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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ho 禪師列傳 |
대주(大珠)가 처음으로 강서(江西)에 이르러 마조(馬祖) 스님을 뵙고 예를 표하니,
마조가 물었다.
"어디에서 왔느냐?"
"월주(越洲) 대운사(大雲寺)에서 왔습니다."
"여기에 무엇을 구하려고 왔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마조가 말했다.
"자기의 보물 창고는 살펴보지 않고, 집을 떠나 먼 곳을 헤매고 다니면서 무엇을 하는가?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데, 그대는 무슨 불법을 구하는가?"
대주가 엎드려 절하고 물었다.
"무엇이 저의 보물 창고입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지금 나에게 묻고 있는 그것이 그대의 보물 창고다. 그 곳에는 온갖 것이 다 갖추어져 있어서 조금도 모자란
것도 없고 자유 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데 어찌 밖에서 헛되이 찾고 있는가?"
대주가 이 말에 크게 깨우치고, 자신의 근본 마음을 알았다. 그가 뛸 듯이 기뻐하며 깊은 감사의 절을 올렸다.
그 후 대주는 6년 동안 마조 스님을 섬겼다.
그 뒤 수업사(受業師)인 도지 화상(道智 和尙)이 노쇠해지자 돌아가서 그를 돌보았다.
백장이 떠나기 전에 마조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갔다.
백장이 오는 것을 보고 마조가 불자(拂子)를 세워서 들어올렸다.
백장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이 불자의 작용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그 작용과 떠나 있습니까?"
마조가 법상(法床) 모서리에 불자를 걸어두었다. 잠시 후 그가 백장에게 물었다.
"그대가 훗날 설법을 하게 된다면 무엇을 가지고 대중을 위하겠는가?"
백장이 불자를 잡아 세우니 마조가 물었다.
"그대는 그 불자의 작용 안에 있느냐, 아니면 불자와 떠나 있느냐?"
백장이 불자를 다시 법상 모서리에 걸어두었다.
바로 이 순간에 마조가 벽력같은 고함을 질렀다. 이 고함 소리에 백장은 사흘 동안 귀가 먹었다고 한다.
마니샤(Maneesha), 백장의 경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서언(序言)으로 몇 마디 해야겠다.
백장은 마조의 직계 제자였다. 그는 최초로 선원(禪院)을 정비한 업적과 돈오(頓悟)를 설파한
논문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대주를 이해하기 위해 첫 번째로 알아야 할 것은 깨달음은 오직 별안간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준비 과정은
점진적일 수 있지만 깨달음의 빛은 갑자기 일어난다. 씨앗을 뿌리기 위해 땅을 갈 수는 있지만 싹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터오른다. 싹은 점진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존재계는 돌발성(suddenness)을 믿는다. 이 존재계에서는 아무 것도 점진적이지 않다. 비록 모든 것이 점진적인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환상일 뿐이다.
예전에 과학은 모든 것을 점진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아이가 점차 어른이 되고, 청년은 점차 노인이 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원자 에너지 때문이다. 원자의
입자는 우리가 집에서 시장으로 가는 식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이것을 알았을 때 아인슈타인 자신도 의아해 했다. 원자의 입자는 비약(飛躍)한다. 이 점프가 너무나 엄청나서 아인슈타인은 이 현상을 가리키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야 했다. '퀀타(quanta:量子)'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양자 비약(quantum jump)이다. 이 말은 A 장소에
있던 입자가 갑자기 B 장소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A와 B사이의 경로를 통하지 않는다.
이 비약은 아주 이상한 현상이어서 A와 B 두 지점 사이에서는 입자를 볼 수 없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에게 존재계의 모든 것이 비약한다는 개념을 주었다. 그러나 이 비약은 너무나 미묘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매 순간 그대는 노년(老年)을 향해 비약하고 있다. 이것은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다. 매 순간 그대는 늙어가고
있으며, 이 비약 현상 사이에는 휴식이 있을 수 없다. 이 비약들은 너무나 가깝게 근접해 있다. 그러나 특히
궁극적 비약인 깨달음을 위해서는 준비가 가능하다. 그대는 명상할 수 있다. 가능한 한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의 중심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중심을 발견하는 순간 비약이 일어난다. 돌연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붓다가 나타난다. 섬광처럼 붓다가 출현한다.
이 출현은 점진적이고 부분적인 현상이 아니다. 대주는 돈오(頓悟) 사상에 크게 기여했다. 돈오는 너무나 비논리적이다. 만일 그대가 이 곳에서 시장으로 간다면 단계적으로 가야 한다. 힌두교의 원숭이 신처럼 하늘을 날고
산을 옮기거나,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점프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씩 가야 한다. 그대는 점차적으로 이동해야
한다. 붓다 오디토리엄(Buddha Auditorium)에서 사라져 순식간에 엠지 로드(M.G.Road)의 시장 통에 나타날
수는 없는 일이다.
실제의 삶에서 우리는 돌발적인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한다. 그대는 장미 나무의 봉오리가 갑자기 꽃이 되는 것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봉오리는 점차적으로 열린다. 아침에 봉오리였던 것이 저녁에 꽃이 된다.
우리는 이렇게 점진적인 현상들을 끊임없이 경험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사(禪師)들은 점진파(漸進派)에
속한다. 그들에게는 지금 당장 즉각적으로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생각으로 여겨졌다.
모든 것이 시간을 필요로 한다. 집을 꾸미고, 정원을 가꾸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은 그대의 불성(佛性)이다. 이 불성은 시간을 초월한다.
그대는 시간을 뛰어넘어 자신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본질은 언제나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백장은 선원(禪院)을 도입했다. 그 전에도 사찰이 있어서 소그룹의 사람들이 함께 기거하며 명상하고 경전을
읽곤 했다. 그러나 백장은 붓다가 되고자 하는 한 가지 목표에 전념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선원을 만들었다.
그 곳에는 경전도 없고 의식(儀式)도 없었다.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겠다는 한 가지 목표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했다.
왜 선원이 필요한가? 많은 사람들이 함께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가면 일이 더 쉬워진다. 왜냐하면 그대가
자신의 공간 속으로 홀로 들어간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 또한 제 각기 동일한 공간 속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것을 안다. 그대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두 번째로, 선원은 특정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것이 백장이 가장 크게 공헌한 점이다. 선원 전체가 단 하나의
열망으로 젖는다. 붓다가 되고자 하는 절박한 갈망이 선원 전체를 감싼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심으로
전념하면 어떤 에너지 장(場)이 형성된다. 이 에너지 장의 도움을 받으면 쉽게 마음 밖으로 빠져 나올 수 있다.
혼자서는 다소 어렵다. 물론 혼자서도 가능하기는 하다. 그런 사례들이 있었다. 하지만 흔한 일은 아니다.
선원을 도입했다는 것은 백장의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 장을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만 명의 산야신(sannyasin)들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갈 때,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혼자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보면 일만 명의 사람들이 함께 있다. 이 실험은 각자의 독방에서 혼자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실험은 열린 하늘 아래에서 행해진다. 같은 길을 가는 수 천 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에너지의 물결을
창조한다.
이런 분위기 안에서 붓다가 되지 않으려면 이 에너지의 장 전체에 대항해 싸워야 할 것이다. 흐름을 거슬러서
헤엄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붓다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된다. 이런 환경 속에서는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깊은 방하착(放下着)이 가능하다. 백장은 선원이라는 아주 과학적인 개념을 도입했다.
백장은 724년에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서 절에 가게 되었다. 어머니가 불상 앞에
절을 하자, 그가 불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것이 무엇입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저 분이 부처님이시다."
백장이 말했다.
"형상은 사람과 같아서 저와 차이가 없군요. 나중에 저도 부처가 되겠습니다."
백장의 유년 시절에 대한 이 짧은 일화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붓다는 어떤 식으로든 비범하거나 특별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비범하고 특별한 존재라면 붓다가 되려고 하는 하는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잃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평범하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특별하지 않다. 그들은 신의 화신(化身)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없다. 그들은 물위를 걸을 수도 없으며 죽은 나자로(Lazarus)를 살려놓을
수도 없다. 예수와 붓다를 비교해 보라. 붓다는 너무나 평범하고 소박하며 겸손해 보인다. 그는 군중과 쉽게 어울릴 수 있다. 반면 예수는 군중과 멀리 떨어져 있다......왜냐하면 우리는 물위를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기독교 주교가 이스라엘에 갔다. 그에게는 두 명의 늙은 랍비 친구가 있었다. 그가 랍비들에게 예수가 방문했던
성지로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물위를 걸었던 갈릴리 호수로 갔다. 랍비들이 배를 빌려
예수가 물위를 걸었던 지점으로 주교를 데리고 갔다.
주교가 랍비들에게 말했다.
"예수님은 유태인이었소. 당신들의 마지막 예언자이며 우리 기독교의 창시자이신 분이지. 당신들도 물 위를 걸을 수 있소?"
랍비가 말했다.
"누워서 식은 죽 먹기지."
그러나 주교는 이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소."
그래서 한 랍비가 배의 왼쪽으로 내려 물 위를 몇 피트 걸어가다가 돌아왔다. 주교가 기절초풍하여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말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오직 예수님만이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소. 그런데 지금 보니 유태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재주를 갖고 있는 것 같구려."
랍비가 말했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지도 않고, 그를 예언자로 인정하지도 않소. 우리는 마지막 예언자라고 주장한 그를 협잡꾼으로 몰아 처형했소. 하지만 당신은 예수를 따르는 분이 아니오? 그러니 예수의 명예를 걸고 한번 물 위를 걸어보시오."
이것은 커다란 도전이었다......주교가 배의 오른 쪽으로 내려 물에 발을 담갔다.
그러나 즉시 그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두 명의 랍비가 그를 구해냈다. 둘 중에서 더 늙은 랍비가 젊은 랍비에게 말했다.
"이 멍청이에게 비밀을 말해 줄까?"
그 비밀은, 물 바로 밑에 바위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위는 배의 오른 쪽이 아니라 왼 쪽에 있었다. 예수는 그 바위 위를 걸었음에 틀림없다. 의문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