의한 성과다. 이엄왕사는 이미 왕건 태조에게 갑오년에 삼한 통일의 기틀이 잡히리라 예언했다고 한다. 그 예언대로 예산진에서 조서가 반포되고 운주성 싸움에서 승기를 잡자 내포 일원이 일시에 고려 태조에게 항복해 오는데, 이런 참패가 원인이 되었던지 다음해인 태조 18년(935) 3월에는 견훤의 장자 신검(神儉)이 그 아비를 김제 금산사(金山寺)에 유폐하고 아우 금강(金剛)을 살해한 다음 자립해 왕이 되는 패역 행위가 후백제에서 일어난다. 그러자 이엄왕사는 태조로 하여금 4월에 유검필을 시켜 수군을 거느리고 나주로 나가 대기하도록 하는데 6월에 과연 견훤이 금성(錦城)으로 탈출해 와서 태조 뵙기를 청한다. 이에 태조는 유검필과 만세(萬歲) 등으로 하여금 견훤을 해로로 영입하여 송경으로 모셔와서 상부(尙父)의 존칭을 올리고 지위를 백관의 위에 두어 우대하니 삼한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을 대로 익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해 10월에 신라 경순왕은 중신들과 의논하고 신라 천년사직을 들어 고려 태조에게 투항하고 만다. 이때 태조의 나이는 59세고, 이엄왕사의 나이는 66세였다. 드디어 다음해인 태조 19년(936) 2월에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朴英規)가 많은 군사기밀을 가지고 투항해오자 태조는 견훤의 청을 받아들여 신검을 응징하기 위해 후백제 정벌에 나선다. 7월에 천안부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67세의 이엄왕사는 해주 수미산 광조사에서 병석에 있다가 태조를 전별하기 위해 급히 송도로 나왔지만 이미 태조는 천안부로 떠난 뒤였다. 그래서 사무외대사 중 막내인 법경대사 경유(慶猷, 871∼921년)가 머물다가 이미 입멸하여 그 사질(師姪)들이 법통을 이어가고 있는 장단(長湍) 용암산(踊巖山) 오룡사(五龍寺, 현재의 開城郡 嶺南面 太院里 沙器幕洞에 절터가 남아 있다)로 들어가서 사제 경유가 입멸한 그 법당에서 8월17일 한밤중에 시적(示寂)하니 세수 67세요 승랍 48세였다. 그의 숙원인 후삼국 통일이 막 진행되고 있는 순간 내포 태안에서 떠올랐던 큰 별은 그 빛을 다 발하고 조용히 떨어져갔던 것이다. 이때 태양은 빛을 잃고 바람은 슬피 울었으며 구름은 수심에 잠기고 물은 목메어 울었다 한다. 문하승들은 유언에 따라 8월20일 신좌(神座)를 절의 서쪽 300보쯤 떨어진 산 기슭에 모시고 다비로 장사지냈다. 9월에 신검을 대파하여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돌아온 태조가 이 소식을 듣고 대들보가 무너지고 안광(眼光)을 잃은 듯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시종신을 보내어 조의를 표한 다음 중신들의 소청에 의해 시호를 진철(眞澈)이라 올리고 탑명을 보월승공지탑(寶月乘空之塔)이라 하여 수미산문 본사인 해주 수미산 광조사에 그 사리를 안장하게 한다. 그리고 당대 최고 문장인 상서좌복야 겸어사대부 최언위(崔彦)와 최고 명필인 이환추(李奐樞)로 하여금 탑비문을 짓고 쓰게 하여 그 다음해에 비를 세우게 하니 태조 20년(937) 12월20일에 비석이 세워진다(도판 8). 이렇게 탑과 비석이 신속하게 세워진 예는 지금까지 없었다. Copyright 2001 donga.com Privac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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