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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드디어 '독꾸'의 털을 깎아버렸다. 아내는 오래 전부터 털을 깎아주자고 하였지만 나는 몇 군데만 남겨 놓고 알몸을 만들어버리는 소위 '미용견'들의 흉칙한 모습이 싫어서 반대하였었다. 그런데 여름이 되니 우리는 별로 안 더운데도 독꾸는 할딱거리는 것이 보기가 안스러웠다. 하긴 털 코트를 입고 있으려니.. 그래 큰맘 먹고 개 병원에 데리고 가서 맡겨 놓았다. 두 시간 후에 찾으러 가보니 아.. 개장에 앉아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독꾸의 모습.. 머리만 남겨놓고는 백구를 쳐서 알몸(?)이 되어버린 독꾸. 마치 옷을 벗겨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떨고 있는 것과는 아주 잘 어울린다만.. 그런데 독꾸의 자랑인 긴 귀털도 손을 댔는지.. 마치 옛날 소녀들 머리 같이 단발이 되었다. 단발머리에 알몸. 허~~
시골 소녀가 옷을 홀딱 벗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 아닌가? 그런데 데리고 오려고 하니 개 병원 의사가 '목욕도 시켰으니까 땅에 내려놓지 마시고 안고 가세요'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 몰골을 안고 가라고? 게다가 독꾸가 좀 무거운가?
어쩔 수 없이 독꾸를 안고 집으로 오는데.. 정말 이런 쪽팔림이 없다. 내가 누군가? 나야말로 개의 본연의 자세를 늘 강조하던 마지막 <광야의 목소리>가 아니었던가? '개는 주인에 충성하고, 잘 지키며, 언제나 기꺼이 자기 몸을 내주어 주인 및 인간의 몸을 보하고..' 라는 '개 헌장'의 주창자이던 내가 어쩌다 이런 '털 벗은' 개를 안고 지역사회를 활보한단 말인가? 아!! 팔려!!
내가 그 동안 쌓아놓았던 지역사회에서의 신망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우리 동네는 내 직장 사람들이 늘상 잘 다니는 곳이 아닌가? 틀기면 이런 개ㅉ이 없다. 고개를 숙이고 독꾸를 안고 뛰다시피 하는데, 이기 왜 이리 무겁노? 집에 와서 자세히 보니 참..이런 얄궂은 몰골이 없다. 풍성해 보이던 개가 노루가 되었으니.
그런데.. 나는 왜 그 털 벗은 독꾸를 보면서 자꾸 탕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스릅..>
출장을 떠나기 전에 일정을 점검하다가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하였다. 로마에 토요일 저녁에 도착해서는 일요일 오전에 성 베드로 성당(Basilica di San Pietro)과 바티칸 미술관을 보도록 되어있었다. 일요일이라.. 주일인데..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바티칸 미술관은 열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바티칸에 이틀을 가야할 판이었다. 다르게 생각하면 번거롭기는 해도 잘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주일 정오에는 교황이 집무실 창에 나타나셔서 바티칸 광장의 사람들을 축복을 해주신다고 하니까.
일요일 아침. 서둘러 성 베드로 성당으로 향했다. 성 베드로 성당과 '천사의 성'을 둘러보고 정오에는 교황도 뵙고 (물론 아주 멀리서였지만).. 몸은 한없이 피곤했지만 오후의 계획도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지하철, 버스, 도보(거의 달리기 수준이었지만)로 이동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오후가 깊어지며 거리의 풍경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깃발을 들고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뒷자리에 앉아서 깃발을 흔드는 여자들도 많아졌고, 승용차도 깃발을 들고 달리기 시작하였다. 경적을 울리며.
(사실은 스쿠터. 이탈리아는 스쿠터가 많았다. 여기서 스쿠터라고 하는 것은 앞 핸들과 사람이 앉는 안장사이의 공간이 비어있는, 그래서 우리네는 그 자리에 중국음식 배달통을 놓고 달리는 그런 모양의 오토바이를 말한다. 그런 오토바이는 이탈리아제가 가장 좋다고 어느 택시 운전사가 자랑하였다.)
그렇다. 일요일은 그들의 축구시합이 있는 날이다. Game Day! 그래서 그렇게 늑대의 젖을 먹는 두 아이의 모양이 새겨진 로마의 깃발과 붉은색과 오렌지색이 체크 무늬로 섞인 'AS 로마'팀의 깃발을 들고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경적은 아마 '지금 축구 안 보고 뭐하냐?'는 질책인 모양이었다.
성베드로 성당과는 또 다른 맛이 있는 성바오로 성당을 보고 나와서 카라칼라의 목욕탕을 보러 갈 때는 길이 눈에 띄게 한산하였다. 아마 축구 시합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지하철역 구내에도 커다랗게 라디오 중계방송을 틀어놓았고, 택시들도 길에 세워놓고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이렇게 축구를 좋아하나?
카리칼라 목욕탕을 보고 나와서 지하무덤인 까타꼼베를 보러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깃발을 들고 달리는 승용차와 오토바이가 부쩍 늘었다. 경적소리도 한층 요란해졌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 그런데 카타꼼베와 예수 발자국의 복제품이 있는 아주 작은 성당인 '쿼바디스' 성당을 보고 난 후, 버스 정류장에서 '성 지오반니' 성당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릴 때는 상황이 한층 더 달라져 있었다. 그 좁은 아피아 구길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의 대표적인 길)을 마구 달리는 승용차들, 오토바이들, 경적소리, 외치는 소리, 나팔 소리..
힘들어서 버스 정류장에 주저앉아 있는 우리를 보고는 뭐라고 한마디씩 떠들고 가는데, 도대체 뭔 일이 생긴 건지? 간간이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우리에게 "나카따~~"하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하~ 나카타! 일본의 축구영웅, 나카다 히테토시.. 그가 아마 AS 로마 팀에서 뛰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햐.. 나카타가 이렇게 인기가 있었나?
한참만에 온 버스를 타고 '성 지오반니' 성당으로 가는데 이젠 거리가 전부 깃발로 뒤덮이고 있었다. 차들의 경적소리, 나팔소리... 이제는 우리가 탄 버스 운전수까지 경적을 울려대고 있었다. 차는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데..
그들의 경적은 응원리듬인 듯했다. 우리 나라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의 리듬과 같았다. 빰.빰.빠바밤..빠바바밤..빠밤. 하는 리듬. 버스 운전수까지 가세한 난리에 나는 귀청이 멍멍한데 다른 이탈리아 승객들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힘들게 '성 지오반니' 성당에 도착해보니.. Oh My God! 성당 앞의 광장은 온통 붉은색과 오렌지색의 물결이었다. 그리고 소리, 소리, 소리들.. 나는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수습하고 서둘러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 안에는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밖의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잘 만들었네..
성당을 돌아보고 나와 관리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물었더니 로마가 참피온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캄피오네..' 어쩌구저쩌구.. 아하..그랬구나..
건너편의 '성계단(Scala Santa: 예수가 골고다에 올라갈 때 있던 28개의 계단. 그 계단을 뜯어다 모셔놓은 곳이다)이 있는 예배당으로 서둘러 가려는데 뒤에서 관리인이 하는 말. "아마 닫았을걸..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역시.. 문을 닫았다. 나도 그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고 싶었는데.. (진짜다!)
아쉬운 맘으로 광장에 서 있는데..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제는 거리까지 꽉 메운 사람들과 깃발들. 차들은 그 사이를 겨우 겨우 지나가는데 비키라고 경적을 울리는 건지 좋아서 울리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귀청이 터지게 큰 소리를 내는 나팔경적은 알고 보니 압축공기통에 부착하는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사람의 숨으로 저리 큰소리가 어찌 나겠나?
순식간에 깃발장수, 나팔경적 파는 장수가 곳곳에 나타나 있었다. 이미 사람들은 광장에 있는 예수와 사도들의 동상에 올라가 깃발을 걸어놓고 또 흔들고 있었다. 저 엄청난 유적에 저렇게 올라가도 되는 건가? 뭐든지 너무 흔하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를 포기하였다. 택시도 포기하고. 그냥 인파에 휩쓸려 걸어갈 밖에.. 성지오반니 성당 앞 광장에서 콜로세움이 2 키로 남짓, 콜로세움에서 우리 호텔이 있는 베네치아 광장이 1.5 키로 남짓. 우리는 그 길을 인파에 휩쓸려 걸었다.
거대한 인파의 흐름이 베네치아 광장으로 향하고 있었고, 또 그만한 인파가 광장에서 반대로 오고 있었다. 인파는 깃발과 경적과 노래로 서로가 Romani인 것을 확인하고 즐거워하고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나와 우리 일행을 보면 '나카타'를 외치고 있었다. 심지어 어느 젊은이는 '나카타'를 외치며, 그의 응원가를 부르다가, 우리에게 '아리가토'를 외쳐 대었다. 나는 그가 아는 유일한 일본어가 '아리가토'인지, 아니면 진짜 나카타에게 고마워서 그의 동향 사람 같은 동양사람들에게 고맙다고 하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나는 그냥 좋다고 하였다. 내가 그들에게서 나카타 소리를 들으며 인상을 쓸 이유는 없지 않은가? 우리 나라 선수가 아닌 것이 아쉽긴 하지만 같은 동양인이 그렇게 칭찬을 받는다는 데 싫을 이유는 없으니까.. 나는 나중에 그들이 '나카타'를 외치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넘버 원'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카타!!' '넘버 원!'...
결국 그날의 광란은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일행 중 혼자 나폴리를 여행 갔던 K교수는 10시쯤 로마역에 돌아왔는데, 광란의 한가운데서 아무 교통수단이 없어서 호텔까지 걸어 왔단다. 12시가 훌쩍 넘어서야 호텔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앞자리의 어느 이탈리아 처녀가 보는 신문을 훔쳐보았다. 18년만의 축구 우승에 관한 특집인 모양인데, 나카타에 대한 기사가 한 페이지 정도 실렸다. 제목이 특이했다. 'Il piccolo grande Samurai, Nakata' 였다.
내 못하는 이탈리아어 수준으로도 이해가 가는 제목이었다. Il은 관사일 것이고 piccolo는 '작다'는 뜻이고(악기 피콜로도 작다는 뜻일 것이다), grande는 말 그대로 grand일 것이고 samurai는 사무라이이고..그러니 '작은 거인 사무라이, 나카타'가 아니겠는가?
그 비행기에 오를 때 한국 스포츠 신문이 있었다. 둘리가 그 신문을 집었는데 그 신문에는 이탈리아에 진출해 있는 우리 나라 A선수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이탈리아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는 해설과 함께. 10개월에 4골. 성공적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초 210만불을 주기로 했던 이적료를 백만불로 제시한 것을 두고도 성공이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런 내가 잘 모르는 것은 제쳐두더라도, 그 A선수의 긴 머리가 불쾌했다. 언젠가 짧게 깎았더니 그 팀 감독도 흐뭇해하더라는 기사를 읽었었는데.. 나는 항상 본연의 임무를 이야기한다. 개는 집 지키는 것이 임무이고 축구선수는 공 차는 것이 임무인데, A선수는 폼 잡는 것이 임무인 것 같다.
자고로 우리 나라에서 운동선수가 머리 길러서 잘된 이를 별로 못 봤다. 굳이 예를 들기도 귀찮다. (꼭 알고 싶은 사람은 메일을 보내면 알려줄 수도 있다) 상시 선발로 나가지도 못하는 선수라면 남들 쉴 때 한 발자국이라도 더 뛰어야 할 텐데, 그 긴 머리 관리하느라 시간이 있겠나? 그것도 남의 나라에까지 가서..
한국의 팬들 생각해서 그렇게 길렀다면 더욱 웃기는 일이다. 운동도 DDR 같아서 인기 떨어지면 길거리에 떨어진 꽃이거늘.. 그렇게 생각이 짧은가? 튀고 싶으면 나카타 정도로 머리에 물이니 들이면 될 것을, 그 긴 머리 빗어 넘기며 언제 세계적인 선수가 되려는지..
나는 이탈리아의 군중들 사이에서 '안~~'하는 함성 듣기를 포기해 버렸다. 그런 자세론 절대로 아무 것도 안 된다. 그저 여느 선수들 같이 '유럽물' 좀 먹은 축구인이 되겠지.
아~~ 기껏 이탈리아까지 와서도 왜놈보다 못한 조선족을 봐야 하나? 능력은 제쳐두고 겉멋만 든 동족을 봐야 하나? Grande 도 바라지 않는다. Il piccolo.. 면 어떠냐? 노력이 인정받는 동족이 있다면 나 또한 자랑스러웠을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