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알기 시작하다 (4) - 생전 처음 하얀 사람, 까만 사람을 보다 뭐니 뭐니 해도 나의 세계관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1950 년 6·25전쟁이었다. 어른들 대화의 중심은 동네, 이웃 마을, 그리 고 아들딸들이 시집을 가고 장가들어 사돈집들이 생기면서 다른 면, 군, 도의 이야기가 오가던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6·25전쟁 이 발발하면서 어른들의 이야기가 북괴 빨갱이, 중국 뙤놈, 쏘련 오 랑캐로 확대되어 어린 우리도 그런 나라들이 있구나 인식하기 시작 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우리 눈을 놀라게 한 것은 UN군의 참전 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 가기 위하여 동네 골짜기를 벗어나 신작로로 나섰 을 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당시 동네 사람들이 이야기하던 하얀 피 부에 코가 큰 양코베기 서양 사람들이었고. 기절할 정도로 놀라게 한 것은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을 보았을 때였다. 어떻게 저렇게 까만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해가 안 되었다. 시골서 여름 강한 햇빛 아래서 일하다 보면 얼굴 128 우연 그리고 운명 팔다리가 검게 탄 사람은 보았어도 온몸 어느 구석 할 것 없이 검은 사람을 보다니 우리는 놀라서 보고 또 보았다. 동네 어른들은 검둥 이라고 불렀고 우리는 그런 검둥이가 신기해서 신작로에서 우두커니 서서 그런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조그만 지프를 타고 지 나가는 그들을 보면 무슨 벼슬이나 한 것처럼 기분 좋아서 집으로 오곤 했다. 오가며 이렇게 만나다 보니 간단한 말도 주워들었다. 헬로, 오케 이, 기브미 초콜릿, 검 등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들이 지나가 면 쫓아가며 큰소리로 지껄였고 그러면 그들은 가끔 초콜릿과 과자, 사탕 등을 던져 주었다, 처음 먹어보는 초콜릿의 맛,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것도 있다니…, 없어지는 게 아까워 조금씩 조금씩 빨아먹던 추억이 지금도 잊히지를 않는다. 그때까지 세상에서 가장 단 것은 꿀이었고 꿀도 말만 들었지 먹어 보지 못했던 우리로서는 그때까지 먹어보았던 가장 달콤한 것은 엿 이었는데 초콜릿은 엿과는 비교가 안 되는 맛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고 이 나라는 서 양에 있으며 서양 나라들은 부자나라고 하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라고 알고 있는데 까만 사람도 서양 사람이라는 데는 이해가 안 되었다. 사람들은 서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는데 나로서는 이해 가 되지 않는 게 많았다. 하얀 피부에 우리가 일 년에 한 번도 먹기 힘든 쇠고기를 매일 먹고 밥 대신 빵을 주식으로 한다는데 빵은 어 떻게 생겼을까 궁금했지만 그 누구도 빵을 먹어본 사람은 없었다. 제2부 우연 그리고 운명 2 129 서양 사람들은 당시 우리로서는 큰 동네에 가면 한두 집 볼 수 있 는 기와집에서 살고 집마다 자동차가 있다는 등의 이야기는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 이야기였다. 더구나 이층집도 없던 시골에서 몇십 층 집 이야기를 하는 데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꽃이 사철 피어 있고 자동차가 집집이 있고 일 년에 한두 번 먹기 힘든 고기를 매일 먹는다는 둥 그리고 빵을 밥 대신 먹고, 여자들은 뾰족구두를 신고 다닌다는 등의 이야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세상을 알아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여행이었다. 어디를 가든 걸어서 다니는 것밖에는 모르던 내가 어느 날 어머니와 버스를 타고 외가를 가게 되었다. 내가 탄 당시 버스는 엔진이 앞에 있는 버스였는데 나는 하도 신기해서 버스를 타고는 앞의 운전수석 옆에 서서 운전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운전사가 둥그런 핸들을 돌리자 차는 가기 시작했고 빵빵 소리도 질렀다. 차 가 가고 멈추는 것이 저 둥그런 핸들이 다 하는 것으로 알았다. 조금씩 성장하면서 버스에 이어 트럭도 타보았고 나아가 수원에 있는 삼촌 집에를 할머니와 같이 가면서 기차도 타보았다. 어느 날 십 리를 걸어가 야목이라는 들 가운데 있는 정거장에서 처음 기차를 보았을 때의 흥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중에 알 고 보니 내가 처음 탄 기차는 수인선 꼬마 기차였는데도 처음 보았 을 때 시커먼 기차가 검고 흰 연기를 뿜으면서 칙칙폭폭 하고 달려 올 때는 나는 무서워 뒷걸음쳤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 기차는 후 일 수원역에서 탄 서울행 기차에 비하면 기차도 아니었다. 수원에서 130 우연 그리고 운명 서울을 가기 위해 부산에서 오는 기차를 처음 보았을 때는 너무 크 고 우람찬 시커먼 기차가 역시 검고 흰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올 때 는 무서움에 어디론가 가서 숨고 싶었다. 저렇게 크고 무서운 기차 가 저렇게 빨리 달려오다니…. 그러면서 나의 시야는 마도 외가에서 수원 삼촌 집으로, 그리고 서울 고모 집으로 확대되면서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사 람 사는 방법도 농사지으며 사는 것이 전부로 알다가 장사하는 사 람, 자동차나 기차 운전해서 먹고 사는 사람, 선생님같이 학교에서 누구를 가르치거나 면사무소에서 사무를 보고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 등을 알게 되었고, 학교에서 사회공부와 지도를 보면서 세상은 넓고 사람도 많고 할 일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 세상이 이렇게 넓고 다양하다니…, 그런 세상을 내가 살아야 한다는 것에 흥분 같은 것을 느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세 상에 대한 흥분과 함께 두려움 같은 것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