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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행문 >
치앙마이, 치앙라이 방문기 (1)
글 | 김형근 (본지 편집인)
란나 건축-왓쩨디루앙 사찰
치앙마이를 거점으로 태국의 북부지방의 불교국가였던 란나왕국
2017년 11월부터 동남아 불교 사찰을 바탕으로 동남아 여행을 시작하여 그 기행문을 2018년 1월부터 미주현대불교에 연재를 하고 있다. 2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태국의 방콕, 아유타와, 수코타이, 태국적인 정서를 많이 가직하고 있는 치앙칸과 ‘꽈이 강의 다리’는 영화로 널리 알려진 ‘칸차나부리’ 그리고 아잔 차 스님이 활동하던 왓 바팡을 방문하여 그 기행문을 발표하였다. 아주 대표적인 곳을 다녔지만 태국을 알면 알수록 가고 싶은 곳이 많아진다. 태국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남북으로 긴 나라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주로 남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소개하였다. 태국의 북부는 아직 소개하지 못했는데 북부에서 세계적인 관광지로 선정되었고,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지역이면서 불교 유적지가 많은 곳이 ‘치앙마이’와 ‘치앙라이’ 그리고 ‘치앙센’ 지역이다.
이 세 지역 중 ‘치앙센’은 ‘골든 트라이 앵글’로 알려진 지역이다. 치앙센은 태국, 미얀마, 라오스 국경이 만나는 지역이고 한때는 이곳에서 마약이 많이 재배된 지역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이 지역에서 마약대신 차를 많이 재배한다.
태국은 동남아시아의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맞닿아 있다. 이중에서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와는 많은 전쟁을 통하여 정복당하거나 정복했던 역사가 있다. 그래서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는 역사가 겹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 때문에 태국은 역사의 시작을 공식적으로 수코타이 왕조(1238~1378)로 본다. 수코타이 이전의 상황을 인터넷 검색으로 소개한다.
골든 트라이 앵글 Jirachayanan Pladruen (Sine Artist)
Jirachayanan Pladruen (Sine Artist)
Jirachayanan Pladruen (Sine Artist)
치앙마이 시내 모습
몬 족 전통춤
중국남서부 운남(雲南)지역에 거주하던 타이족은 BC 2C경부터 중국계인 남소국(南昭国: 당나라때)의 지배와 영향을 받으며 수 세기에 걸쳐 남쪽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태국북부, 라오스북부, 미얀마북동부에 걸쳐 소국가를 형성하는데, 일부는 오늘날의 라오스를 형성하였고, 다른 일부는 남하하여 차오프라야 강 유역에 정착하여, 오늘날의 태국을 형성하였다.
라오(Lao)인과 타이인은 원래 같은 민족인데, 라오스는 아이라오(Ailao)족으로, 태국은 타이족(자유인)이라 자칭한 데에서 연유한다.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남소국이 멸망하면서 타이족이 지금의 태국북부와 라오스지역으로 대거 이동하여 앙코르왕국의 영향권 안에서 마을
을 형성하고 살고 있었는데, 이 지역에 먼저 거주하던 몬(mon)족과 크메르족의 세력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타이족의 독립 소국가가 생기게 된다.
이때 생긴 최초의 타이족왕국이 남부와 중부지역의 수코타이 왕국과 북부의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한 ‘란나왕국’이며, 라오스와 동북타이에 걸쳐 란상왕국(라오족), 북서부지역에 파야오왕국, 남부해안지역에 롭부리 왕국등 타이민족의 소왕국이 각지에 등장한다. 1
4세기까지 현재 태국 영토의 대부분은 크메르의 영토였고, 타이족은 크메르에 조공을 바치면서 거주하였다.
후난(Funan) 왕국 (86-550) | |||
앙코르 왕국 (802-1431) (1431-1863) (1863-1953) | 수코타이시대(1238-1378) | 란나왕국(1259-1558) | 란쌍왕국 선포 (1353) (17세기후반-1893) (1804~1829) (1893~1945) |
란나왕국 태국에 편입(1939년) |
** 후난, 첸라왕국 등 선사시대 및 초기 역사는 어느 한 국가의 개별사로 보기는 어려워 공통으로 표시했다.
여기에서 보이는 ‘란나왕국’이 태국의 북부지역에 있었고, 이 ‘란나왕국’의 중요한 지역이었던 곳이 치앙마이, 치앙라이, 치앙 센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몬 족을 비롯하여 소수민족들이 또한 많이 살고 있다. 치앙마이는 방콕에 이어 태국에서 인구수로는 6-7번째 이지만 북부의 중심도시이기 때문에 태국의 2번째 큰 도시로 간주된다. 태국은 방콕 외에는 거대도시가 없다. 유튜브에 치앙마이를 검색해 보면 많은 영상들이 뜬다. 치앙마이 집 소개, 치앙마이 여행지소개, 여행소감, 치앙마이 생활 소개 등 다양하다. 별 깊이는 없지만 치앙마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된다. 치앙마이가 사찰이 많은 불교 도시인데 불교사찰을 깊이 있게 소개한 영상은 거의 없다. 한국인들이 골프 여행을 많이 가는 이 치앙마이에는 요즘에는 한국인들의 한 달간 잠시 살아보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여행객이 많이 오기 때문에 치앙마이, 치앙라이, 치앙 센에는 이 지역 관광객을 전문으로 안내하는 여행사도 많이 있고, 소득수준이 낮은 이 지역의 소수민족을 겨냥하여 서울에 본부를 두고 선교활동을 하는 ‘미전도종족선교연대(Unreached People Missions Alliance)’라는 한국인 선교단체 등 선교사들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참으로 집요한 기독교인들이다. 이들의 행동과 방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 열성만은 인정하다. 이러한 열성이 결국은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며 때로는 큰 사회문제를 일으킨다. 인천에서 치앙마이까지 직항 항공기도 있고, 시내에는 한국 간판을 건 병원과 골프 여행을 도와주는 업소 한글간판도 있다. 또 한국어를 교육시키는 세종학당 교육기관도 있었다. 치앙마이에서 살고 싶은 은퇴자들과 사업하려는 사람들도 많은지 유튜우에는 한국인 부동산업자도 보이고 있다. 또 단체 카톡방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한국인들이 현재 다수 거주하고 있다. 이 치앙마이, 치앙라이는 태국으로 편입된 지가 대략 80년 정도이고 그 이전에는 ‘란나 왕국’이었으며, ‘란나 왕국’은 불교국가이었으므로 불교인으로서 치앙마이와 치앙라이를 관광하기 위해서는 란나 왕국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가 있으면 여행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란나 왕국’에 대한 소개를 먼저 한다
란나 왕국의 역사
안도북부에 있던 몬족은 대이동하여 현재의 미얀마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버마족과 전쟁을 하였는데 패하여 다시 대이동을 하여 강을 건너고, 산을 건너 도착한 곳이 방콕주변이었고, 이들이 세운 왕국이 드바라바티(Dvaravati) 왕국이다. 이 드바라바티 왕국의 짜마데비라는 못생기고, 사고뭉치였던 공주가 왕궁에서 내쫓겨 짜오프라야강 줄기를 따라 북쪽으로 새 삶의 터전을 찾아 올라온 곳이 지금의 치앙마이 나잇바자 옆을 흐르는 빵강(Ping River) 줄기였다. 이런 여정을 통하여 공주가 찾아낸 땅이 치앙마이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람푼(Lamphun)’이며 그곳에 짜마데비 공주가 성을 쌓고, 왕국을 건설하니 ‘하리푼차이(Hariphunchai)’ 왕국이다. (람푼시내에는 짜마데비 동상이 있으며, 하리푼차이 국립박물관과 ‘짜마데비 사원’이 남아있다)
람푼시
멩라이 대왕 동상
‘하리푼차이’ 왕국을 건설한 공주는 이제 왕으로서 새로운 삶을 준비한다. 이때부터 치앙마이 와 ‘란나’ 역사가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왕국을 건설한 그 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인 도이깜(현재의 치앙마이 공항 부근)을 근거지로 하는 부족이 있었다. ‘와(WA)’족으로 사람을 먹는 식인종이였다고 한다. 당시에 와족은 치앙마이에서 그 세력이 강성하였고, 족장의 명령을 거부하면 온 마을을 피로 물들였다고 한다. 그 족장 위랑가는 초인적인 힘의 소유자였는데 하리푼차이 왕국을 다스리는 ‘짜마데비’에게 청혼을 한다. ‘짜마데비’는 임신 중이라거나 또는 아직 아이들의 이유식이 끝나지 않았다고 시간을 무려 8년이나 끌면서 위랑가를 속였다.
위랑가 족장이 ‘쩨마데비’에게 최후 통첩을 하였다. 이에 ‘짜마데비’는 위랑가의 청혼에 대한 답신을 보냈다.
“당신의 청혼에 응하겠소, 그러나 나의 백성들이 나를 계속해서 따르도록 하려면 당신의 비범함을 보여야 합니다. 그 증표로 당신이 사는 ‘도이 깜’에서 이곳 람푼 성까지 창을 던져서 그 창이 이곳까지 도착하면 기꺼이 당신의 청혼에 응하겠소. 기회는 3번이요."
위랑가 족장은 첫 번째 창을 던졌는데 창이 거의 람푼 성까지 도달하였다. 이에 놀란 ‘쩨마데비’는 어차피 식인종에게 시집을 가야 한다면 수모라도 주고 가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그 당시 남자의 최대 수모는 여자의 아래 속옷을 남자의 머리에 던지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쩨마데비’는 자신의 속옷으로 모자를 만들고, 그것이 속옷임을 감추기 위해 금과 은으로 만든 장신구를 모자에 단다. 8년을 기다린 족장은 그 모자를 쓰는데 그 모자를 쓰자마자 온 힘이 빠지며 그의 초인적인 힘은 사라졌다. 2번째 창을 던졌으나 그 거리는 매우 짧았다. 이에 위랑가 족장은 자신의 옷을 찢으며 창을 다시 하늘 위로 던지고 내려오는 창에 자신의 몸을 던져 가슴이 찔려 죽는다. 죽으면서도 자신의 머리를 쩨마데비가 있는 남쪽으로 향해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멩라이 대왕 동상
이렇게 되자 ‘하리푼짜이’ 왕국의 몬족들은 방콕의 아버지에게도 원군을 요청한 짜마데비의 명령에 따라 와족을 몰살시키려고 공격을 하였다. 족장을 잃은 와족은 근거지를 버리고 도망을 하는데 달아난 곳이 바로 치앙센(Chiang Saen;지금의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이다. 이 와족을 추격하여 치앙센에 도착한 몬 족은 새로운 부족을 만나게 된다.
당시 치앙센에는 중국 최남단 운남성에서 내려온 것으로 추측이 되는 민족이 있었으니 태국의 타이(Thai)족과 구별되는 따이(Tai) 족이다. 언양국(녹양Ngoen Yang 이라고도 함, 일반적으로 일종의 부족국가 정도로 봄)으로 알려진 중국계 민족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몬 족’과 ‘와 족’의 전쟁은 다시 ‘몬 족’과 ‘언양국’의 전쟁으로 상황이 바뀌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몬 족’(하리푼차이)와 언양국은 치앙센에서 500년이 넘는 세월을 대치를 하다가 언양국의 25대왕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정리된다. 그가 바로 란나 왕국을 건설한 ‘맹라이(Mengri 1238 ~ 1317)’ 왕이다. 그는 치앙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란나왕국 (LANNA) 건설
하리푼차이 몬 족으로 인하여 세월동안 치앙 센을 벗어나지 못했던 언양국의 맹라이는 왕자의 신분으로 부왕의 명령을 받아 새로운 땅을 찾아 남하정책을 편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치앙라이(Chiang Rai)를 건설하고 다시 남하정책을 펴서 하리푼차이 왕국이 있는 람푼을 점령한다. 661년에 건설된 몬 족이 세운 하리푼차이 왕국은 1281년 맹라이 왕에 의해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맹라이 왕은 당시 강성했던 미얀마와 크메르 왕국 때문에 더 이상 북방으로 진출이 용이하지 않자, 멩라이 왕은 남쪽으로 세력확장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람푼(Lamphun, 1281년), 위앙쿰캄(Wiang KumKam,1287년)을 도읍으로 삼게 된다. 1287~1290년동안 ‘란나 왕국’의 수도가 옮겨온 곳은 치앙마이에서 동남쪽으로 5km 떨어진 위앙쿰캄이다. 하지만 이 도시는 매년 반복되는 홍수 피해를 겪다 1294년 핑강의 대범람으로 침수되었고 버마의 침공까지 더해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700년 가까이 발굴이 이뤄지지 않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 후 1984년에 ‘역사 공원’으로 복구되었으며 현재에도 땅속에 묻힌 란나 왕조의 유적과 사원을 발굴 중이다.
멩라이 왕은 1296년 언양왕조를 마감시키고, 치앙마이를 수도로 하는 ‘란나왕국’을 건설한다. 현재 태국의 북서부를 차지하면서 ‘수코타이왕국’과 태국을 북남으로 양분하였다. 왕으로 있는 사람이 다시 왕조를 건설하는 세계사에서 매우 보기 드문 사례를 여기에서 보게 된다. ‘치앙마이’에서 ‘치앙(Chiang)’은 ‘도시’를 의미하며 ‘마이(Mai)’는 새롭다는 뜻으로 ‘치앙마이’는 란나 ‘왕국의 신도시’를 의미한다. 치앙마이는 도이수텝산과 삥강 사이의 비옥한 들판에 성벽과 해자(수로)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하지만 1556년 버마의 침입으로 260년간 지속된 ‘란나왕국’은 거의 200년 가까이 버마의 속국이 되었다. 따라서 치앙마이의 많은 사원들은 버마의 불교양식을 볼 수 있다.
1774년 딱신 왕이 흩어진 타이족을 모아 태국에서 미얀마를 몰아내고 1939년 란나의 마지막 통치자가 죽자 태국정부에서 도지사를 보내 지금의 태국으로 완전히 편입시키게 되었다. 현재 치앙마이 시에는 300여개의 불교사원, 6000여 명의 수도승이 있는 태국불교의 중심지 중의 하나이며 북방의 장미로 불리며 북방의 중심지로서 태국 제2의 도시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의 많은 스님들도 이 치앙마이를 방문하고 있다.
유네스코에서는 치앙마이를 세계 10대 관광지로 선정한 적이 있다.
남부와는 다른 ‘란나 예술’
란나 왕국이 13세기부터 역사를 이어 온 덕에 역사, 예술, 음식, 생활 방식 등 모든 문화가 독창적으로 발전했다. 란나 왕국는 북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버마, 동쪽으로는 크메르 왕국과 남쪽의 시암까지 여러 나라로 둘러싸였다. 문화적인 접목과 수용에 관대한 태국인의 특성답게 란나 스타일(Lanna Style)은 ‘다문화적 아름다움’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란나 시대부터 치앙마이는 이미 예술 작품, 수공예 작품으로 이름이 높았다. 치앙마이의 이런 예술적인 분위기를 바탕으로 ‘란나 예술’, ‘란나 건축’은 그만의 색과 개성을 빛내며 예술적 치앙마이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이 지역의 지붕은 여러겹이고 그 처마 끝은 하늘로 S 형자로 쭉 뻗힌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건축물 내부도 티크 나무에 새긴 화려한 불상과 정교한 조각들이 오랜 고찰들에 많이 남아있다.
란나 건축
란나 예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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