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동의 이미지는 석유와 전쟁의 양대 이미지로만 생생하게 각인되어 온바, 중동의 획일적 사고관을 다채롭게 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진 시점에 있다. |
美國의 이라크 사태 개입에 가일층 상시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는 中東! 한시도 월드뉴스의 헤드라인을 벗어난 적이 없다.
특히 아랍국과 이스라엘간 세기의 반목과 갈등은 미국과 아랍국간 대리전 양상으로 비화된바, 회교와 기독교 대립 구도라는 종교전 양상으로까지 치닫으면서 증오와 테러의 불길을 거세게 불러일으키고 있다.
막대한 석유자원의 보고이면서 고대문명의 중핵을 이루었던 중동의 인식은 이렇듯 전쟁과 테러의 이미지로만 먹칠된 상태이다.
이스라엘 현대사를 심층 조망한 ‘격동의 이스라엘 50년’ 著者이기도 한 소정현 기자는 중립적 시각 하에 중동의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제반 전 분야를 세밀 투시할 것이다.독자 제현들의 적극적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편집자 주>
지중해 ‘헬레니즘문명’ 여명기 맞아 ‘多民族 포용’ 고대중동 최후 제국
페르시아 제국 태동기원 ‘아케메네스’로 소급 마케도니아 알렉산더대왕 그리스군에 대종말
다리우스 1세때 황금기 ‘초유 3권분립’ 대위용 크세르크세스 1세는 ‘구약성경 에스더서’ 등장
▲ 페르시아 대제국은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 서쪽으로는 그리스 북부, 남쪽으로는 이집트까지 이르렀다. | |
제국을 통칭할 때면, 응당 하나의 지역, 하나의 국가를 뛰어넘어 다른 거대한 세계, 상이한 민족, 이질적 국가를 포괄하는 응축된 헤게모니를 일컫는다. 일찍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사통오달의 천혜 전략적 요충지로서 농업경제와 교역경제가 융성한 가운데 여러 민족과 국가 간 끊임없는 각축전 하의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 여러 제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여기에서 페르시아 제국(Persian Empire)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마지막 주자로서 그 소임에 충실하였다.
▽ 고대 중동의 마지막 제국
고대 페르시아는 기원전 550년경에 세워져 331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당한 제국이다. 그 연원을 자세하게 추적하기로 한다.
BC 815년경 이란 민족의 기원되는 무리들이 ‘우르미아호’(Urmia 湖)로부터 자그로스산맥을 가로질러 남하, 수사(Susa) 북동쪽에 있는 ‘파르수마슈’에 정착하게 된다. 이후 BC 700년경 이들은 다시 남동 방면으로 이동하여 새 영토를 확장하고 이를 ‘파르사’(Parsa : 현재의 fars)라고 하였는데,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이 지방 명에서 유래한다.
메디아 인과 동시에 이란고원으로 침입하여 정착한 페르시아인은 10여 부족으로 나누어 있었는데 부족의 연맹 장으로 아케메네스(Achaemenes)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페르시아를 아케메네스의 페르시아 제국이라고 하는 것은, 그 후 여러 왕조와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아케메네스의 아들 ‘테이스페스’는 ‘파르수마슈’뿐만 아니라 ‘파르스’지방을 통괄 통치하여 ‘안샨왕’으로 알려진다. 이윽고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기반을 닦게 되는 그의 손자인 키루스 2세 시대(Cyrus II, BC 585∼BC 529, 구약성경 역대하에 기록된 고레스 왕을 지칭)가 도래한다. 키루스는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 1세(Cambyses I)’와 메디아(이란 북부 지방) 여인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어머니는 메디아왕국의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네인데, 생후 곧 산중에 버려져 이리의 젖으로 자랐다고 한다.
▲ 이스라엘 유대인에 관용정책을 베푼 키루스 대왕 | |
키루스 유년 시절에는 페르시아가 메디아 속국이었으나 BC 550년경 키루스는 메디아의 수도 ‘에크바타나’를 점령하여 메디아 왕인 자기 외할아버지 ‘아스티야게스’를 물리치고 왕좌에 오르면서 명실 공히 페르시아 제국의 기초를 다진다.
이어 키루스 2세 대왕은 에게 해의 통상로를 장악하여 거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던 ‘리디아’를 낙타부대로 급습하여 들어갔는데 기마병으로 맞선 리디아는 결국 무릎을 꿇고 만다. 페르시아 맞서 동맹을 체결하고 대항한 카르디아·리디아·이집트 가운데, 그는 우선 리디아(Lydia,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 소아시아 서부 지방에서 번성하였던 왕국)를 쳐서 수도 사르디스(성경은 사데)를 함락하고(BC 546년), 소아시아 연안의 많은 그리스계(系) 식민도시를 수중에 넣었다.
키루스 2세는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 전역을 순식간에 정복하면서 바로 인근 지역으로 최강의 제국으로 군림했던 일명 신바벨론과의 전투에서 극적 승리하면서 페르시아를 중동고대사에서 최대 최후의 대제국의 반열에 올려놓는다.(538 BC)
키루스는 BC 529년 우즈베키스탄 북쪽에 위치한 아랄 해 근처에 있는 ‘마사게테(Massagetae)’라는 나라를 침공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그의 유언대로 그가 페르시아를 호령하면서 기거했던 ‘파샤르가데’에 묻히게 된다.
▲ 고대 이집트 수도 멤피스를 점령하여 오리엔트를 평정한 캄비세스 2세 | |
키루스 생전에 성취할 수 없었던 이집트 정복은 그의 장자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529∼521 BC)에게 승계 되었다. 그는 동생을 암살하여 내분을 처리하고 부왕의 훈련된 군대를 이끌고 가나안을 지나 이집트를 침입하여 수도 멤피스를 점령하여 오리엔트 통일의 꿈을 실현하게 된다.(525 BC) 그러나 캄비세스는 이집트에서 급거 귀환 중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메디아 출신의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의 제사장인 가우마타(Gaumata)가 암살된 캄비세스의 동생 바르디아(Bardiya)의 이름을 참칭(僭稱)하여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왕으로 추대되면서 왕년의 메디아의 세력 만회를 꾀하였다. 캄비세스는 이 변고의 소식을 접하고 서둘러 본국으로 향했으나, 도중 시리아에서 실의한 나머지 자살하였다 전해진다.
▽ 다리우스 대왕때 최대 전성기
▲ 고대 페르시아 제국을 최대의 반열에 올려놓은 다리우스 대왕 | | 캄비세스에게는 후사의 부재로 그와 함께 이집트에 원정했던 그의 삼종제(8촌 동생)인 다리우스1세(Darius I, 521∼486 BC)가 즉위하여 페르시아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다리우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패권을 차지할 절호의 기회라고 간주하고 6명의 경호대원과 함께 신속히 가우마타와 그의 군대의 응징에 나섰다. 그는 곧 가우마타를 제거하고 6명의 경호대원의 추대로 페르시아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러나 다리우스 부임 초기에는 반란의 불길이 워낙 거세어 페르시아 제국의 모든 나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다리우스 대제는 그의 즉위 1년 동안 반란들을 진압하는데 전력투구하였다. 그의 첫해에 9번의 전쟁을 치루고 9명의 반란군 대장들을 처형하였다.
BC 518년∼BC 510년에 걸쳐 인도의 펀자브 지방, 소아시아의 여러 그리스 식민폴리스를 정복하고, 보스포러스 해협(터키해협)을 건너 발칸반도의 트라키아(Thracia, 발칸반도 동부 일원에 걸쳐 있으며, BC 2000년경부터 도나우강·흑해·에게해로 둘러싸인 지방)를 지나 국토의 북변을 자주 침범한 스키타이인(Scythian, BC 6세기~BC 3세기경 남부 러시아의 초원지대에서 활약한 최초의 기마유목 민족)의 응징에 나섰다.
다리우스 1세는 BC 513년 도나우강을 건넜으나 스키타이의 후퇴작전과 후퇴하면서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일명 초토작전에 고전하여 스키타이를 멸망시키지는 못했으나, 우랄 통상로를 확보하였고 마케도니아에 종주권을 인정받게 된다. 이어 에게 해(Aegean Sea) 흑해(黑海, Black Sea)로의 진출을 노린 다리우스는 BC 492년과 BC 490년 두 번에 걸쳐 그리스로 원정 길에 오fms다.
사위에게 지휘를 맡긴 첫 번째 전쟁은 중도에서 실패했지만 트라키아를 확보하였고, 두 번째는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의 중장보병의 밀집대형에 밀려 그리스 전역의 지배는 실패하였지만 많은 폴리스(도시 국가)를 영토로 편입하였다.
다리우스는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 서쪽으로는 그리스 북부, 남쪽으로는 이집트까지 속령으로 삼음으로써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에 걸친 대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여 대위용을 이루게 된 것이다. 현대의 이란, 이라크, 파키스탄, 그리스 북동부, 터키,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아프가니스탄, 이집트 등을 두루 포괄한 셈이다. 다리우스 1세 시절의 페르시아 제국이 지배한 인구는 2000만 명으로 당시 세계인구가 1억명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페르시아 제국은 당시 세계인구의 5분의 1을 호령한 셈이다.
▽ 제국 쇠퇴기 통치의 왕들
최황금기를 구가하던 다리우스 1세 이후 페르시아 제국의 국운은 점점 쇠락을 길을 걷게 된다. 이후의 페리시아 제국을 다스렸던 왕들은 다음과 같다. 크세르크세스 1세(성경은 아하수에로 왕), 또 그 다음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성경은 아닥사스다), 크세르크세스 2세, 다음은 다리우스 2세, 다음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BC404∼358), 다음 왕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에 이어 다리우스 3세로, 이 다리우스 3세에 이르러페르시아 제국이 종말을 고했다.
다리우스 1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 BC 486~BC 465)는 장남은 아니었지만 부왕의 유지(遺志)를 따라 그리스와 전쟁을 재차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궁정 내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이어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Artaxerxes I, 464∼424 BC)때 아테네 장군 ‘키몬’(Kimōn)과의 평화체결로 그리스 원정의 결말을 보게 된다.(BC 449)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2세(Xerxes II)는 재위 수십 일 만에 암살되었고, 동생 다리우스 2세(Darius II, BC 424~405, 19년간)가 왕위에 오른다. 이 무렵부터 궁정의 내분과 지방의 반란이 더욱 극성을 부리면서 국력이 극도로 쇠퇴하게 된다.
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Artaxerxes II)가 즉위한 무렵 당시 소아시아의 장관이었던 동생 키루스가 그리스 원병(援兵)을 얻어 왕위 찬탈을 시도했으나 바빌론 전방(前方)에서 전사하였다. 다음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Artaxerxes III) 시대에는 이집트의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이를 가까스로 진압하기는 하였으나, 다리우스 3세((Darius III, BC 336~BC 330) 즉위 무렵, 필리포스 2세(Philippos II, BC 382~BC 336)에 이어 왕위에 오른 마케도니아(Macedonia)의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투스((Hellespontus, 現 다르다넬스 해협, Dardanelles)를 건너 페르시아 제국에 깊숙이 동진(東進)하였다.
BC 331년 아르벨라 전투에서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대군을 격파하고 바빌론시에 입성하였다. 결국 BC 330년 다리우스 3세는 신하인 빅트리아 총독인 베소스에게 암살되어, 페르시아제국의 대종말을 고하였다. 이 싸움 이후로는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북서 인도에 걸쳐, 아케메네스왕조의 영토 전체가 완전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비참하게유린되었다.
대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은 인류사적 일대 전환점을 이루었다. 바야흐로 고대중동의 오리엔트 문명의 주도권이 고대 유럽의 모체격인 지중해의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Helleism 330∼31 BC)로 넘겨진 것이었다.
▲ 페르시아 제국 문명의 응축체라 할 수 있는 ‘페르세폴리스’ 여름 궁전 | |
▽ 중앙집권제 기반 최초로 다져
다리우스 1세에 이르러 페르시아 제국은 세계역사상 초유로 전제군주제를 기반으로 하는 중앙집권제를 이루었으며, 23개의 행정군․구에는 행정장관을 파견하고, 각지역의 수비를 관장하는수비대 대장으로 군장관을 임명하여 상호 권력을 견제하였으며 행정감찰관을 파견하여 감시하는 3권분립체제를 갖추었다.
다리우스 대왕의 진가는 각 주마다 사트라프(Satrap)라고 하는 총독을 파견하여 징세(徵稅)와 병역(兵役)등의 행정을 위탁했고, 군사권은 군 사령관에게, 대왕에게 속속 보고되는 속주 통치의 기록사무는 비서관에게 부과하는 등 권력 분산을 도모하였다. 또한 이들 사트라프의 행동을 감시하고 중앙과 연락을 담당하는 '왕의 눈'과 이를 보좌하는 지방의 '왕의 귀'를 두었다.
▲ 전제군주의 중앙집권제 초석인 사트라프(총독제). 사트라프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 |
중앙집권의 필수적 요체인 교통에 순풍을 달기 위해 수도 수사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사이에는 전장(全長) 2,400km의 "왕의 길"(王道)을 건설하고, 20km마다 역참을 두는 역전제(驛傳制)를 채택하였다. 각 역에는 말을 두고 역과 역 사이를 릴레이식으로 연결하여 신속하게 중앙정부의 명령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도로는 평상시에는 상업교통로로, 전시에는 군용도로 이용되었다. 이 역전제(驛傳制)와 사트라프 제도는 그 이후 오랫동안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 통치제도로 답습되었다.
또한 다리우스 1세는 아람어를 제국의 공용어로 채택하였으며, 종교적인 관용과 다양한 지역의 민족과 문화를 수용하는 포용정책을 펼쳐 제국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중앙집권 체제 확립의 일환으로 화폐제도를 통일하고 금화(金貨)의 주조도 실시하는 한편, 페니키아 등을 이용하여 항해망까지 확보하면서 상품유통을 촉진시켰다.
덧붙여, 다리우스 1세는 페르시아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아 제국의 사상적, 이념적 통일을 추구하였다. 다리우스는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원명은 자라투스트라)의 주신(主神)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에 대한 숭배가 무척 깊었다. 불을 신성시하고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를 믿는다 하여 마즈다 예배교(마즈다야스나 : Mazdayasna)라고도 부르며, 한자로는 불을 숭배하는 종교라 해서 배화교(拜火敎)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현교(祆敎)라고도 불렀다.
다리우스는 전국 각지의 기술과 재료를 총 집결시켜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에 여름 궁전을, 에람(Elam)의 수사에는 겨울 궁전을 웅장하게 건축하였다. 그리스어로 '페르시아의 도시'라는 뜻인 페르세폴리스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신년 제례 행사시 왕이 각국의 사신을 접견하던 곳이었다. 그 궁궐은 다리오의 뒤를 이은 아하수에로에 의해 완성되었다.
여기에서 하나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성경속의 언급되는 페르시아 왕들의 존재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공헌과 업적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BC 538년 수도 바빌론을 무혈점령한 키루스(성경은 고레스) 2세 대왕은 BC 605년에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본토로 귀환시킨다.(구약성경 역대하 36:22∼23)
다리오 1세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1세가 바로 구약성경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아하수에로왕이다. 이곳의 주인공은 왕비 유대인 에스더와 대신 모르드개이다. 이 시기는 유다 총독인 스룹바벨에 의한 제 1차 포로 귀환(주전 537년경)과 학사 에스라에 의한 제2차 포로귀환(주전 458년경) 사이이다. 구약성경의 기록을 보면, 많은 유대인들이 아닥사스다 1세(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와 다리우스 2세의 통치 기간에 페르시아제국 내에서 요직을 맡고 있었다. 그 중에서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1세의 술관원이었다.(구약성경 느헤미아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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