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톰 행크스가 '허트 로커'를 호명하자 막 시상식 무대를 내려갔던 캐슬린 비글로(59)는 감독상 트로피를 쥔 채 환호성을 지르며 다시 무대에 올랐다. '허트 로커'의 프로듀서 그레그 샤피로와 시나리오 작가 마크 볼도 어깨동무를 하며 무대로 뛰어들었다. 비글로는 양 손에 두 개의 트로피를 들고 "내 인생의 (최고) 순간"이라며 감격에 겨워했다. 비글로의 전 남편이자 이날 아카데미상의 경쟁자로 이른바 '장미의 전쟁'을 벌였던 영화 '아바타'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예스"를 연발하며 박수를 보냈다.
'할리우드의 아마조네스' 캐슬린 비글로 감독이 아카데미영화상의 새 역사를 썼다. 비글로의 '허트 로커'는 7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닥극장에서 열린 제8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등 6개 부문 상을 수상하며 명실상부한 2009년 최고의 미국 영화 자리에 올랐다. 3D영화 열풍을 몰고 온 '아바타'는 미술상, 촬영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하는 데 그쳤다.
'허트 로커'의 압승은 이변 아닌 이변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라크에 파병된 미군 폭발물 해체팀의 이야기를 그린 '허트 로커'는 많은 영화평론가와 영화매체로부터 21세기 최고의 전쟁영화라는 호평을 받았다. 이미 미국감독조합상 등에서 여러 차례 수상작으로 호명되며 아카데미상 석권을 예감케 한 영화다.
문제는 세 싸움이었다. '허트 로커'와 함께 9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된 '아바타'의 위세가 워낙 드셌다. 시청률을 의식해온 아카데미상의 상업적 전통이 가장 큰 변수였다. 전 세계에서 20억 달러를 벌어들이며 역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아바타'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상식 전 미국에선 "'허트 로커'가 받아야 하지만 '아바타'가 받을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미국영화예술과학협회(AMPAS)가 작품상 후보작 수를 지난해 5편에서 10편으로 늘린 것도 '아바타'를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해석도 나와 비글로 감독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 '아바타'는 3개 부문 수상에 그쳐이처럼 불안한 예감을 떨치고 영예를 안은 '허트 로커'의 비글로 감독은 여성 최초의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자라는 기록도 세웠다. 감독상 수상을 발표한 배우 바브라 스트라이젠드는 비글로의 이름을 부르기 전 "그 시간이 왔군요"라며 역사적 순간을 반겼다.
비글로는 "나에게 영감을 주고, 내가 존경했던 유력한 영화인들과 함께 후보에 들어간 것만으로 이색적인 경험"이라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그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매일 목숨을 걸고 있는 남녀 군인들에게 상을 받치고 싶다. 그들이 안전하게 집에 돌아오길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허트 로커'는 가장 저조한 흥행에 그친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라는 진기록도 동시에 남기게 됐다. 1,5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허트 로커'는 '아바타'가 벌어들인 수입의 100분의 1 가량인 2,100만 달러의 흥행에 그쳤다.
▦ 또 하나의 승자 '프레셔스'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은 '크레이지 하트'의 제프 브리지스, '블라인드 사이드'의 산드라 불록에게 각각 돌아갔다. 알코올중독 퇴물 컨트리 가수를 연기한 브리지스, 흑인 부랑아를 입양해 미식축구 스타로 길러내는 엄마 역을 맡은 불록의 수상은 전문가들의 예상대로였다. 브리지스는 4전 5기 끝에, 불록은 첫 도전으로 영광을 차지했다.
남우조연상과 여우조연상에서도 이변은 없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나치군 장교를 연기한 오스트리아 배우 크리스토프 발츠, '프레셔스: 사파이어의 소설 푸쉬를 기초로 한'에서 폭력적인 엄마를 그려낸 TV쇼 진행자 모니크가 각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흑인 감독이 만든 영화로는 최초로 작품상 후보에 오른 '프레셔스'는 여우조연상 외에도 각색상을 받아 블랙파워의 저력을 과시했다. 애니메이션상은 '업'이, 최우수외국어상은 아르헨티나 영화 '시크릿 인 데어 아이스'가 각각 받았다.
●비글로는 누구… '폭풍 속으로' 등 섬세하고 선 굵게 연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1951년 태어난 캐슬린 비글로는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회화를 공부했다가 컬럼비아대학에서 영화로 전공을 바꿨다. 여성 경찰을 주인공으로 한 '블루 스틸'(1990), 은행강도를 소재로 한 '폭풍 속으로'(1991) 등의 작품을 통해 여성 감독으로는 드물게 선 굵은 액션을 선보여 '할리우드의 아마조네스'라 불렸다. 그러나 '스트레인지 데이즈'(1995) 등이 잇달아 흥행에 실패해 한동안 잊혀진 감독으로 여겨졌다. 1989년 제임스 카메론과 결혼, 2년 뒤 이혼했으나 두 사람은 제작자와 감독으로 '스트레인지 데이즈'를 함께 만드는 등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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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왼쪽부터 작품상과 감독상 트로피를 양 손에 쥔 캐슬린 비글로 감독,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제프 브리지스, 여우주연상을 받은 산드라 불록. 맨 오른쪽 사진은 1991년 이혼한 캐슬린 비글로와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시상식장에서 앞뒤로 앉아 있다가 비글로가 수상자로 호명되자 환호하는 모습이다. 로스앤젤레스=로이터 AP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