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개 빠진 놈들!
자기 주관 없이 어영부영하는 사람에게‘이 쓸개 빠진 놈아’하고 호되게 나무라는 것을 가끔 듣는다. 도대체 쓸개가 사람의 정신태도와 무슨 연관이 있기에 그런 말이 생겨났을까? 한의학에서 간(肝)은 장군지관(將軍之官)이라고 한다. 인체를 하나의 국가로 볼 때 ‘의로운 장군처럼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중요한 기관에 비유한 것이다. 또 ‘간이 크다’는 것은 ‘용감하다’ 또는 ‘겁이 없다’는 뜻이며, 그 정도가 심한 경우를 빗대어 ‘간이 부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간에 붙어 있는 장기가 쓸개인데, 쓸개(膽)는 중정지관(中正之官)이라고 부른다. ‘아주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어느 쪽에도 치우침 없이 중도와 바름을 지키는 장부’라는 의미다. 무엇에 놀라 겁을 먹을 때 쓰는 ‘간담(肝膽)이 서늘했다’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간이 콩알만 해졌다’라는 표현이 있는가 하면, 위기에서도 좀처럼 놀라지 않고 동요 없이 잘 대처하는 사람을 보고 ‘담력(膽力)이 세다’ ‘대담(大膽)하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모두 이와 연관이 있다. 따라서 ‘쓸개 빠진 놈’이란 어떤 위기의 상황에서 사리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소신 없이 행동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의학적으로 간은 각종의 영양물질들을 재처리해 필요에 따라 에너지원을 공급·저장하는 역할 뿐만 아니라 혈액에 섞여 있는 독성물질을 분해하는 해독작용을 한다. 또 평소에 혈액을 만들어 저장해 두었다가 순환혈액이 더 필요할 경우 공급해 주기도 한다. 해독하고 남은 찌꺼기는 담즙 성분으로 변환돼 십이지장을 통해 배출되는데, 쓸모없이 버려지는 것이 아니고 섭취한 음식물 중에 지방성분을 분해해 장에서 잘 흡수되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하루 세 끼니를 먹는 사람이나 한동안 굶고 지내다 먹이를 잡아야 비로소 식사를 하는 육식동물들은 담즙을 모았다가 위에서 음식물이 장으로 내려올 때를 맞춰서 분비해야 지방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담즙을 일정기간 저장하는 주머니, 즉 쓸개[膽囊]다. 그렇다면 이른바 ‘간이 큰 동물’은 왜 겁이 없을까? 또 쓸개 빠진 동물은 왜 겁이 많을까? 궁금한 일이다. 동물이 놀라 흥분하면 뇌에서 스트레스 호르몬이 일시에 다량 분비된다. 이는 혈압을 올려 사지근육으로 피를 모으는 동시에 뇌의 혈액공급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어 사리분별에 교란을 야기한다. 일시적으로 공황장애를 일으켜 이성적 판단을 저해하고 안절부절못하는 행동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간이 크면 간에 저장된 혈액이 많아 뇌에 필요한 혈액을 신속히 보충해 줌으로써 스트레스 호르몬을 빠르게 분해해 뇌의 교란현상을 쉽게 바로 잡을 수 있다. ‘담력이 세다’는 것은 이처럼 큰 간의 순환조절 능력과 해독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말은 이런 쓸개가 없다. 그 이유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나 몇 가지로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우선 야생에서 풀을 뜯어먹고 사는 말은 지방성분이 들어 있는 음식물을 섭취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풀은 대부분 섬유소 성분이며, 이것이 맹장에서 분해돼야 지방산이 되고, 다시 체내의 필요한 곳에 지방 형태로 저장된다. 그러므로 위에서 소장으로 내려가는 음식물에는 지방성분이 거의 없어 담즙의 효용도 그다지 크지 않다. 둘째는 간에서 만들어진 담즙을 모아두었다가 일시에 분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은 하루 종일 풀을 뜯으며 생활하기 때문에 섭취한 음식물도 위에서 소장으로 조금씩 지속적으로 내려간다. 그러므로 일부러 담즙을 모았다가 일시에 분비할 필요 없이 간에서 생산된 담즙이 수시로 담관을 통해 소장으로 배출된다.
이런 이유로 말은 쓸개가 필요 없는 동물로 진화돼 온 것이다. 그렇다고 초식동물 모두 쓸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소·염소 등의 반추동물은 대표적인 초식동물이지만 큰 쓸개를 가지고 있다. 반추동물들은 일시에 많은 풀을 뜯어먹고 그것들을 제2위에 저장해 뒀다가 한가로운 시간에 되새김한 후 제4위를 통해 한꺼번에 소장으로 음식물을 내려 보낸다. 이때를 위해 담즙을 저장해 놓을 쓸개가 필요한 것이다. 소의 쓸개 안에서 담즙이 너무 농축돼 뭉친 것이 바로 ‘우황’인데, 이는 사람이 놀라거나 풍기가 있을 때 먹는 우황청심환의 재료가 된다.
어쨌든 말은 쓸개가 없어서 그런지 매우 겁이 많은 동물이다. 바람소리에도 놀라고, 심지어 자신이 뀐 방귀소리에도 놀라 마구 발길질을 한다. 주변의 낯선 물체나 이상한 소리,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 등에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공격 자세를 취한다. 늘 말밥을 주고 관리해 주는 사람이라도 말 엉덩이 뒤쪽에서 얼씬거리다 뒷발에 차이는 경우가 흔하다. 겁이 많아 후미에 미확인 물체가 자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성급하게 판단한 때문이다.
야외에서 승마를 하다 보면 말이 갑작스레 날뛰며 사람을 떨어뜨리고 달아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들이 날아가는 소리 등 아주 작은 어떤 소리에 놀란 것이다. 또 경주로에서 훈련을 하거나 경주를 하던 말이 지면에 길게 드리운 조명탑 그림자를 보고 놀라 멈칫하거나 점프를 하며 피하는 동작을 보이기도 한다. 말을 타다가 낙마하는 것은 대부분 말의 이같은 경박한 공포증 때문이다. 쓸개가 없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말은 겁이 많은 동물임에는 틀림없다. 경마장에서 말과 함께 일하는 사람 중에서도 말에서 떨어지거나 채어 병원에 입원한 이들이 적지 않다. 이처럼 말을 돌보는 일은 화약을 다루는 일만큼이나 위험하다. 말이 놀라 날뛸 때는 정말 간담이 서늘해진다.
글 김병선 재결전문위원·수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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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기는 경마공원 ^^ 원문보기 글쓴이: K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