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오장환의 시를 꼽으라면 아래의 다섯 편이 아닐까 싶다. 딱히 내가 좋아한다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시인과 인연이 있고, 그 속에 어떤 시는 유머가 깃들어 있어 맘속에 두게 되었나 보다. 아래에 미리 옮겨 적어 본다. - 김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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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제(聖誕祭)
오장환
산 밑까지 내려온 어두운 숲에
몰이꾼의 날카로운 소리는 들려오고,
쫓기는 사슴이
눈 위에 흘린 따뜻한 핏방울.
골짜기와 비탈을 따라 내리며
넓은 언덕에
밤 이슥히 횃불은 꺼지지 않는다.
뭇 짐승들의 등 뒤를 쫓아
며칠씩 산속에 잠자는 포수와 사냥개,
나어린 사슴은 보았다
오늘도 몰이꾼이 메고 오는
표범과 늑대.
어미의 상처를 입에 대고 핥으며
어린 사슴이 생각하는 것
그는
어두운 골짝에 밤에도 잠들 줄 모르며 솟는 샘과
깊은 골을 넘어 눈 속에 하얀 꽃 피는 약초.
아슬한 참으로 아슬한 곳에서 쇠북 소리 울린다.
죽은 이로 하여금
죽은 이를 묻게 하라.
길이 돌아가는 사슴의
두 뺨에는
맑은 이슬이 내리고
눈 위엔 아직도 따뜻한 핏방울……
― 조선일보, 1939. 10. 24
종소리
오장환
울렸으면…… 종소리
그것이 기쁨을 전하는
아니, 항거하는 몸짓일지라도
힘차게 울렸으면…… 종소리
크나큰 종면(鍾面)은 바다와 같은데
상기도 여기에 새겨진 하늘 시악시
온몸이 업화(業火)에 싸여 몸부림치는 것 같은데
울리는가, 울리는가
태고서부터 내려오는 여운一
울렸으면…… 종소리
젊으디젊은 꿈들이
이처럼 외치는 마음이
울면은 종소리 같으련만은……
스스로 죄 있는 사람과 같이
무엇에 내닫지 않는가,
시인이여! 꿈꾸는 사람이여
너의 젊음은, 너의 바램은 어디로 갔느냐.
― 상아탑, 1945.12
강도에게 주는 시
오장환
어슥한 밤거리에서
나는 강도를 만났다.
그리고 나는
웃었다.
빈 주머니에서 돈 이 원을 꺼내 들은
내가 어째서 울어야 하느냐.
어째서 떨어야 되느냐.
강도도 어이가 없어
나의 뺨을 갈겼다.
一 이 지지리 못난 자식아
이같이 돈 흔한 세상에 어째서 이밖에 없느냐.
오 세상의 착한 사나이, 착한 여자야.
너는 보았느냐.
단지 시밖에 모르는 병든 사내가
삼동 추위에 헐벗고 떨면서
시 한 수 이백 원
그 때문에도 마구 써내는 이 시를 읽어보느냐.
一 1946. 1. 10 (『민성』, 1946. 4)
고향이 있어서
오장환
잠자는 약을 먹고서
나타샤는 고이 잠들고
나만 살았다.
나타샤는 마우재, 쫓긴 이의 딸
나 혼자만 살았느냐
고향이 있어서……
또다시
메르치요, 메르치요, 메르치요, 메르치.
매양 힘에 겨운 사무를 보고
점심 시간 지붕 위에 나오는 즐거움
나타샤의 어머니와 마주 앉으면
우리 옛날은 모조리 잊으십시다.
어두운 지붕 속에서……
엄마가 주무시던 방
높은 다락 안에서
능금이 썩는 향내에 잠을 못 한 밤이 있었습니다.
안개 낀 거리를 내려다보며
우리 다아만 눈물 속에
달큼한 입맛을 나눠봅시다.
나타샤와 나의 쓸쓸한 사랑엔
오직 눈물밖에 나눌 것이 없었느니
차디찬 방 안에
둘이서 웃기사 했소.
임자 없는 그의 생일날
스물하나의 기인 촛불을 쓰고
조선백지에는 붓글씨로다
나타샤, 베드로프나의 이름을 적어
고요히 사루어버립시다.
지난날의 풍습이지요.
고향이 있어서……
나타샤는 고이 잠들고
나만 살았다.
나 혼자만 살았느냐
고향이 있어서……
아버님
내가 혹시 고향에 가면, 그리고 그때가 겨울이라면
고이 쌓인 눈을 헤치고라도
평생에 좋아하시는 술. 고진음자 술.
그 대신에 성냥불만 그어도 불이 붙는 술.
웍카, 웍카
이제 와선
마우재의 화주를 뿌려 드리우리다. 고향이 있어서……
一 문장, 1940. 12 (여성 1938. 3)
첫겨울
오장환
감나무 상가지
하나 남은 연시를
가마귀가
찍어 가더니
오늘은 된서리가 내렸네
후라딱딱 훠이
무서리가 내렸네
(시집에 미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