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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재복
책이 나왔습니다. 일곱 번째 책이자 내 공부의 화두인 ‘몸’으로는 네 번째 책입니다. 출간 인사는 이 책의 머리말(몸의 소리를 들어라)로 대신합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쓴 지가 올해로 이십여 년째다. 이제 조금 글 쓰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등단 초기에는 글 쓰는 일이 즐거웠다.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가리지 않고 밤을 낮 삼아 글을 써댔다. 많이 쓸 때는 한 달에 열 편 가까이 쓸 때도 있었다. 이렇게 글을 많이 쓰던 시기에는 이 대학 저 대학 돌아다니며 강의도 많이 했고 또 지인들과 술도 많이 마셨다. 지금 되돌아보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내 자신도 의아해 할 때가 있다. 나는 종종 지인들에게 ‘대한민국 문단은 이재복이 글을 쓰는 잡지와 쓰지 않는 잡지로 나누어진다’고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나의 이런 행태에 대해 걱정과 두려움을 표하는 지인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러나 기세등등하던 나의 호기도 차츰 꺾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다. 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정신은 은화처럼 맑은데 육체는 흐느적거리는, 의식은 이것 해라 저것 해라 명령을 내리는데 몸은 그것을 못 하겠다고 아우성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정신과 몸의 이율배반은 내 삶과 글쓰기를 미궁 속으로 몰고 갔다. 이 과정에서 나는 정신의 비만함이 몸을 허약하게 하여 세계를 왜곡시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신이 비만해짐에 따라 몸은 허약해지고, 이것은 그대로 글쓰기의 왜소함을 불러왔다. 비만한 정신은 몸을 통해 드러나는 세계의 부피감과 무게를 온전히 지각할 수 없게 하여 글쓰기 자체를 관념의 덩어리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몸이 아파보고 고파봐야지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나는 몸을 살피고 모시게 되었다. 몸으로 육화된 말이나 글의 진정성과 그것이 드러내는 존재의 견고함을 신뢰하게 되었다. 말이나 글은 단순한 재주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의 육화된 과정을 거친 연후에야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몸의 육화된 과정이 하나의 예술의 형식으로 탄생한 것들을 주목하게 되었다.
시와 소설은 물론 음악, 미술, 영화, 연극, 무용에 이르기까지 몸은 그 가치 평가와 판단에 하나의 준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내가 특히 주목한 예술은 ‘판소리’이다. 판소리 역시 소리의 예술이지만 그것은 여느 소리와는 다른 성격을 드러낸다. 판소리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몸을 통한 수련 과정과 그 성취의 정도이다. 판소리의 소리는 맑은 소리(천구성)와 걸쭉하고 탁한 소리(수리성)가 결합된 것으로 이 두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삭임’의 과정이 전제되어야 하며, 이것은 몸을 통한 신산고초의 과정을 의미한다.
판소리의 소리는 온갖 전자 매체의 소리로 넘쳐나는 ‘지금, 여기’에서 소외와 소멸의 길을 걷고 있지만 존재의 진정성 차원에서 그것을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몸이 사라지고 가상실재의 속성을 지닌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살다보면 그곳이 가상 세계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이때 그곳이 가상 세계라는 것을 증명해 줄 가장 확실한 실재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몸일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전자 매체에 의해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으로 늘 전송된다. 하지만 몸은 우리가 숨 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전자 시대의 공간 내에는 몸 없는 혹은 몸 가벼운 말이나 글들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이 말이나 글들은 몸이 없어 부피감이나 무게감 없이 떠돌 수 있다.
그러한 떠돎이 전자 시대의 운명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어떤 부피감과 무게감 없이 부유하는 것이 얼마나 고독하고 불안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몸으로 느끼고 또 자각해야 하리라.
몸에 대한 나의 사유는 몸(2002)을 시작으로 비만한 이성(2004), 한국문학과 몸의 시학(2004)을 거쳐 이번에 출간하는 몸과 그늘의 미학(2016)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사유의 궤적은 일정한 변화와 부침을 동반하지만 그 토대를 이루는 중심 원리는 달라진 것이 없다. 몸에 대한 사유의 과정 내내 그 흐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몸을 통한 에코와 디지털의 통합’ 혹은 ‘에코와 디지털이 통합된 몸’이다. 에코와 디지털은 화합과 공존보다는 그 안에 불화의 요소를 더 많이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인간 개인의 차원을 넘어 인류 문명사 전반에 걸쳐 어떤 뿌리 깊은 딜레마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인식과 존재의 차원에서 커다란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에코와 디지털과 그것의 통합으로서의 몸은 이에 대한 사유의 과정이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만한 이성과 한국문학과 몸의 시학을 낸 이후 몸과 그늘의 미학이 나오기까지 십 년 넘게 숨 고르기를 한 이유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번 책에서는 몸에 대한 사유의 대상과 범주가 넓어졌을 뿐만 아니라 몸을 존재 넘어 생성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또 해석하려고 하였다. 시와 소설과 같은 문학은 물론 굿, 탈춤, 판소리 등과 같은 전통적인 연희 양식, 영화, 광고, 음악, 웹툰, 애니메이션, 누드 등과 같은 매체를 통한 대중문화 양식 그리고 집회(응원), 바이러스, 선, 한의학 등과 같은 사회, 종교, 의학의 분야로 사유의 대상을 확장하여 몸의 지형과 의미 지평을 탐색하였다. 이것은 이러한 다양한 대상들을 통해 몸이 에코와 디지털이 통합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볼 때 인류 문명은 비트bit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해 빠르게 구축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제Ⅰ장 ‘인간현상과 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피크노렙시, 속도, 촛불집회, 바이러스, 누드, 웹툰, 영화, 애니메이션 등의 경우 그것의 현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디지털’이다. 디지털로 인해 속도의 개념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변화했고, 자발적인 참여와 질서의 창출로 인해 집단지성이 형성되기도 했으며, 대중의 향유와 소통의 방식이 익명화되고 또 전 지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디지털에 기반을 둔 사회 문화의 변모는 곧 인간 조건의 변모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곧 인류 문명사의 대전환을 예고한다. 인간의 몸이 점점 사이보그화되어 간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하나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몸의 온전한 사이보그화는 생식 기능의 포기를 말한다. 하지만 생식 기능을 하지 않는 인간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인간이 호흡, 임신, 출산, 배설 등이 없이 실리콘 생명체와 같은 형태로 존재한다면 지금과 같은 형태의 인간과 역사는 단절되거나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런 사이보그의 출현은 그 가능성의 여부를 떠나서 자연이나 생명으로서의 현 인류의 존재성을 제대로 해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것을 어둠의 기억 속으로 추방한다는 점에서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인간의 몸이 지니는 생식성과 생명성은 아직 해명되지 않은 그늘의 영역을 은폐하고 있는 현 인류의 존재 조건이며, 그 심층에는 ‘산알’과 같은 내적 응축으로서의 생명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보면 제Ⅱ장 ‘산알과 우주 생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인간의 몸은 우리가 해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영적, 우주적 기능이 충만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몸 안에 있는 표층경락이나 심층경락은 단순한 물질적인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그 안에 ‘넋’이나 ‘얼’ 등 정신 에너지를 지니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것은 에코와 디지털이 통합된 인간의 몸이 복잡한 생성과 진화의 단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몸의 복잡성은 다양한 이미지와 상징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언어로 세계를 표현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언어는 몸을 기반으로 하며, 이 과정에서 지각의 방식이 결정되고 그것이 예술의 형식을 낳는 것이다. 인간의 몸이 이미지와 소리를 어떻게 지각하느냐에 따라 여기에 새겨지는 문신은 달라진다. 이때 중요한 것은 몸의 반성의 과정과 정도이다. 제Ⅲ장 ‘상징과 문신’에서처럼 몸이 일정한 발견과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때 상징은 깊고 풍부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가령 몸으로 하는 예술의 경우 어떤 세계의 발견과 의미의 깨달음은 지난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전통 양식 중에 굿이나 탈춤, 풍물이 그렇고 판소리가 또한 그렇다. 이 양식들은 연희의 형식도 독특하지만 지각의 방식도 독특한 데가 있다. 마당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관객과의 호흡을 통해 응어리진 한을 풀어내고 신명나는 살판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양식들이다. 제Ⅳ장 ‘지각의 방식과 예술의 형식’에서 주로 이야기하고 있는 연희 양식이라든가 선禪과 같은 방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시 양식은 우리 예술의 독특한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것들은 하나같이 내 사유의 화두인 ‘몸과 그늘’을 구현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술의 양식들이다.
몸은 가장 표층적인 감각부터 가장 심층적인 영의 세계까지를 아우르는 복잡한 생성체이다. 우리는 디지털의 세계를 감각으로 에코의 세계를 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지극히 단선적인 사고에 불과하다. 디지털 역시 영적일 수 있고 에코 또한 감각적일 수 있다. 디지털 세계에서의 집단지성의 구현은 감각을 넘어 정신의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고,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 소령이 보여주는 거대한 네트의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뇌는 단순한 감각 행위를 넘어 정신적인 반성 행위를 동반한다고 할 수 있다. 인류 문명의 흐름이 점점 디지털화되어 가고 있고, 인간 또한 점점 사이보그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인간은 그러한 세계가 하나의 인공 내지 가상 세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망각할 수 있다. 인간의 몸이 에코와 디지털의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몸적인 존재인 인간은 어느 한 방향(디지털)으로 자신의 존재성을 규정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된다. 지금 인간의 몸이 처한 이러한 존재성은 거대한 혼돈과 복잡 미묘한 흐름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우주의 그것과 닮아 있다. 몸이 하나의 우주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디 멀리서가 아니라 바로 여기 인간의 몸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내 공부의 의미 지평이 저 우주만큼 아득하고 또 아득하다. 우주라는 저 망망대해에 나갈 한 척 배를 마련해준 도서출판 b의 조기조 대표와 식구들께 감사하며, 꼼꼼하게 선생의 글을 읽어준 제자 김세아, 이융희, 이민주, 이황임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2016년 2월
뚝섬의 陋屋에서 저자
첫댓글 건강한 몸이 있어야 아름다운글도 쓰고 행복도 누리고~~ 행복하루 되셔요.
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