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일 대통령이라면> 원고
정치혐오와 정면으로 맞서기 : 아레나형 국회와 의원추첨제
1. 정치의 껍질 : 그 짙은 정치혐오
아네스 자우이의 영화 <레인>(Let it rain, 2009)의 한 장면.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강단 있는 여성주의자인 아가테는 글쓰기에 머물지 않고 현실정치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다. 갑작스레 퍼붓는 빗줄기를 피해 들어온 농가에서, 그녀는 어수룩한 농부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가 곧 정치인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한 농부가 아가테에게 불평을 늘어놓는다. 당신들이 우리를 위해 해준 게 뭐 있어. 항상 당신들은 말만 할 줄 알지. 우리 농부들 기분을 알기나 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정치 같은 소리하네. 취기에 한껏 날카로워진 농부는 자리를 뜬다. 이 독한 정치혐오, 그것은 우리도 곧잘 접하곤 하는, 정치의 껍질이다. 그건 프랑스도 우리도 마찬가지일 테다.
2. 정치의 속살 : 갈등과 긴장. 민주주의의 힘
정치인이 된다는 것은 그래서 그 독한 혐오를 정면으로 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고통이다. 유시민이 <씨네21>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정치인의 일상에는 짐승의 비천함이 있다.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효도잔치 가서 노래하고 초등학교 총동문회 텐트마다 돌며 술을 마셔야 한다. 그걸 체질적으로 즐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스트레스가 아닌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해야 겨우 주민들의 눈에 들고 정치인 자신에 대한 혐오를 간신히 벗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치 그 자체에 대한 인식에는 변하는 게 없다. TV를 틀면 곧잘 나오곤 하는, 국회의원들끼리 벌이는 온갖 몸싸움과 말다툼에 이맛살을 찌푸리곤 하는 게 우리네 일상이니까. 정치적 뒷거래와 각종 뒷돈은 또 어떤가. 정치인의 무능과 부패에는 물론 정치인 자신의 책임이 우선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책임은 역시 국민이 질 수밖에 없다.
정치에 대한 관심을 끊는 순간, 대표자들의 언행에 개입하지 않는 순간, 정치인은 시민의 대표자 자리를 떠나 시민의 머리 위에 서려 들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시민이 자신의 대표자 밑에 있게 되는 것은 자업자득이다. 그건 이명박을 뽑은, 혹은 아예 투표를 하지 않은 심리와 서로 통한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지난 대통령선거 결과는 그저 경제만 살아나면 된다는 욕망과, 시민들이 정치 자체에 환멸을 느끼거나 아예 위기의식을 갖지 못했기에 가능했던 현상이었다. 이건 극도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주류경제학적 사고방식과도 맞닿는다. 그리고 그 배경으로 강남부자 같은 고정지지자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그들과 큰 격차를 보이는 강북서민과 지역노동자들이 이명박을 뽑은 데에는 토론하고 갈등하는 정치구조에 대한 피로감이 깔려있다.
작년 광화문 앞을 가득 메운 촛불 역시 현상 자체는 역동적인 ‘거리의 정치’가 눈앞에 구현된, 열정의 푸짐한 굿판이었지만 동시에 그 또한 현실정치에 대한 혐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뚜렷한 한계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국회의사당의 부패한 대의민주주의와, 시청 앞 광장의 깨끗한 직접민주주의라는 선명한 대립구도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내년도 경제성장률이 4% 미만으로 떨어진지 오래인, 지금 같은 경제위기 속에서 특히나, 시민들은 ‘유능한 정치인’을 찾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시민이 촛불을 든 건 이명박이 그 유능한 정치인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명박을 반대하는 것이 진보가 아닌 이유다. 이래서는 또 다른 이명박을 호출하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다. 경제를 위해서라면 비정규직의 희생은 불가피하고, 4대강 개발에 준하는 환경파괴가 얼마든지 용인될 위험은 여전하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이명박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 나아가 이명박과 개발․경제성장 욕망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를 보다 건강하게 꾸려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문제는 서민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더 나아가 서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정치구조가 부재하다는 데 있다. 여기에 ‘소통’에 대한 개념이 이명박은 물론이고 시민들에게조차 뚜렷이 잡히지 않았다는 난점이 겹친다. 갈등을 두려워하고 긴장을 회피하며, 오로지 한 가지 의견으로 통일되어 논쟁이 잠재워지기만 하면 되는 것. 그것이 소통이라면, 이명박의 소통이야말로 진정한 소통일 게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도 안 된다. 본질과 당위가 말한다. 갈등과 긴장,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힘이라고. 이건 누가 대통령이 된다한들, 설령 내가 대통령이 된다한들 갑작스럽게 바뀔 문제는 아닐 게다.
3. 논쟁 권하는 국회 : 아레나형 의석배치와 발언권 보장
논쟁을 피하지 않는 것. 정치는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국회의원은 각 지역주민과 특정계급․계층을 대변하는 대표자인 만큼 주민과 지지자의 이해가 일치하는 정책이나 법률을 추진하고, 반대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견제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국회는 서로 다른 입장 간의 싸움터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상임위원회는 의원들끼리 서로 마주볼 수 있게 되어 있다 해도, 본회의장은 항상 국회의장을 바라보게끔 의석이 만들어져 있다. 한 명이 말하고 여럿이 듣는 구조다. 이는 대의정치에 대한 기존 위정자들의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애초부터 논쟁을 통해 합의를 이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정부에서 제시하는 정책을 일방적으로 통과시켜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공간은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인식을 바꿔놓는다. 배치의 힘이다.
그렇다면 정치개혁을 하기 이전에 공간부터 바꾸는 것이 의회정치를 활발히 하고 의원들이 주민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본회의장을 비롯해 모든 회의실을 의원들이 서로 마주볼 수 있도록 아레나(Arena)형 구조로 바꾸는 것이다. 긴장과 갈등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더욱 논쟁을 활발히 할 수 있도록 배치함으로써, 기왕 토론으로 진행되는 곳이 국회라면 제대로 해보는 것이 어떨까. 또, 공간을 확보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있다. 국회의원들 모두에게 자유로운 발언권 역시 주어져야 한다. 충분하다 못해 좀 줄여도 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많은 특권들-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 각종 지원금 같이-이 부여되는 게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라지만 말이다. 원내교섭단체에 속하지 않는 국회의원도 보다 힘 있는 발언권을 주어야 한다(발언권의 차이를 줄이더라도 원내교섭단체의 권한은 상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욕설과 비방 또한 격한 논쟁 중에 튀어나올 수 있지만, 일본 NHK의 사례로 알려진 대로 본회의 TV 생중계 등을 활용해 정보공개와 의원견제라는 두 가지 효과를 보는 방안도 있을 게다. 요컨대 국회에서 제대로 토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그저 말만 하는 국회라는 비난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한편, 국회의원들이 민의의 대표자로서 의정활동에 충실하도록 강제하는 주요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게다.
4. 자리 앉길 권하는 의회 : 주민참여제 확대와 의원추첨제
대의제가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시민이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면 의미도 없고, ‘과두제의 철칙’(어떤 정치체제든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방식에는 변화가 없다는 주장)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시작단계에 있긴 하지만 풀뿌리 민주주의와 지방정치에 대한 어느 정도 합의가 있고, 주민참여예산조례나 시민배심원제도, 주민발의제, 주민감사청구제와 같은 제법 다양한 제도를 만들어 놓은 상태다. 곤란한 점은 이런 시민들의 참여가 구청, 시청 등 지방정부의 비협조로 인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당장 가시적인 성과물이 나오는 게 아닌 만큼 제도의 실효성에 대한 의구심이 여전하다는 데 있다. 당위가 현실과 충돌하는 전형적인 사례인데, 이는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다.
하지만 제도는 그 자체로 완성형이 아닌데다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참여와 개입을 요구하는, 불편한 삶의 방식이다. 요점은 이렇다. 기왕 불편할 거라면 제대로 불편해야 한다. 국회의원들이 시민의 대표자로서 자기 지지자의 이해와 최대한 일치한 상태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하듯, 시민들은 국정의 주인으로서 자신이 사는 지역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추첨(제비뽑기)을 통해 지역주민을 지역의회 의원으로 선출하는 의원추첨제를 시행하는 것은 어떨까.
이 아이디어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뚜렷했던 정치방식으로, 직접민주주의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추첨제와 관련된 가장 가까운 사례라면 초록정치연대의 당원추첨제 구상인데, 비록 초록정치연대의 활동이 시민운동의 범주에서 머물러있었다곤 하더라도 아이디어의 참신함과 실행가능성을 볼 때 의원추첨제는 고려해 볼만 하다. 무엇보다 지역주민들의 자발성과 높은 교육수준-물론 지역과 나이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건 인정하고 들어가야 하지만-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물론 의원추첨제 앞에는 많은 난점이 있다. 무엇보다 의심을 받는 것은 추첨으로 선출된 의원의 질이다. 말 그대로 무작위로 뽑히는 것이므로 과연 누굴 맡기더라도 제대로 맡길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최고의 걸림돌이다. 동네 노는 형이나 생선가게 아주머니, 복덕방 영감님이 의원을 한다고 했을 때 정치의 속류화에 대한 경계와 반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오로지 대중에 대한 신뢰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들이다.
이를 위해 다양한 방안, 예컨대 추첨으로 선출된 의원이 몇 달간 참관인 및 업무인계자 개념으로 의정교육을 받는 의원인턴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직접민주주의의 꿈은 단순히 그것이 이상이기 때문에 중요한 게 아니라, 주민이 자기 삶의 터전에 올곧이 뿌리박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비로소 자신과 공동체에게 도움을 주고 자신과 가족, 자기 마을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5. 정치의 속살 파고들기 : 정치혐오를 극복하기까지
영화 <레인>에서, 아가테는 중도에 정치를 그만둘까 고민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남자친구와의 이별, 갈등 많은 가족사 같은 사적인 고민에, 과연 내가 정치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를 고민하게 했던, 농부들과의 대화가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내리누른다. 무엇보다 자신이 여성과 이민자, 소수자 등 약자를 대변하기 위해 정치인이 되겠다고 했지만 정작 자기 주변의 진짜 약자인 아랍인 식모와 그녀의 아들에게 무관심하고 종종 독재적이었다는 자각이 그녀를 괴롭힌다.
그럼에도 아가테는 결국 정치인의 길을 선택한다. 정치에 대한 혐오와 무관심, 그와 함께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과 멸시를 기꺼이 감수하기로 결심한다. 여기서 “정치인의 일상에는 짐승의 비천함이 있다”는 명제는 기각된다. 물론 종종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게 헌신적이고 이상적인 정치인을 찾기란 어렵다. 또 그런 사람이 나오더라도 짐승의 비천함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노무현을 잃은 유시민의 고뇌는, 자신은 노무현처럼 그 비천함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자문자답이기도 할 것이다(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별개로 치더라도 말이다.).
정치를 바꾸는 길은 곧 정치혐오를 정면돌파하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이건 누군가 뛰어난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갑자기 달라질 것이 아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노력이,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필요하다. 제도는 그걸 드러내는 몇 가지 방식일 뿐일 게다. 아레나형 의석배치가, 의원추첨제가 그렇다. 정치는 여전히 어렵고 이야기하기 곤란한 주제이지만, 그럼에도 시민들 스스로 안고 가야 하는, 어쩌면 업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끝날 즈음, 아가테는 자신은 정치를 그만두지 않겠다며 활짝 웃음을 짓는다. 정치에 대한 혐오와 멸시를, 그 독한 감정을 파고들어 공동체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보듬는 그런 웃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