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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 Emperor Caligula. AE As. AD 37~41. Rome 37~38
Roman Emperor Caligula. AE As. AD 37~41. Rome 37~38
Obv: C CAESAR AVG GERMANICUS PON M TR POT - Bare head left
Rev: VESTA SC - Vesta seated left, holding patera and scepter; S C across fields
Diameter: 26.5~27.6mm weight: 10.98g RIC 38. C27 (Spink 1803)
2018.5.31 Aureo & Calicó S.L.
칼리굴라는 로마제국의 3대 황제. 칼리굴라는 별명으로 '작은 군화''라는 뜻이다.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Gaius Iulius Caesar Germanicus). 생전에는 사실 가이우스, 또는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불렸다. 네로, 도미티아누
스, 콤모두스 등과 함께 로마제국의 폭군 중 한 명으로 거론된다.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와 대(大) 드루수스(네로 드루수스)에 이어 게르마니아를 공략했던 영웅,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대(大) 아
그리피나 사이에서 태어나 살아남은 세번째 아들이었다. 칼리굴라는 혈연적으로는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 아그리파의
피를 모두 이어받았다.
서기 12년 8월 31일에 안티움에서 태어났는데, 이 해는 그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가 집정관
직에 있을 때였다. 칼리굴라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수에토니우스의 기록과 로마에서 발행된 관보에 따르면 안티움 태
생이 맞다고 기록되어있다. 실제로 칼리굴라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자신의 고향인 안티움을 좋아했고 자신이 이곳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수에토니우스는 가이우스(칼리굴라) 편에서 칼리굴라가 안티움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까지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이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게르마니아 지역의 사령관으로 근무한 아버지를 따라 게르만 족과의 전선지대인 병영에서 자랐다. 부모는
칼리굴라에게 병사들과 똑같은 복장을 입히고 병사들 틈에서 자라게 했는데 외모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기에 어린 시절부터 군
인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오늘날 우리가 통칭하는 "칼리굴라(Caligula, 작은 군화)"라는 별명은 게르마니아 주둔 군단
병들이 가벼운 대화를 하는 가운데 생겨난 것으로 병사들이 가이우스를 부르던 애칭이었다.
당시 칼리굴라가 얼마나 군단병들에게 사랑을 받았는지 나타내는 증거도 있다. 아우구스투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단병들이 폭
동을 일으켰을 때였는데, 어떤 짓이라도 할 것 같던 군단병들이 가이우스의 모습을 보자 금세 진정하고 정신을 차렸다는 것이다. 그래
서 그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칼리굴라를 그들의 폭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웃 도시로 보내려 했고, 이를 안 병사들은 로마인들
인 자신들의 품에서 갈리아 지방으로 칼리굴라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잘못을 크게 뉘우쳤다. 그래서 어떤 병사들은 마차를 붙
잡아 세운 다음 게르마니쿠스에게 간곡히 용서를 빌기도 했다.
이후 잠시 로마로 귀환한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에서 살았던 칼리굴라는 다시 시리아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동방으로 갔다. 그리
고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서기 19년에 시리아에서 사망한 이후, 어머니 대(大) 아그리피나와 함께 귀국하여 함께 살았고, 종조부이
자 할아버지였던 티베리우스의 근위대장 세야누스의 음모로 반역죄가 씌워져 어머니와 두 형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추방된 이후에는 가족 중 남아있는 자신과 세 명의 여동생과 함께 증조모인 리비아 드루실라와 함께 살았다. 그러다가 증조모 리비아
가 죽자 성년식도 치루지 않은 칼리굴라는 율리우스 가문을 대표하여 리비아 장례식 추도연설을 로스트라에서 가졌다. 그 뒤, 칼리굴
라는 티베리우스가 카프레아이(카프리 섬)의 별궁으로 부르기 전까지는 친할머니였던 안토니아와 함께 살았다
티베리우스의 부름을 받고 카프레아이에 도착한 날, 칼리굴라는 성인용 토가를 입고 처음으로 면도를 했다. 그러나 칼리굴라가 한 성
년식은 비공식적인 성년식이었고 성대하지 않았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이때 궁정의 신하들이 티베리우스에 대한 불만을 입 밖에
내도록 갖은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양할아버지나 전체 가족들에게 지나치게 순종적이었기에 누군가는 칼리굴라를 가리켜 "그보다 더
나은 노예나 그보다 더 나쁜 주인은 없을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에게 그다지 관심(나쁜 쪽으로)
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칼리굴라는 마르쿠스 실라누스의 딸 유니아 클라우딜라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형 드루수스 카이사르 대신 복점관에 임명되어, 책임
감있는 행동과 모범적인 삶의 태도를 인정받고 사제직에 올랐다. 이 무렵, 세야누스가 몰락했고, 칼리굴라의 첫 아내였던 유니아가 아
이를 낳다가 죽었다. 한편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가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근위대장 마크로의 아내 에니아 나이비아를 유혹하
여 자신이 황제가 되면 에니아와 결혼하겠다고 맹세했고 그 내용을 문서로 써주기도 했다고 들었던 소문을 검증없이 그대로 적었고,
이는 역시 루머인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를 죽였다는 증거로 제시되게 된다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었을 때, 로마인들과 "전 세계인들의" 열광을 받으며 서기 37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아내도 자식도 없는 상태에
서 황제가 되었다. 사실 가이우스(칼리굴라)의 등극 당시 인기는 로마 사상 최고였다. 로마인들 사이에서 소문에 의해 음침한 성격인
데다가 말년에는 카프리 섬에 틀어박혀서 시민들에게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던 티베리우스 황제는 인기가 매우 낮았기 때문이다. 또한
살아있던 시절, 게르만 족과의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여 전쟁 영웅으로 여겨진 게르마니쿠스의 인기와 후광,비극적인 가족사로 인한
아픔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가이우스(칼리굴라)의 인기는 더했다.
어쨌든간에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젊은 나이에 오리엔트 속주에서 병으로 요절했고, 어머니와 두 형들의 비극을 경험한 로마 여론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향수도 더해진 까닭에 이들의 피를 이어받은 가이우스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가 사망했을 때 상복을 입고 미세눔에서 티베리우스의 시신과 만나 함께 로마로 향했다. 이때 거리로 나온 군
중들은 제단을 만들어 제물을 바치고 횃불을 밝혔으며 칼리굴라를 열렬히 환영했다. 로마인들은 잘생긴 칼리굴라에게 "가이우스는 우
리의 별", "병아리", "아기", "귀염둥이" 등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이들 일행이 로마에 도착하자 원로원과 우격다짐으로 원로원 건물로
들어온 수많은 군중들은 만장일치로 즉시 그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했다. 전임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의 유언장은 안중에도 없었고, 티
베리우스의 유언에 따라 가이우스(칼리굴라)와 공동 상속자이자 공동 황제로 지명된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그
대신 칼리굴라는 성년식을 치루지 않은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선포했다. 또한 티베리우스를 기리는 장
례연설을 할 때, 수많은 군중 앞에서 시종 눈물을 펑펑 흘렸다. 또한 원로원이 티베리우스의 유언집행을 보류하기로 하자 이를 무효화
하고 시민들에게 예외없이 성실히 유산을 지불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때 무효화해서 욕을 많이 먹은 리비아 드루실라의 유언도 집행
하여 환호를 받았다.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어머니와 형 네로 카이사르의 유골을 가져오기 위해 악천후를 뚫고, 판다다리아와 폰티
네 제도로 달려갔다. 이 사건은 칼리굴라의 효성을 부각시켰으며, 칼리굴라가 경건한 태도로 유골을 직접 수습하여 유골단자에 담아,
오스티아를 거쳐 테베레 강을 거슬러 로마를 오는 내내 2단 갤리선의 고물에서 군단기를 들고 서 있던 모습은 인기를 더하게 했다. 더
불어서 칼리굴라는 어머니를 위해 희생제를 올리는 날을 정하고, 키르쿠스에서 축제를 열도록 했다. 그리고 9월을 아버지 게르마니쿠
스의 이름인 "게르마니쿠스"로 바꿔 아버지를 기렸으며, 할머니 안토니아에게 증조모 리비아 드루실라가 살아생전 누렸던 모든 영예
를 원로원 포고를 통해 수여했다. 또한 임기 첫 동료 집정관으로 삼촌 클라우디우스를 선택했다. 그리고 양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가
성인이 되자 "젊은이들의 지도자"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러한 칼리굴라의 첫 7개월 간은 지나치게 절약하고 시민들의 쾌락을 배척했기에 인기가 없었고 말년에는 카프리 섬으로 들어가 나
오지 않은 티베리우스를 기억하기 싫어서인지 몰라도, 엄숙하고 큰 행사없이 제위를 계승한 티베리우스와 달리 성대한 축하 행사로
가득했다. 특히, 축제 3개월 동안(혹은 그보다 짦은 시간동안) 벌였다. 이 기간동안 16만 마리의 제물이 제단에 바쳐졌고, 새 황제의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많은 양의 무료급식을 나눠줬다. 그리고 각종 검투사, 전차 경기도 많이 개최하여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또한
이 시기, 칼리굴라는 캄파니아 인근의 섬들을 방문했는데, 로마 시민들은 앞다투어 그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더불어서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는 칼리굴라가 즉위하자 먼저 친교를 청하고, 시리아 총독과의 회의에 참석했다. 이때 파르티아 왕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기 전에 로마의 은독수리기와 군단기, 그리고 카이사르의 조각상 앞에서 경의를 표했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거두어들
이던 0.5 퍼센트의 경매세를 폐지하고 화재로 집이 파괴된 이재민들에게 즉각적인 보상 대책을 실행에 옮겼다.아울러 티베리우스 시
대 당시, 왕위를 잃은 여러 왕들의 제위를 되찾아주어 그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았다.
즉위 7개월 만인 37년 10월쯤, 칼리굴라는 열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로마인들은 칼리굴라가 몸져누워 생사를 알 수없다는 이야기를 듣자 밤새돌고 궁을 에워싸고, 신들에게 칼리굴라를 병에서 회복시켜
주기를 기도했다. 특히 이때 어떤 사람은 칼리굴라가 병에서 회복된다면 검투사가 되어 시합에 나가겠다고 맹세했고, 누군가는 신에
게 칼리굴라 대신 자신이 죽겠다는 현수막을 걸어 무사안일을 빌었다. 그러다가 칼리굴라가 깨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 모두는
환호를 하며 칼리굴라의 회복을 기뻐했다. 그러나 칼리굴라 본인은 회복된 이후, 의심이 많아지고 밤마다 환청이 들리고 불면증에 시
달렸으며 정신이 이상해져 그 후부터는 미친 듯이 폭정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서기 38년에 칼리굴라는 중병에서 완쾌되자마자 양자이자 공동제위계승자인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죽였다. 창창한 미래를 가진 젊
은 칼리굴라에게 게멜루스는 제어할 만한 대상이지만, 죽을 뻔한 이후에 제위를 위협하는 자를 곱게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여동생들과 근친관계를 맺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칼리굴라는 3명의 여동생 중 평소 끔찍하게 사랑했던 누이동생인 드
루실라가 병으로 죽자 드루실라를 신격화하여 '디바 드루실라' 라고 부르게 했다
유흥문화에 많은 관심과 지원을 했는데, 이전과 달리 검투사 경기를 매우 과격하게 바꾸었으며 전차경기는 칼리굴라의 지원으로 많은
발전이 있었을 정도였다. 이 외에도 매일 화려한 만찬을 벌이고 자신을 태워다준 인부에게 거액을 주는가 하면 각종 여러 희귀동물들
을 매우 비싼값에 구하는 등 너무 많은 연회와 방탕한 잔치를 벌이느라 티베리우스가 긴축정책을 펼치며 쌓아둔 국고가 1년 만에 바
닥이 나버렸다, 이에 칼리굴라는 카이사르 집안의 잡다한 물건들과 노예들을 경매로 팔고, 매춘부들에게도 세금을 거뒀으며, 부자들
에게 막대한 세금을 물게 하여 귀족층과 부유한 사람들이 칼리굴라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또한 자신을 상속자 이름에 넣게 해서 부족
금을 메우려고 하였다.
대 플리니우스의 기록을 제외하면 남아있는 기록들은 전부 정신이 이상해 졌다고 서술되는데 중병을 앓고 난 이후부터는 스스로가 정
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칼리굴라는 종종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으로 걷거나, 서 있거나, 생각을 하거나, 머
리를 들고 있기를 힘들어할 때가 있었고 불면증은 가장 큰 고통이어서 기껏해야 3시간 밖에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마저도 자다 깨
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그래서 칼리굴라는 침대에 앉아 있거나 긴 주랑을 헤매며 어서 태양이 뜨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또 칼리굴라는 멀리서 천둥소리만 들려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질끈 감았고, 폭풍우가 다가오면 침대에서 뛰쳐나와 그 밑으로 기
어들어가 숨기도 했다.
물론 로마 시에 수도교 2개를 건설했고, 아우구스투스 신전과 폼페이우스 극장을 완공한 것, 갈리아 북부를 침공하여 브리타니아 야
만족들의 침공을 저지하는 정책과 함께 그리스의 경제 부흥 성과를 위해 반도 지협에 운하를 뚫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의
모습은 괜찮았지만, 칼리굴라가 저지른 실책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칼리굴라는 점성가가 살아생전 티베리우스에게 한 예
언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나폴리 만에 배로 다리를 만들어 말을 타고 건너며 제우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브리타니아의 코 앞에서 병사들에게 해변에서 조개껍질을 줍게 하라는 정신나간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중병으로 약화된 육체와 정신력때문에 많은 실정을 저질렀고, 그 중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피를 이어받은 마우레티니아 왕 포톨레마
이오스를 잔인하게 죽인 것은 그 중 하나였다. 그러다가 서기 41년 1월,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열린 전차경주 대회장에서 자신의 근위
대 대장인 카시우스 카에리아와 그 일당들에게 배신당해 목숨을 잃었다. 이때 아내였던 카이소니아도 궁에서 경기장으로 이어진 지하
복도에서 함께 살해당했으며 어린 딸 율리아 드루실라는 던져져서 벽에 머리를 부딪혀 죽고 말았다. 재위 4년 만의 일이었다.
칼리굴라가 죽던 41년 1월 24일 정오가 지날 무렵, 사실 칼리굴라는 극장 안에 있었다. 칼리굴라는 이때 점심을 먹을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전날 저녁식사를 과식한 결과 속이 거북했다고 한다. 그러나 친구들의 설득에 어쩔 수 없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때 칼리
굴라는 거리에서 귀족 남자아이들이 트로이 전쟁 춤을 연습하고 있자, 잠시 멈춰서서 이들을 격려하고 이들을 극장으로 데리고 가서
연습을 도와주고 공연을 시켜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친구 중 한 명이 감기에 걸렸는데 얼른 가자고 불평해서 가야만 했다.
그 뒤, 이야기에 대해서는 2가지가 전해오는데, 첫 번째 이야기에 따르면 칼리굴라가 서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근위대장 카이
레아가 뒤쪽에서 갑자기 나타나 "이걸 받아라"하고는 목 깊숙이 칼을 꽂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라는 장
교가 칼리굴라의 가슴을 찔렀다는 것이다. 다른 이야기는 좀 더 정확한 것인데 장교 사비누스가 먼저 군중을 시켜 군중들을 쫓아냈다
고 한다. 그런 다음 사비누스는 황궁 통로에서 칼리굴라에게 그날의 암호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때 칼리굴라는 웃으며 "유피테르"라
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뒤에서 경호를 하고 있던 카이레아가 "그래, 그렇다고 해주지."라고 외치며 고개를 돌린 칼리굴라의 턱을
칼로 베며 공격했다. 이에 칼리굴라는 몸부림을 치며 바닥에 쓰러져 게르만 근위병들을 큰 소리로 부르며 "나는 아직 살아있다!"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카이레아는 가담자들에게 "다시 내려쳐!"라고 명령을 내려 상처를 입은 채 저항하는 칼리굴라에게 30군데의
상처를 입히며 칼로 찔러 죽였다. 이때 황제의 가마꾼들이 장대를 들고 칼리굴라를 지키기 위해 저항했고 그 사이, 칼리굴라의 외침을
들은 게르만 근위병들이 "황제를 보호하라!"를 외치며 암살자 몇명과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죄없는 원로원 의원 몇명을 죽였다고
한다.
이렇게 칼리굴라는 29세(28세)의 나이에 죽었다. 재위기간은 3년하고도 10개월 정도였으며 칼리굴라의 유해는 비밀리에 카이레아에
의해 라미우스 정원으로 옮겨져 숨겨진 다음, 황급히 만든 장작더미에 대충 태워져 얇은 잔디층 아래에 가매장했다. 그리고 백인대장
이 황궁으로 가서 칼리굴라의 아내 카이소니아를 칼로 찔러 죽이고, 딸 율리아 드루실라는 벽으로 던져져 머리가 깨져 죽었다. 이후,
근위대에 의해 황제로 옹립된 삼촌 클라우디우스의 명으로 유배가있던 칼리굴라의 여동생들이 귀국한 이후, 칼리굴라의 유해는 수습
되어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치되었다.
칼리굴라를 살해한 이들은 병약한 육체를 가졌던 삼촌 클라우디우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줬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는 칼리굴라 암살
을 주도한 카이레아 등을 황제를 암살한 죄로 처형했다. 아울러 칼리굴라의 유해를 수습하여 다시 장례를 지내고 아우구스투스 영묘
에 매장했다. 더해서 조카에 대해 원로원 의원들에게 '기록말살형'을 당하지 않도록 부탁하는 연설을 하고 기록말살형을 막았다. 그러
나 원로원 역시 4년이 안 되는 기간동안 도미티아누스처럼 기록말살형을 할 만한 뚜렷한 정책을 펼치지도 않았던 칼리굴라를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딱히 기록말살할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해서 근위대를 등에 업은 온화한 성격의 클라우디우스가 죽
은 칼리굴라에게 그런 짓은 하지 말아달라고 원로원에게 당부했기에 그렇게 할 이유도 없었다. 어쨌든 후임자이자 삼촌인 클라우디우
스가 형인 게르마니쿠스를 매우 존경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또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시대때 정치에서 배제되었다가 조카의 도
움으로 집정관도 해보고 관직생활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클라우디우스 입장에서는 나름 황숙으로 예의를 갖춘 조카 칼리굴라에
게 그렇게 심한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