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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심경』보다 140여년 빠른 시기에 출판된 책 찍어낸 고려 금속활자의 의미 |
김대환의 文響_ ‘證道歌字’ 진위논쟁이 남긴 것 |
▲ 사진1. 고려금속활자. | ||
2010년 9월, 12점의 작은 금속활자가 세상을 흔들어 놓았다. 남권희 경북대 교수가 수년간 연구해 발표한 것으로, 직지심경보다 140여년 빠른 시기에 출판된 『南明泉和尙頌證道歌』라는 책을 직접 찍어낸 세계최초의 ‘금속활자’였기 때문이다. 발표당일 필자는 발표현장에서 금속활자(證道歌字)를 실견했으며 수십 년간 문화재를 연구한 경험으로 그 遺物에 대한 정리를 바로 할 수 있었다. “땅속에서 출토된 지 얼마 되지 않은(수년이내) 금속활자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유일한 고려시대의 활자인 ‘’자와 같은 형식이며 모두 眞品이라는 것”이다. ‘ ’활자는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이왕가박물관(편집자주: 1909년 창경궁 명정전 일원에 식물원, 동물원과 함께 박물관이 설립돼 11월 1일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일제강점기에 이왕가박물관으로 개칭됐으며 1938년 이왕가미술관으로 바뀌었다가 해방 뒤에는 덕수궁미술관으로 존속하다가 1969년에 국립박물관에 소장품이 통합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일본인 골동상에게 12원을 주고 매입한 것으로 출토경위는 알 수 없다(개성의 무덤에서 출토됐다고 전해 오지만 고려왕궁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됨). 필자는 남권희 교수의 발표 이전에 이미 지인의 감정의뢰를 부탁받아 같은 계통의 금속활자를 확인한 터였고(사진1.필자가 직접 조사한 고려금속활자) 그래서 발표된 금속활자의 진위여부를 바로 결론내릴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남 교수에 의해 발표된 금속활자들은 진위공방에 휘말려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관계당국 역시 적극적인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고 방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 5년 동안 남 교수를 중심으로 김성수 청주대 교수 등은 꾸준한 서체연구와 국내외의 학술발표로 체계적인 연구를 거듭했지만, 이것을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로 먼저 인정한 것은 해외 쪽에서였다(2012년 미국 버클리대 동아시아도서관·한국학중앙연구원 공동 국제학술회의).
반면에 僞作이라고 주장하는 이상주 중원대 교수는 “서법적으로 한 글자도 같지 않다”라고 말로만 주장할 뿐이고, 천혜봉 성균관대 명예교수 역시 처음에는 위작제기를 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언급이 없다. 문헌정보학자인 조형진 강남대 교수는 금속활자의 부식상태를 설명하면서 위작이라고 주장했으나 사실은 출토 금속유물의 상태를 정반대로 알고 있었다. 학자는 말보다는 체계화된 논문으로 자기주장을 발표할 수 있어야 한다. 위작의 증거를 체계적으로 입증하지 못하면서 말로만 떠드는 것은 당연히 인정받지 못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우리민족의 문화유산에 크나큰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서지학자가 아닌 필자가 봐도 이 금속활자들과 증도가자의 유사성이 많은데, 한 글자도 같지 않다고 억지주장 하는 것은 창조적이고 뛰어난 우리의 선현들을 너무 경솔하게 생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지난해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경북대 산학협력단에 ‘증도가자 기초학술조사연구’ 연구용역을 의뢰했다. 금속활자의 성분분석, 활자의 서체분석, 활자에 묻어있는 먹의 탄소연대측정으로 나눠 분야별 전문가 32명이 참여해 심도 있게 연구를 진행했다. 금속의 성분분석 만으로는 제작 년대를 정확히 알아내기 어렵고, 서체분석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날 수 있어서 반론의 여지가 있다. 그래서 탄소연대측정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결정적인 방법으로 활용된다. 탄소연대측정은 세계적으로 95%이상의 정확도를 인정받는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금속활자 획 사이에는 당시 출판에 사용하던 먹과 오랜 기간 땅속에서 침윤된 흙이 뒤엉켜있었다(사진2).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다. 서울대 기초과학공동기기원, 국책기관인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일본의 탄소연대측정 전문기관인 일본 팔레오라보(Paleolabo)연구소에서 활자에 묻은 먹을 채취해 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모두 서기 1100년(高麗, 肅宗) 전후로 금속활자의 제작시기를 확정지을 수 있게 됐다. 독일 구텐베르크의 활자보다 약 250여년 앞서는 것이다. 당시 고려국은 세계적인 고려청자 생산의 절정기로 문화의 황금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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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된 증도가자의 대부분은 고미술품 상인이 소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유물의 출처나 소장경위가 명확하지 않다. 밝히고 싶지 않은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또 하나의 약점으로 문제 삼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문화재의 본질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문화재는 출토경위나 소장경위, 소장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변하는 게 아니다. 後人들이 그들의 입맛에 맞게 그렇게 설정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문화재의 근본적인 가치는 결코 변할 수 없다. 그러한 이차적인 이유에 매달려서 세계적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의 위상에 해를 끼치면서 어떤 득을 얻겠단 말인가.
국가지정문화재(국보, 보물)중에 출처가 확실한 매장문화재가 과연 몇 점이나 될까. 학술 발굴 이외의 모든 지정매장문화재는 출처가 불명확하다. 즉 어디서 어떻게 출토됐는지 모른다는 것이다(국보 제68호, 국보 제136호, 국보 제219호, 국보 제222호, 국보 제253호 외 수백여점이 그렇다). 그럼에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는 이유는 이차적인 이유보다는 문화재의 내재적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국외에서 반입한 우리나라 문화재라면 문화재 지정을 더욱 서둘러야 한다. 국가지정문화재의 가장 큰 의의는 문화재의 소유권이 개인이나 일반 단체에 있다해도 영원히 국가의 감독과 관리를 받게 돼 잘 보존될 수 있다는 데 있다. 문화재 보존은 발굴이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남권희 교수가 학계에 소개, 발표했던 금속활자는 그동안 5년이나 우물쭈물 방치돼 있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관계당국에서 뒤늦게나마 연구용역을 발주해 발표된 증도가자와 금속활자가 모두 고려시대의 진품으로 확인된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불필요한 진위논쟁을 끝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꼭 집고 넘어가야할 것은 그동안 줄기차게 위작을 주장 했던 전공자들의 태도다. 물론 새로운 유물에 대한 견해는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분석도 없이 섣부르게 ‘위작’이라고만 주장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살며시 꼬리만 내린다고 그들의 행위가 감춰질 수 있을까. 그동안의 잘못된 주장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반성하는 이들이 있을까. 先賢의 문화재를 잘못 평가한 결과는 평생을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잊지말아야할 것이다.
2010년에 청주 고인쇄박물관은 증도가자로 추정되는 고려 금속활자 7점을 구입 소장했다고 발표했다. 금속활자의 진위논란이 한창일 때인데도 불구하고 공공기관에서 용기를 내어 구입 소장했다는 것은 대단히 잘한 일이다. 고인쇄박물관의 확고한 의지와 소명의식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적어도 7점의 고려금속활자를 공공기관에서 안전하게 확보한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권희 교수의 공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단순한 금속조각으로 역사의 기억 속에서 망각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개성의 고려왕궁터(滿月臺)에는 잔여분의 금속활자들이 후손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중단된 남북공동발굴이 재개돼 하루속히 세상의 빛을 보게 되길 바란다. 世界 最古의 금속활자 책인 『直旨心經』과 세계최고의 금속활자인 ‘證道歌字’가 모두 우리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인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