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 폭 만큼 단을 올리고 4인용 혹은 2인용 탁자와 의자가 적당한 위치로 놓이고 뒷벽으로 너덧 개의 차창이 보이는데, 블라인더로 가리었고 그중 하나만 열려 있어 지나가는 밖의 풍경을 (특수 조명에 의함) 보여 준다. 가능하면 단 밑에 보이지 않는 바퀴를 달아 정거, 출발할 때의 미미한 반동을 보여 주는 것이 좋다. 막이 오르면 노부부가 왼쪽 2인용 탁자에 앉아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고, 그 앞자리에 중년의 남녀가 식사를 끝내고 포식 뒤의 나른함 속에 몸을 맡기고 늘어져 앉았고, 흰 제복의 웨이터가 왼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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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다.
오전 10시가 넘었을까 말까한 시간, 따라서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말해 주듯, 이들은 저 나름대로의 외각을 저만큼 주위에 두르고서 저 침상에서 눈을 떴을 때의 한껏 게으르고 싶은 사치한 고독을 조심조심 잔을 기울이고 손을 내려놓고 창 밖을 내다보면서 즐기고 있는데, 달리는 차 위의 이 기묘한 적요는 언듯 기구드리는 사람의 웅얼거림과 엄숙한 모습을 띄우는 이들의 자리를 미소로 눈여겨보며 한차례 돌아가는 흰 제복의 웨이터의 모습까지도 깜박, 끝네 연보 주머니를 매단 긴 막대기를 들고 가는 듯한 우스꽝스러운 착각을 일으키게도 한다. 어쨋든, 이들은 6월의 아침나절, 보리 익어 가는 들판을 치달려는 특급열차의 달거락거림. 흔들거림을
<요람의 자장가>로 들으면서 좋은 반찬을 약싹 빠르게 혼자 차지한 고양이들처럼 웅크리고 눈을 깜박거리며 한편 쓸쓸하게 앉아있는 중이다.
가령, 기차가 어느 산모퉁이를 도는 동안에 뛰어 오른 낮도깨비가 발발 기어와서 앞자리에 턱을 괴고 앉는대도 이들은 힐끗 보고 고개 한번 까딱하고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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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다시 창 밖으로 옮겼으리라.
[노인] (밖을 가리키며) 참 솔밭 좋다. 저 봐요.
[노파] (밖을 보며) 저거 내외간인가 보죠?
[노인] 내외간이라니?
[노파] 저 가운데 들어앉은 쌍 묘 말예요.
[노인] 흠- 거기 묘가 있었구만 (노인과 노파는 솔밭, 그 양지 바른 곳에 들어앉은 두분의 묘를 따라 고개를 돌린다)
[노파] 아, 저 보리 좀 봐요, 좀 잘 됐수?
[노인] 아니야, 그건 말이지.
[노파] 말은 더 크지요. 가늘구
[노인] (안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쓰고 한참 드려다 보다가) 밀이요, 삐쩍 마른 데다가 흰 길.
[노파] 그럼 메밀인가 봐요.
[노인] 저런, 봄에 피는 모밀도 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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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여름이지요. 벌써 유월예요.
[노인] 여름에두 모밀은 없구
[노파] 열매가 희다시니 모밀인가부다 했죠.
[노인] (손을 들어 가리키며) 저기 저긴 보리요.
[노파] (보지 않고 마침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전보 치려면 이쪽으로 가오? 저쪽으로 가오?
[웨이터] (왼쪽을 가리키며) 저쪽을 한 칸만 더 가시면 됩니다.
[노인] 전보는 무슨 전보?
[노파] 아이들을 나오래야지.
[노인] 그건 아까 역에서 큰 아이가 친다지 않습니까
[노파] 그래두 그 애가 말이 앞서는 애라 했을까 몰라요
[노인] (자신이 없다) 했겠지.
[노파] 짐이 좀 많아요? 만일 아이들이 안나오면 그걸 어쩌겠우?
[노인] 짐이 많은가?
[노파] 당신이 드신다면 다 들고 나갈 수야 있죠만.
[노인] (헛기침을 하고 창 밖을 가리키며) 저 것두 보리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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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는 들은 척도 않고 일어서려고 주섬주섬한다)
[노인] 아니, 어딜 가려구?
[노파] 그 많은 짐을 다 어쩌겠우? 아무래도 아이들을 불러야겠어요.
[노인] 이따가 내가 가지. 앉으오-.
[노파] 이따가 서울역에 닿으면 치려구요?
[노인] 글쎄 친다니까.
[노파] 당신이 짐을 들고 나가시기만 한다면 뭐 또 전볼 칠랴, 돈을 없앨랴 안 해도 되죠만
[노인] 임자 말하는 것이 어째 그러오?
[노파] 내가 뭘 어째요?
[노인] 누가 들으면 내가 짐을 마다하고 당나귀처럼 잔뜩 꾀나 부리고 있어서 저러는 가보다 하지 않겠오?
[노파] 짐이래야 전부 당신 자실 것이지요, 그러니 들고 나가시든가 그게 안되겠으면 전볼 치든가 당신 맘대로 하시라는 것 아니우?
[노인] 전본, 그게 돈 없이 되는 것인가?
[노파] 그럼 짐을 들고 나가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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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언성을 버럭 높인다) 임자가 몰라서 하는 소리요? 손목이 시어서 젓가락질도 제대루 안 되는 몰라서 지금 그런 소릴 하고 있소?
[노파] 그러니 내가 전볼 치시라 안 해요.
[노인] 치지 쳐! 짐을 들고 나가던가 전볼 치던가 내 알아서 할테니.
(이 때 오른쪽 적당한 차장 위에 장치되어있는 스피커에서 윙하고 전류가 통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스피카] 안내의 말씀 올리겠습니다. 본 열차는 현재 시간 열시 십이분 정각에 왜관 역을 통과 시속 구십 칠 킬로미터의 속력으로 정상 운행 중이옵고 다음 정착 역인 김천에는 앞으로 오십 칠 분 후에, 그러니까 열 한 시 구 분 정각에 도착할 예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김천에서는 본 열차와 같은 특급 하행 열차에 볼일이 있으신 분은 충분한 시간동안 번잡을 피하시어 하차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노파] 교행이라니요? 무슨 소리지요?
[노인] 내려가는 열차하고 엇바뀐단 소리지.
[노파] 엇바뀌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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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길이 하나니까 올라가는 놈 내려가는 놈이 피차 길을 비켜 줘야할 게 아니요.
[노파] (끄덕이며) 딴은--- (이때 무대 오른쪽에서 나정이와 상기가 흡사 그물에서 뭍에 던져진 두 마리의 잉어처럼 번쩍 번쩍, 팔닥거리는 듯 등장한다. 이들은 여드레 동안의 밀월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이라, 지치기도 했지만 한껏 방자하다)
[상기] (휙 둘러보고 중년 부부 앞에 있는 빈자리를 가리키며) 저기 가 앉아.
[나정] 싫어. 해가 비쳐요 (하고 노부부 곁에 앉는다. 상기는 카메라를 들어 광도를 본다)
[상기] 아냐, 어두워서 안되겠어. 이쪽으로 옮기라니까.
[나정] 또 찍어요?
[상기] 자, 어서
[나정] (마치 자루를 던지듯 몸을 던져 중년 부부의 건너편에 가 앉고 망원경을 갖다 대듯 두 손을 주먹 쥐어서 두 눈을 가려버린다)
[상기] 그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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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 훼드라, 죽어도 좋아예요. (「바하」의 하프시 코드의 멜로디를 휘파람분다)
[상기] (셔터를 누르고) 자, 이제 그 그래프는 치우지.
[나정] (왼쪽 주먹만 내리며) 죤, 포드
[상기] (셔터를 누르고) 어서 손 치워.
[나정] (주먹을 콧잔등에다 얹고) 칼 말덴.
[상기] 이봐 제발!
[나정] (손가락으로 코끝을 밀어 올리며) 나타리 우드 (하다가 상기의 등뒤로 등장하고 있는 동숙을 보고) 어마, 선생님! (동숙은 어딘가 상기한 안색에 초조한 빛을 띄우고 있다. 그의 거동으로 보아 식당차를 그냥 건너질러 가려는 듯이 보인다)
[나정] (동숙을 잡아 세우며) 선생님!
[동숙] 응? 음---
[나정] 저예요, 나정이. 한나정.
[동숙] 아 그래 그렇지! 난 누군가 했지. 이건 뭐 엉뚱해져 버렸는데.
[나정] 예뻐졌지요. 많이?
[동숙] (웃으며) 더 바랄 나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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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 저 지금 신부예요. 여드레 됐어요.
[동숙] 그래! 그럼 이게 귀성 열찬가?
[나정] (웃으며) 귀양 열차지요
[동숙] (짐짓 정색을 하고) 귀양길이라니. 설마 벌써 채인 꼴은 아닐테지?
[나정] (카메라를 들고 웨이터하고 무슨 말인가 주고받고 있는 상기를 가리키며) 저 카메라맨이에요. 저 카메라는 아마추어구요, 프로는 아직 미정인데--- 약제사가 되느냐, 테니스를 하느냔데 그걸 저보구 결정하라는 거예요. 그게 저하고 결혼한 첫째 이유구요.
[나정] 그래서 불안해요. 아직 결정을 못해줬거든요. 선생님 같으면 어느 쪽을 택하시겠어요?
[동숙] 글쎄--- 테니스하구 약제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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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 (짐짓 정색을 하고) 저 그만둬 버릴까도 해요.
[동숙] 그만두다니?
[나정] 신부 말이에요.
[동숙] (짐짓 놀라며) 여드레밖에 안 됐다면서---
[나정] 테니스냐, 약제사냐, 그게 아무래도 무서워요. 제 인생을 결정한 것두 통 신용이 안돼 죽을 지경인데, 여기나 또 자기 인생까지 나보구 어쩌라니--- 여자는 약하거든요. (하고 고개를 살레 살레 젓는다)
[동숙] (가볍게) 결정은 믿음이라지, 믿으면 되는 거야.
[나정] 깜깜 밤중에 해운대에 도착했는데 글쎄, 저보구 호텔을 잡으라는 군요. 밤에 들어갔더니 침대가 둘 있는데 혼자 자던가 자기 침대로 오던가 맘대로 하라더군요. 첫날 밤 일이예요.
[동숙] (웃으며) 서양식이로구만.
[나정] (웃으며) 그래도 제 성은 바뀌지 않은 걸요. 전 윤가가 아니라 한가예요. 아직두 한나정이에요.
[동숙] 지금이니까 그런 소리라도 들을 수 있지. 얼마 안가면 이래라 저래라 하겠지. 그럼 그때 가선 뭐랄텐가? 오늘에 감사해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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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 (혼잣말하듯) 그 거꾸로가 되어야겠죠. 지금 이래라 저래라 하고--- 저도 잘은 모르지만요.
[상기] 이봐, 필름 가져 온 것 있어?
[나정] 없어요.
[상기] 그럼 잠깐 있어. 다녀올게.
[나정] (퇴장하는 상기를 보고 웃으며) 또 필름을 갈아 끼우는군요. 저게 몇 통 짼 줄 아세요? 스물 일곱 통 째예요. 첫날 저녁에만 열 통을 넘겼대요. 신부 화장을 지우기 전에 찍는다고 김포 비행장에서부터 시작한 게 해운대 밤 세시까지, 이 백 장의 필름으로 문질러대는군요. 글쎄, 그래 얼굴이 한 꺼풀 벗겨지겠다구 소릴 질렀더니. <맛사지에는 필름 맛사지가 최상이야,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봐>에요. 절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만들려는 거예요. 저하고 결혼한 두 번째 이유구요.
[동숙] (웃으며) 그 이유에는 불만이 없겠네. 다음 세 번째 이유는 뭐라든가?
[나정] (진심으로) 어마 선생님, 여태 제 말만 했네요. 용서하세요. 대신 제가 살게요. 술, 괜찮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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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숙] (흠칫 노래며) 응? 술?
[나정] 왜요? 지금 바쁘신 것 아니죠? 여기 오시는 길이죠? 아니면, 누가 오기로 되었어요?
[동숙] (등장한 곳을 이윽히 바라보면서)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앉세. 내가 사지. 이봐요.
[웨이터] 네
[나정] 맥주 주세요. 준 우선 커피--- 한잔 가지고는 안되겠는데, 그럴 수 있다면 곱배기로 줘요. 그리고 선생님 안주하실 것 콩하고--- 또요 선생님?
[동숙] 콩이면 됐지. 그런데 커피만 가지고 되겠나?
[나정] 곧 올걸요 뭐
[동숙] 음, 그렇군 (하고 초조한 빛을 감추려는 듯 담배를 꺼내 물고 성냥을 그어댄다)
[나정] (찬찬히 보다가) 선생님
[동숙] 음?
[나정] 여전하시군요. 왼손을 담밸 물고, 왼손을 성냥을 그어대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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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숙] (놀랜다) 응? 왼손으로? 내가 그런가? 왼손으로?
[나정] 늘 그러셨는걸요. 전에두
[동숙] 그랬었나? 어디 (하고 성냥을 그어 본다. 왼손이다. 두 사람은 웃는다) (웨이터 맥주와 콩을 담은 접시, 그리고 커피 잔을 갖다놓고 물러난다)
[나정] 제가 딸아 올릴께요.
[동숙] 아니, 내가 편해.
[나정] 고되지 않으세요? 이렇게 왔다 갔다 하시면?
[동숙] 시내 버스에 시달리는 것보다 뭐 더 고되달 건 없어. 게다가 이렇게 얼리자베스를 만나기두 하구 (두 사람 웃으며 잔을 기운다)
[나정] 선생님, 저 아무 소리나 해도 괜찮죠?
[동숙] (짐짓 정색을 하고) 그게 시집 간 첫째 권리라면 해도 상관없지.
[나정] 이렇게 왔다 갔다 하시다가 언니를--- 어마, 나 좀 봐. 그만 학교 때 버릇이라.
[동숙] (웃으며) 어서 계속해요. 나도 자넬 학교 때 제자로만 알고 있으니까
[나정] --- 언니를 잃어버리면 어쩌지요?
[동숙] (가볍게) 그럼 찾아 나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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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 어마, 말씀하시는 게 잃어버리기를 바라고 계시기라도 한 것 같아요.
[동숙] 그러지 않아도 한번 잃어버린 적이 있었어.
[나정] 네?
[동숙] 그 사람 나하고 싸움을 한 날 밤이면 테이블 밑으로 기어 들어가 웅크리고 자지. 그런데 한번은 내가 먼저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 갔겠다. 그 길로 그 사람 집을 나가더니 감감 소식이야.
[나정] 어마, 그래서요?
[동숙] 찾는 사람은 안 온다고 가만 놔뒀지. 그랬더니 나흘인가 지낸 뒤에 지게꾼을 앞세우고 들어서더군.
[나정] 지게꾼을 앞세워요?
[동숙] (해설피 웃으며) 지게꾼 등위에 테이블을 지웠더라니까.
[나정] 어마, 언니두.
[동숙] (정색을 하고) 그 날 밤부터 우린 각기 자기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가 자는 습성을 기르고 있다네.
[나정] (웃음 지으며) 별난 습성도 다 기르시네요, 그런데 설마 매일 밤 그런 습성을 감행하는 건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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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숙]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노인] 큰애가 당신한테도 그런 소릴 합디까?
[노파] 그 애가 내게 이런 저런 소릴 하니요. 어디?
[노인] 그 애가 올부턴지 에미를 모셔보겠다고 그럽디다.
[노파] (크게 놀랜다) 누구요?
[노인] 절 나준 사람 말이오.
[노파] 그럼 그 분이 살아 계셨단 말이우?
[노인] 산 사람이니 모시겠다는 거지.
[노파] 당신이 날 놀래게 하느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지요?
[노인] 왜 그리 놀래오? 당신은?
[노파] (끄덕이며) 그 분이 살아 있었구만요, 그럼-.
[노인] 나도 이번에야 알았소.
[노파] 이번에 아셨어요!
[노인] 모자지간에는 꽤 오래 전부터 교통이 있었던가본데--- (하고 쓸쓸한 빛으로 창 밖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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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조심스레) 그래 뭐라셨우?
[노인] (고개를 저으며) 지 핏줄을 모시겠다는데 내가 멀 뭐라겠소?
[노파] (진심으로) 잘 하셨우.
[노인] (혼잣소리하듯) 이제 부산엔 발 끊어야겠소.
[노파] 발을 끊다니요?
[노인] 그 사람도 그만한 나이가 됐으니 아들하고 살게 놔둡시다.
[노파] 그런다구 큰애가 가만있을 라구요. 당신도 말은 그러지만
[노인] 가만있지 않으면, 지금 내가 그 사람을 볼까?
[노파] 못 보실 건 또 뭐요?
[노인] (고개를 저으며) 세상엔 다시 보아선 안될 사람도 있는게요.
[노파] 내일 모레면 죽어 없어질 사람들이 뭘 보고 말고 해요.
[노인] 그만 둡시다. 그 얘긴
[노파] 그 동안 당신이 그 사람을
[노인] 그만 두자니까 그런다!
[스피카] (윙하고 전류가 통하는 소리가 들리고) 안내의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서울 청파동에 사시는 현영미씨에게 급전이 와 있습니다. 현영민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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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 취급소까지 오셔서 찾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 올리겠습니다. 서울 청파동에 사시는 현영민씨는 전보 취급소까지 오셔서 전보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동숙] (문득 생각난 듯이) 지금 누구라고 그랬지?
[나정] 누가요?
[동숙] 누굴 보고 전볼 찾아가라고 그랬지?
[나정] 청파동에 사는 현연--- 뭐라더라
[동숙] 현영미라고 그랬지?
[나정] 네, 현영미, 그랬던 것 같아요. (동숙은 생각에 잠긴 채 담배불을 비벼 끈다)
[나정] (조심스레) 선생님 아시는 분에요?
[동숙] 음?
[나정] 현영미라는 분
[동숙] (생각을 더듬어가며) 음--- 그러니까 그 여자를 영미로 아는 게 아니라 그 여자 남편을 알지, 친구니까
[나정] 아--- 네.
[페이지] 024 (대본에 페이지 잘못 기재)
[동숙] 분명히 그랬지? 청파동 현영미라고.
[나정] 네--- 왜요?
[동숙] (고개를 갸우둥하고) 그게 맹랑하단 말야. 청파동의 현영미라 이 여자가 3년 전에 산후가 좋질 않아서 죽은 여자라면 나정이는 곧이 듣겠어?
[나정] 어마 (눈을 깜박이다가) 그럼 그 여자가 아닌가 보죠.
[동숙] (고개를 저으며) 전번 달 언젠가두 이런 일이 있었지. 그 때두 오늘처럼 여기 혼자 앉아서 커피를 들고 있는데 (스피커를 가리키며) 저기서, 그 여자가 이름을 부르더군. 청파동의 현영미한테 급전이라구. (빙긋 웃으며) 꽤 놀랬지. 낮도깨비가 있다더니 이런 때를 두고하는 소린가보다 곰곰 생각을 하자니, 지금 자네 말처럼 청파동에 사는 동명이인이겠지 하는 편으로 굳어버리더군, 그래 곧 잊어버리고 창 밖을 보고 있는데 저것이 또 그 여자를 불러대지 않겠나. 얼마나 됐는데 또 부르더군--- 다른 사람이겠거니 하고 앉아있는 사람한테 자꾸 아는 사람 이름을 불러대면서 급전을 찾아가라니. 그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뒤집히고, 아는 사람. 3년 전에 죽은 청파동의 현영미, 그 사람이 찻간에는 없는 것이 분명하니 내가 받아 친구한테 갖다 주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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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서 전보취급소엘 갔지. 헌영미는 내 아내요. 몸이 좋질 않아 내가 대신 왔소 했더니 전보를 주는데 힐끗 봤더니 (손을 저으며) 놀라지 말게. 발신인이 나로 되어있지 않겠나!
[나정] 네? 선생님이요?
[동숙] 이동숙이라고 쓰여 있으니 내가 이동숙인 이상 나라고 할 수밖에
[나정] 어마. 무서워!
[동숙] 이것이 내가 친 전보란 말이지? 3년 전에 죽은 친구의 아내한테 친 전보란 말이지, 하고 내려보니 아무래도 기가 차더군. 친구한테 전하느냐. 그냥 없애버리느냐 꿍꿍거리는데 쿵쾅 쿵쾅 소란을 떨 길래 보니 한강 다리야. 에라 던져라 하고 창 밖으로 손을 내밀다가 내가 친 건데 뭘 하고 뚜껑을 따 보았지. 하루 앞 당겨 상경한다. 저번 장소에서 보기를 앙망한다. 이런 소견이더군.
[나정] 어마, 로맨틱하네요. (하고 어처구니없는 듯 웃는다)
[동숙] (웃음 지으며) 등이 오싹할 신파조지. 그런데, (정색을 하고) 그걸 버리려다가 힐끔 다시 보고는 정말 나둥그러질 뻔하질 않았나!
[나정] ---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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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숙] (나즉히 혼잣소리하듯) 하루 앞 당겨서 올라간다는 글귀 말이요. 그게 사실이었거든.
[나정] 잘 모르겠네요. 무슨 말씀이신지?
[동숙] 내가 늘 금요일에 올라가질 않나? 그런데 그날이 목요일이었거든--- (빙긋 웃음 짓고) 그 쏘피아 로렌 때문에 그렇게 되질 않았겠나.
[나정] 누구 때문에요?
[동숙] 영화관에 들어가 앉고 보니 쏘피아 로렌이 춤을 추는데 서울서 본 것이야. 그래 도로 나왔는데 어쩌자고 나온 것이냐, 두 발이 꿈쩍도 안 해. 그렇다고 술을 하잘 수도 없고, 그래도 내일까진 있어야지 연속강의가 있지. 달래고 달래서 두 번째 영화관 앞에 서니, 또 그 이집트의 스핑크스 만한 쏘피아 로렌이 입술을 내밀지 않나! 두 번째 쏘피아 로렌이라 이것두 봤던가? 알쏭 달쏭이야 어디 담배 한 대 타들어 가는 동안 결판을 내보자. 불을 붙여 물고 목을 잡아 빼고 눈싸움하듯 쏘아붙이는데도 그놈의 스핑크스, 그냥 요지부동이야. 담배는 손가락을 뜨끔뜨끔 물어뜯기 시작하고, 그러는데 시내 저편에서 빼-衁 하고 기적이 울리더니 연기가 모락 올라오더군. 아하, 저기로구나. 그 길로 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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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 빼서 올라타고 한잔 커피를 시켜 놓고 있던 참이었다네. (헤설피 웃고 스피커를 가리키며) 채 잔을 비우지도 못했는데 저 낮도깨비한테 꽉 물린 꼴이 되질 않았겠나.
[나정] (어이가 없어 벙벙한 채)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된 거예요? 그 전보 말에요. 지금 그 쏘피아 로렌 말씀을 하시니 이런 생각이 드는데 혹 누가 장난을 쳤는가보죠. 선생님이 역으로 가시는 걸 본 친구 분이 있었다거나, 아니면 열차에 그런 분이 있었다거나.
[동숙] 열차엔 없었지. 그러지 않아두 행여나 하구 앞뒤로 왕복을 해봤거든--- (빙긋 웃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 진범은 쏘피아 로렌이 아니냐!
[스피커] (윙하고 전류가 통하는 소리에 이어)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서울 청파동에 사시는 현영미씨에게 급전이 와 있습니다. 현영미씨께서는 전보 취급소까지 오셔서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동숙] (일어서며) 스핑크슨지 소피안지 이번에 이쪽에서 꽉 물어주지.
[나정] (엉겁결에 일어서며 숨죽이듯) 저두 같이 갈까요?
[동숙] 그랬다가 자네까지 홀려버리면 어찔려구. 장가 간지 여드레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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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를 낮도깨비한테 뺏겨버렸다면 그 신랑이 너무 가엾잖은가? 앉아 있어요. 내 곧 가서 전볼 가져오지.
[나정] 선생님.
[동숙] 음?
[나정] (빙긋 웃으며) 전보 취급소는 다음, 다음 칸이래요.
[동숙] 그놈의 전보 취급소 숫재 번쩍 들어 와야겠네. (두 사람 웃는다. 동숙이 무대 왼쪽으로 퇴장하는데 상기가 오른쪽에서 등장)
[상기] (잔에 맥주를 따르며) 피아노라. 경부선을 시속 백 킬로로 달리는 피아노란 말이지. 그 피아노 우리가 살까? 당신 생일이 언제더라? 프레센트로 하지. 자, 그럼 프레센트 피아노를 위해서 쭉
[나정] 출장 강의를 하시기 때문에 매주 화요일 밤에 내려가셨다가 금요일이 차로 올라가요. 월, 화, 토요일은 학교 강의를 하시구
[상기] (정색을 하고) 가만, 다시--- 뭐라고 했지. 지금?
[나정] 서울하고 대구에서 피아노를 가르치신 다구요.
[상기] 그럼 남도 천리를 매주 오락가락하신 단 말인가? 피아노를 등에 지구? 맙소사. 설마 돈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겠지?
[나정] 가엾어요. 저번 달 언젠가는 쏘피아 로렌한테 쫓겨가지구 하루 먼저 올라가시다가 낮도깨비한테 홀렸대요.
[상기] (어이가 없다) 다시 해 봐. 뭐라구? 쏘피아 로렌하구 낮도깨비가 어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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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구?
[나정] 지금 그 낮도깨비를 꽉 물어 오신다며 간 거예요.
[상기] (곤혹에 차서) 그 사람 피아노가 아니라 싸이코 아냐?
[나정] 오늘 금요일이 분명하지요?
[상기] (시계를 숫재 풀어주며) 당신도 증세가 있어. 우물쭈물하다가는 홀아비 십상인데--- 대체 어떻게 된거야? 밤새도록 카메라를 찍어대긴 했지만 홀아비가 될 작정은 아니었거든 (정색을 하고) 그 사람 진짜 교수야?
[나정] 이따 오시믄 물어보세요.
[상기] 쏘피안 뭐구, 도깨빈 뭐야?
[나정] 그건 저두 잘 모르겠어요. 아직 끝난 얘기가 아니예요.
[상기] 2막이 또 있나?
[나정] 전보를 가지고 오실 텐데, 그걸 보면 알게 될지 모르겠어요. 안 가져오시는 편이 좋지만.
[상기] 전보라니?
[나정] 삼 년 전에 죽은 여자한테서 온 거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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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삼 년 전에 죽은 여자가 전볼 쳐 보내?
[나정] 말하자면 그런 셈이 돼요.
[상기] (정색을 하고) 당신 증세가, 증세가 아니라 응급인데. 대체 어떻게 된거야?
[나정] 말한 대루에요.
[상기] 사실이야? 그 교수가 그런 소릴 해?
[나정] (끄덕이고 나직하나 분명하게) 좀 과장해서 말하는 게 당신도 어리둥절 하셨던가봐요. 가엾게 두 내게 자꾸 웃어 보이느라구 여간 애를 쓰지 않았어요.
[상기] 모를 소리야. 그런 소릴 해대는 사람두 뻔뻔하고.
[나정] (혼잣소리하듯) 저 괜히 이것 타자고 그랬나봐요. 당신 말대로 밤차를 탈 걸. 머리가 쑤시는 것 같아요. 이 커피 때문에 그런가봐.
[상기] 몸이 좋지 않아? 피곤한가? 진정제 줄까?
[나정] (버럭 언성을 높인다) 싫어요! 필름을 그렇게 먹여 놓구 또 약까지 먹일려구 그러세요? 약제사가 될지 테니스가 될지 아직 모르잖아요? 벌써 약제사 노릇을 하려고 들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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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잠시 표정을 살피다가) 그럼 저리로 돌아갈까?
[나정] (당황한다) 네? 아니오. 그럴 것까진 없구. 그저 좀 기분이 나빠요. 좋지 않은 일을 보게 될 것만 같구 (잠시 귀를 기울이는 듯 하다가 벌떡 일어서며) 그래요! 그게 좋겠어요. 자리로 돌아가요. 쎄코날두 몇 알 주세요. 먹구 한숨 자야겠어요. 왜 여태까지 그 생각 못했는지 모르겠군요! (하고 막 나서는데, 식당차 전체가 흔들리며 급정거하는 브레이크의 쇳소리가 따갑게 길게 끌리다가 뚝 멎고, 연결기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다금다금 멀어져 가고, 증기 새는 소리가 노인의 입파람 소리처럼 푸-푸 들리기 시작한다)
[나정] (신경질스레, 다급하게) 왜 이래요?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왜 멎어요?
[상기] 가만 있어 봐. (웨이터가 급히 뛰어나간다. 상기는 가까운 창으로 가서 <블라인더>를 올리고 상체를 디밀어 밖을 내다본다. 나정이는 병든 몸을 이끌 듯 힘없이 자리에 앉는다)
[상기] (탁자 위에서 카메라를 들고) 사람이 다친 모양이야. 내 다녀올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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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으로 뛰어나간다)
[나정] 사람이 왜 다쳐요?
[상기] 치었겠지.
[나정] 어디예요?
[상기] (소리만 들린다) 저 뒤야. (나정이가 뛰어 나갈 듯 몸을 일으키는데 노파가 가로막듯이 대들며)
[노파] 사람이 죽었대요?
[나정] 네, 아니오--- 아니에요. 다쳤대요.
[노파] 그럼 떨어졌나?
[나정] (힘없이 자리에 앉고) 아니요. 저두 잘 몰라요.
[노파] 그런데 이 영감이 웬일인가?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전보 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오? 색씨?
[나정] 거기 사정에 따라 시간이 걸리겠지요.
[노파] 그래두 이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텐데--- 그러게 내가 간다니까 부득부득 우기시더니 (하고 왼쪽으로 퇴장한다)
[나정] 저 할머니, 거기 가시거든요. 저 (하다가 고만둔다. 불안하게 서성거리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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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가 블라인더를 거두어 올려놓은 창으로 가서 밖을 내다본다) (무대 오른쪽에서 이동숙의 처 은주가 대빈의 팔을 기대듯이 끼고 등장한다.)
[은주] 아, 이렇게 한가한 줄 알았으면 진작에 올 걸 그랬네요.
[대빈] 파장이나 아닌지 모르지.
[은주] 해장이지요 (하고 웃는다)
[대빈] 이쪽으로 앉지 (하고 나정이가 앉았던 자리에서 斜線으로 보이는 자리에 앉는다)
[은주] 그런데 기차가 왜 섰죠?
[대빈] 좀 쉬어 가자는 게지 (하고 창 밖을 본다)
[은주] 정말 파장인가봐요. 아무도 없게.
[대빈] 지금 막 올라타누만!
[은주] 누가요?
[대빈] 저기 (하고 무대 오른쪽을 턱으로 가리킨다. 은주가 돌아보자 웨이터가 급히 등장한다)
[대빈] 파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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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터] 네. (하고 꿈벅한다)
[은주] 무슨 일이에요?
[웨이터] (우물쭈물하다가) 솝니다.
[대빈] 소라니?
[웨이터] (파장해서) 철뚝에다 매뒀던 모양인데, 놀래서 뛰었다나봐요.
[대빈] 앞서 뛰다 깔렸군.
[은주] 가엾어라.
(나정이가 창에서 얼굴을 거두다가 흠칫 놀랜다)
[나정] 어마, 언니!
[은주] (당황하여 일어서 나정이 자리로 오며) 어마, 이게 누구야? 나정이 아냐? 어쩐 일이지! 요 며칠 전에 식을 올렸다는 소릴 들었는데 지금 그 몸이 여기 있을 몸이 아니잖아?
[나정] 바야흐로 최전방 행이에요.
[은주] 어마, 그럼 돌아가는 중인가? 그래? 그런데 신랑은 어딨지?
[나정] (빙긋 웃으며) 그보다 선생님은 어디 계시지요?
[은주] (흠칫 놀라며) 선생님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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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 저런, 언니까지 그러시기에요? 선생님이 시치미 떼시는 건 내가 그만 꼼짝 당하고 말았지만 두 번씩이나 그렇게는 안될걸요?
[나정] (웃음 지으며) 글쎄, 언니, 조금 전에 선생님이 여기서 절 얼마나 놀리시겠어요. 언니를 보기 전까지만 해두 속이 언짢아서 혼났어요. 글쎄 너무 엉뚱한 말씀을 하시니 참말 같기두 하구--- 혼났어요. 정말!
[은주] (곤혹에 차서 조심스레) 선생님이라니? 그럼 집 어른이시란 말야?
[나정] 어마, 그럼?
[은주] (크게 당황하며) 그럴 리가! 괜히 그러지? 그럴 리가 없어!
[나정] 어마, 언니 왜요? 동행이 아니세요, 그럼?
[은주] 놀리느라구 그러지? 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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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은주] (정색을 하고) 그러니까 선생님이 이 열차에 타고 계시단 소리냐?
[나정] (앞의 맥주병을 가리키며) 이거 선생님이 조금 전에 잡수시던 거에요.
[은주]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럴 리가 없다니까! 모두 엉뚱한 소리야 쏘피아 로렌이니, 스핑크스니 해 가지구 엉뚱한 소리만 하구서는,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나정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은주를 바라본다. 은주는 문득 나정이를 살피듯이 보다가 겁에 질린 듯 속삭인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나정] 금요일이래요.
[은주] (부르짖듯이) 설마! 목요일이 아니구?
[나정] 목요일이요?
[은주] 응! (창 밖으로 고개를 디밀고 열심히 내다보고 있는 대빈에게 가서) 저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요?
[대빈] 응? 뭐랬소?
[은주] 오늘이 목요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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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빈] (껌벅이다가) 그런 것 같구만 (하고 창 밖으로 고개를 가져간다)
[은주] 목요일이라는데!
[나정] (탁자위에 있던 상기의 시계를 들어주며 힘없이) 금요일이에요.
[은주] (급히 그것을 본 다음 절망적으로) 이를 어쩌지! (나정이 맞은 편에 앉으며) 나정이 이 일을 어쩌지? 나는 오늘이 목요일인 줄만 알고--- 내일 올라오실 줄만 알고 그만 이렇게--- 이 일을 어쩌지?
[나정] (대빈을 보고 나서 조심스레) 그러니까, 선생님은 언니가 이 차에 타고 있는 줄 모르신 단 말에요?
[은주] (끄덕이고) 이런 적은 없었어. 이런 적은
[나정] 동행이 계세요?
[은주] 나정이 같으면 어떡하겠어?
[나정] 저분이에요?
[은주] (끄덕이며) 어쩔 수 없는 걸, 내 힘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벌써 모래 전부터 끊으려구--- 몇 번 죽어버릴까두 했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차라리 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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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 (겁에 질린 표정으로 속삭이듯) 어마 언니! 언니가 어떻게---
[은주] 몰라 나두 왜 내가--- (고개를 젓는다)
[나정] 선생님은 모르고 계세요?
[은주]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오늘 아시게 되겠지.
(이 때 디젤 기관차의 크랙션 소리가 멀리 들리고 무대 위에 미미한 반동이 있고 레일 마디마디 건너가는 달그락 소리가 점차 다급해지나가 미미한 소음으로 변한다)
[노파] (왼쪽에서 등장한다) 여기두 안 계신가? 이 영감이 어딜 갔나? 차가 떠나는데 어딜 갔나? (나정에게) 일루 안 지나 갑디까? 아까 여기 앉아 있던 영감 말이오.
[나정] 못 뵈었는데요.
[노파] 아까 전볼 치려구 가셨는데 가보니 없어요. 전보치는 사람 혼자 뎅그러니 앉아 있습니다. 그래, 그런 영감이 여기 안 왔었냐니까, 고갤 내둡니다. 영감이 전보두 안 치구 어딜 가셨누?
[나정] 잘못 아시고 그 넘어 칸으로 가셨는가 보죠.
[노파] 그 넘어는 화찹니다. 그러니 일루 안 갔으면 어딜 갔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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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 혹 제가 모르는 사이 지나 가셨는지도 모르지요.
[노파] 저, 내 가서 찾아 볼테니. 그 사이 오시거든 꼭 이르시우. 여기 꼼짝 말구 앉아 계시라구 일러주우
[나정] 네. (노파는 오른쪽으로 퇴장한다)
[웨이터] 저, 할머니 계산을 하셔야지요.
[노파] (소리만 드린다) 곧 와요.
[웨이터] (따라 나가며)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주셔야--- (상기가 카메라를 들고 들어선다)
[나정] (웃으며) 차에 탄 분이 갔으면 어딜 갔을라구
[상기] 저 두 사람 왜 저러지?
[나정]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잃어버렸대요.
[상기] 저런 할아버지께서 바람이 났나보군. 그 피아노 말야.
[나정] (숨죽이듯) 여보!
[상기] 사고 난 데서 카메라를 눌러대는데 누가 등에 손을 얹어. 그래 보았더니 그 피아노야.
[나정] (엉겁결에) 네? 선생님이요? (하고는 은주와 시선이 부딪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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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대뜸 한다는 소리가 알리바이가 절대 필요해서 그러는데 저 특급열차 앞에 설테니 사진 한 장 찍어 주겠소. 내 사례는 올릴 테니. 현상을 하거든 이 주소로 좀 부쳐주시오. 이러더군. 그래 셔터를 눌렀더니 그럼 안녕히들 가시오 하고 저쪽으로 가. 아니 기차가 곧 떠날텐데 어딜 가십니까? 했더니 전보가 날아갔어요. 전보가 날아가다니요? 아까 전보를 찾아 가지고 펴 보는데 그만 잘못 떨어뜨렸답니다. 그랬더니 그 놈이 바람을 타고는 비둘기처럼 확 날아가 버리질 않습니까 그래 어쩌나 하고 있는데 마침 기차가 서는군요. 안 섰더라면 뛰어내렸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하고 웃더군.
[나정] 그러구 가셨어요?
[상기] (끄덕이고 웃음 터지며) 그 사람 저만큼 가더니 돌아서 소릴 치는데 뭐라는 줄 알아? 오늘이 목요일이래. 목요일, 그러니 이 시계 날짜를 고치라는 거야!
[은주] 오늘이 목요일이에요? 보아요. 그 시계를 다시 봐요.
[상기] (시계를 보며) 금요일인데.
[은주] (정색을 하고) 그러니까 고치라는 것 아니에요. 오늘은 목요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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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허지만
[은주] (인자하게 웃으며 나즈막히) 선생님은 금요일에 올라오세요. 4년 동안 한 번두 어기신 적이 없어
요. 선생님은 오늘 이 기차에 타지두 않으셨어요. 다 두 분이 꾸며낸 얘기지요?
[상기] 꾸며대다니요?
[은주] (미소 지으며) 허지만 당신이 오시기 전까지만 해두 정말 이 차를 타신 줄 알고 있었어요! 글쎄 너무 엉뚱한 소리만 하니 그게 모두 참말 같기두 하구--- 당신두 그래요. 어쩜 선생님 목소리하고 그렇게 똑같죠! 놀랬어요. 정말 이렇게 놀래보기는 생전 처음이에요! 자! 그럼 다음에 봐요 (하고 대빈에게 가서)
[은주] 가십시다. 가서 말씀 드릴게 있어요.
[대빈] 벌써 시켰는데.
[은주] 이따가 와서 먹죠! 가요. 가서 말씀드릴 일이 있어요. 정말 재미있는 소리에요. 정말!(하고 웃으며 앞장서서 나간다)
[웨이터] (맥주와 안주가 든 접시를 들고 나간다) 왜 일어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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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빈] 이게 여자 변덕이라는 거네. 들어보게 재미 있다잖나! (하고 나간다)
[웨이터] 허지만 저 선생님--- (하고 어찌할 줄을 모르고 서 있다)
[상기] 그것 이리 가져와요. (웨이터는 기쁜 표정으로 맥주를 갖다 놓는다)
[상기] (나정이한테) 저 여자는 누구야?
[나정] 사모님이에요.
[상기] 그 피아노?
[나정] (끄덕이고 혼잣소리하듯) 저러던 분들이 아니었는데
[상기] 둘이 잘도 만났군 그래 (돌아서려는 웨이터에게) 아참, 오늘이 무슨 요일이요?
[웨이터] 금요일입니다.
[상기] 틀림없소?
[웨이터] 제가 올라가는 날짜가 월, 수, 금, 삼일이 랍니다. 내려가는 게 화, 목, 토구요.
[상기] (빙긋 웃으며) 그럼 오늘이 수요일인가 보구만.
[웨이터] 까짓거 월요일이든 수요일이든 제겐 상관없는 일입니다. 지금 이 기차가 올라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거든요 (하고 웃는데 노파가 오른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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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한다)
[노파] 여기 안 왔습니까? 우리 영감 말이우.
[웨이터] 못 봤는데요.
[노파] (나정에게) 대에서두?
[나정] 네, 할머니
[노파] 자리에 가 봐두 없어요. 어쩐 일인가, 이 영감이? 저 내 저쪽을 보고 올테니 오거든 여기 꼼짝 말구 있으라구 일러주
[나정] 네, 하지만 할머니, 이제 곧 오실 걸요 뭐. 힘 드실텐데 앉아 기다리시죠.
[노파] 맘이 편해야 앉아 있지. 영감이 오면, 꼭 여기 있으라고 일루. 내 금방 다녀 올테니
[나정] (빙긋 웃으며) 두 분이 숨박꼭질을 하는가 봐요.
[상기] (노파가 나간 쪽을 유심히 보며) 아냐, 아까 그 노인이 저 할머니가 찾는 노인인지도 몰라.
[나정] 노인이라니요?
[웨이터] 저두 분명히 보지는 못했지만 아까부터 그렇지 않은가 하고 생각든 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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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 (다급하나 조심스레) 노인이라니오?
[상기] 아까 사고난 거 말야. 노인이야.
[나정] (소스라치게 놀랜다) 어마!
[웨이터] 기관사 말이 앞서가는 사람이 없었다는 걸 보면 기차에서 떨어졌던가 보던데
[나정]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죽었어요?
[스피카] (윙하는 코트 음이 들리고) 안내의 말씀 올리겠습니다. 본 열차는 현재 시간 열 한시 이분 현재 김천 역 전방 3킬로 지점을 통과, 정착 역인 김천에는 앞으로 약 오 분 후인 열 한 시 칠 분 경에 도착할 예정으로 되어있습니다. 김천에서는 본 열차와 같은 특급 하행 열차와의 교행 관계로 오 분간 정차 하겠사오니 내리실 분이나 하행 열차에 볼일이 있으신 분은 충분한 시간동안 번잡을 피하시어 하차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나정] 교행이라니오? 무슨 소리죠?
[상기] 내려가는 열차하고 만난다는 소리야
[나정] 어마, 그래요! (신경질스레) 이 차 내리구 그것 탔으면 좋겠네 우리.
[상기] 도루 허니문이란 말이지? 그 싫지 않은 소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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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 그래요 네? 이 차는 싫어!
[스피카] (전류가 통하는 소리가 윙하고)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서울 청파동에 사시는 현영미씨에게 급전이 와 있으니 현영미씨께서는 전보 취급소까지 오셔서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