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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집 정진규
가을집
가을엔 아내의 집에 머물기로 합니다 떨어진 입성도 기워입기로 합니다 여뀌꽃처럼 가난한 아내가 데운 뜨거운 목욕물, 거기 잠시 잠깐 나를 허락해두기로 합니다 마른 먼지 냄새가 나는 그런 갈증의 내 말씀의 곳간도 애써 열어두기로 합니다 녹슨 자물쇠, 열고 열다 상한 손가락, 신선한 두어 방울의 피, 피를 흘리기로 합니다 가을 햇살 속 빨간 피, 그것과도 만나기로 합니다 여름 내내 상한 불빛 하나 들고 비에 젖던, 목선(木船) 하나로 비에 젖어 있던 봉두난발의 저녁 나루터, 내가 마시던 뜨거운 술국, 내가 부르던 유행가 한 가락, (아, 나의 떠돌이 나의 사십 년(四十年) 여기 와 잠시 머물다) 두어 줄 써놓고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기로 합니다 감춰진 별빛 찾기, 별빛 찾기, 하늘 속으로 하늘 속으로 내가 잠겨들기로 합니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가장 맑디맑게 물꼬를 터주던 것은 정진규
가장 맑디맑게 물꼬를 터주던 것은
새뱅이, 모래무지, 미꾸라지, 구구락지, 얼게미, 고무활, 방패연, 잣치기, 말똥이, 옥천이, 기계충, 율무기, 쇠똥벌레, 비단벌레, 물방개, 땅개비, 구렛골, 구수머리, 봉우재, 도구머리, 읍내(邑內), 회다리, 쇠전거리, 사거리, 양조장, 농업학교, 향교, 천주교회, 명륜당, 삼덕포도원, 이발소집 셋째딸 김미자, 사거리 책방 허씨네 딸들, 신생보육원 영숙이, 우편 집배원 최종재, 탁구를 잘 치던 광성이, 공부를 잘 하던 코주부, 칠장사, 청룡사, 팔사당 바우덕이, 시인(詩人) 임홍재(任洪宰), 내 고향의 말씀들
향기다
꽃이다
별빛이다
내 어머니의 자궁(子宮)이다
지금은 또 어떤 말씀들이 생겨나고 있을까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는 되도록 시치미를 떼기로 한다
이 말씀의 별빛들 별빛들이
흐려질까 때묻을까 두려운 탓이다
가장 캄캄하고 캄캄할 때
어렵게 어렵게 나를 비춰주던 것은
장리(長利)쌀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내어주던 것은
오직 이들이었다
이 말씀의 별빛들뿐이었다
가장 맑디맑게 물꼬를 터주던 것은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가죽가방 정진규
가죽가방
가죽가방 하나를 샀다
일제 때
아버지가 미두(米豆)*하러 들고 다니시던
`오리가방' 같은 걸 찾았지만
없었다
그게 가장 튼튼하리라는 것.
이유는 그것뿐이었지만
일제 때라는 것, 미두(米豆)라는 것
그게 걸렸다
(매사에 나는 이렇게 걸린다
도처에 감옥이다)
포기할까 했지만
감옥을 찾아내서
내가 그의 감옥이 되리라 마음먹었다
감옥일 수 있음의 기쁨!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을
다 뒤졌다
비슷한 것 하날 겨우 찾았다
모양은 보지 않았다
튼튼하면 그만이었다
(감옥은 튼튼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내가 더욱 튼튼한 그의 감옥이 될 수 있다
감옥의 감옥이 될 수 있다)
그대 연서(戀書) 한 통도
마침내 거기 가두었다
가죽가방 하나를 샀다
요즈음 나는 매우 유력(有力)하다
그대 앞에서 유력(有力)하다
가죽가방 앞에서 유력(有力)하다
이제 안심이다
순전히 그걸 위해서였다
* 미두(米豆): 일제 때 미곡의 시세 변동을 이용하여 현물 없이 약속으로만 거래하던 일종의 투기 행위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 1990
강설 정진규
강설(降雪)&
버린 여자(女子)들이
무시로 다시 찾아온다.
젓가락 한 짝이라도 들려줘야 떠난다.
버린 자식들이
떼지어 몰껴온다.
기계충이 돋은 머리로 그대를 규탄한다.
비로소 강자(强者)를 만난다. 소금과 같다.
한밤중엔
버린 만년필이 찾아온다.
그대의 모든 공책에 쓴다.
그대의 전생애(全生涯)를 누설한다.
구멍 뚫린 모자도 온다.
떨어진 구두 한 짝이
그대 연전(年前)의 한 짝이
동대문시장(東大門市場) 고물상(古物商)으로부터
혼자서 달려온다.
대문을 걷어차고
한 번만 더 걷어차고
내 머릿속으로 깊고 깊게 떨어져가는 것이
보인다.
새들은 한 마리도 날지 않는다.
이렇다.
눈 오는 날의 만남이란
실로 어지러운 어지러운 방문일 뿐이다.
현관(玄關)의 등불이
한 번만 더 어렵게 켜지고 있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겨울 양평 정진규
겨울 양평(楊平)
제일 추운 곳 양평(楊平)으로 갔다 피하지 않고 그리로 갔다 따뜻한 곳 이곳이 믿어지지 않았다 견디기 실습(實習)을 나는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모두 문 걸고 들앉아버린 거리, 거리를 홀로 통과(通過)했다 이튿날은 기차도 와서 닿지 않았다 고드름 고드름 수정고드름 고드름은 보석이었다 추운 것엔 추운 것만큼의 따뜻함이 있었다 아픈 것엔 아픈 것만큼의 힘이 있었다 사랑이구나 사랑이구나 세상의 아픔이란 아픔들이 거기 가서 함께 있었다 고드름 속에 함께 가서 얼어 있었다 아픔은 아픔만을 찾아다닌다는 걸 새롭게 알았다 그들끼리만이 깊은 단짝이다 함께 견디어주는 건 오직 그들 뿐이다 그걸 새롭게 알았다 오, 그렇구나 나와는 나의 아내가 단짝일 뿐이란 걸 새롭게 알았다 이 겨울 나는 양평(楊平)으로 갔다 겨울 양평(楊平)으로 갔다 얼어버린 웅덩이 속 겨울 미나리 한 뿌리 새파랗게 새파랗게 견디고 있었다 고드름 고드름 수정고드름 고드름은 보석이었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곳곳에 가을이 당도하였으매 정진규
곳곳에 가을이 당도하였으매
지난 여름은
줄곧 난행(亂行)만 당하고
겨우 한 줄의 시(詩)를 써서
수습(收拾)하고
곳곳에 가을이 당도하였으매
장구 소리 풍악 소리 드높사오나
빈자(貧者)로다, 빈자(貧者)로다
나 이 땅의 일등(一等)가는 빈자(貧者)로다
깊은 밤
고향 문전(門前)을
비인 손 낡은 입성 하나로 서성대이나이다
어디선가
돌아갈 곳 없는 자(者)의
슬픈 눈물방울 하나가
백근(百斤) 무게로
손등 위에 떨어지고 있나이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그림지우기 정진규
그림지우기
요즈음엔 터닦기 벽돌쌓기 나무 속살 만나기 대패질하기 못질하기 한 채의 집을 짓기 그런 쪽보다 한 채의 집을 헐어내기 그런 쪽에 가서 내가 재미있게 놀고 있습니다
요즈음엔 내가 즐겨 그리던 쌍무지개 뜨는 언덕 그런 그림보다 그런 그림지우기 고향으로 되돌아가기 엄마의 자궁(子宮)으로 되들어앉기 내어쫓아도 내어쫓아도 되들어앉기 그런 쪽으로 내가 가서 재미있게 놀고 있습니다
버리고 버리고 또다시 버리는 자의 마음공부가 아니올시다 그저 재미있게 놀고 있습니다
뼈에 대하여, 정음사, 1986
깨끗한 물고기 정진규
깨끗한 물고기
보인다
서로의 가슴을 서로가
한 줄기 물소리로 건너 다니는 것이
보인다
맨발로 건너 오고 있는
여자의 하얀 발이
보인다
그런 물소리의 바닥에서 놀고 있는
한 마리
깨끗한 물고기가 보인다
가을이다
한밤에 문득 그가 잠을 깨운다
돌아 눕지 말 일이다
돌아 눕지 말 일이다
차가운 향기,
우리가 그간 잘못 살아왔음을
한꺼번에 깨닫듯
차가운 향기의 집 한 채를
그런 가을집 한 채를
새벽이 오기 전에
세상에 보탤 일이다
이 가을엔
숨어 살지 말 일이다
따뜻한 국이 있는
아침상을 받아도 될 일이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 1990
남쪽 마을에 가서 정진규
남쪽 마을에 가서
가고 싶던 남쪽 마을에 당도했다 거기엔 아직 몇 뼘쯤의 햇살이 남아 있으리라 믿었던 나의 생각은 언제나처럼 잘못이었다 늦가을 저녁 거리엔 옛날의 객사(客舍) 하나 오슬오슬 감기를 앓고 있었다 옛날의 말들이 비루먹은 당나귀들이 마른풀만 씹고 있었다 몸을 뎁히고자 잔기침을 하며 나도 소주를 마셨다 찬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생두부를 씹었다 다른 나라 사람처럼 이 마을의 거리를 혼자 걸어다녔으며 찬 빗방울 두엇 이마에 떨어질 때는 동구밖까지 나가 있었다 끝내 찾고자 했던 것 남아 있을 햇살 두어 뼘쯤 어렵게 끊어내어 그대에게 보내드릴 말씀의 입성 한 벌 따뜻이 지어내고자 했던 것 잘못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대여 이번에도 나는 빈손이다 다만 빈손일 따름이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다시 별 정진규
다시 별
누가 어둠을 조금씩 찢어내고 있다
빛이 샌다
내가 찢은 어둠,
어둠도 몇 개는 될 터인데
그것들도 별이 되었을까 빛이 되었을까
말하자면 나는
적지 않은 여자들의 어둠을 찢은 것인데
지금 어디서
나의 별새끼들이
한참 자라고 있음을 굳게 믿는다
별아버지, 나는 기쁘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 1990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정진규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어쩌랴, 하늘 가득 머리 풀어 울고 우는 빗줄기, 뜨락에 와 가득히 당도하는 저녁 나절의 저 음험한 비애(悲哀)의 어깨들 오, 어쩌랴, 나 차가운 한잔의 술로 더불어 혼자일 따름이로다 뜨락엔 작은 나무의자(椅子) 하나, 깊이 젖고 있을 따름이로다 전재산(全財産)이로다
어쩌랴, 그대도 들으시는가 귀 기울이면 내 유년(幼年)의 캄캄한 늪에서 한 마리의 이무기는 살아남아 울도다 오, 어쩌랴, 때가 아니로다, 때가 아니로다, 때가 아니로다, 온 국토(國土)의 벌판을 기일게 기일게 혼자서 건너가는 비에 젖은 소리의 뒷등이 보일 따름이로다
어쩌랴, 나는 없어라 그리운 물, 설설설 끓이고 싶은 한 가마솥의 뜨거운 물, 우리네 아궁이에 지피어지던 어머니의 불, 그 잘 마른 삭정이들, 불의 살점들 하나도 없이 오, 어쩌랴, 또다시 나 차가운 한잔의 술로 더불어 오직 혼자일 따름이로다 전재산(全財産)이로다, 비인 집이로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하늘 가득 머리 풀어 빗줄기만 울고 울도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따뜻한 달걀 정진규
따뜻한 달걀
우수(雨水)날 저녁
그 전날 저녁부터
오늘까지 연 닷새 간을
고향, 내 새벽 산여울을
찰박대며 뛰어 건너는
이쁜 발자욱 소리 하날
듣고 지내었더니
그 새끼발가락 하날
가만가만 만지작일 수도 있었더니
나 실로 정결한 말씀만 고를 수 있었더니
그가 왔다.
진솔 속곳을 갈아입고
그가 왔다.
이른 아침,
난 그를 위해 닭장으로 내려가고
따뜻한 달걀
두 알을 집어내었다.
경칩(驚蟄)이 멀지 않다 하였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따뜻한 상징 정진규
따뜻한 상징
어떤 밤에 혼자 깨어 있다 보면 이 땅의 사람들이 지금 따뜻하게 그것보다는, 그들이 그리워하는 따뜻하게 그것만큼씩 춥게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눈물겨워지는 지 모르겠다 조금씩 발이 시리기 때문에 깊게 잠들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눈물겨워지는지 모르겠다 그들의 꿈에도 소름이 조금씩 돋고 있는 것이 보이고 추운 혈관들도 보이고 그들의 부엌 항아리 속에서는 길어다 놓은 이 땅의 물들이 조금씩 살얼음이 잡히고 있는 것이 보인다 요즈음 추위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요즈음 추위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들의 문전마다 쌀 두어 됫박쯤씩 말없이 남몰래 팔아다 놓으면서 밤거리를 돌아다니고 싶다 그렇게 밤을 건너가고 싶다 가장 따뜻한 상징, 하이얀 쌀 두어 됫박이 우리에겐 아직도 가장 따뜻한 상징이다
뼈에 대하여, 정음사, 1986
말씀의 춤을 위하여 정진규
말씀의 춤을 위하여
죄송하다 나 또다시 떠난다 내 눈으로부터 눈썹으로부터 갈비뼈로부터 설렁탕으로부터 모든 짓거리들로부터 나 또다시 떠난다 그게 그거니까 말이다 내 말씀의 춤이 굳어 있으니까 말이다 언제나 눈은 눈이고 눈썹은 눈썹이고 설렁탕은 설렁탕이었다 갈비뼈는 갈비뼈일 따름이었다 지금 나 보이지 않는 나라다 보이지가 않는 나라다
어쩔 수 없다 방황을 해볼 작정이다 쇠주 한잔 걸치는 목로집 때묻은 걸상, 잠시 잠깐 엉덩이를 붙이는 그런 순간 말고는 그대로 흘러 흘러 볼 작정이다 첫서리 내린 고향 들판 까치집 하나, 사랑하던 논두렁길, 논두렁길도 그저 홀로 통과(通過), 통과(通過)다 찾지 마시압, 아무도 찾지 마시압, 허리 굽혀 홀로 물푸는 사람, 들판에 홀로 물푸는 사람, 오직 비워내고 있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매듭 정진규
매듭
우리집 장모가 매듭을 노년의 심심풀이로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집 곳곳엔 매듭들이 장식으로 예저기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싫었습니다 이른 아침마다 집을 나서는 나는 뒤엉킨 일들을, 엉킨 매듭들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를 생각하고 장모는 하루 종일 매듭으로 엮어대고 있다는 게 아무래도 틀린 일이었습니다 나는 장모를 미워하기로 했습니다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는 나의 뒤엉킴을 당신은 어찌하여 묶어놓고 묶어놓는 것이냐고 투정을 해댔습니다 그는 고요로히 미소만 지었습니다 한참 만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미소의 깊이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묶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풀어내고 있는 거였습니다 그의 매듭 속에는 얼마든지 날 수 있는 아름다운 새들의 하늘이 있었습니다 산에도 가고 바다에도 가고 있었습니다 새장 속에 갇힌 새들보다 더욱 향기롭고 아름다운 똥을 지상을 향하여 하얗게 깔기고 있었습니다 그러곤 노래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묶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풀어내고 있는 거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길이란 길들을 모두 불러 모아 이리 엮고 저리 엮다 보면 하나의 길이 보이는 거였습니다 한 채의 집이 마침내 지어지는 거였습니다 오 천 또 한 채의 집이 우리집 벽 위에 아름답게 걸리고 있었습니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몸시․36 정진규
몸시(詩)․36
기억나지 않지만 물 속엔 깨끗한 물 속엔 꽃의 두근거림이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이른 새벽에 봄날 새벽에 안개를 헤치고 가서 풀밭을 한참 걸어가서 물가에 당도하여서 젖은 발로 그걸 보고 들었다고!
그는 다시 말했다 햇살이 그의 따뜻한 혀로 이슬들 핥기 시작한 바로 그 때쯤, 마침내 물 속에서 솟아오른 꽃을 두고 오, 물이 알을 낳았다고!
그러니까 꽃은 알이다 그러니까 물은 자궁(子宮)이다 두근거림이란 회임한 내 아내의 배에 귀를 대고 내가 듣던 바로 그런 소리다 내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상처를 핥아 다오, 물 속의 꽃의 두근거림아!
몸시(詩), 세계사, 1994
몸시․60 정진규
몸시(詩)․60
부제 : 천상렬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세종기념관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지가 꽤 여러 해 되었는데 왜 이 하늘지도가 별들의 길이 문득 생각난 것일까 하긴 벌써 여러 해 내 몸의 운신(運身)이, 내 몸 속 별들의 운행(運行)이 순조롭지 못하기도 했고, 이 땅의 거리거리는 날마다 변비였다 어제 오늘 내린 눈으로 대관령이 하얗게 막혀 있기도 했다
눈 쓸고 가서, 그 석각(石刻)의 탑본 하날 어렵게 구해다 놓고 한참 들여다보니, 길을 더듬거려보니 한 여자가 내 새끼들 끌고 아득히 가고 있는 길과 내가 아직도 술주정으로 머물고 있는 주막 한 채 사이를 겨우겨우 메우고 있는, 비추고 있는 흐린 등불의 가련한 별 한 점(點) 보였다 그런 별 한 점(點)의 길이 거기에도 있었다
겨우 그것밖에 나는 읽지 못했다
* 천상렬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처음 1395년에 종이에 그려진 것을 1443년(세종 15년)에 돌에 새긴 천문도. 북반구에서 관측 가능한 1464개의 별들이 새겨져 있다.
몸시(詩), 세계사, 1994
몸시․86 정진규
몸시(詩)․86
길이 열릴 때 보면 밝음이 늘 어둠 안쪽에서 몸을 키워 키를 키워 밤을 새워 어둠 밖으로 길을 내놓던데, 엄지발가락 하나가 상해 있던데, 어렵게 거미줄 뽑듯 시작하던데, 오늘은 그렇게 보이지가 않았다 직방(直方)으로 왔다 길이 밝음 그대로 몸이 되어 덩어리로 그냥 걸어나왔다 낙산 의상대 가서 바다에서 뜨는 해를 새롭게 만났다 어둠과 이미 한평생 잘 살고 나온, 한살림 차렸던 흔적이 역력한, 이미 싸움을 끝낸, 피냄새가 나지 않는 해를 새로 보았다
몸시(詩), 세계사, 1994
문단속 정진규
문단속
그동안 내가 한 일이란
터득한 일이란
우리집 문단속이나 잘 하는 일이었다.
진종일
속에서는
뜨거운 부정으로 여러 번 봉기하고
밖에서는
차가운 미소로만 여러 번 쓰러지는
나의 자유(自由),
그 떨리는 오한(惡寒)의 어깨를 다수히 두다려주는
아내의 시간이나 사랑하는 일이었다.
서툴게
우리집 문단속이나 잘 하는 일이었다.
뜨겁게
사물의 깊이를 횡단해간
나의 날새들이
떼지어 익사(溺死)한 바닷가, 바람의 칼날들이 자른
그날, 그 마을에선
이따금씩의 못질 소리만이 들려오고
아아, 그것은
실로 연십팔개월(連十八個月) 동안이었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물소리 1 정진규
물소리 1
너의 나라를 네 몸의 나라를 네 영혼의 나라를 속속들이 핥고 있다 지금 너를 부르는 나의 목소리가, 그렇다 나의 생음(生音)이 비로소 깊고 아름답다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너의 온몸은 언제나 물기에 젖어 있다 이 여름 땡볕 속을 혼자 걸어도 언제나 물소리를 듣고 있다 너를 듣고 있다
뼈에 대하여, 정음사, 1986
물소리 2 정진규
물소리 2
이제 무너지고자 하오니 오셔요, 겨우 어렵게 말하면 문 열고 나서면 그때는 거두어 떠나시고 말짱한 나의 뜨락 햇빛만 넘칩니다 햇빛만 넘칩니다 돌아와 문 걸고 깊이 걸고 책 읽고 있노라면 무너지라, 무너지라, 또다시 찾아오십니다 소나기로 오십니다
뼈에 대하여, 정음사, 1986
물회 정진규
물회
속초에 가서 물회를 먹었다 바다를 보지 않고 바닷속엔 잠겨들지도 않고 물회만 먹고 왔다 내 살아오는 동안 밖에서 나를 적시고자 했던 것들 그런 것들과는 끝내 재미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속초의 바다도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한 그릇의 물회만 그저 맛있게 먹고 왔다 금방 건져낸 것이라 했다 그건 잘못이었다, 잘못이었다, 물회가 그저 물회가 아니란 걸 알게 된 것은 그 후 어느 날이었다 내가 바다를 설명할 수 있다니, 거부할 수 있다니, 가당찮은 일이었다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던 그 밤, 나를 적실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던 그 밤, 내 안에서 출렁대는 속초의 바닷물 소리가 들려왔다 구원이었다 물회가 살아 있었다 싱싱한 오징어떼들을 만났다 아, 이토록 나도 몰래 내 안에 들어와 사는 바다와 같은 것들을 나는 몇 개쯤이나 지녔을까 나는 얼마만큼 구원받을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의 안쪽에 가서 이와 같이 살아 있을 수 있을까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뼈에 대하여, 정음사, 1986
밥시 1 정진규
밥시(詩) 1
이런 말씀이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 이젠 겨우 밥술이나 좀 들게 되었다는 말씀, 그 겸허, 실은 쓸쓸한 안분(安分), 그 밥, 우리나란 아직도 밥이다 밥을 먹는 게 살아가는 일의 모두, 조금 슬프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 어머니께서도 길 떠난 나를 위해 돌아오지 않는 나를 위해 언제나 한 그릇 나의 밥을 나의 밥그릇을 채워놓고 계셨다 기다리셨다 저승에서도 그렇게 하고 계실 것이다 우리나란 사랑도 밥이다 이토록 밥이다 하얀 쌀밥이면 더욱 좋다 나도 이젠 밥술이나 좀 들게 되었다 어머니 제삿날이면 하얀 쌀밥 한 그릇 지어올린다 오늘은 나의 사랑하는 부처님과 예수님께 나의 밥을 나누어드리고 싶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겸상으로 밥을 드시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분들은 자주 밥알을 흘리실 것 같다 숟가락질이 젓가락질이 서투르실 것 같다 다 내어주시고 그분들의 쌀독은 늘 비어 있었을 터이니까 그분들은 언제나 우리들의 밥이었으니까 늘 시장하셨을 터이니까 밥을 드신 지가 한참 되셨을 터이니까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 1990
밥시 2 정진규
밥시(詩) 2
술을 빚기 시작한 지도 오래 되었다 이제 한 동이쯤 고였으니 그대에게 가리라 살 버린 나의 뼈, 뼈 버린 나의 뼈, 뼈를 지나 또다시 썩은 한 모금, 또록또록 한밤중에도 홀로 눈뜨는 한 모금, 독하고 독하게 눈뜨는 한 모금, 한 모금으로 그대에게 가리라 이제 한 동이쯤 고였으니 그대에게 가리라 진국으로 온전히 가리라 이 한 동이는 우리들 사랑의 밥, 나는 그대의 밥이다 이젠 그대도 닫힌 고리를 풀리라 꽂아두었던 놋숟가락 하나, 퍼어렇게 녹 오른 놋숟가락 하나, 소리없이 뽑아내리라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 1990
밥시 7 정진규
밥시(詩) 7
한 삼십여 년 전 이야기이지요 지금도 연애라는 걸 더는 못 벗어나고 철없이 살고 있는 저희 내외가 그 연애라는 걸 처음 시작했을 때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어서 어떤 절을 찾아간 적이 있었지요 우리 사랑 한 채의 집으로 지어내자면서 한 채의 절이 될 때까지 그렇게 가자면서 어떤 절을 찾아간 적이 있었지요 거기서 저희는 절밥을 얻어먹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정갈하게 비워낸 절밥 한 상 세상에서 가장 넘치게 고봉으로 담겨진 절밥 한 상 차려주셨어요 공양(供養)이라 했어요 그날 이후 저희 내외도 그런 절밥 한 상 세상에 차려내자면서 예까지 오기는 왔지요 부끄럽게 예까지 오기는 왔지요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 1990
밥시 8 정진규
밥시(詩) 8
처음엔 사자(死者)밥인 줄 알았습니다 저승길도 시장하셔서는 가시지 못합니다 이승에서 받으시는 마지막 밥 한 상 어머님께 차려 올리는 눈물의 밥 그런 걸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자(使者)밥, 저승길 잘 모시고 가달라고 제 어머님 잘 모시고 가 달라고 밥 한 상 잘 차려올렸사오나 노자도 두둑히 드리긴 드렸사오나 어머니, 평생을 나의 밥이셨던 당신, 마지막 밥 한상마저 당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 1990
법고 정진규
법고(法鼓)
나의 집에 한 십 년 북 하나 걸어두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의 북 하나 지니게 되었습니다 비 오는 날 날씨 눅눅한 날엔 어둡고 무거운 소리로 햇빛 밝은 날 청명한 날엔 밝고 가벼운 소리로 북은 웁니다 세상을 예감합니다 세상을 그대로 말합니다 잘 다듬은 대추나무 북채 하나 늘 곁에 놓아두고 있으니 모두 와서 울려보세요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시는 분 지금 어디에 계신지를 모르시는 분 하고 싶은 말씀이 쌓이고 쌓이신 분 그런 분은 오세요 모두 딴소리로 지나가고 딴소리로 다가올 뿐인 거리로부터 돌아와 나는 오늘도 북을 울립니다 제소리를 만납니다 비로소 길을 만납니다 내 마음속 북 하나 걸어두고 그런 까닭으로 예까지 겨우겨우 살아왔습니다 아아 법고(法鼓)란 말씀의 뜻을 이제서야 겨우 깨닫고 있습니다 제소리로 말합니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별 정진규
별&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 1990
별낳기 정진규
별낳기
매일 저녁 저는 별을 낳는 사람입니다 이건 헤프다고 설사기(氣)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도리없이 별을 낳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별은 있어도 있어도 밑빠진 항아리나 다름이 없습니다 모두 별에 배고픕니다 먹어도 먹어도 고픕니다 빛이 고픕니다 빛이 그립습니다 대단 송구스럽사오나 이에 저는 별공장(工場) 주인이 되고자 결심한 사람입니다 하늘 가득 별을 낳고 싶은 사람입니다 무상(無償)으로 나누어 드리고자 합니다 인사불성으로 아픔이 아픔인 줄 모를 때까지 별낳기, 별낳기로 쓰러지고 쓰러집니다 실로 어렵게 어둠을 밀어내는 빛의 집합(集合)들, 작은 반짝임들, 그런 까닭만으로 저는 이토록 쓰러지고 쓰러집니다 그래서 또 살아남습니다 어쩔 뻔했나요, 그대 없으시다 하였다면 아, 하늘이란 나의 모국어(母國語), 나의 별밭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복사꽃 만개 정진규
복사꽃 만개(滿開)
만개(滿開)로 활짝 웃는다 만개(滿開)로 대답하고 만개(滿開)로 걸어간다 만개(滿開)로 글씨를 쓰고 만개(滿開)로 밥을 먹고 만개(滿開)로 물을 긷는다 실상 이제 그는 다 열어버려 당도해야 할 곳이 없다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 나는 떠나야 했다 그의 어디에도 나는 남아 있지 않았으며 혹은 남아 있기도 하였다 모자라는 내게는 그러한 그의 향기(香氣)가 맡아지지 않았다 지난 겨울 언몸 하나로 울고 섰던 그가 그리웠다 가득 차 있는 것의 비어 있음이여 들리지 않음이여 나는 하산(下山)하고 있었다
뼈에 대하여, 정음사, 1986
봄비 정진규
봄비&
실눈을 뜨고 반쯤 잠든
나른한 슬픔에게
떠나 버린 지 너무나 오랜
그 여자의 알 수 없는 향기에게
삼 년째 내 방에 걸려 있는
복역중인 내 친구
때묻은 그의 모자에게
잉크가 나오지 않는 만년필에게
값싼 볼펜에게
미구에 가득히 비어버릴 나의 지갑에게
몇 평(坪) 나의 땅 문서(文書)에게
여린 나뭇잎들 몰래 핥고 지나가는
바람의 쓸쓸한 탐욕에게
방안 가득 엎질러진 꿈
꿈을 혼자서 쓸어담고 있는
낡은 나의 언어에게
자꾸 엎질기만 하는 넘치게만 하는
나의 언어에게
새 바구니 하날 다시 줍시오
십 년 넘게 주문해도 주시지 않는
인색한 나의 하느님에게
오, 나의 모든 슬픔들에게
나를 버리라고 떠나가라고
봄비!
하루 종일 속삭인다
믿을 게 없다고 기다려야 소용없다고
함께 살자고 책임지겠다고
봄비!
하루 종일 속삭인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 1990
봄이 올 무렵 정진규
봄이 올 무렵
가느다란 갈비뼈가 가만히 만져지는 한 마리 참새의 여윈 가슴과 같다 햇볕이 오히려 춥다 마지막 술 한 사발이 조금씩 조금씩 슬프게 엎질러지고 있다
뼈에 대하여, 정음사, 1986
뼈에 대하여 정진규
뼈에 대하여
사람의 뼈 나무의 뼈 흙의 뼈 이별의 뼈 슬픔의 뼈 바람의 뼈 컴퓨터의 뼈 뼈에 당도하기 뼈에 이르기 그걸 하고 있다 내 가장 사랑하는 여자도 뼈일 뿐이다 뼈로만 남아 있다 내가 여자의 살을 다 발라먹은 탓이다 사랑은 살일까 아니다 아니다 살의 숲을 헤치고 뼈를 찾아내기 살을 버리기 마침내 뼈로만 남아 있기다 서로가 하얗게 하얗게 뼈로만 남아 있기다 빛의 뼈, 서로가 하얗게 하얗게 별들로만 빛나기다 어젯밤 나의 꿈 나의 물푸기 내 유년(幼年)이 고기를 잡고 있었다 마지막 바닥엔 뼈들만 소복하게 남아 있었다 빛의 뼈, 별들만 소복하게 남아 있었다 아프게 살을 버린 사람들 그들의 것이라 하였다 어젯밤 나의 꿈 나의 물푸기 아, 그것은 물푸기가 아니라 살푸기 누가 살버리기라 하였다 어머니 당신도 지금 그렇게 계시지요 확실히 보였다
뼈에 대하여, 정음사, 1986
새 1 정진규
새 1&
새들은 한 나뭇가지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앉는다 새는 언제나 새이지만 그럴 때마다 나무의 모양이 달라진다 세상이 달라진다 대낮에도 깊게 고여 있는 어둠을 새들의 날카로운 발톱이 조금씩 찢어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졸다가 자꾸 깨었다 그럴 때마다 찢긴 어둠, 별을 보았기 때문이다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 1990
서서 자는 말 정진규
서서 자는 말
내 아들은 유도(柔道)를 배우고 있다
이태 동안 넘어지는 것만
배웠다고 했다
낙법(落法)만 배웠다고 했다
넘어지는 것을 배우다니!
네가 넘어지는 것을
배우는 이태 동안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살았다
한 번 넘어지면 그뿐
일어설 수 없다고
세상이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잠들어도 눕지 못했다
나는 서서 자는 말
아들아 아들아 부끄럽구나
흐르는 물은
벼랑에서도 뛰어내린다
밤마다 꿈을 꾸지만
애비는 서서 자는 말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 1990
세 번째 별 정진규
세 번째 별
너무나 짙어서 너무나 팽팽하여서
저절로 찢어진 어둠의 상처,
숫처녀의 상처,
그런 별들이라 하시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어둠을 서로가 찢어주는 일이다
찢긴 어둠, 어둠의 상처가 되는 일이다
별들은 어둠의 상처다
몇 개의 별들을 서로가 나누어 갖는 일이다
몇 개의 별들로, 상처로,
서로를 겨우 건너다니는 일이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 1990
속살 정진규
속살
한 채의 생각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 한 채의 말씀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 이 한 채는 온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터전을 닦는 일은 이미 끝내었습니다 네 귀퉁이를 반듯하게 닦았습니다 한 그루 대추나무는 그대로 놓아두었습니다 우리들의 가난한 양식(糧食)으로 남겨두었습니다 대패질을 합니다 나무들의 속살이 화안하게 드러납니다 이 싱그런 속살, 당신의 속살과도 처음인 듯 만납니다 나 온갖 거짓과의 결별을 끝냅니다 대패질을 합니다 나는 지금 요염합니다 머리꼭지까지 가득 차오르는 이 땅에서 가장 정결한 물, 물빛과도 만나고 있습니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슬픈 허방 하나 정진규
슬픈 허방 하나
우리집은 반짝거리지 않는 평화, 우리집엔 그런 식솔들이 모여 산다 조금씩 손때가 묻었거나 조금씩 이울고 있는 가구들 곁에서 늘 끼니를 함께 차려먹고 우리집만의 물맛에 우리집만의 나물맛에 익숙해 있다 그렇게 서로를 평안하게 믿고 산다 하지만 어쩌랴, 나만이 몰래 혼자서 감추고 있는, 웃을 때도 혼자서 감추고 웃는, 빠져버린 나의 어금니 하나, 슬픈 허방 하나 있다 그런 나의 망가짐을 그러나 그들은 눈치채지 못한다 참 미안한 일이다 그래도 나는 말할 수 없다 말해버릴 수 없다 그래도 나는 들킬 수 없다 들켜버릴 수 없다 빠져버린 나의 어금니 하나, 슬픈 허방 하나, 그런 만큼 그들은 서로를 평안하게 믿고 산다 (평안(平安)이 소중하다)
뼈에 대하여, 정음사, 1986
안방에 머물며 정진규
안방에 머물며
요즈음엔 2층(層) 내 방으로 가지 않고 안방에만 머문다 기일고 편하게 누워 가볍게 볼 수 있는 것들만 본다 음악도 듣지 않는다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것만 먹는다 지금 나는 단절(斷絶)이란 생각을 하면서도 그냥 그대로 견딜 만하다 사실은 피신중(避身中)이다 이러한 나를 아내는 오히려 성실해졌다고 할 것이다 상식을 회복하고 있는 중이라고 할 것이다 아내는 상식을 좋아하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언젠가 나는 2층(層) 내 방으로 돌아갈 것이다 가고 싶어질 것이다 안방을 떠날 것이다 상식의 안방을 떠날 것이다 아내는 그거야말로 단절(斷絶)이라 할 것이며 나는 회복(回復)이라 말할 것이다 바라건대는 안방에 있으면서 2층(層)이고 2층(層)에 있으면서 안방일 수 있음의 그것, 그러면야 시(詩)를 쓰지 않아도 좋을 일! 시(詩)를 쓰지 않아도 견딜 일! 다만 알 수가 없는 것은 이토록 아내와 내가 이쪽과 저쪽이 아니었던 쌍문동(雙門洞) 단칸방 시절, 그때는 그렇지가 않았다
들판에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연서 정진규
연서(戀書)
열어주세요 이 봄엔 열어주세요 소리를 열어주세요 끝끝내 열지 않으신다 하면 일납니다 일이 나고야 맙니다 울려주세요 이 봄엔 울려주세요 끝끝내 울려주지 않으신다 하면 일납니다 일이 나고야 맙니다 정신을 차리세요 봄이 와서 당도하고 있어요 종은 울고 싶어요 방방곡곡 울고 싶어요 이 몸 한복판에 그대로 오세요 오셔야 합니다 이 영혼 정수리에 몸으로 오세요 오셔야 합니다 소리의 땀, 땀을 흘리도록 해주세요 그래야 몸도 성해져요 개운해져요 지금 나 불쌍하고 불쌍해요 열어주세요 이 봄엔 열어주세요 울지도 울지도 못하는 종에는 청록의 버섯이 독(毒)으로 핍니다 한으로 핍니다 사람의 몸에도 영혼에도 그리 하시면 검버섯이 돋습니다 저승꽃이 핍니다
뼈에 대하여, 정음사, 1986
연장에 대하여 정진규
연장에 대하여
나 어렸을 적 우리 아버지는 논에 다녀오시면 삽을 번쩍번쩍 빛나게 닦으셨고 어머니는 밭에 다녀오시면 언제나 호미를 그렇게 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연장은 그래서 언제나 녹이 슬지 않았다 그걸로 우리들 십남매를 모두 키우셨다 그렇다 녹이 슬지 않음! 언제나 쓸모가 있음! 지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내 삽 한 자루, 한 삼십 년 써먹었지만 개비할 생각을 말자 그래, 번쩍번쩍이다 모지라질 때까지 빛나게 닦아 쓰자 아무리 뛰어난 기술자라도 제 연장이 아니면 일이 손에 붙질 않는다 그게 법(法)이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 1990
연필로 쓰기 정진규
연필로 쓰기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 반편도 거두어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오세요, 오세요 정진규
오세요, 오세요
달과 해의 매달림 땅과 바다의 매달림 그런 흐름 오, 흐르는 매달림 한 송이의 꽃이 하나의 꽃대궁에 하나의 우주(宇宙)로 매달려 있음 열매는 하나의 가지끝에 승리(勝利)처럼 매달려 풍요(豊饒)로움 아가는 엄마의 가슴속에 우주(宇宙)로 매달려 평화(平和), 평화(平和), 음악(音樂)이여 그대가 적시며 그으며 흔들며 닫아주며 이끌고 가는 그 순수(純粹)의 집결(集結)끝에 겨우겨우 날 가담시켜주던 그런 매달림 행복한 사랑의 인력(引力) 오, 그러나 요즈음엔 그것들이 무너지고 무너져내리는 소리 천지(天地) 가득함 사랑 밖으로 쫓겨난 저 벼랑끝의 아우성들 그렇게 매달려 있는 것들의 소리만 듣고 있음 매달려 있는 것들의 냄새만 맡고 있음 아픔 그들은 때로 모습마저 없고 소리마저 없고 냄새마저 없사오나 내게는 더욱 분명히 보이오며 분명히 들리오며 분명히 맡아지는 그런 일대사건(一大事件)임 더욱 아프고 아픔 매달려 있음의 세상, 매달려 있음의 세상, 일대사건(一大事件)임 어느 날엔가 매우 강력한 힘이 하나 나타나 이들의 손목을 잡아줄 것임 풀어줄 것임 분명히 달려오고 달려오고 있음을 믿음 행복한 사랑의 인력(引力)이여 오세요, 오세요, 지금 그립 그리움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옹이에 대하여 정진규
옹이에 대하여
십 년도 더 넘게 넘어져 있던 한 그루 꽃나무 투병을 끝낸 여자(女子)와 다시 만났다 그는 다시 일어섰다 한 그루 대추나무와 같았다 열매나 이파리도 달고 있지 않았지만 이상한 향기가 났다 저 여자를 대패질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생각했다 저 여자의 깊은 속 어디엔 아픈 생채기들 그가 거느리던 깊은 어둠들 엉기고 엉켜붙은 단단한 옹이들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어디쯤서 나의 대팻날이 덜컥 걸려버릴 것이다 나의 대팻날이 깊이 상할 것이다 이가 빠질 것이다 못쓰게 될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그러하다 할지라도 너는 그러할 것인가 저 여자를 대패질할 것인가 그러하리라 나는 대답했다 이상한 향기 탓이었다 내 영혼의 집의 갈비뼈 내 영혼의 집의 대퇴골(大腿骨) 석가래나 기둥 그런 단단한 말씀들의 옷을 내가 입기엔 아직도 멀지만 한 그루 대추나무가 되기엔 아직도 멀지만 그를 만나자 나는 힘이 생겼다 이상한 향기 탓이었다 내 연약함이 내 대팻날이 덜컥 못쓰게 다친다 할지라도 옹이를 만들자 다치고 다쳐서 나도 옹이를 만들자 이상한 향기를 만들자 시인(詩人)이란 옹이가 많을수록 좋다 저러한 옹이는 우리의 자본(資本)이다 나는 처음으로 굳게 믿었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우리집 쓰레기통은 네 개 정진규
우리집 쓰레기통은 네 개
저로서는 과분하게도 우리집 방(房)이 네 개입니다 하나는 우리 내외(內外)가 쓰고 하나는 저의 장남(長男)이 쓰며 하나는 제 사랑스러운 딸이 또 하나는 제 막내가 외할머니와 함께 쓰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네 개의 쓰레기통을 버리는 것이 저의 소임입니다 무심코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막내와 외할머니의 쓰레기통엔 졸음에 겨운 옛날 이야기의 꼬리가 버려져 있고 나의 딸의 쓰레기통엔 한밤내 만난 꿈의 꽃잎 하나가 실로 부끄럽게 떨어져 있으며 나의 장남(長男)의 쓰레기통엔 영웅(英雄) 몇 명이 무릎 꿇어 깊은 잠에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 내외(內外)의 쓰레기통은 언제나 비어 있습니다 버릴 것이 없사오며 없사온 까닭인즉 저들의 쓰레기통을 채워주고 다시 채워주어도 모자라는 탓이오며 용서를 바라옵기는 가득히 비어 있는 충만을 또한 사랑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세상의 쓰레기통 속엔 무엇이 버려지고 있는지요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원석 정진규
원석(原石)
사람들은 슬픔과 외로움과 아픔과 어두움 같은 것들을 자신의 쓰레기라 생각한다 버려야 할 것들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줍는 거지* 사랑하는 거지 몇 해 전 집을 옮길 때만 해도 그들의 짐짝이 제일 많았다 그대로 아주 조심스레 소중스레 데리고 와선 제자리에 앉혔다 와서 보시면 안다 해묵어 세월 흐르면 반짝이는 별이 되는 보석이 되는 원석(原石)들이 바로 그들임을 어이하여 모르실까 나는 그것을 믿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나는 슬픔 부자(富者) 외로움 부자(富者) 아픔의 어두움의 부자(富者) 살림이 넉넉하다
* 거지: 걸인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이 여름의 내 알몸 정진규
이 여름의 내 알몸
여섯 달은 더 흔들리고 있으면서 용케 빠지지는 않고 있는 이빨, 앞니빨 하나를 오늘도 애써 달고 다녔다 무사했다 그래도 뿌리가 꽤 깊은 모양이었다 한쪽 어금니가 빠진 지는 이미 오래여서 거기 캄캄하게 어둠이 고이고 있었지만 그걸 용케 감추고 그동안은 기술적으로 웃을 수가 있었지만 이번은 사정이 다르다 피해갈 수 없다 언젠가는 빠지긴 빠질 것이며 내 몸이 더없이 흉해 보일 것이며 내 정신의 앞대목도 문단속이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다 실은 그게 내 모습이다 감추지 말자 이제는 정면(正面)이다 이 여름엔 나도 알몸이다 여름엔 알몸이 마땅하다 그동안의 내 거짓을 용서받자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 1990
지금 키 큰 미루나무 하나는 정진규
지금 키 큰 미루나무 하나는
요즈음은 참 이상하네요 그동안은 내가 늘 상처를 입히곤 했는데 그걸 제자리에 앉히기라 믿었는데 제자리 찾아주기라 믿었는데 가지도 꺾고 토막을 내고 껍질도 벗기고 대패질을 하고 못질은 되도록 하지 않는 집짓기, 쇳소리는 가까이 하지 않는 절짓기, 그걸 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네요 보여요, 보여요, 분명히 보여요 나무가 상수리나무가 가문비나무가 오리나무가 아그배나무가 스스로 지어놓은 집, 짓고 있는 집 한채 절 한채가 보여요 절 한채의 시가 보여요 이젠 받아쓰기나 해라, 받아쓰기나 해라, 그렇게 있어요 이젠 베끼기나 해라, 나를 베끼기나 해라, 따라 읽어라, 따라 읽기나 하거라, 그렇게 있어요 실은 애당초부터 그렇게 있었겠지요 내가 눈뜬 장님이었겠지요 청맹과니였겠지요 지금 키 큰 미루나무 하나는 내가 자란 마을 어귀, 잎진 나뭇가지 위, 추운 까치 한 마리 앉혀놓고 저문 들녘을 바라보고 있어요 다 비워낸 가슴이기에 들녘을 들녘으로만 바라보는 눈빛, 아 소리없이 오를 줄 아는 자의 지혜, 저녁 연기 하나가 거기 있네요 그리고 하늘엔 처음 나온 별빛 하나, 스스로 짓고 있는 집, 절 한 채가 거기 있네요
뼈에 대하여, 정음사, 1986
직전의 힘을 믿겠다 나는 정진규
직전의 힘을 믿겠다 나는
직전의 힘을 믿겠다 나는, 벼랑끝을 뛰어내리는 한 줄기 폭포가 되었건 탁 트인 풀밭이 되었건 제 어미의 자궁 열고 지상에 마악 떨어진 한 마리 강아지새끼가 되었건 알몸을 섞는 알몸이 되었건 직전의 힘을 믿겠다 나는, 화르르 날아오르는 천 마리 새떼가 되었건 솟아오르는 초록 풀잎이 되었건 맺힌 이슬 한 방울이 되었건 마지막 대못 치고 난 관뚜껑이 되었건 나는 거기까진 다 가지 않겠다 직전까지만 가겠다 직전의 직전까지만 가겠다 직전의 힘! 숨도 쉬지 않는 힘! 문 열고 들어서면 한줌의 재가 돼, 열지 마, 열지 마, 건드리면 터져! 끝끝까지 차 있는 힘, 직전의 힘을 믿겠다 나는, 이 힘 모아서 나는 사랑 제일 잘할 사람, 남북통일 제일 잘할 사람에게만 드리겠다 숨도 쉬지 않고!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 1990
집 정진규
집&
새집을 짓고 이사한 날 밤은 꿈자리가 사뭇 어수선했다 집은 나를 문밖으로 밀어내고 빗장을 지르고 등뒤엔 달빛만 드높이 차고 열어줘요, 열어줘요, 문 두드리면 겨우 들여놓고 다시 내어놓고 그러기를 거푸하면서 새벽까지 이끌고 갔다 녹초로 날 때려눕혔다 이건 제가 날 압도적으로 수용(受容)하려는 오만한 연습이군 겨우 깨달을 수가 있었지만 나는 매우 기분이 나빴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다음날 밤부턴 드디어 싸움이 시작됐다 내가 내 몸 밖으로 집을 밀어내기 다시 들여놓기 거대한 오만을 한 마리 순한 양으로 길들이기 그걸 시작했다 집은 매우 막강(莫强)했다 기우뚱거렸다 달빛만 드높이 차고 내가 그를 수용할 것이냐, 그가 나를 드디어 수용할 것이냐, 나는 그것만 따져갔다 누가 옆에서 속삭였다 서열(序列)이 언제나 중요해, 이니시에이티브를 잡아야 해, 선제(先制)해야 해, 때려 눕혀 그러나 새벽에 나는 다시 녹초로 쓰러지고 하느님께서 모올래 개입(介入)하신 듯 뜨락엔 드디어 가득히 가득히 하얀 화해(和解)의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비로소 한 채의 새로운 집이 태어나고 있었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평화롭고 따뜻하였던 한 사날 정진규
평화롭고 따뜻하였던 한 사날
얼음은 얼음으로서만 빼낼 수 있다 온전히 녹일 수 있다 뜨거운 것은 위험하다 얼음인 그대에겐 위험하다 얼음인 그대의 살 썩이고 만다 놋대야 가득 얼음 채우고 언발 언손 담그고 그렇게 해보신 분들만은 아실 수 있다 얼음인 우리가 몸 섞어 마음 섞어 하나 되던 날 우리들 손가락 마디마다 발가락 마디마다 은침이듯 꽂혀 있던 우리의 얼음들이 비로소 한 떼의 하얀 물고기들 되어 강으로 떠나는 게 보였다 그들도 몸 섞어 마음 섞어 하나가 되고 있었다 우리는 한 사날 평화롭고 따뜻하였다 우리는 다시 얼음일 수밖에 없었으나 그것을 영원이라 믿기 시작하였다 평화롭고 따뜻하였던 한 사날
뼈에 대하여, 정음사, 1986
푸들거리는 상징 정진규
푸들거리는 상징
선생님은 지금 겉껍질이어요, 아니라고 말하자 그는 다시 물이 찼느냐고 물었다 아 다시 물이 차다니! 기가 막힌 말씀, 울림이 있는 말씀, 말씀의 몸이 보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다 완벽한 관능, 상징이었다 나의 탕진과 끝남의 이야기를 그가 알고 있기에, 바닥난 나의 웅덩이를 그가 알고 있기에 그렇게 물었겠지만 아 다시 물이 차다니! 살아서 되살아서 푸들거리는 상징, 물고기처럼 푸들거리는 상징, 나도 다시 푸들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물이 찼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나의 웅덩이에도 다시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상징은 이토록 크고 아름답다 상징은 세상 도처에 이토록 살아 있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 1990
흑백 정진규
흑백(黑白)
나는 흑백, 당신은 컬러, 컬러인 당신은 이미 모르는 게 없으시지만 흑백인 나는 흑백 둘밖에 아는 게 없어요 그래서 상상은 제가 더 잘해요 내 상상의 끈끈이엔 걸리지 않는 게 없어요 늘 무엇이 다닥다닥 붙어요 나무의 초록색도 내겐 흑백으로 보이는 사진, 흑백 사진 한 장이지만 초록색의 내부가 보여요 하얀 뼈대도 보여요 흐르는 강물도 보이고요 그대 초록색을 갉아먹는 한 마리 작은 벌레로서 그대 영혼의 사타구니에 가만히 내가 숨어 있어요 나는 흑백, 당신은 컬러, 맨정신엔 그럴 수가 없지요 맨정신이 아닌 사람만이 흑백을 사랑할 수 있어요 뛰고 싶어라, 흑백을 사랑하는 나의 기쁨, 맨정신이 아닌 나의 기쁨, 외롭게 남아 있는 외로움의 기쁨, 흑백의 기쁨, 이미 모르는 게 없으신 당신은 이것도 벌써 아시긴 아시겠지요
뼈에 대하여, 정음사,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