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두번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병오년 봄 마중 답사는 경기도 광주시로 갑니다.
역사서와 풍수계에 유명한 여말선초의 인물인"고불 맹사성" 선생의 묘소를
45인승 차량 진입이 불가하여 계속 미루다가 드디어 이번에 갑니다.
쏠라티 2대로 갈아 타고 이동하다 보면 시간이 좀 소요되겠지만
역사속 인물을 알현하려 가는게 풍수 답사의 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입춘 지나고, 우수 지나고, 경칩까지 지나고 가는 답사니
진짜 봄 마중이 맞네요 (*~*)
1. 답사일 : 2026년 3월 8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9시 정각 출발
3. 답사지
1) 광주이씨 이손 묘역 (광주시 초월읍 신월리 산22-1)
이손(李蓀, 1439∼1520)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방(子芳), 시호는 호간(胡簡)이다. 아버지는 평안도절도사 수철(守哲)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이맹상(李孟常)의 딸이다.
1459년(세조 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학문은 물론 활쏘기와 말 타기를 잘 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우찬성·좌찬성을 역임하고, 1512년(중종 7) 일본의 화호(和好) 요청을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1513년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진봉되고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만년에는 영의정 유순(柳洵), 판서 안침(安琛) 등 남학(南學)의 친우들과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어 서로 왕래하며 즐겼다. 50여 년의 관직 생활에 두드러진 과실 없이 나이 80이 넘도록 녹위(祿位)를 보전하여 시종 영화를 누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손의 묘는 초월읍 신월리 두월마을 광주이씨 묘역에 있다. 묘소는 3계로 구분되어 상계에는 봉분, 중계에는 묘표와 묘제(墓祭) 석물, 하계에는 의장 석물을 배치하였다. 분묘의 형태는 이손과 부인의 묘가 나란한 좌우쌍분이다. 지대석을 놓은 뒤에 7각형의 호석을 2단으로 쌓고, 미석(楣石, 차양)을 얹은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각각의 봉분 앞에는 방부하엽 형태의 하얀 대리석 묘표가 세워져 있다. 각각의 묘표 앞으로는 혼유석과 상석, 향로석이 차례로 놓여 있다. 하계에는 망주석 1쌍과 문인석 1쌍,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망주석은 받침돌과 몸체가 분리되어 꽂는 형식이고, 육각형의 몸체에는 장식물을 표현하였다. 문인석은 관모와 관복을 착용한 복두공복 형태로 얼굴의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턱 밑의 갓끈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장명등은 도난당하여 근래에 다시 설치하였다.
묘소는 15세기 묘제에서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16세기 전반기에 새로운 유형의 묘제를 시험하던 시기에 조성되어 다른 봉분에 비해 특이하게도 7각 형태를 보이고 있다. 중종 대에는 이와 같이 아직 3계가 잘 갖추어져 있으면서 새로운 시도를 한 묘소들이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바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석물은 1520년에 일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다만 혼유석은 17세기에 새로운 양식을 받아들여 조성된 것이며, 이에 따라 밀려난 상석을 받치기 위해 설치하였던 고석은 없어지고 새로운 고석과 향로석이 놓여있으며, 장명등도 도난당하여 다시 설치하였다. 그러나 망주석과 문인석은 당대의 석물로 조각적인 면에서도 우수한 면모를 갖추고 있다.
1520년(중종 15)에 세운 신도비(神道碑)는 묘소 바로 아래에 있었으나 기울어질 조짐이 있어 약 50m 앞인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신도비는 거북 받침대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윗부분에 용(이무기)을 조각한 귀부이수 형태로, 귀부는 규모가 작은 편으로 입을 다문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으며, 등에 6각형의 귀갑문을 장식하였다. 전체적인 조각은 크게 돋보이지 않고 비신보다 폭이 약간 클 뿐이어서 안정감이 다소 떨어진다. 비신과 한 몸인 이수는 앞면에 구름 속에서 2마리의 이무기가 가운데에 있는 여의주를 다투는 형태이고, 뒷면에는 한 마리의 이무기가 조각되어 있다. 모두 굵고 날카로운 4개의 발톱을 가진 모습이 생동감이 넘치게 표현되어 우수한 조각 솜씨를 보이고 있다. 비신은 하얀 대리석으로, 앞면과 뒷면에 비문을 적었고, 전액은 "胡簡公神道碑”라고만 하였다. 비문은 이행(李荇)이 짓고, 김희수(金希壽)가 글씨를 썼으며, 전액을 쓴 사람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무른 성질의 하얀 대리석에 새겼지만 글씨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당대의 명필이었던 김희수의 기량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수의 조각도 훌륭하여 석조 조각사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주시청 향토지정문화 (이손묘역 및 신도비)
2) 광주안씨 묘역 (중시조 안성 선생 설명, 광주시 중대동 텃골)
안성(安省)[1344~1421]은 조선 세종 3년까지 활동한 문신이다.
조선 전기 문신으로 경기도 성남시의 세거 성씨인 광주 안씨의 중시조.
조선 개국 후 처음으로 청백리에 뽑힌 3인 중 한 사람이며, 한쪽 눈이 작아서 이름을 ‘소목(小目)’이라 하였는데, 벼슬을 하면서 임금의 명령으로 ‘성(省)’으로 고쳤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습지(習之)·일삼(日三), 호는 설천(雪泉)·천곡(泉谷)이다. 아버지는 안기(安器)이다.
광주 안씨의 시조는 안방걸(安邦傑)이지만 성남[현 경기도 광주 포함] 일대에 집성촌을 이룬 중시조는 안성이다. 안성은 고려 우왕 초에 생원이 되었고, 1380년(우왕 6)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보문각 직제학을 거쳐 상주판관이 되었다. 조선이 개국하고 1393년(태조 2)에 청백리로 뽑힌 3인 중 한 사람이다. 개성유후(開城留後)에 임명되었을 때, 고려의 벼슬을 한 사람으로 개성에 가서 조상의 혼을 대할 수 없다 하여 궁전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며 통곡하였다. 좌우에서 죽이려 하는 것을 태조(太祖)가 이 사람을 죽이면 후세에 충성하는 선비가 없어질 것이라 하여 밖으로 추방되었다. 훗날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우리 나라의 성씨 대부분은 고려 전기에 형성되었다. 광주 안씨도 고려 태조 때 안방걸이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지면서 형성된 성씨이다. 각 성씨의 족보는 조선 후기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전한다. 안성이 조선 전기에 광주 안씨 족보 3권을 만들었다고는 하나 전하지는 않는데, 그 서문은 남아 있다고 안정복(安鼎福)[1712~1791]이 광주 안씨 「족보발(族譜跋)」에서 언급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3) 맹사성 선생 묘 (광주시 직동 산27)
조선 전기에, 예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 · 성지(誠之), 호는 동포(東浦) · 고불(古佛). 온양 출신. 아버지는 고려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 맹희도(孟希道)이며, 최영(崔瑩)의 손서(孫婿)이다.
1386년(우왕 12)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이 되었다. 이어 전의시승(典儀寺丞) · 기거랑(起居郎) · 사인(舍人) · 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수원판관이 되었다가 다시 내직으로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때 예조의랑(禮曹議郎)이 된 이래, 정종 때 간의우산기상시(諫議右散騎常侍) · 간의좌산기상시가 되었다. 태종 초에 좌사간의대부(左司諫議大夫) · 동부대언(同副代言) · 이조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1407년(태종 7)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어,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에 가는 세자를 시종관(侍從官)으로서 수행하여 다녀왔다.
1408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어 지평(持平) 박안신(朴安信)과 함께 평양군(平壤君)이자 경정공주(慶貞公主)주1의 부군(夫君)인 조대림(趙大臨)을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잡아다가 고문하였다. 이 일로 태종의 큰 노여움을 사 처형될 뻔했으나 영의정 성석린(成石璘)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1411년 다시 기용되어 판충주목사로 임명되었다. 그러자 예조에서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인 맹사성이 음률(音律)에 정통하므로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울에 머물게 하여 바른 음악을 가르치도록 건의하였다. 그 이듬해에도 풍해도도관찰사(豐海道都觀察使)에 임명되자, 영의정 하륜(河崙)이 음악에 밝은 맹사성을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樂工)을 가르치도록 아뢰었다.
1416년 이조참판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생원시에 시관(試官)이 되어 권채(權採) 등 100인을 뽑았으며, 왕이 친림한 문과 복시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었다. 그 해 노부(老父)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원했으나 윤허되지 않고, 역마(驛馬)와 약을 하사받았다.
이어 호조판서가 되어서도 고향의 노부를 위해 다시 사직을 원했다. 그러나 왕은 충청도도관찰사로 삼아 노부를 봉양하게 하였다. 1418년 공조판서가 되어 또다시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19년(세종 1) 이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이 되고, 이듬해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1421년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역임하고 1427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우의정 재임시에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 감관사(監館事)로서 감수하였다.
『태종실록(太宗實錄)』의 편찬이 완료되자 세종이 한번 보고자 하였다. 그러자 맹사성이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 하고 반대하니 세종이 이에 따랐다.
1432년 좌의정에 오르고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나라에 중요한 정사(政事)가 있으면 반드시 맹사성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지 않았다.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주2로 하였다. 출입할 때에는 소[牛] 타기를 좋아하여 보는 이들이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영의정 성석린은 선배로서 맹사성의 집 가까이에 살았는데, 매번 집을 오고 갈 때는 그 집 앞에서 말을 내려 지나갔다.
음악에 조예가 있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다. 품성이 어질고 부드러웠으며, 조정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할 때에는 신중함이 있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맹사성(孟思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회비 : 5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회장 이 영기 (010 - 9001 - 4561)
총무 김 은희 (010 - 3228 - 6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