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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의 정신으로 가만이 전도(5) http://youngsaing.or.kr/index.php
-아나니아의 모범을 따라-
사도행전 9 : 10 - 19a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a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우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영적 가족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에 사도 바울이 된 바로 그 사람입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믿게 된 처음 이야기입니다.
당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는 때였습니다. 이에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일의 중심에 사울이 서있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아예 쓸어버리려고 날뛰었습니다. 그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끌어내서, 감옥에 넘겼습니다. 그는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다메섹에까지 가서 그곳에서 믿는 사람을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다메섹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는 땅에 엎어졌습니다. 사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사울은 일어나서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이 때, 그를 위하여 준비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박해자 사울을 전도자 바울이 되게 하는데 헌신한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아나니아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I. 명령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기 위하여 다메섹에 온 사울을 만나러 가라는 주님의 명령이 제자 아나니아에게 내렸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먼저,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일어나라는 첫 번째 명령은 ‘가라’는 두 번째 명령을 위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직가, ‘곧은 길’이라 부르는 거리로 가야 했습니다. 세 번째 명령은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는 가서 사울을 찾아야 했습니다. 아나니아는 일어나 가서 사울을 찾으라는 주님을 명령을 받았습니다.
1. 일어나 가서 찾으라는 명령입니다.
성경은 ‘가라’는 명령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도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하여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에게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출 3:9). 예언자 이사야는 죄를 범한 이스라엘백성에게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사 6:9). 예레미야 역시 배신하고 반역한 백성에게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렘 3:12). 선지자 호세아는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아내를 값을 주고 사 오기 위하여 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호 3:1). 선지자 요나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악독한 니느웨가 회개하도록 하기 위하여 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욘 1: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a)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가라’는 명령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역시 가라는 명령을 들어야 합니다. 세상으로, 거역하는 자들에게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로, 제자삼기 위하여, 구원하기 위하여, 가라는 명령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가보자, 만나보자, 이야기하자!’는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가라’고 명령하시면서 그가 가야 할 이유가 사울이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사울이 무엇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다메섹으로 오다가 강한 빛을 만난 사울은 눈이 멀어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의 영으로 보았습니다. 주님은 사울이 환상 속에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손을 얹어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나니아가 사울이 본 환상을 이루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환상을 이루어 주라는 명령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네가 가서 사울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사울이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로 가야하는 것은 우리를 기다리는 그 사람의 필요 때문입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십니다. 그 사람의 필요를 위하여 우리를 보내십니다.
지난 주 수요일, 어느 가정을 심방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 새로 등록한 분입니다. 그 분은 전에 다니던 교회를 5년이나 쉬셨습니다. 그 동안 그 분은 누군가가 자기를 다시 교회로 이끌어 주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드디어 5년 만에 우리교회 어느 권사님을 만나서 교회에 다시 나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전도해도 교회에 나올 사람이 없다는 것이 전도해야 할 교인들의 아우성(?)입니다. 그러나 갈급한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전도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안타까움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자기를 전도한 사람에게 나쁜 사람이라고 하였답니다. 이렇게 좋은 예수님을 자기 혼자서 믿고 자신에게 일찍이 전도하지 않았다는 원망의 말이었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전도할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교회에 다니려는 사람은 전도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탄식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영적인 갈급함을 채우지 못해서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영적인 갈급함을 해결하여 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갈급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서, 저들의 영적 갈급함을 채워주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나니아는 일어나 가서 찾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가 주님의 명령을 거절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II. 거절
제자가 이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3절 말씀입니다.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사울에게로 가서 그가 본 환상을 이루어 주라는 명령에 아나니아는 “주님,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해를 끼쳤는지를, 나는 많은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사울의 악명이 이곳 다메섹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이미 사울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라는 이름 앞에서 작아졌습니다.
1. 소문에 위축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그야말로 정보의 홍수시대입니다. 셀 수 없는 많은 이야기가 세상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소문이 세상을 온통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교회와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예외가 아닙니다. 좋은 이야기보다는 나쁜 이야기가 훨씬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 나아가기도 전에 이미 오그라들었습니다. ‘나 떨고 있니?’ 바로 그것입니다. ‘된다는 믿음’이 아니라 ‘안 된다는 믿음’으로 충만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소문의 실체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많은 경우들이 왜곡 내지는 과장되었습니다. 또 소문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연약함이지 예수님의 연약함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세상의 소문에 무릎을 꿇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가라는 주님의 명령에 아나니아가 망설인 이유가 또 있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행한 일에 대한 소문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곳 다메섹에 와서 행할 일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는 사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갈 권한을 가지고 지금 여기 다메섹에 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나니아는 떨고 있었습니다.
2.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두려움을 별 것 아니라고 말하지 맙시다. 두려움은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얽어맬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는 막강한 힘이 있습니다. 때로 소문이 사실을 이기고, 두려움이 진실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움을 두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실체를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사울은 더 이상 아나니아가 알고 있는 그런 사울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두 눈이 멀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끌리어 다메섹에 들어왔습니다. 아나니아가 두려워해야 할 사울은 이미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에 사탄의 머리가 깨어졌다는 것을 믿습니다.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께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이겨놓으신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a)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내쫓는 온전한 사랑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뒤흔들도록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두려움을 내어쫒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세상을 이기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다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주저하고 망설이고 있는 아나니아에게 그가 가야 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III. 이유
예수님께서는 아나니아가 알지 못하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그를 사울에게 보내시는 이유입니다.
15절 말씀입니다.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사울은 주님이 택한 그릇이기 때문에 아나니아는 그에게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택한 그릇’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선택한 도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을 선택하셨습니다. 사울은 성도를 핍박하고, 잡아 죽이는 사탄의 하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이방인과 임금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도구로 선택하셨습니다.
1. 주님이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우리가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전도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을 우리를 통하여 부르시는 과정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의 마음대로 가야 할 사람과 가지 말아야 할 사람을 구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선택하신 사람을 찾기 위하여 일어나 가라는 명령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께 민감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께 즉각 순종하여야 합니다. 기도하심으로 성령님께 민감하여 즉각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을 통하여 이루실 자신의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16절 말씀입니다.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아나니아는 사울을 통하여 교회가 얼마나 커다란 고난을 받았는지를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울이 교회를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교회에 커다란 해악을 끼치던 사울을 부르셔서 교회에 엄청난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나니아가 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사용하신답니다.
2. 주님이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제자들이 맞은편 마을로 가서 매여 있는 것을 풀어 끌고 온 것입니다. 그 때 제자들은 그 주인에게 단지 “주께서 쓰시겠다.”(눅 19:34)고 하였습니다. 주인은 주께서 쓰시겠다는 한 마디에 자신의 나귀를 내놓았습니다. 우리 역시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이 선택하셨다고 하면 우리의 선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님이 사용하시겠다고 하면 우리의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결단하여야 합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유가 우리의 이유입니다.
드디어 아나니아는 순종하습니다. 주님의 선택하심에 순종하였습니다. 주님의 사용하심에 순종하였습니다.
IV. 순종
17절 말씀입니다.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아나니아는 사울이 다메섹에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리 피신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머무르고 있던 곳을 떠나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사울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안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그대로를 실천하였습니다. 아나니아는 말씀에 절대 순종하였습니다.
1.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논리에 따르려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말씀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점령당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이 지배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이라는 영적고지를 점령하여야 합니다. 순종을 위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남 유다가 멸망하면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사람 중에 모르드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벨론이 멸망한 뒤에 바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모르드개가 돌보아 준 사촌 동생 에스더는 바사 왕 아하수에로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만이라는 사람의 모함에 빠져서 모르드개를 비롯한 유다인들이 몰살당할 위기에 빠졌습니다. 이에 모르드개는 왕궁에 있는 에스더에게 도움을 청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 4:13-14) 이에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왕이 부르지 않음에도 왕실의 규례를 어기고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고 결심하고 왕에게 나아가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말씀에의 순종, 여기에는 우리의 결심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인간적인 노력 그 이상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간절히 기도하여야 합니다. 기도함으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영혼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나니아가 순종할 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18절 말씀과 19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a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아나니아가 말씀에 순종하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드디어 박해자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는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온전히 회복되는데 순종하였습니다.
2. 회복에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회복시키십니다. 우리는 그 통로로 쓰임을 받는데 순종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부흥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부흥을 위하여 노래하여야 합니다.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 / 이 땅 흔들며 임하소서 / 거짓과 탐욕 죄악에 무너진 / 우리 가슴 정케 하소서 // 오소서 은혜의 성령님 / 하늘 가르고 임하소서 / 거룩한 불꽃 하늘로서 임하사 / 타오르게 하소서 주 영광 위해 // … 흰 옷 입은 주의 순결한 백성 / 주의 영광 위해 이제 일어나 / 열방을 치유하며 행진하는 / 영광의 그 날을 주소서
우리는 진정한 부흥의 날을 꿈꾸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제는 어린이 날,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가정에서 어린 자녀들이 복되기를 축복합니다. 어린이들에게는 반드시 보호자와 양육자가 필요합니다. 교회에서는 신앙이 어린 사람들에게 반드시 돕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교 선교에 엄청난 발자국을 남긴 대 사도 바울이었지만 회심 직후에는 그를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사울이 바울이 될 수 있었습니다. MD의 정신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있고, 거절하고 싶으나 말씀에 순종하여 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부흥을 꿈꾸며 가서 만나고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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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