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7일 김준엽 前 고려대 총장이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9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1920년 8월 26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일본 게이오대학에 유학중 1944년 2월 학도병으로 징집됐다가
장준하와 함께 탈출 광복군에 합류해 항일운동을 벌였다.
우리나라 학도병 탈출 1호 였다.
광복 이후 중국사 연구에 매진한 고인은 고려대 사학과 교수로 중국 근대사를 가르쳤으며
1982년부터 1985년까지 고려대 총장에 재직했다. 고려대 총장 재직 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정권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보호하다가 총장직에서 쫓겨났다.
이로 인해 학생들이 한 달 이상 총장 사퇴를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9일 빈소를 찾아 故 김준엽 전 총장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고 유족을 위로했다.
조의록에 '늘 기억하겠습니다. 이명박' 이라고 적었다.
손학규 대표는 빈소를 찾아 "고결하고 깨끗하게 산 선비 지사로 애국애족
정신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가신 민족의 스승"이라며
"이분의 삶 자체가 우리 민족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했다.
항일투쟁과 군사독재에 맞서서 올곧게 정도를 걸어온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의 빈소에는
김신 백범 김구기념사업회장, 고(故) 장준하 선생의 큰아들 장호권 사상계 대표이사,
안희정 충남도지사, 박유철 광복회 회장,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이기택4.19혁명공로자회회장등
국내 정. 관계 및 학계등 주요 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2011년 6월 10일 오전 8시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영결식장에서
고 김준엽 선생의 영결식이 있었다. 이기택 4.19혁명공로자회 회장의 추모사가 있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시는 것만으로도 나라의 기둥이셨고 우리의 힘이고 자랑이었다."며
"선생님이 걸어온 애국의 길과 정의의 길을 잊지 않고 따르겠다고 했다."
또한 " 제가 현직에 있을 때에는 만나지 않으셨던 고인이 모든 것을 떠났을 때
맞아주시고 이야기를 들어주셨다."고 회고했다.
김정배 이사장은 "선생님은 관리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끊임없이 받고도
사양하며 학문세계를 지켰다."며 "선생님의 간절한 소망이었던
조국 통일은 후학 몫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부디 영면하시길 바란다."고 했다.
김정배 이사장은 조사를 읽는 중에 목이 잠겨 잠시 멈추기도 했다.
헌화시간이 되었다. 미망인 민영주 선생이 헌화했다.
고 김준엽선생의 가족사는 현대사에도 그 가계가 돋보였다.
백범의 비서실장 민필호의 따님인 민영주 선생과 김준엽을 장준하가 중매를 섰다.
김준엽과 민영주는 중국 서안의 광복군 주둔지에서 이범석과 장준하가 지켜보는 가운데 결혼했다.
고 김준엽 선생이 한 평생을 대쪽 같은 절개를 지키고 정의를 지켜낸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남편 못지않은 강단과 남편의 일에 힘을 실
어줄 수 있는 부인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는 고인의 유지에 따라서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지냈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 올곧게 자신의 길을 가셨다. 가족들 또한 고인의 유지를 끝까지 받들었다.
독립군 가문의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고대 병원을 출발했다.
故 김준엽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고려대 아세아연구소로 왔다.
고려대 직원들과 학생들이 고 김준엽 전 고대 총장에게 마지막인사를 했다.
고려대에서 작별인사를 고하고 성북동의 사회과학원으로 왔다.
명륜동 자택을 들렀다.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도착했다.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김정배는 추모사를 통해 " 존경하옵고 자랑스러운 선생님!
지금 나라 안팎에서는 선생님께서 운명하신 후에 선생님을 겨레의 스승이요.
마지막 광복군의 항일 투사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한결같이 선생님의 일관된 애국애족의
생활철학을 높이 찬양하며 나라의 큰 별이 떨어진 슬픔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며 "평생 조국을 사랑하신 큰 뜻을 우리 후손들이 받들어 자신의 발전은
물론 나라의 번영 발전에 기여토록 하겠습니다.
부디 편안하게 유택에 머무시길 두 손 모아 빌고 또 비옵니다." 라고 추모했다.
가족들과 추모객들이 예의를 표했다.
추모객 김교문(79)은 "담백한 분이셨다. 고리타분한 학자풍이 아니고
약주 한 잔, 담배를 피시면 멋진 풍류객과 같았다."고 회고 했다.
박우동(67)은 김준엽 선생은 "연인이라고 표현했던 장준하 선생의 일을 가장 안타까워했다."
또한 고인은 " 영원한 자유인이었다. 정의를 따르고 정도를 걸어가셨다. 강하신 분이다."
며 "늘 공부 열심히 하고 글을 남기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62세에 경제학 박사를 했다. 고 회고 했다.
조카인 김영규(64)는 "가족보다 조국을 위해서 사셨다. 노년에 가족들을 위해서 배려했다.
고인은 애국지사들은 가족을 돌 볼 수가 없었다. 가난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다.
혜택을 가족들에게 줘야한다고 했다." 고 했다.
가족이 헌화했다.
상주가 절했다.
고 김준엽 선생은 저서 <회고록 장정>, <나와 중국>, <중국 최근세사>등을 함께 묻었다.
김준엽 선생의 마지막 가는 길을 기록하면서 많은 생각들이 교차되었다.
김준엽 선생의 별세를 전하는 신문들을 보았다.
[한겨레] " '영원한 광복군' 김준엽 전 고려대총장 별세"는 제목으로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중
국 연구에 평생을 바친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의 별세"를 전했다.
[한국일보] "김준엽 전 총장, 독립투사로 꼿꼿한 학자로 평생 한길"
"'영원한 광복군'"으로 전했다.
[조선일보] "' 꼿꼿한 지성. 영원한 광복군' 김준엽 前 고려대 총장 별세"
라는 이름으로 부음을 전했다.
[경향신문] "별은 지지 않고, 밤에 더 반짝인다"고 김준엽 넋 기려"는
제목으로 김준엽 前 고려대 총장의 별세를 전했다.
[동아일보] " '시대의 스승' 긴준엽 전 고대총장 별세"로 광복군 투신과 군사정권시 장관, 총리 제안을
고사했던 일들을 실었다.
광복군으로 또 학자로서 절개를 지킨 故 김준엽 선생이 올곧게 정도를
걸어온 91년의 세월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사회장으로 해야 한다"는 말에도 유족들은 고인의 유지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르겠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기록을 하면서 보았다. 명문 독립군 가문의 서늘한 절제와 고인의 유지를 받드는 모습을 보았다.
박우동(67)은 고인이 "가장 검소하게 하라. 교수나 학생들에게 피해주지 말라.
여러사람들을 번거롭게 하지마라."고 했다고 한다.
생의 마지막 가는길까지 꼿꼿한 선비의 기상으로 떠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한 광복군', '학병 탈출 1호' , '총장사퇴를 반대하는 학생들 시위를 받으면서
명예롭게 독재정권에 의해 쫓겨난 총장' ' 시대의 지성' 등
故 김준엽 선생을 표현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정도로 걷고 살아온
분을 존경하는 마음이 담긴 호칭들이었다.
故 김준엽 선생이 하셨던 말씀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닿았던 것은
60이 넘은 제자에게도 만나면 늘 말씀하셨던
" 열심히 공부하고 그동안 배우고 느낀것들을 책으로 써라."고 제자들에게 늘 하셨다는
말이 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영원한 민족의 스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대의 큰 별이 떨어졌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면서 故 김준엽 선생의 영면을 기원했다.
첫댓글 지금 여기 많은 분들의 희생으로 우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귀한 자료와 글, 감사합니다. 진실이 승리하는 그날까지, 많은 분들의 눈물과 기도가 이어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