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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진리회 회보 71호
돌하르방 글 교무부
여주본부도장의 숭도문 앞길 양쪽에는 돌하르방이 서있다.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이 돌하르방은 벙거지형 모자에 부리부리한 퉁방울 눈과 커다란 주먹코의 해학적인 얼굴을 가지고, 두 손은 배 위아래로 위엄있게 얹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때 손의 위치에 따라 문신과 무신으로 구별되는데 붓을 잡는 오른손이 위로 올라가 있으면 문신(文臣), 칼집을 쥐는 왼손이 올라가 있으면 무신(武臣)이라고 한다.
돌하르방은 외세의 온갖 침탈과 자연 재해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온 제주도 섬사람들의 기개를 잘 보여주는 상징물로 현재 제주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옛날에 돌하르방은 ‘우석목(偶石木)’, ‘벅수머리’, ‘무성목(無聲木)’ 등으로 불려졌고, 『탐라지(耽羅誌)』 등의 문헌에서는 ‘옹중석(翁仲石)’이라고도 하였다. 이 옹중석이란 명칭은 중국 진시황제 시절 원옹중(院翁仲)이라는 장군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적군을 얼씬도 못하게 하였으므로 그를 상징해서 성문 밖에 옹중석이라는 석상을 수문장격으로 세운 데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또 모습이 불상과 흡사하여 ‘돌부처’니 ‘미륵’이니 하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불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지금도 돌하르방에 배례하며 기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돌하르방’이란 현재의 명칭은 ‘돌할아버지’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으로서 1971년 문화재위원회에서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채택된 것이라고 한다.
돌하르방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현재는 몽고의 영향을 받아 건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1273년(원종14) ~ 1305년(충렬31) 사이에 31년간 제주도는 몽고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아왔다. 이 시기에 몽고의 문화가 제주도로 유입되면서, ‘훈촐로’라 불리는 몽고 석상의 영향을 받아 돌하르방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학설은 돌하르방이 북방식 몽고의 모자와 동일한 모자를 쓰고 있는 사실을 잘 설명해 준다고 한다.
제주도의 돌하르방은 몽고지배기에 최초로 5기가 조성되었고, 그 후 1418년(태종 18)에 제주도의 대정현 성(城)이 축성되면서 성문 앞에 이 돌하르방이 옮겨진 후 추가로 7기가 더 만들어졌다. 1423년에는 정의현 성(城)이 축성되었는데, 여기에도 돌하르방이 12기가 조성되었다. 1754년(영조30) 제주읍성이 건설될 때에는 목사 김몽규에 의해 23기의 돌하르방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해서 제주도에 세워진 돌하르방들은 전부 47기인데, 대정현이나 정의현의 것들은 대부분 건립된 본래의 위치에 놓여있다. 제주읍의 것은 도시의 발달로 인해 모두 원래의 위치에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 중 2기는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으로 보내어졌다. 현재 제주도에 남아있는 돌하르방은 45기이며 평균 크기가 제주읍은 181.6cm, 정의현 141.4cm, 대정현 136.2cm로 제주읍의 것이 가장 크다.
돌하르방은 성문 앞에 세워짐으로써 성읍의 위치를 알려주는 기능도 하지만, 무엇보다 두 주먹을 불끈 쥔 모습으로 성내에 침입하는 잡귀나 잡인을 쫓아내는 역할을 하는 석상이었다. 단 한 가지의 불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성내의 주민들을 외부 세력으로부터 방어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해왔던 돌하르방처럼, 수도인들도 운수 받는 날까지 목숨보다 중요한 공부가 돌아가고 있는 도장을 잘 지켜나가야 하겠다.
출처: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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