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월) (녹)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5,1-20
동네 사람들은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기피했습니다. 괴성을 지르고 이상한 행동을 하기에 무덤가에 묶어 두었습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리는’ 괴력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입니다. 그런데 그가 무릎을 꿇고 외친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괴력의 남자는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성경은 그를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자라 했습니다. 쇠사슬을 끊고 족쇄를 부수어 버리는 힘은 그의 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를 사로잡았던 ‘더러운 영’의 힘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그 사람에게서 물러가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복음의 교훈은 간단합니다. 어떤 ‘영’도 예수님 앞에서는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그를 ‘말씀 한마디’로 제압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악한 기운’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술만 먹으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맨 정신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이 술만 먹으면 남을 괴롭힙니다. 괴력을 발휘합니다. ‘어떤 힘’이 그렇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어찌 술뿐일는지요? 일중독, 게임 중독, 놀이 중독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악한 기운’에 사로잡힌 자를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이 한 말씀에 그는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선한 기운’을 되찾은 것이지요. 주님의 말씀이 그립습니다.
2월 2일 (화) (백) 주님 봉헌 축일(봉헌 생활의 날)
[복음묵상] 루카 2,22-40<또는 2,22-32>
율법에서는 아이를 낳은 산모를 ‘일정 기간’ 부정한 몸으로 규정해, 남편과 떨어져 있게 했습니다. 몸에 피를 묻혔기 때문입니다. 사내아이를 낳으면 33일간이었고, 여자아이를 낳으면 66일간이었습니다. 이 의식이 ‘정결례’의 핵심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내아이는 7일, 여자아이는 14일로 축소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뒤, 사내아이는 성전에 봉헌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셨기에 주님께 드린다는 종교 예절입니다.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굉장한 ‘마음가짐’이지요. 그리고 형편에 따라 새끼 양이나 비둘기를 봉헌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비둘기 한 쌍을 바치십니다.
신앙인 역시 봉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례성사로 주님께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매일의 사건을 그분께서 ‘주시는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기쁘고 즐거운 일에는 봉헌이 쉽습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일에는 힘이 듭니다. 억울한 사건을 ‘주님께서 주셨다고’ 여기는 것은 ‘신앙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시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봉헌의 삶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시메온과 한나를 만나십니다. 그분들이 우연히 아기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평생 의롭게 살았기에 구세주를 뵈올 수 있었습니다.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신심 깊은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의 모습입니다.
2월 3일 (수) [(녹) 연중 제4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6,1-6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고정 관념’ 탓입니다. 그분의 소년 시절을 떠올리며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들은 이렇게 수군거립니다. 못 믿겠다는 말입니다. 기적의 소문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마법사나 점쟁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사람들의 편견’을 놀라워하십니다.
누구나 과거에 ‘매여 살면’ 그렇게 됩니다. 지난 일을 ‘지나간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렇게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힘든 인생’을 살게 됩니다. 자신도 힘들고 남도 힘들게 하는 삶입니다. 물이 흐르지 않으면 썩기 마련입니다. 변화를 거부하면 결국은 퇴보합니다. 자연의 평범한 ‘진리’입니다.
신혼 초에는 남자가 말이 많고, 여자는 듣기만 합니다. 이삼 년이 지나면, 여자가 말이 많고, 남자는 듣는 쪽이 됩니다. 아이를 낳고 나면 가끔씩 싸우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떠드는 것이지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의 ‘내면’을 보게 됩니다. 상처를 주고받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은 영영 싹트지 않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었더라면 ‘주님의 기적’을 만났을 것입니다. 삶의 풍요로움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행복의 주님을 그들은 놓치고 있습니다.
2월 4일 (목) (녹) 연중 제4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6,7-13
물질이 많으면 본인도 모르는 새에 게을러집니다. 웬만큼 어려운 일은 물질로 해결하려 듭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족해야 간절한 마음이 되고,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결실이 찾아옵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기쁨을 만나게 합니다.
일류 선수들은 마음을 비울 줄 압니다. 무아의 상태에서 경기에 임하려 애씁니다. 점수에 집착하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내기’를 하면 언제나 이기던 사람도 ‘큰돈’을 걸면 가끔은 실수합니다. 실력은 그대로지만, 마음이 ‘졸아들었기’ 때문입니다. ‘큰돈’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지요. 모든 일이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행동도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결코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소유는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자주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관리자임을 늘 되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가르침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말씀을 실천했기에 기적을 베풀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인생은 ‘내기’가 아닙니다. 남의 것에 신경 써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의 것에 대하여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2월 5일 (금) (홍)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성녀 아가타 불확실한 전설이지만 성녀 아가타는 시칠리아(Sicilia) 섬의 카타니아 혹은 팔레르모(Palermo)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신심이 깊어 하느님께 스스로 정결을 서원하였다고 합니다.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기간에 그 지방의 집정관이던 퀸티아누스(Quintinianus)가 그녀를 탐해 그녀를 소유하려는 계략으로 박해를 이용하였습니다. 그녀가 그의 제안을 거절하자 퀸티아누스는 온갖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 그녀를 매음굴로 보냈으며,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고, 죽을 때까지 이글거리는 석탄불에 돌리면서 구워 죽였다고 전해옵니다.
교회미술에서 그녀는 보통 한 쌍의 집게나 접시에 담은 그녀의 가슴으로 묘사되었는데, 후일 이것이 잘못 전해져 접시 위의 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성녀 아가타의 축일에는 빵을 축성하는 관습이 내려옵니다. 성녀 아가타는 처녀, 양치는 여자, 종 만드는 사람, 유리 제조공, 광부, 알프스 등반 안내자, 간호사들의 수호성인이자 불과 날씨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월 6일 (토) (홍)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성 바오로 미키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 三木)는 지금의 오사카 인근 도쿠시마(德島)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세례를 받고, 10여 세 되었을 무렵 아즈치야마(安土山)의 예수회 신학교에 제1회 입학생으로 들어가 22세 때인 1585년 졸업과 동시에 수사가 되었습니다.
수사가 된 성 바오로 미키는 타고난 성품과 열정으로 전교 활동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후에 주교 마르티네즈(Martinez Pedro)를 따라 오사카(大阪)에서 활동하던 중 예수회 신부인 오르간티노(Organtino Gnecchi-Soldi)의 눈에 띄어 게이한(京阪, 교토와 오사카) 지방에서 함께 활동했습니다. 이후 그는 불교 승려들과 많은 토론을 벌였고, 자신이 저술한 교리서들을 통해 불교 신자들을 깨우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일본 교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87년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적이 있었지만, 1590년 순찰사 발리냐노(Valignano Alessandro)가 인도 부왕(副王)의 사절 자격으로 히데요시를 방문한 뒤에는 금교의 제약 속에서 조심스럽게 활동을 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1596년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금교를 무릅쓰고 교토 일대에 성당과 수도원을 건립하는 등 공공연한 전교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히데요시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그 결과 1597년 초에는 교토와 오사카 일대에서 활동하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박해로 게이한 지방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작은 형제회 수사 6명, 예수회 수사 3명과 일본인 신자 15명 등 24명이었습니다. 성 바오로 미키는 이때 오사카에 있다가 뜻하지 않게 체포되어 1597년 1월 1일 교토의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어 그는 1월 3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오사카를 거쳐 1월 9일에는 나가사키로 출발하였고, 27일 동안 혹한 속을 걸어서 2월 5일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들 일행은 도중에 일본인 신자 2명이 자진하여 체포됨으로써 모두 26명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날 저녁, 성 바오로 미키는 동료들과 함께 나가사키(長崎)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사카(西坂)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습니다. 순교 직전에 그는 당당한 얼굴로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였으며,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을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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