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8/22
내게 7박8일의 시간이 주어졌다. 이번에는 중국의 대련, 뤼순 그리고 하얼빈을 방문하고자 한다. 만주지역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다. 한때 우리나라의 영토였기도 했기에 아직도 그 유물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안중근의사의 자취를 찾아 보는 일이다. 대련주변에는 랴오둥 반도의 남쪽에 뤼순시가 있고 그곳의 뤼순감옥소는 안중근의사가 거사후 투옥되어 사형이 집행되었던 곳이다. 하얼빈은 안중근의사가 이등방문을 사살한 곳이다. 현장을 찾아 보고 30대 안중근의사의 집념을 느껴보고자 했다.
따롄에 도착하여 택시(35원)를 타고 호텔에 체크인을 하였다. 호텔은 생각했던 것보다 시설이 낙후하였다. ELONG.COM에서 보았던 사진과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체크인을 하자 마자 해야 할 일이 하얼빈가는 열차표를 사는 일이었다. 중국여행에서 가장 예측할 수 없는 것이 기차표를 사는 일이다.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열차표를 구입할 수 있다면 이러한 불편함은 없을 터인데 중국은 아직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
대련역사 모습
기차표를 사는 방법은 기차역의 매표소에서 구입하거나, 시내 곳곳에 있는 매표소에서 구입하거나, 호텔로비 등에 있는 여행사를 통해서 구할 수 있다. 여행사를 통할 경우에는 20-50위안정도의 수수료를 예상하여야 한다.
중국열차 시간표는 http://www.chinatravelguide.com/ctgwiki/Special:CNTrainSearch 에서 구간별로 자세히 알아 볼 수 있다. 중국어가 충분치 못할 경우에는 미리 구간별 열차번호와 시간 등을 별도로 메모하여 매표소에 제시를 하면 손쉽게 살 수가 있다. 예정한 열차표를 구입하지 못할 경우도 있으므로 그 대안도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한다.
마침 호텔 프론트데스크 옆에 1인이 근무하는 조그맣게 여행업무를 보는 곳이 있어서 기차표를 알아 보니 예정한 8/24일에 하얼빈 가는 열차표는 있는데 8/28일에 돌아 오는 표가 없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정쩌우에서의 경험을 생각해서 내가 직접 역으로 가 보았다. 마침 역에는 그리 많은 사람들이 없어 매표구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는데, 8월28일에 돌아 오는 표가 없단다. 하얼빈에 가서 구입하기로 하고 8/24 밤에 대련을 출발하여 8/25일 새벽에 하얼빈에 도착하는 표를 구입하였다.
미국에서 막 건너 왔기에 시차로 인한 피로가 몰려 들어 시내를 잠시 걸어 보고는 일찍 (5시) 근처의 한국식당에서 우거지해장국을 먹고 호텔로 들어 왔다. 호텔의 시설도 낙후되었고, 인터넷의 속도도 상당히 느렸다. 그래서 다른 호텔을 찾아 elong.com을 다시 뒤져 보았다. 통상 호텔을 정할 경우에는 역전을 선호하지 않았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지저분한 부분들도 많았었는데 이곳 대련역전은 그리 지저분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쇼핑센터가 함께 있어서 교통편도 좋을 것 같아 역 바로 옆에 있는 발해호텔을 예약하였다.
8/23/09
아침에 일어나서 호텔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별도의 요금(20원)을 내고 먹었다. 그런데 속이 좀 안 좋은 것 같다. 짐을 싸서 역전의 새로운 호텔에 체크인을 하였다. 프론트데스크에서 영어를 좀 하는 젊은이가 아직 방이 청소되지 않았는데 당장 치우고 체크인을 시켜 주겠단다. 그래서 올라 가 보니 단인방 (single room)이다. 약간 방이 작다. 내 기억에는 단인방은 방이 작아 답답할 것 같아 돈을 더 주고 분명 표준방을 예약을 했는데 이상하다. 다시 프론트 데스크에 가서 이야기 하니, 그 방이 필요하냐면서 바꿔 주겠다고 한다. 예약대로 방을 내 주지 않았던 것이다.
대련역을 바라보면서 오른쪽에 위치한 호텔
대련역 맞은편의 정경
역전 맞은 편 도로에서 주차관리 모습
시내를 벗어나 성해공원 근처에 가면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다. 그곳에서 뤼순가는 시외버스가 출발을 한다. 50여분을 달려 뤼순시에 도착을 하였다. 우선 점심을 먹고 (미국 소고기 국수 12+오이무침 5+물 2) 뤼순의 박물관으로 가 보았다. 뤼순 박물관은 두 개의 건물이 있었는데 그 중 한군데를 먼저 가보니 요금이 20원이란다. 중국에서 이제 박물관은 무료인데 왜 입장료를 받을까 의아해 하며 표를 구입해 들어갔다. 이 입장권이 두 개의 박물관에 다 사용이 되느냐 물으니 이 건물에만 입장권이 필요하고 다른 건물은 무료란다. 무엇이 다른가를 살펴 보니 아마도 그 건물에는 다른 건물에서 볼 수 없는 미이라가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뤼순박물관 전경
박물관에 전시된 미이라
또 다른 뤼순박물관
볍씨가 산동반도에서 대련반도를 통하여 한반도로 전달된 경로를 보여 주고 있다.
한 전시관을 지나는데 어느 중년의 박물관 근무자가 일본말로 내게 접근한다. 그래서 한국인이라 답변을 했더니, 반색을 하면서 잠시만 기다려 달란다. 그러더니 한국어 회화책을 가져와서 몇 개 단어의 발음을 알려 달라 한다. 그 책을 보니 정말 한국말은 중국인이나 영어 구사자들이 배우기에는 어려운 언어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발음을 도와 주고 돌아 섰는데, 종전의 경험에서도 박물관 근무자들은 아무래도 향학열이 높은 것 같았다.
그 박물관을 다 돌아 보고 마지막 코너인 쇼핑룸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뤼순 감옥에 대하여 물어 보니 그곳에 가는 버스 번호(3路)까지 2원짜리 조그만 뤼순지도에 적어 주면서 자세히 일러 준다. 다음 건물의 박물관에서 특이한 것은 젓가락의 전시였다. 동양인들의 젓가락 사용을 설명하면서 여러 가지 젓가락을 전시해 놓았다.
젖가락이 전시되어 있다
일아감옥구지 가는 길
일아감옥구지
일아감옥구지를 들어 서니 벽돌건물의 감옥소가 눈앞에 나타 났다
아래층에서 올려다 본 이층의 감방들
감방 내부를 들여다 보는 관광객들
감방 내부
죄수들의 수의가 걸려 있다
뤼순박물관을 나와 3路버스를 타고 종점에 가니 바로 옆에 일아감옥구지 (日俄监狱旧址)가 있었다. 입장료 25원을 내고 들어 가니 붉은 벽돌집으로 된 감옥소였다. 여느 감옥소의 모습을 보여 준다. 좁은 공간에서 8명정도의 인원이 수감되어 있었던 당시를 생각하니 오금이 저려 온다. 정말 열악한 시설에서 죄값을 치루어야 했던 당시 사람들의 고통이 조금이나마 느껴지는 듯 하였다.
단채 신재호선생의 기록이 감방앞에 붙어 있었다
시설을 돌아 보니 단채 신재호선생이 10년형을 받아 수감 중 1936년에 옥사하였는데, 그는 북한인으로 작가와 역사학자로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한 것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뤼순감옥을 방문하면서 가장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안중근의사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는 국사범으로 분류되어 다른 수감자와 달리 특별히 당직간수부장의 바로 옆방에 수감되었다 한다. 다른 수감자들보다는 넓은 공간에 책상이 놓여 있는데, 간수부장이 안중근의사의 의연한 모습에 존경을 표시하였다는 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한글, 영어, 일어, 중국어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었다.
‘조선애국지사 안중근을 구금했던 감방‘ 안내판
"조선애국지사 안중근을 구금했던 감방
안중근(1979-1910)은 조선 황해도 해주부 사람이다. 1907년 조선의병운동에 가담하여 참모중장을 담당하였으며 1909년 "대한독립동맹"조직에 참여하였다. 동년 10월26일 그는 중국의 하얼빈역에서 일본제국주의 중심인물로 조선 초대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체포된 후 11월3일 여순감옥으로 압송되었으며 일본의 "국사범"으로 분류되어 간수부장 당직실 옆에 있는 이 감방에 단독으로 구금되었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에 안중근은 감옥 교수형장에서 순국하였으며 그때 나이 32세였다."
안중근의사가 구치되었던 감방. 안중근의사의 감방이라는 안내판을 관광객들이 읽고 있다.
감옥소내 한쪽 외딴곳에 위치한 사형집행장 (교형실)
사형집행실의 내부 전경. 위에 죄수의 목을 거는 밧줄이 걸여 있고 그아래로는 사각형의 구멍이 죄수를 기다리고 있다
죄수의 시체를 처리하기 위하여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시체를 담는 둥근 나무통이 놓여있다
둥근 나무통에는 형이 집행된 죄수의 시체를 쭈그려 담았다
감옥소의 저편 외딴 곳에 사형집행실(絞刑室)이 외롭게 서 있었다. 실내로 들어서니 죄수의 목을 거는 밧줄이 매달려 있고 그 아래에는 사각형의 구멍이 나 있었다. 죄수의 목이 밧줄에 걸리면 아래의 사각형의 널빤지가 밑으로 떨어져서 죄수의 몸뚱이가 대롱 대롱 매달리게 되어 있었다. 그 사각형의 구멍 밑에는 시체를 그대로 담는 둥근 나무통이 놓여 있어서 집행된 죄수의 시체를 쭈그려 담을 수 있었다. 이렇게 사형이 집행된 죄수의 시체는 둥근 나무통에 담겨져 다른 죄수들에 의해 운반되어 한쪽에 묻히게 된다.
안중근의사와 관련하여서는 옥사와 별도로 '安重根就義地'라는 조그마한 건물을 찾아 볼 수 있었는데, 이 건물의 창문을 들여다 보니 뭔가가 진열이 되어 있었는데 오늘은 굳게 닫혀 있었다. 뤼순감옥의 방문은 근세사를 흠뻑 느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식당의 내부 모습. 현대식으로 실내장식을 하고 손님을 맞이 하고 있다.
왔던 순서의 역순으로 버스를 타고 대련으로 돌아 왔다. 호텔에 돌아 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호텔 부근에 있는 "태능갈비"집으로 갔다. 한국사람이 사장이라 하는데, 고급스럽게 인테리어를 한 식당이었다. 메뉴를 보니 한국의 가격대를 보여 주고 있는데, 고객들이 상당히 많았다. 내가 주문을 한 돌솥비빔밥이 30원 (6,000원)이니 한국과 비교해서 그리 싼 가격은 아니었다. 고객에게 서브하는 종업원들이 아주 많아서 반찬 그릇이 비면 즉시 새것으로 바꿔 주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매출액은 한국과 비교할 때 그렇게 떨어 질 것 같지 않았다. 동일한 수의 고객이 왔다 하더라도 매출액은 비슷하다면, 비용면에서는 상당히 적을 것이다. 음식재료의 값이 그럴 것이고 특히 종업원의 급여는 한국의 5분의 1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인테리어와 점포 등에 대한 투자비용도 한국과 비교할 때 훨씬 적을 것 같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고급식당을 운영한다면 한국에서 보다 수익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게다가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인에 대한 인식은 아주 호의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중국으로 건너와 사업을 하는가 보다. 아침 7시에 문을 연다고 하니 아침도 이곳에서 먹어야 할 것 같다. 이날 호텔에서 먹은 것이 좋지 않아서 인지 속이 좋지 않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역사이야기로 모셔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