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전쟁 이후 차별의 지속, 흑인 영가 아무도 내 괴로움을 모르리>
흑인 영가(spiritual) <아무도 내 괴로움을 모르리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는 흑인들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1865년 남북전쟁은 종결되고, 노예제는 폐지되었지만, 흑인들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다.
미국 남북전쟁 후 노예 해방령이 선포되고 흑인들에게 자활능력을 갖추게 하기 위해 '해방노예 사무처(Freedmen's Bureau)'가 설치되었다. 반란자들로부터 몰수한 토지를 불하하여 경작케 하였다. 그러나 링컨 대통령 사후 대통령직을 계승한 앤드류 존슨 대통령은 해방노예들보다 남부인들의 지위 회복에 더 관심이 많았다. 존슨 대통령은 토지를 원 소유자에게 돌려주라고 하였다. 낙담한 흑인들은 '아무도 내 고뇌를 모르리'를 불렀다고 한다(앨런 와인스타인/데이비드 루벨, 이은선 역, 미국사, 시공사, 2004, 307쪽)
1. 역사적 배경
남북 전쟁 후 미국 헌법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수정헌법 제13조가 제정되어 노예제 폐지가 선언되었다. 이어서 수정헌법 제14조가 제정되어 평등권과 적법절차의 원리가 보장되고, 수정헌법 제15조를 통해서 흑인들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남부의 반발은 계속되었고, 흑인 차별은 해소되지 않았다. 해방노예들의 자활을 위한 사회적 조치들도 좌절되었다. 흑인들의 고난과 비애는 계속되었다.
남북 전쟁 후 수정헌법 제13조에서 노예제 폐지가 선언되었다. 그러나 그 조항은 해방노예의 권리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링컨은 남북전쟁 이후 남부의 재편입과 연방의 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링컨은 남부 주들의 재승인 조건을 관대하게 하면서, 대신 해방노예들의 처지 개선에 주력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남부의 주들은 노예제 폐지를 수용하였지만, 흑인 문제를 개선하려는 의사는 없었다.
1865년 4월 링컨이 암살되고 남부 민주당 출신의 부통령 앤드류 존슨 Andrew Johnson이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남부인의 권리를 회복시키는 데에는 열심이었지만, 해방노예의 법적 지위를 회복시키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남부 주들은 흑인들의 참정권, 토지소유권, 무기 소유, 그리고 법정 증언 등의 권리들을 배제하였다.
공화당의 연방의회는 흑백차별을 방지하기 위하여 또 하나의 수정헌법을 추진하였다. 1866년 수정헌법 제14조, 즉 평등권 및 적법절차 보호 규정이 제정되었다. 대부분의 남부 주들은 그 헌법 수정안을 거부하였다. 다시 남북 갈등이 고조되었고, 연방 공화당 정부는 1867년 ‘재건법(Reconstruction Acts)’을 제정하고 남부에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1869년 수정헌법 제15조가 추가되었다. 재건법을 헌법화하여 흑인들에게 투표권 부여토록 한 것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시행은 법률에 의존하도록 하였다.
한편 1865년 노예해방령과 더불어 해방노예들의 재활을 돕기 위한 해방노예 사무처(Freedmen's Bureau)도 구성되었다. 이는 원래 링컨 대통령의 구상이었다. 흑인들의 의식주와 교육, 직업문제를 도와주고 지속적인 권익보장을 위한 것이었다. 대통령 링컨과 법안의 발기인들은 이를 백인 사회의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전쟁 중 몰수된 토지를 불하하여 흑인들의 자립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링컨 사후 그 구상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해방노예 사무처장 하워드 장군(Oliver O. Howard; General Howard)은 흑인들을 돕고자 했다. 학교와 병원을 짓고, 노동조건 협상을 지원하고, 굶주린 흑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그러나 링컨의 후임 앤드류 존슨 대통령은 그 토지를 원래의 주인에게 반환할 것을 명하였다. 하워드는 부처장 색스턴(Rufus Saxton)와 협력하여 대통령의 지시를 늦추거나 저지하고자 하였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해변 에디스토 섬 백인들이 토지 소유권을 주장했다. 존슨 대통령은 하워드를 파견하여 흑인들을 무마하라고 지시했다. 하워드는 대통령의 명령과 흑인들에 대한 동정 사이에서 고뇌하였고, 낙담한 흑인들은 <아무도 내 괴로움을 모르리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를 불렀다고 한다(앨런 와인스타인/데이비드 루벨, 이은선 역, 미국사, 시공사, 2004, 307쪽).
하워드 소장은 주민들이 참여하는 분쟁 조정 위원회를 구성하여 새로운 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시간을 벌고자 하였다. 그러나 하워드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방노예 사무처 부처장이 새로 임명되었고, 그는 백인들 재산 반환을 명령했고, ‘해방된’ 흑인들은 다시 백인 토지 주인에 고용된 농업 노동자 신분으로 떨어졌다. 해방노예 사무처는 예산을 삭감당하는 등 점차 기능이 축소되어 갔으며 1872년 해체되었다.
이어진 1868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그랜트 Ulysses S. Grant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그는 남북 전쟁 승리 당시 북부 사령관이었다. 그러나 그랜트 대통령 공화당 정부는 부정과 추문으로 얼룩졌다. 민심은 이반하였고, 공화당은 정국 주도권을 상실해 갔다. 1872년 사면법이 통과되었다. 남부 반란군 출신으로 참정권이 제한되었던 수십만의 백인들이 시민권을 회복하였다. 경제도 불황에 빠졌다. 마침내 1874년 중간 선거에서 민주당이 대거 진출하여 의회를 장악하였다. 이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궁지에 몰린 공화당은 남부의 군정을 중단하게 된다. 이렇게 재건 시대는 지나가고, 흑인들의 권리 회복도 중단된다.
2. 노래 설명
<아무도 내 괴로움을 모르리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이는 유서 깊은 흑인 영가로서 1867년 <Slave Songs of the United States>에 최초로 수록되어 있다. 그 책에는 노래의 기원도 소개되어 있으며 앞서 얘기한 사우스 캐롤라이나 해변 에디스토 섬(Edisto Island)에서의 사연도 나와 있다.
그에 따르면 이 노래는 찰스턴(Charleston) 흑인 학교에서 1865년 가장 애창되던 노래였다고 한다. 이후 해변 섬들까지 널리 퍼지며 여러 버전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에디스토 섬의 이야기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해방노예 사무처 하워드 장군이 원 주인에게 토지 반환의 명을 받고 섬에 파견되어 왔다. 그러나 하워드 장군은 정부 명령을 바로 통고하지 못하고 흑인들을 위로하고자 노래를 제안했다. 한 여인이 이 노래를 시작했고, 모인 사람들이 다 같이 이 노래를 불렀다. 하워드 장군은 노래에 감동하며 흑인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으며, 그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Slave Songs of the United States, New York: A. Simpson & Co., 1867. 55쪽: 이 책은 인터넷 아카이브에서 바로 읽을 수 있다. https://archive.org/details/slavesongsunite00allegoog/page/n7/mode/2up).
아래 폴 롭슨(Paul Robeson)의 노래와 가사를 올린다. 폴 롭슨은 20세기 전반 미국 흑인 유명인사로서 전설의 베이스 바리톤이다. 가사는 폴 롭슨이 부르는 노래 가사를 소개한다. 원래 책 Slave Songs of the United States의 가사와는 좀 다르다.
https://youtu.be/pwYpqJVHHmo
<아무도 내 괴로움을 모르리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작자 미상, 번역 정태욱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Nobody knows my sorrow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Glory hallelujah!
Sometimes I'm up, sometimes I'm down Oh, yes, Lord Sometimes I'm almost to the ground Oh, yes, Lord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Nobody knows my sorrow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Glory hallelujah!
Although you see me going 'long so Oh, yes, Lord I have my trials here below Oh, yes, Lord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Nobody knows my sorrow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Glory hallelujah!
If you get there before I do Oh, yes, Lord Tell all-a my friends I'm coming to Heaven! Oh, yes, Lord
| 누구도 나의 이 괴로움 모르리 누구도 나의 슬픔을 모르리 누구도 나의 이 괴로움 모르리 하나님께 영광을!
때로는 기운이 나다가, 때로는 기운이 꺼집니다. 오, 예, 주님. 때때로 나는 거의 죽을 것 같습니다. 오, 예, 주님.
누구도 나의 이 괴로움 모르리 누구도 나의 슬픔을 모르리 누구도 나의 이 괴로움 모르리 하나님께 영광을!
이렇게 오래 온 것 같은데, 오, 예, 주님, 나는 여기 아래 시련 속에 있습니다. 오, 예, 주님.
누구도 나의 이 괴로움 모르리 누구도 나의 슬픔을 모르리 누구도 나의 이 괴로움 모르리 하나님께 영광을!
그대 나보다 먼저 천국에 가거든, 오, 예, 주님, 친구들에게 나도 곧 온다고 얘기해 주시오. 오, 예,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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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에 대하여는 여기 게시판에 일찍이 올린 글이 있습니다. 대만 국립대학교 합창단의 합창 버전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참고하기 바랍니다. https://cafe.daum.net/epistle/EBy6/272?svc=cafeapi
3. 이후의 전개과정
‘재건법’이 폐지되고 1877년 연방군이 철수하면서, 남부에는 ‘역류’의 시절이 도래하였다. 남부 각 지역에서 ‘흑인차별법(이른바 Jim Crow법)’이 양산되었다. 흑인들의 투표권은 사실상 배제되었다. 투표세(poll tax), 읽기 쓰기 테스트 등의 장애를 넘을 수 있는 흑인들은 거의 없었다. 배심원 자격도 박탈되었다. 해방되었다고는 하지만, 강제노역이 만연하였다. ‘KKK단’ 등 백인들 사설 무장집단의 흑인 살상도 자행되었다.
흑인들의 지위가 온전히 회복되기 위해서는 20세기 중반 민권 운동(Civil Rights Movement)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