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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 성지는 1879년 이벽 성조의 묘 이장(종전에는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공동묘지에 모셔져 있었음)을 시작으로, 1980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비 건립,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1981년)기념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묘 이장과 조선교구 창설(1831년)의 주역이신 정하상 묘 이장으로 묘지성역화 사업을 끝냈다. 이어서 1986년부터 100년이 걸리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 기념 순례 대성당을 비롯해 창립사 연구소, 박물관, 신학 연구소, 강학당, 피정의집 등이 지어졌거나 지어질 계획으로 현재 성지 36만평에 걸쳐 성지 조성 중이다.
▲ 100년 기념 대성당 부지 전경(1) - 대성당은 벽과 기둥, 기단, 마당에 사방 1M 크기의 돌이 약 10만개가 소요될 것이라 한다. 성당 부지에 수많은 주춧돌이 이미 놓여져 있다. 1986년 12월 29일 천진암 대성당 건립 터닦기 기공식을 시작으로 한국천주교회 창립 300주년을 맞는 2079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우리 한국 카톨릭교회도 언젠가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1506년부터 신축 착공~ 미완성), 파리의 노틀담 대성당(1163~1250 1차 골조완성, 현재 미완성), 독일 쾰른 성당(1248년~현재까지 건축중), 스페인 바로셀로나 성가정 대성당(1882년 지하실 기초공사~ 현재 건축 중) 등 세계 유수의 대 성당에 필적할 만한 웅대한 성전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 100년 기념 대성당 부지 전경(2)
▲ 100년 기념 대성당 부지 전경(3) - 2008. 6. 24 벌써 제30회 기념제가 개최되었다. 앞으로 70년 동안 더 건축이 지속되어 2079년 완공될 때가지 우리의 기도와 실천적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 기념 대성당 부지를 지나 천진암 강학터와 순교자 묘지가 있는 순교자 5인 성역묘역으로 올라간다.
▲ 천진암터와 5인 성현 묘역으로 가는 입구
▲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터임을 전하는 안내판도 해가 뜨고 지고, 달이 차고 기울며 벌써 고색창연한 역사가 되버렸다. 이미 부산하였던 열정과 언어, 상념들도 모두 끊긴 자리에 명징한 신앙 선조들의 천주를 향했던 의지만이 오롯이 빛난다.
▲ 한국천주교 발상지 강학회터의 안내문 - 이곳이 강학회가 개최되었던 천진암이 있었던 자리라는 것은 1962년 남상철에 의해 확인되었다. 천진암은 본래 단군 영정을 모시고 산제, 당제 등을 올리던 작은 초가 당집으로 추정되고 1779년을 전후하여 폐찰되었다고 한다. 후일 이곳을 다시 찾았던 정약용 선생의 글에 "천진암은 다 허물어져 옛모습이 하나도 없다"라는 기록이 있다.
▲ 한국천주교 발상지 강학터의 표지석(전면)
▲ 한국천주교 발상지 강학터의 표지석(후면)
1979년 당시 이곳 천진암에 모였던 분들은 권칠신이 좌장 격으로 44세였으며, 이벽 성조 26세, 정약용 17세, 정약종 19세, 정약전 21세, 이승훈 22세, 이총덕 15세 등 10대와 20대의 열혈 남아들이었다. 당시 조선 중기에서 근대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을 찾아 밤을 지새며 고뇌하던 선조들의모습이 눈에 아련하다. 세상을 밝히는 참 진리는 하느님을 신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요일이 없던 때라 음력으로 매월 7, 14, 21, 28일을 휴일, 즉 主日로 정했으며, 이벽이 지은 天主恭敬歌(천주공경가), 聖敎要旨(성교요지)와 정약용이 지은 십계명가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 빙천터 - 천주교 성인묘역 아래에 있는 샘물로서 당시 강학회 주역들이 목을 축이며 머리를 식히던 곳이 아니었을까? 순례객들이 이곳에서 잠시 영혼의 갈증을 푼다.
▲ 5인 성인묘역 - 이곳에는 순교로 경기 일원에 모셔져 있던 이벽(세례자 요한), 이승훈(베드로), 정약종(아우구스티노), 권철신(암브로시오),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앙선조를 다시 이곳에 안장하였다. 중앙에 이벽성조를 위시하여 좌측으로 정약종, 이승훈, 그리고 우측으로 권철신, 권일신 선조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벽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알린 것처럼 한국 천주교회의 문을 여신 분이고, 이승훈 베드로는 베드로가 가톨릭의 주춧돌이 된 것처럼 한국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된 분이며, 정약종은 아우구스티노가 교리를 정립하였듯 한글로 된 교리서 ‘주교요지’를 남겼으며 권철신은 학자, 주교로 유명한 암브로시오 성인이 대인관계의 넓은 폭을 가졌던 것처럼 유명한 학자이자 자신의 대인관계를 활용하였고 권일신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아시아 선교에 힘썼던 것처럼 예수님을 전파하는데 열심이었던 사실에 비추어, 이 분들의 역할이 어떻게 세례명과 완벽하게 일치하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것은 아마 조선, 한국에 천주의 나라를 오시도록 한 천주님의 뜻이었으리라.
▲ 순교자 묘역에서 세상의 역리와 순교자의 장엄한 승리에 몸을 떨다 - 진정한 순교자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성조 이벽은 천진암 강학 멤버들을 중심으로 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상경하여 1784년에 한국천주교회창립을 도모한다. 즉, 1783년 늦가을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 세례를 받아 오도록 부탁하여, 이듬해 봄, 이승훈은 북경의 北堂에서 프랑스 신부 그라몽에 의해 한국천주교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어 성경과 성물을 갖고 귀국했다. 이에 성조는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고, 자신의 서울 수표동 집을 임시 성당으로 정하고 성직자 없이 전교활동에 나선다. 이 때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권철신·정약용·정약전·이윤하 등 남인학자들과, 최창현, 최인길, 김범우, 지황 등 중인들이었는데, 이 때 신앙을 받아들인 중인들은 양반들이 배교할 때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상인들과 부인들에게도 신앙이 전파되었다. 그 부인들 중에는 병조판서 권암의 딸(이벽의 부인), 안정복의 딸(권일신의 부인), 정약용의 누이(이승훈의 부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던 정조 9년(1785) 을사년에 성직자 없이 갓 태어난 한국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다. 추조(秋曹: 刑曹)의 금리(禁吏: 수사관)들이, 李檗의 주재로 명례방(明禮坊: 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의 김범우(역관과 의원을 겸업한 중인) 집에서 진행 중이던 미사현장을 덮친 것이다. 참석자들은 정약용과 그의 형들인 약전·약종, 그리고 이승훈·권일신 등 한국천주교회 창립멤버들이었다. 이때 김범우는 혹심한 매를 맞고 경상도 밀양에 귀양 가서 죽음으로써 한국천주교 순교자 제1호가 되었다. 형조에서는 이벽, 이승훈, 권일신, 정약용 등 명문 양반 출신에 대해선 공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정약용의 아버지는 압해정씨 종친회에, 그리고 이승훈의 아버지는 평창이씨의 종친회에 불려나가 크게 추궁당했다. 이벽의 아버지 이부만은 경주이씨 문중회의에 여러 번 호출되어 "오랑캐의 법도를 가르치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을 족보에서 삭제하겠다"는 공박을 받았다. 족보에서 삭제되면 양반의 지위를 잃고 관직에서도 추방되던 시절이었다. 이벽의 부친은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이벽의 형과 아우도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직에 올라 있었다. 특히 아우는 좌포도대장(현 경찰청장?)의 신분이었다. 이부만은 드디어 대들보에 노끈을 걸어 목을 매달았다. 이벽은 아버지의 죽음을 살리기 위해 "그럼 안 나가겠습니다"라고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의 방 안에서 15일간 기도와 명상을 하다가 탈진해 죽었다. 1785년 음력 6월14일의 일로 향년 32세였다. 나는 이벽 성조의 삶을 되새기면서 눈물을 훔친다. 그의 고난의 역사가 그리스도교의 전파과정에서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껶었던 고난과 박해와 무엇이 다르랴?
그런데, 초기 한국 천주교 창립에 적극 참여하였던 다산 정약용의 삶은 이벽 성조와 형인 정약종과의 삶과는 대조적이었다. 을사박해의 회오리가 불긴 했지만 천주교와 좀 거리를 둔 정약용 일가에는 별다른 타격이 없이 넘어갔다. 정조 13년(1789) 정약용은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고 그 후 엘리트 관료로서 한강에 주교(舟橋: 배다리)를 놓는 규제(規制)를 만들어 올림으로써 소위 "정조 스쿨" (초계문신:抄啓文臣)의 최우등생이 되었다. 정조 15년(1791) 진산(珍山)사건으로 진사 윤지충 등이 효수되고 권일신이 모진 고문을 받고 귀양 가서 병사하는, 천주교도에 대한 신해박해가 벌어졌지만, 정조의 총애를 받은 정약용은 출세의 길을 달렸다. 윤지충은 외사촌 정약용의 권유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는데, 모친상을 당하자 신주(神主)를 불태우고 천주교 의식에 따라 장례를 지냈다는 이유로 전주에서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중앙정계는 시파(時派: 사도세자 옹호)-신서파(信西派:천주교 신봉을 묵인)와 벽파(僻派사도세자 반대)-공서파(攻西派:천주교 탄압)로 대립하게 되었고, 신해박해(1791) 이후 정약용은 반대파들의 계속된 비방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마침내 자신의 배교를 명백히 밝히는 상소(자명소)를 임금에게 올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보전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1800년 순조가 즉위하여 김귀주의 누이인 영조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노론계열의 벽파가 일시에 정권을 잡았다. 벽파 정권은 먼저 시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였으며, 이단의 배격이라는 원론적 입장에서 천주교와 남인에 대해 탄압을 가했다. (박해의 진짜 이유는 남인 숙청이었다). 1801년 1월 정순왕후는 사학(邪學:천주교)을 엄금하고 뉘우치지 않는 자에게는 반역죄를 적용하며, 전국적으로 오가작통법(다섯 집 중 한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적발되면 모두 처벌하는 연좌제로 변질)을 철저하게 실시해 신자의 씨를 남기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유는 천주교가 혈연과 군신의 관계를 부정하여 인륜을 무너뜨림으로써 백성들을 오랑캐나 금수의 상태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조처로 천주교에 관여했던 남인 인사와 당시 교회를 이끌고 있던 인물들이 대거 체포되어, 그해 2월에 정약종·최창현·최필공·홍교만·홍낙민·이승훈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했다. 권철신·이가환은 옥사했으며, 이존창은 충청도 공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정약전·정약용 형제는 유배당했다. 여주와 양근 감옥에 갇혔던 이중배·최필제 등의 경기지방 천주교도들도 다수 처형당했으며, 황주까지 피신했던 주문모 신부도 자수하여 효수되었다.
참고로, 정약용은 천주교에 무관심한 비신자라는 점이 확인되면서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그의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의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저술 대부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는 ‘여유당’(與猶堂- 노자의 말에서 딴 것으로서 '망설이면서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같이 주저하면서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 한다'는 뜻)이란 호에서 감지되는 것처럼, 자신의 교회적 동지들과 형 약종의 순교적 죽음과 자신이 살아 남은 것 사이에 강한 심리적 자괴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1818년 8월에 귀양이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교회의 재건 운동에 간접적 지원활동을 하였고, 보속을 위해 고행과 묵상으로 말년을 보내고 중국인 유방제 신부로부터 병자성사를 받고 1836년 음력 2월 22일에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한국 근대의 대학자로서 풍운아 같은 삶의 궤적을 보면서 또 다른 감회에 젖어들게 한다.
그리고 형 정약종은 일관되게 교회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하면서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자주 한양으로 올라가 성사를 받았고, 신부와 교우들을 도와 교회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오랫동안의 교리 연구를 바탕으로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2권을 완성하였다. 1839년에 순교한 유소사(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고, 1801년에 순교한 정철상(가롤로)과 1839년에 순교한 정하상(바오로) 성인, 정정혜(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아들과 딸이다. 그가 형장(서소문밖)에서 참수 직전에 하였다는 말,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다.”고 한다. 순교자로서 그 얼마나 당당하고 기개있는 모습인가?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신유박해가 진행되던 1801년 가을, 황사영(정약용의 맏형 정약전의 사위)이 탄압의 전말을 보고하고 중국이나 서양의 힘을 동원하여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베이징의 교회에 보내려 한 일이 발각되어(황사영 백서사건), 이에 관계된 인물들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신자 약 100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된 같은 해 12월에 척사윤음(가톨릭교를 배척하기 위하여 전국의 백성에게 내린 윤음. 가톨릭교의 폐해를 적어 그 배척하여야 할 뜻을 적고, 끝에 한글로 주석을 달았다)이 공표되면서 일단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천주교 박해는 계속되었다.
▲ 갈멜 여자 수도원 정문
▲ 갈멜 여자 수도원 내부 전경
▲ 갈멜 여자 수도원 성모자상
▲ 조선교구 설립의 공로자 - 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인 묘역
정하상 바오로 성인은 명도회장이었던 정약종의 아들이며, 정약용의 조카이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로 아버지와 형 철상(哲祥)이 순교한 뒤, 누이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13년 상경, 유진길 ·현석문 등과 함께 교회재건사업의 일환으로 신부 영입을 위해 북경을 9차례 왕래하였다. 1825년 유진길·이여진 등과 연명으로 로마교황에게 청원문을 올려 베이징교구에서 조선교구를 분리시켜 줄 것을 청하여 1831년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조선교구가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그 뒤 1835년(헌종 1) 모방 신부, 1836년 샤스탕 신부, 1837년에 조선교구 제2차 교구장 앵베르 주교를 맞아들임으로써 한국 교회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838년(헌종 4) 앵베르 주교 밑에서 신학교육을 받고 성직자의 대상에 올랐으나, 1839년 기해박해로 앵베르 주교를 비롯하여 가족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다(만일에 그가 이때 순교하지 않았다면 김대건 신부님에 앞서 최초의 방인주교가 되었을 것이다). 그가 체포되기 전에 작성한 《상재상서(上宰相書)》는 한국 초유의 호교론으로서, 가톨릭의 교리 및 박해의 부당함을 피력한 것이다. 1881년 홍콩교구에서 발간되어 중국에서 전도에 널리 활용되었다. 1925년 로마교황에 의하여 복자 위에 올랐으며, 1984년 누이동생 정혜(엘리사벳)와 함께 시성되었다.
그리고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소년 성인 유대철의 아버지로서, 서울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학문에 뜻을 두고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회의를 느끼고 있던 중 우연 히 천주실의 책을 발견하게 되어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그 후 정하상을 만나 역관의 신분을 이용하여 북경을 왕래하면서 성직자 영입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1831년 조선 교구가 설정되게 하 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 어나자 박해 초에는 정3품 당상역관이라는 높은 지위와 대왕대비의 오빠인 황산과의 친분으로 인 해 체포되지 않았으나, 황산이 죽자 7월 17일에 체 포되어 갖은 혹형과 고문을 받은 끝에 9월 2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초기 순교자 가족묘역
- 정하상 성인묘역 오른 편 100여 M 떨어진 곳에 한국 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의 직계 가족인 정약전, 정지해, 이석 등의 묘가 안장돼 있다.
* 다음의 글은 광암 이벽과 다산 정약용, 그리고 이승훈의 행적에 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인용하였다. 특히 핍박과정에서의 정약용의 배교, 회한, 회개와 이승훈 성현, 최창현 성현의 위대한 신앙심을 읽을 수 있다.
1.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4형제의 생가는 마재는 특이한 지형을 나타낸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마주 서로 만나는 양수리에서 팔당댐 방향으로 3킬로미터쯤 가다 보면 왼쪽으로 그 입구가 나타난다. 그런데 그 모양이 혹처럼 불쑥 튀어 나와 있어 마치 한강물을 지키는 파수꾼같다.
마재의 정다산 유적지에는 사당과 기념관, 생가 터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언덕 위에는 다산의 묘소가 있다. 이 묘소에서 내려다보면 마을과 한강을 넘어 천진암이 있는 앵자봉 계곡이 펼쳐지고 그 오른쪽은 약종이 살았으며 묘소가 있던 배알미리(拜謁尾里)가 된다. 지금은 팔당댐으로 물길이 바다처럼 넓어졌으나 2백 년 전의 능내리(마재)와 비알미리는 강을 사이에 두고 있을지언정 이웃 마을이었음에 틀림없다. 정약현, 약전, 약종, 약용 등 여기서 태어난 4형제 중 셋째인 약종은 천주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로, 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약현의 부인이 이벽 성조의 누이, 정씨 형제의 누이가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의 부인,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라는 것을 알면 정씨 형제가 얼마나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중 정다산은 그의 형 약종처럼 순교하지는 않았으나 천수(天壽)를 다하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수많은 명저를 남겼다. 그는 본래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갖고 10여 년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제사 문제로 번진 신해박해 때(1791년)만 해도 그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을묘년(1795년) 포도청 장살 사건이 당쟁으로 발전, 좌천되면서 반대파의 원성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명소(自明疏)를 올린다. 즉 천주교를 떠났다는 것을 글로써 명백히 밝힌 것이다.
이어 그는 신유박해(1801년) 때 배교함으로써 죽음을 면하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실학을 집대성한 5백여 권의 주옥같은 저서는 바로 이 무렵 18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쓰여진 것이다.
이 때 그는 스스로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불러 초대 교회 창립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 회장으로 크게 활약한 형 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데 대해 부끄러움을 표시했다.
그는 당시의 참담한 심정과 외로움을 "만천 유고(蔓川遺稿)"에서 "한평생을 살다보니 어쩌다가 죄수가 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을까, 그 옛날 어질던 스승과 선배 그리고 절친했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나." 하고 노래했다.
그러나 그는 20여 년간의 기나긴 유배 생활 중에 잃었던 신심을 되찾는다. 1811년에는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한 교회 재건 운동에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할 정도였다. 그가 완전히 교회로 돌아온 것은 유배에서 풀려 난 지 2-3년 뒤로 볼 수 있다. 그의 생활은 은둔과 묵상, 고행과 기도로 일관했을 뿐만 아니라 회갑을 맞으면서 미리 작성해 둔 자신의 묘비명 가운데는 참회와 성찰의 문구가 역력히 들어 있다. 유배 생활을 끝내고 다시 이곳 마재로 돌아온 그는 보속하는 뜻에서 기도와 고행의 삶을 살다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병자 성사를 받고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마재에서는 또한 천진암 앵자봉 능선을 멀리 바라다볼 수 있다. 그리고 천주교회의 큰 초석이 된 권철신 5형제의 집터가 있는 양근(陽根) 대감 마을과도 지척이다. 때문에 마재는 당시 천진암 주어사에서 천주학을 공부하던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 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2.
정약용 선생은 65세 되던 1827(丁亥)년 초여름, 옛 친구들과 폐허가 된 천진암을 마지막으로 찾아와 머물면서 옛 추억을 회상하며 현장에서 지은 많은 시를 남겼는데, 그 중 몇 구절만 추려서 현대적 표현으로 의역해봅니다. “천진암에 오르는 돌바닥 이 오솔길은, 내가 어려서 놀던 곳인데(石徑細如線, 昔我童時游), 이제 다시 찾아오니 나그네 마음 서글퍼지네(重來愴客心). 일찍이 호걸들과 선비들은 여기서 강학하고, 독서하였었지(豪士昔講讀)! 상서는 여기서 소련했고(尙書此燒鍊), 선방 옛 친구들은 사라져 이제는 어디 가도 구해올 수 없네그려(禪房無處舊人求)! 기숙사는 무너져 절반이 빈 터로세(樓前寮舍半墟丘)! 새벽에 德目 외우기는 지금 차마 부끄럽지만, 해지면 그래도 책들을 쳐다본다오(寅緣慙講德, 書帙見隨陰). 그 전에 여기서 걸어온 발자취는 아득하여 다시 걸어볼 수 없으니 애달프구나(前躅凄迷不可求)!” -≪天眞消搖集≫-그런데 1777(丁酉)년 다산공이 15세로 결혼하던 해 이벽 성조께 지어드린 詩文에서, “광암공은 성현과 호걸의 기백을 갖추시고, 어려서부터 덕을 닦으신 분”으로 경탄합니다(七曜迭舒卷, 賢豪氣相投, 令德勉早修). ≪贈李檗≫ 당시 정약용, 정약전, 형제들은 이벽 선생을 쫓아다니면서 日月五行뿐아니라 달력과 요일계산, 기하원본 등도 배웠습니다(從李檗, 兄若銓, 嘗從李檗, 游聞曆數之學, 究幾何原本). -≪墓誌銘≫-
천진암 계곡은 예나 지금이나 봄이면 원앙새들의 집단 산란처라서 일명 원앙산이라고도 하고, 여름이면 꾀꼬리들의 서식처로 앵자산이라고도 하는데 사찰은 유일하게 천진암뿐으로, 마재 앞 소내 건너 두미에 있던 이벽 성조의 저택에서 보이는 30여리 거리로 정약용 선생 형제들이 자주 가던 곳입니다.
정약용 선생이 36세 되던 1797(丁巳)년, 왕궁 현직에서 단오날 두 형들과 천진암을 찾아와 현장에서 지은 詩에서는, “천진암에는 이벽의 독서처(讀書處)가 아직도 저기 그저 있는데, 원공이 깃들이던 발자취 아득하여 다시 찾기 어렵네! 풍류문채는 모름지기 신령한 경지라야지, 그 시절 생각하며 한나절내 술 마시며 시를 짓노라”하였습니다(李檗讀書猶有處, 苑公棲跡杳難尋, 風流文采須靈境, 半日行桮半日吟). -≪端午日陪二兄游天眞菴記≫-
심산궁곡의 독서처는 선비들의 소박하고 검소한 작은 처소로서, 주로 혼자서 3년 독서, 7년 독서 하는 면학 강마(勉學講磨)의 道場이었습니다. 정학술(丁學術)의 이벽전(李檗傳)은 천진암에 은거하던 이벽 성조의 독서처 道場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무술(1778)년 광암공이 25세 때 성호 이익 선생 제자들과 어진 벗들과 어진 선비들, 丁氏, 李氏네 자제들과 함께 면학(勉學)하셨고, 홍군사한테서 천주교 서적함을 받아 주야로 열심히 읽으시고 연구 묵상하여 의심이 없게 되자 山水간을 노닐으시며 광주 원앙산사에 은거하시매, 道友가 衆徒를 이루자 성교요지(聖敎要旨)를 下筆하시었다.”“기해(1779)년 광암공 26세 때, 어진 벗들과 학문에 힘쓰는 제자들이 광암공을 ‘웃어른’으로 삼고 모시게 되자(爲上), 제자들이 무리를 지어 산사에 모여들었다. 이 때 광암공은 기묘한 학문에 박식하여 천문, 지리, 의학, 복술, 성명지학, 등에 달통하여, 사람들 질문에 유수처럼 해답하여, 모인 선비들로 그 門下에 총림(叢林)을 이루었고, 그 명성은 세간에 널리 전해졌다”
다블뤼(Daveluy) 주교 문헌에는, 1777(丁酉)년 학자 권철신과 이승훈, 정약전 등이 어떤 절에서 강학한다는 소식에, 이벽 선생은 권철신이 우거하던 절(鹿菴寓居走魚寺)로 갔다가 절을 잘못 알아서(trompe de pagode), 한밤 중 다시 雪中인데도 험난한 큰 산을 넘어 반대편 산 중심의 퇴락한 건물(天眞菴)에서 만났으며(édifice isolé et perdu dans le sein des montagnes), 여러 경서와 천주교 교리를 토론하고 실천하고자 금육재와 음력주일 제정 실천도 시도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정약용 선생도 1779(己亥)년 겨울 권철신 주도의 강학이 천진암에서 있을 때, 주어사는 설중인데 한밤중 이벽이 도착하여 촛불을 베풀고 경서를 담론하였다고 간결이 적었는데, 2년간의 연도차는 있으나 두 강학을 하나로 봄이 합리적이며, 다블뤼 주교의 상세한 문헌과 다산의 간단한 기록은 상호보완적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젊은 선비들이 이벽 성조를 중심으로 산속 은둔처에서 자발적으로 수행한 천주교 교리 연구와 신앙실천은 문헌 따라 연도와 기간, 표현 등이 조금씩 다를 뿐 대동소이한데, 1770년대 천진암을 본거지로 하여 이벽 성조 중심의 천학운동(天學運動)은 1800년대에 와서 근거를 달리하는 여러 문헌에서 비교적 소상히 밝혀지고 있으나, 지면관계상 줄입니다만 1838년 Pierre Maubant 신부의 문헌, 1845년 김대건 부제의 문헌, 1850년대에 집필한 Daveluy 주교 문헌, 1885년 동남아 신학교 역사문헌, 특히 1911년 Joseph Longford 교수의 문헌 등 1770년부터 또는 1777년부터 또는 1770년부터 1783년까지 13년간으로도 아주 단정하는 산속 은둔처에서 이벽 성조의 독서와 강학과 성교요지 하필, 금육재와 음력주일 제정 등, 신앙실천 공동체가 한국천주교회의 출발이며, 그 본거지 天眞菴은 한국천주교 발상지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천주교회의 진정한 역사는 이벽의 저 위대한 강학”에서 시작되었다. 천주께서 조선 천주교회의 始動을 걸기 위하여 그 도구로 이벽을 선택하였다. 이벽은 조선천주교회 창립을 튼튼히 하고자 권철신을 선택하였다(Daveluy)”, “이벽은 조선천주교회의 始祖(一世)다(闢衛編, 朝鮮王朝實錄)” 등에서 보듯이 조선천주교회 창립자 이벽 성조를 존경하고 사모하던 정약용 선생이 천진암을 자주 찾은 기록은 수차례지만 주어사나 양근을 찾거나 머물렀다는 기록은 보기 어렵습니다.
유배생활 후에도 천주교 반대자들처럼, “사학(邪學)이니, 곡학(曲學)이니”하지 않고, “서학(西學)이니, 서교(西敎)니”하였으며, 心身이 착잡하던 1797년에도 천진암을 찾았고, 특히 4개월간 누워서 앓고 난 1827년 마지막 다녀갈 때 천진암에서 下山하면서는, “여기 와서 아주 살고 싶으나(我欲來此住), 편의를 제공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네그려(無人示方便)!”하며 아쉬워하였으니, 정약용 선생은 천진암을 마치 자신의 정신적 母校처럼, 마음의 고향처럼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약용 선생 생애 중 천진암 만큼 어려서, 젊어서, 늙어서, 심지어 왕궁 현직에서도 수차에 걸쳐 방문하여 현장에서 많은 시를 읊은 곳은 그리 많지 않게 보입니다.
[출처 : 천진암 성지 홈페이지(http://www.chonjinam.or.kr), “정약용 선생과 천진암 성지,” 천진암 자료실, 등록일 2007. 12. 03]
3.
최근 정약용선생이 천주교 신자였느냐, 아니었느냐를 가지고 학자들 간에 논쟁이 분분하다. 그러나 ‘추안급 국안(推案及鞫案)’(주: 오늘날 범죄수사기록)을 보면, 천주교 세례를 받았음이 명기되어 있고, 본명이 요한이었음도 뒤에 나온다. 이는 다불뤼 주교의 기록에서도 그의 본명이 요한이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추안급국안은 1801년 음력 2월 13일에 이승훈 진사와 최창현, 정약용 등을 대면시켜 문초한 기록이다.
,,,,同日罪人李承薰崔昌賢面質今是白乎矣承薰向昌顯曰汝知我乎昌顯曰我豈不知李承薰乎承薰曰汝於何處見我乎昌顯曰甲辰年於李檗家相見而汝豈不爲我領洗而爲我神父乎承薰曰今始覺得則果然矣問曰丁若鏞招內以矣身爲仇讐而渠家之沈溺皆是矣身之慫惠云矣身何以發明乎供曰若鏞之供如此則矣身亦有可言者矣曾於甲辰年間與若鏞會於李檗家而若鏞潛惑於此術請受領洗於矣身故矣身爲之矣今若鏞以矣身爲仇讐則矣身亦以渠爲仇讐矣此外無他 - <推案及鞫案 純祖1년 음력 2월 13일자 鞫案記錄 번역문. 제25권 68면>-
,,,.,,,같은 날 죄인 이승훈 최창현을 대면질의한 바 이제 밝히 알려졌다. 이승훈이 최창현을 보고 가로되, “네가 나를 아느냐 ” 하니, 최창현이 이르기를,“내가 어찌 이승훈을 모른단 말이오?” 하였다. 승훈이 가로되,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다는 말이냐?” 하니, 창현이 가로되, “갑진년(1784) 이벽의 집에서 우리가 서로 만나보았고, 또 당신이 내게 어찌 세례를 주지 않았다는 말이오?, 더구나 나를 신부를 하게하고 그렇게 부르게 하지 않았단 말이오?” 하자, 이승훈이 가로되, “내 지금 비로서 너한테 들어 알게 되는 바이니, 과연 그렇단 말이냐?” 하였다. 정약용의 문초 중에 나온 말에 대하여 이승훈에게 물어보니, 이승훈이 가로되, “내가 정약용 집안을 모두 천주교에 빠지게 하고, 천주교에 호의를 베풀게 권하였다고 하며, 정약용은 지금 나를 아주 원수로 여기고 있으니, 내가 어찌 이를 일일이 다 밝혀 답변할 수 있겠습니까. 문초 중에 정약용의 답변이 이러한즉, 나역시 한마디 말할 수 있는 것은, 일찍이 갑년년(1784) 동안에 정약용과 더불어 이벽의 집에서 회동하였는데, 그 때 정약용은 천주교에 흠뻑 빠져서, 자기도 세례를 받게 하여 달라고 나에게 간청하므로, 나는 정약용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정약용이 지금 나를 원수로 삼고 있은 즉, 그렇다면 나역시 그를 원수로 여기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외에는 더 이상 다른 할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위 원문은 1801년 2월 13일, 많은 조정 대신들의 참석과 입회 하에 실시된 국문 기록에 명확히 들어 있다. 여기서 보면 정약용은 천주교 신앙을 후회하며 이승훈 진사를 원망하고, 이승훈 진사에게 책임을 돌리며 고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승훈 진사는 정약용이 정영 그렇게 말한다면 자기도 이제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필요가 없으므로, 천주교 신앙과 자신과의 관계를 발설하는 정약용에 대하여 더이상 침묵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을 보아, 이승훈 진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정약용과 다른 신앙인들의 천주교 신앙에 관하여 요새 표현으로 묵비권을 행사하며 일체 발설하지 않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들이다.
이 내용은 최창현 회장에게 세례를 주고, 임시 준 성직자 역할까지 맡겼던 이승훈 성현이 최창현을 대면하여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최창현으로 하여금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연루된 다른 신자들을 더 알리지 말라는 뜻으로 최창현과 다른 신도들을 위해서 하는 묵언의 메시지였다. 또한 처남인 정약용이 배교하며 변명하는 과정에서, 자기네 정씨 형제들이 천주교를 신앙하게 된 것은 모두 매형이 되는 이승훈 성현 때문이라고까지 말하자, 비로소 이승훈 성현은 만일 처남인 정약용이 후회막심해하며 자신을 매형으로보다 원수로 여긴다고 한다면, 이승훈 성현 자신도 정약용 같은 저런 사람을 처남으로 두었고, 세례까지 주게 된 것을 후회하는 동시에, 역시 배교하는 원수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훈 진사의 고매한 성품과 열렬한 신덕이 밝게 들어나는 대목이다. 이 문초 후, 이승훈 진사(주: 당시 進士는 오늘의 博士 학위에 해당함)는 몇 차례 더 고문과 혹심한 매를 맞고, 10여일 후, 정약종 등과 함께 서소문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출처 : 천진암 성지 홈페이지(http://www.chonjinam.or.kr), “丁若鏞先生 領洗 李承薰 進士가 確認 證言,” 천진암 자료실, 등록일 2008. 08. 16]에서 발췌.
(주: 최창현 요한(1759∼1801)은 역관출신으로 1784년 겨울에 입교하여, 권일신·이벽·정약종 등과 함께 교회창립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으며, 성직자 영입을 위하여도 앞장서서 활동하였으며 천주교리 전파에 힘썼다. 형조에서는 일찍부터 그를 체포하고자 혈안이 되었는데, 그는 피신하여 체포를 모면하였으나 도피생활중 병을 얻어 집에 돌아왔을 때 배교자의 밀고로 잡히고 말았다. 포청에서 혹독한 고문에 못이겨 처음에는 배교하였으나, 국청(鞠廳)에 넘겨진 뒤로는 배교를 취소하고 호교문(護敎文)까지 지어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였으므로 4월 8일 정약종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모든 순교자들과,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으신 주님의 종들에게 자비와 은총을 배풀어 주소서..
첫댓글 와! 하늘 너무 파아랗게 예쁘네요!! 꺄아!!!
천진암 성지 안내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